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18. 4. 2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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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는 기도와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먼저 기도를 권면하지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7)

 

베드로 사도의 이 명령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며 마지막까지 요구하셨던 단 하나의 명령이 있었다면, 그것은 깨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저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였지요. 넘어지고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는 자신의 실패를 디딤돌 삼아 초대교회를 향해 간절히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십시오.’

 

계속해서 베드로 사도는 사랑에 대해 권면합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이 명령 역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12명의 제자에게 주셨던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십자가의 길을 걷고 계신 예수님 앞에서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큰가 논의하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살피고 있었던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었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의 가슴에 남아 오늘 본문에서 초대교회를 향한 베드로 사도의 간곡한 부탁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지점에서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명령 곧 기도와 사랑 은 개별적인 항목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기도를 따로 생각하고, 사랑을 따로 생각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도할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저 한순간 우리의 마음을 스쳐 가는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것은 기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언젠가 당신이 세상에서 멸시 받는 사람들을 그토록 사랑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던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에게 만일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참 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 자신의 소원, 자신의 욕구만을 쏟아 놓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기도도 필요하지요. 그러한 기도가 필요가 없다거나 수준이 낮다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기도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이고 내 곁에 신음하고 있는 이웃을 향한 중보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의 기도는 그저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 곧 이기적인 기도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득하여 뜨겁게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비로소 이웃을 위한 진실한 기도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참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기도와 사랑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때 얻을 수 있는 한 두 가지 교훈을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기도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기도와 사랑에 대한 교훈, 그 첫번째는 기도의 완성은 사랑이다는 교훈입니다. 조금 전 인용하였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예수님께서 이 위대한 새 계명을 주시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4)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하는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지요.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다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에요. 우리가 교회에서 뜨겁게 찬양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다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성경을 공부하고 여러 가지 부서에서 최선을 다해 봉사를 해도 그것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아요. 그러면 무엇입니까? 딱 하나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진심으로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뜨겁게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비로소 우리를 향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인정을 해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는 단지 세상 사람들의 평가만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평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면서 이러한 구절을 덧붙이고 있지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이 말씀의 일차적인 의미는 사랑하면 허물을 눈감아 준다는 의미입니다. 곧 사랑은 용서를 동반한다는 뜻이죠. 그러나 이 구절에는 보다 깊은 의미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것은 사랑이 허다한 죄를 멈추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신약학자는 오늘 본문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명하시고 본보기로 보여 주셨던 사랑에 의해서 실제로 [죄가] 뿌리 뽑힐 수 있다는 것이다.”[1] 사랑이 우리 공동체 안에 가득하면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실제로 멈추게 되고,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지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3:10)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 우리의 기도, 우리의 찬양, 우리의 예배, 우리의 교회 봉사, 우리의 경건생활…. 이 모든 것이 지향하는 단 하나의 지향점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 안에 사랑이 실제로 가득하게 넘치면 서로 허다한 죄를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을 넘어서 실제로 공동체 안에 죄악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사라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모든 신앙생활의 완성, 모든 기도의 완성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적인 열정이 때로 사랑과 역행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를 열심히 해요. 매일 새벽 예배에 빠지지 않고 밤낮으로 열심히 기도해요. 그러면 그 기도의 결과가 사랑으로 이어져야 하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이런 마음을 갖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나는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아무게 집사는 집도 가까운 사람이 왜 이렇게 새벽 예배에 안 보이는거야?”

 

어떤 분은 말씀을 늘 가까이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매일같이 큐티를 하며 말씀을 묵상합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서 날마다 나에게 말씀으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요. 그런데 여러분, 말씀 묵상의 결론은 사랑으로 귀결되어야 하잖아요. 내가 말씀을 늘 묵상한다면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 넘쳐야 하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구역모임이나 소그룹에 참여해서 큐티를 나누면서 아무게 집사님이 나눔을 잘 못하면 사랑의 마음은 사라지고 비판하고 비난하는 마음이 들어요. “저분은 저렇게 큐티도 안 하면서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예만 더 들어볼까요?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열심히 전도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어디에 있든 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전도의 열매도 참 많아요. 그런데 여러분, 전도 역시 그 지향점은 사랑이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어쩌다가 일년이 지나도 전도를 하지 않고, 십년이 지나도 전도를 하지 않는 분들을 보면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저분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만 전도 한 명 안 하는 것을 보니 그의 신앙생활은 헛 거 아니야?”

