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인문학2015. 12. 7.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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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교회성장학자인 엘머 타운즈(Elmer L. Towns) 교수는 교회성장방법론이 시대를 따라 어떻게 변천하였는지를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50년대 북미지역에서 가장 효과적이었던 교회성장 방법론은 ‘축호전도’였으며, 1990년대에는 ‘구도자중심의 예배’가, 그리고 지금의 2010년대에는 ‘소그룹’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론으로 채택되고 있다. 타운즈 교수는 북미지역의 교회성장 방법이 어떻게 변화되어왔는지를 설명한 후, 향후 100만 명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One Million Church)가 가능하게 될 것인데, 그 방법론은 바로 “인터넷”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The Shallows: What the Internet Is Doing to Our Brains)이라는 책에서 인터넷이 사람들의 사고 구조를 바꾸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터넷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체계화된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에 수많은 웹사이트를 스쳐가며 단편적인 지식을 얻는 데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터넷의 부정적인 측면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으나,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교의 필립 크레이톤(Philip Clayton) 교수는 동일한 현상을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측면으로 평가한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크리스천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순차적(혹은 논리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부분적인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부분적인 이야기, 그러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를 듣기 원하는데 기존의 기독교 신학은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고도의 훈련을 받은 몇몇 신학자들의 손에 전적으로 위임되어 있기에 평신도 및 넌크리스천을 위한 신학이 부재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필립 크레이톤 교수의 논리를 따른다면,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현대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의 신앙을 전문적으로 훈련 받은 몇몇 학자들의 전유물로 만들어 버린 기독교 신학의 잘못을 먼저 지적해야 하겠다. 


인터넷 시대(혹은 포스트모던 시대)는 짧은 글을 요구한다. 모든 반론에 대비하는 ‘두꺼운 서술’(thick description)이 아니라, 근거와 자료를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을지라도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얇은 서술’이 필요하다. 한 편의 논문이 아니라, A4 한두 페이지 정도로 블로깅에 적합한 글이다. twitter나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정도보다는 긴 글이기에 분명한 주제와 소재가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그렇다고 방대한 자료를 담기에는 너무도 짧은 글이기에 ‘간결성’이 중요하다. 내용이 없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미사여구를 늘어놓을 수도 없는 ‘짧은 글쓰기’, 이것이 인터넷 시대에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려는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하나의 덕목이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의 발달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필립 크레이톤 교수는 최근 미국 기독교의 쇠퇴 원인을 기술 혁명에서 찾기도 한다. 인터넷은 기독교 외에도 수많은 종교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기독교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은 주일 예배에 출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터넷을 검색한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는 기술 혁명이 가져다 놓은 대변혁의 현실 속에서, 보조를 맞추기 위해 모바일 앱을 개발하거나 화려한 영상을 제작하는 등의 노력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과연 21세기의 한국 교회는 인터넷이 처음 소개되었던 1990년대 막대한 예산을 들여 홈페이지만 만들어 놓으면 인터넷 선교가 가능할 것이라던 오류를 재현할 것인가?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밖에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바로 소통을 위한 미디어의 발전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미디어의 한계는 없다. 기술력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욱 중요하게 대두될 수 밖에 없는 과제가 ‘내용’(content)의 문제이다. 내가 전하려는 내용을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서술하는 ‘짧은 글쓰기’, 근거와 자료를 길게 늘어놓지 않더라도 진심을 전하는 ‘짧은 글쓰기’, 먼저 나의 마음을 울렸으며,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짧은 글쓰기’를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짧은 글이란 단순한 분량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식 없이 담아내는 글쓰기인 것이다. 


그렇기에 미디어가 발전할수록,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내 안에 빈곤하다는 사실로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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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