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신학적 교회론2017. 1. 17.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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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취미활동가의 모임인가? 과연 크리스천들의 신앙생활은 취미활동의 하나인가? 물론 모든 신앙인들은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사고가 가르치는 ‘정답’을 읊어대기 이전에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 생활을 돌아본다면, 얼마나 많은 ‘취미활동’으로서의 신앙생활형태가 존재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취미활동의 특징은 ‘내가 좋아서’ 참가하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취향이 달라졌거나, 나의 여건이 어려웠을 때,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취미활동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주셔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크리스천으로 불러주셨기에, 나의 마음이 어떠하든지, 나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신앙생활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수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이지, 수평적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자원하여 모여든 사람들이 아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교회의 생활은 결코 취미활동이 아니었다. 사도행전과 많은 서신서들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삶의 전부였다. 그들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불러 모았다는 것,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파송을 받았다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로마 황제 콘스탄틴의 회심이 있기까지 지속된다.

콘스탄틴의 회심이 있기까지, 교회는 당시 세계를 다스리는 로마의 박해를 받았으며, 그 결과 지하 카타콤에서 신앙생활이 이루어졌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지하로 끌어내리는 일이었다. 313년 콘스탄틴이 밀라노 칙령을 공포함으로써 드디어 기독교는 지하의 종교에서 벗어난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은 교회의 형태, 특히 예배의 형태에 큰 변화를 야기했다. 콘스탄틴 이전까지 기독교의 예배는 상당히 간단했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회심 이후 기독교 예배는 궁정의전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황제에 대한 존경의 표시인 향불이 교회 예배에도 사용되었고, 교역자들이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했으며 성가대가 발전하였다. 반면 회중은 예배에 있어서 훨씬 수동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1) 기독교 내의 이러한 변화는 참된 기독교의 삶을 찾아 나선 이들이 교회를 떠나 수도원운동을 시작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4세기 후반, 5세기 초에 활동했던 어거스틴은 이러한 교회를 보면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하기에 이른다. 현재 ‘보이는 교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 중에도 가라지와 같은 이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보이는 교회’에는 속해있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에는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로서 후일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모두 포함한 ‘보이는 교회’와 의로운 사람이 그 핵심이 되는 ‘보이지 않는 교회’ 사이를 구별함으로써 “제도적 교회 개념이 더 이상 타당성이 없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2)

고대 교회가 밀라노 칙령 이후 그 역동성을 잃어버리는 현상은 한국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재연된다. 조선의 왕조가 급격히 무너져 내리고 있을 때, 기독교는 그 땅에 빠른 속도로 뿌리내린다. 특히 일제로부터 해방되기까지 한국의 기독교는 반외세반봉건의 정신으로 한국사회를 선도했다. 일제가 문화통치를 시작하면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본에 협력하였고, 신사참배 강요에 모든 교단들이 무릎을 꿇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을 지켰던 신앙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취미 활동일 수 없었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며 상황은 변하기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계는 냉전체제가 시작된다.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남한 내의 기독교도 서로의 기득권을 주장하며 수없이 분열을 거듭한다. 민족적으로 남북이 상쟁(相爭)하고 있을 때 기독교는 세계사에 대한 바른 비판 의식을 잃어버리고 기독교 자체가 분열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후 기독교는 당시 집권세력과 급속히 유착되어 급기야 선지자적 정신을 잃어버리고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동조하기까지 한다.3)

이후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 본연의 자세를 많이 잃어버리게 된다. 1970년대 이후 한국의 기독교에 대한 교회사가 이만열 교수의 지적에 귀 기울여보자.4)

1970년대 이후 한국기독교의 특징의 하나는 양적인 팽창이다. 대형교회가 나타났고, 수십만 명이 회집하는 기독교 모임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교회성장의 척도도 점차 외적인 대형화 여부에 두게 되었다. 이와 함께 우려할 만한 현상이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잘못된 축복관이 기독교 진리의 탈을 쓰고 신자들 사이에 보편화되어 간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축복이 마치 물질적인 풍요와 신유의 은사로 대표되는 듯이 오도되어지고 있다. 이 그릇된 축복관이 이제 겨우 형성되어지고 있는 한국의 중산층과, 불안 속에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해 가야 하는 식자층 및 그 주변의 계층을 기독교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그릇된 축복관은 기독교 진리를 은폐시키고 기독교인들의 가치관을 타락시켰다. 가치관의 타락은 우리 사회에 만연된 물량황금만능주의의 풍조를 쉽사리 의 풍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인과 기독교 세력의 증가는 듯불가하고, 일반사회의 윤리도덕의 성장은 엿볼 수 없고 기독교적 가치관의 사회화를 기대할 수 없으며 기독교가 이 사회에 정신적인 지도역귉은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교회는 취미활동가들의 모임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어거스틴이 말한바 눈에 보이는 교회, 그러나 기독교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는 결코 진정한 교회일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의 교회를 부정하고, 천상의 교회만을 바라볼 수도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교회가 부족하나마 기독교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 진정한 교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교회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1-10). 교회 구성원들이 처음부터 도덕적이고, 정결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바울에 의하면 에베소교회 구성원들은 죄와 세상의 풍조를 따르던 사람,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바라는 대로 행하여 태어나면서부터 진노의 자식이었던 사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 곧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신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란 죄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그 모든 것을 덮어주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확신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나를 그분의 자녀로 불러주셨다는 신앙의 사람,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라도 이 믿음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진정한 교회를 구성한다. 만일 이 믿음을 떠나 로마의 국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여 그 혜택을 누리려는 사람들, 혹은 정권의 보호를 받으며 잘못된 축복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라면, 우리는 또다시 이를 눈에 보이는 교회라고 부정하며 새로운 교회를 찾아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1. 이형기, 『세계교회사』(), 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p. 235

2. E. G. Jay, 주재용 역, 『교회론의 변천사』, 대한기독교서회, 2002, pp. 130-131.

3. 한국기독교의 이른바 진보진영은 부정선거에 대해 저항을 쉬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국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보수진영의 기독교를 주로 언급하였다.

4. 이만열, “한국 기독교 100년 약사”, 『한국기독교 성장 100년』, 기독교문사, 1986, p.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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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