 

기도도 유익하고, 말씀 묵상도 필요하고 전도도 신앙인으로서 행해야 하는 중요한 덕목이지만. 그 중에 제일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사랑을 향해 나아가야 해요.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무엇보다도” – 기도보다도, 말씀묵상보다도, 전도보다도, 봉사보다도 무엇보다도무엇을 실천해야 합니까?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기도와 사랑의 근거는 종말신앙이다

 

기도와 사랑에 대한 교훈, 그 첫번째는 기도의 완성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기도와 사랑에 대한 교훈, 그 두번째는 기도와 사랑의 근거가 종말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베드로 사도는 교회가 기도에 힘쓰고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딱 하나로 이야기합니다. ,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 곧 우리의 생명이 언제 끝날 줄 모르는 안개와 같다는 사실, 나아가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 지 모른다는 종말에 대한 신앙이 흐려지기에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 어린 아이가 두 명입니다. 첫째가 아들이고, 둘째가 딸이죠. 두 아이가 사이가 참 좋아요. 특별히 언제 사이가 좋으냐면, 두 아이가 공조해서 아빠와 엄마의 말을 안들을 때 두 아이의 사이가 참 좋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가 잘 지내고 친하게 지내고 같이 노는 것도 잠깐입니다. 오빠하고 동생이 친하게 잘 지내는 구나라고 생각할 때쯤 갑자가 아이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급기야 둘 중에 한 명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도대체 왜 싸우나 가서 살펴보면 이런 거지요.

 

"오빠가 내가 가지고 놀던 인형을 뺏아갔아요." 

"동생이 내가 보고 있는 책장을 넘겨버렸어요." 

"내가 먹으려고 아껴 두었던 과자를 오빠가 먹어버렸어요." 

"내가 열심히 만들어 놓은 미술작품 여기서 미술 작품이란 공을 들여 접은 딱지 등을 말합니다. – 을 동생이 망쳐버린 거에요." 

 

만일 여러분이 이와 같은 일을 당하면 속에서 울화가 터질까요? 여러분이 이런 일을 당하면 분노가 화산처럼 일어날까요? 여러분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만나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느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아요. 사실, 아이들이 싸우고 우는 이유를 살펴보면 어른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따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성인들 사이의 갈등과 불화의 원인을 살펴보면서 제 마음에 저희 집에서 자라는 두 아이가 서로 싸우는 원인을 확인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른들이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것들,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을 가지고 아이들이 서로 싸우고 다투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보거나, 제 삼자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 때문에 다투고 갈등하고 싸우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특별히 종말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우리 개인이 이 세상을 떠날 때 모두 놓고 가야 하는 것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에 모든 시선이 사로잡혀서 아둥 바둥 다투는 어리석음이 우리 가운데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야할 때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종말 신앙이 우리의 마음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십시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9장의 가사 가운데 참 깊은 묵상으로 인도하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바로 마지막 4절의 가사 가운데 일부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죠.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옵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이 찬양의 가사와 같이 우리는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영원을 살지 못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일년이 지나면 한 살을 더 먹고,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동일한 시간에 두 장소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과 동일하게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에 잇대어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여전히 고난과 슬픔이 존재하는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처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환경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우리의 현실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여전히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영원이라는 관점을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 파묻혀서 살아갈 때도 있지요. 그래서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우리의 관심이 온통 잠시 있다가 사라질 이 세상의 것에 사로잡혀 서로 다투고 시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시금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때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소서. 나아가, 우리의 마음이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옵소서.” 바로 이와 같은 기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세상만 바라보고 있던 우리의 관점을 바꾸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요, 비로소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뜨겁게 서로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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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램지 마이클스, <베드로전서> 박문재 역, vol 49 of WBC (서울: 솔로몬, 2006),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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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