설교문2018. 3. 2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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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도폭발훈련이 시작하는 날입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 그리고 전도에 대한 열정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일어나는 시점이지요. 하지만 오늘 저의 설교는 복음을 전하는 우리 전도자에게 뼈아픈 고통을 주었던 최근의 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미투운동 일어나면서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가 크게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미투운동이 촉발하게 되었던 한 인터뷰를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현직 여성 검사가 8년 전 남성 검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피해사실을 인터뷰를 통해 밝혔지요. 그 여성 검사는 인터뷰의 마지막에 자신이 굳이 방송을 통해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저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 가해자가 최근 종교에 귀의하여 자신이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간증을 하고 다닌다는 소식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회개는 피해자에게 직접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많은 매체들이 이 인터뷰를 2007년에 개봉하였던 영화 <밀양>의 한 장면과 빗대어 표현하곤 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신애는 신앙생활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 평정심을 되찾고 자신의 아들을 살해하였던 살인범을 용서하기 위해 감옥에 면회를 갑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들을 잃고 괴로워했던 자신의 모습과 달리 감옥에 있던 그 살인범은 너무도 말쑥하고 평안한 얼굴로 신애를 대합니다. 그리고 말하죠. ‘하나님께서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신애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셨다고요?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하나요?’ 이후 영화의 내용은 주인공 신애가 겪은 마음의 분열과 고통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복음이란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 인간이 저지른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행하신 일,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생의 길이 열렸다는 것, 그러므로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용서가 임하고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전하는 복음 제시 혹은 전도폭발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복음제시 전문 에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고 우리의 죄가 용서 받는 것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물론, 구원을 은혜로 받은 이후 선행과 경건생활에 힘써야 한다는 대목도 있지만 복음의 전반적인 흐름 속에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받고,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면 다 되었다는 인상을 얼마든지 풍길 수 있지 않을까요?

 

최근 일어나는 미투운동을 보면서 저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전도자로서 마음에 무거운 짐이 생겼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복음의 내용을 오용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많은 피해자들에게 더욱 깊은 마음의 상처를 줄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았다는 자책감 때문입니다. 복음 전도자로서 느끼는 자책감으로 말미암아 더욱 주목하게 되는 성경 구절이 조금전 함께 읽은 로마서 11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방 그리스도인을 향한 권면: 두려워하라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치밀한 논리로 행위로서 구원에 이르려는 모든 주장을 봉쇄하고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힘있게 선포하였지요. 로마서 8장에 이르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구원에 대한 확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1-2)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8:38-39)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힘주어 외쳤던 구원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도폭발훈련을 통해 더욱 분명한 확신을 얻게 되지요. 구원의 확신, 복음에 대한 분명한 믿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얻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 확신을 전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놀라운 확신을 선포한 뒤,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 새로운 주제를 이야기합니다. ,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른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권면입니다(cf. 11:13). 이방인, 곧 율법 없이 살았던 사람들, 그리하여 혈통이나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사람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권면입니다. 곧 유대인도 아니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도 아니지만 그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영생의 풍성한 삶을 누리는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소개하겠습니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18a)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0b)

 

구원의 확신에 거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우쭐대지 말고 교만하지 말하야 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좋은 감람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을 참감람나무라고 부르지요. 참감람나무는 뿌리가 튼튼하여 그곳으로부터 영양분을 충분히 받아 누립니다. 그러나 그 옆에 나쁜 감람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을 돌감람나무라고 부르지요. 돌감람나무는 뿌리로부터 좋은 양분을 받지 못합니다. 당연히 좋은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두 가지의 나무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참감람나무란 뿌리를 통해 좋은 양분을 받아 누리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돌감람나무는 참감람나무로부터 멀어진 사람들, 곧 하나님의 은혜나 구원과 상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하죠.

 

사도 바울의 논리에 따르면 참감람나무의 가지들은 오직 유대인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시내산의 언약이 주어진 유대인만이 참감람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헬라사람이나 로마사람이나 아시아 사람, 혹은 우리와 같은 한국 사람은 참감람나무가 아니라 돌감람나무의 가지입니다. 그런데 참감람나무의 가지 가운데 몇 개가 잘려 나갔어요. 참감람나무 가지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의 뿌리가 되는 하나님만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이야기하죠. 그리고 잘려나간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의 가지 가운데 몇 개가 접붙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7)

 

그러므로 18절에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돌감람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져서 영양분을 받아 누리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져 주시는 은혜일 뿐이지 우리는 여전히 돌감람나무 가지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쭐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20절도 보십시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자격만을 자랑했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없었기에 꺾여 나갔습니다. 그런데 20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아무런 자격도 없는 돌감람나무이지만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접붙여지고 세워졌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지금까지 견지해오던 논리를 지속합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자신의 자격이나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떨어져 나갑니다. 다만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이지요. 문제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바울은 더 이상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 속에서 흔들리지 말라고 권면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로마서 8장 이전에 다 했어요. 이제는 구원의 확신을 얻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를 이렇게 권면합니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마치 이제는 구원과 하나님의 은총이 나의 것으로 확실히 소유한 것처럼 교만하지 말고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취하시면 다시금 빼앗길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가지라는 권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선하고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구원받은 성도들은 경건한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오늘 본문이 의미하는 두려움은 나의 행위를 완벽하게 하려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두려움은 마치 구원이나 하나님의 은혜가 완벽하게 나의 것이 된 것처럼, 내가 소유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거나 우쭐대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렀다는 확신 속에서 풍성한 삶을 살아가지만 동시에 언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면 다시금 나의 인생이 비참하게 변할 수 밖에 없는 사실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이 했던 다음의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복음을 믿는 자의 자세

 

영화 <밀양>에 등장하는 살인자의 모습 속에서 관객들이 소름이 끼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피해자는 아들을 잃을 슬픔으로 그의 삶이 파탄나고 있는데, 오히려 그 일을 저지른 가해자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양심의 가책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고 평안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천국을 소유한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후배 검사를 성추행한 남성 검사에 대해 우리가 증오의 감정이 일어나는 이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검찰이라는 조직 안에서 권력을 누리고 특혜를 누리면서 그 힘을 가지고 후배 검사를 성추행해놓고, 그래서 그 후배 검사는 지난 8년 동안 눈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데 자기는 이제 용서도 받고 구원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천국도 받아서 누린다고 하니, 다른 사람은 짖밟으면서 자기 자신은 모든 것을 누리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비치는 것이죠. 그러한 인간이 간증하는 하나님이라면 한 여성은 모든 것을 잃고 지방으로 퇴출당했는데, 그 가해자만을 축복하는 폭군과 같은 하나님으로 보이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복음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는 <밀양>의 살인자나, 여성 검사를 성추행한 남성 검사가 왜 그토록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지 분명해집니다. 이미 자신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이미 자신은 천국을 소유했다고, 이미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다고 자랑하고 우쭐대는 모습이 자신들이 저질러 놓은 잘못이 피해자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고 있던 것이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자격없는 죄인, 곧 돌감람나무라는 고백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다시금 비참한 죄인의 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다는 두려운 마음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두려운 마음이 있다면 기회가 왔을 때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향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사죄하지 않을까요? 최소한 피해자들에게 나는 구원받았으니, 나는 용서받았으니 나는 마음에 평화를 누린다고 자랑하듯 말하지는 못하지 않았을까요?

 

사랑하는 전도폭발팀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는 먼저 구원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율법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지요. 어떠한 행위를 해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실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빠집니다. 그러한 자세로 복음을 전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윤리적인 모습을 전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주일 예배 출석이나 금연 금주 등을 강조하게 되지요. 그러나 그것은 참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자로 나선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전도자로 나서는 우리에게는 확신과 더불어 두려움도 필요합니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의미도 아니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돌감람나무인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참감람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접붙여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분명히 신뢰하기에 우리는 겸손하며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확신만 있을 뿐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교만한 자세로 대상자에게 다가가게 됩니다. 확신만 있을 뿐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덧 나 자신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 또한 바른 전도자의 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확신과 더불어 두려움을 가지십시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 안에 거하십시오. 동시에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임을 깨닫고 두려운 마음도 품으십시오. 바로 그때 우리는 허리를 굽혀 낮은 자세로 전도대상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요, 바로 그때 우리는 겸손하고 약한 모습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을 온전히 선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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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