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17. 7. 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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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인간의 무지

 

오래전 어느 부유한 남성이 마차를 타고 어두운 밤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부유한 남성은 밤의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마차 안에 있었고 그 안에 환하게 등불을 켜 놓고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어두운 밤 길을 달리고 있었지만 그 부유한 남성에게는 따뜻한 공기가 있었고 밝은 빛이 있었습니다. 반면, 그 마차를 끌기 위해 차가운 밤 기운을 온 몸으로 맞으며 어두움 속에서 열심히 말을 모는 마부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마부에게는 어두운 밤 길을 비춰주는 등불도 없었고, 차가운 밤 기운을 막아줄 따뜻한 마차도 없었습니다.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이 두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있었지요. 한 사람은 마차 안에서 따뜻한 공기와 밝은 등불을 누리고 있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차가운 밤 공기를 맞으며 어두움 속에서 말을 몰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 시간 마차 안에서 따뜻한 공기와 밝은 등불을 누리던 부유한 남성은 결코 볼 수 없었던 한 가지, 그러나 어두움 속에서 차가운 밤공기와 싸우며 말을 몰고 있던 가난한 마부에게는 너무도 분명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던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밤 하늘에 빛나는 찬란한 별들의 행진이었지요. 마차 안에서 인간이 켜놓은 등불을 누리던 부자는 결코 밤 하늘의 영광스러운 별빛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빛도 자신의 앞길을 비춰주지 않는다고 여겼던 가난한 마부에게는 하늘의 찬란한 별 빛이 쏟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1]

 

덴마크의 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이 비유를 통해 과학이라는 등불을 켰지만,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밝히 비추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던 19세기 유럽 지식인들의 무지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비유는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던져지는 일침이기도 합니다. 나의 마음에 있는 조그마한 등불과 같은 진리, 기껏해야 조그마한 마차 안을 밝힐 수 있는 등불을 켜 놓고는 그곳에 만족하며 온 하늘에 펼쳐져 있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인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오늘 본문 3절이 정확히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기 전체는 인간들의 말잔치처럼 보입니다. 욥기에서 사건을 묘사하는 대목은 그저 1-2, 그리고 마지막 42장이 조금 등장할 뿐입니다. 우리는 욥기가 의인의 고난을 다루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욥이 당한 고난에 대한 내용은 그저 욥기 1-2장에 조금 묘사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 대신 욥기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내용은 욥이 쏟아놓은 언어, 욥의 세 친구들이 쏟아놓은 말의 잔치입니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을 놓고 이렇 궁 저렇 궁 참 많은 말을 합니다. 끝도 없고 결론도 없이 하나님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계속해서 쏟아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기의 마지막 장인 42장에 이르러 욥이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3절을 다시 보십시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내가” ‘깨닫지도 못하고 말을 했습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인가 안다고 하지만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거저 입술로만 떠들어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욥과 같이 고백할 수 밖에 없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를 벌하기를 원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은 또한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반드시 벌하셔야 합니다라고 배웠어요. 그래서 그 문장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줄 수는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가 얼마나 넓고 얼마나 깊은지 그 한 문장의 참된 의미를 충분히 체득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지는 않으십니까? ‘천국 영생은 값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라고 배웠기에 그렇게 선언하고 있지만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다 헤아려보지 못한 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지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여러 가지 훈련을 통해 나의 마음에 조그마한 등불은 켰지만 오히려 그 등불 때문에 밤하늘에 가득 펼쳐진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은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면 제 3기 전도폭발훈련을 마치는 지금, 우리는 욥과 같이 고백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내가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변화] 하나님의 개입

 

욥과 그의 친구들은 하나님에 대해 알기는 알았어요. 그런데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저 마차 안에서 누리는 밝은 등불 정도의 지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자신의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떠들어대고 있었지요. 그런데 욥기 42장에 이르러 욥은 하나님께 대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5)

 

욥이 친구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이렇궁 저렇궁 많은 이야기를 했을 때,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풍문만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 욥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몰려오는 공허함과 허무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욥은 자신의 그러한 마음을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욥이 이렇게 이야기한 대목이 등장해요.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23:8-9)

 

욥은 당대 의인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대해 많은 지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탄식이 있었어요. ‘내가 앞으로 가도 하나님이 안 보이고 뒤로 가도 하나님이 안보인다는 탄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나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일하고 계신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는 탄식. 그 깊은 탄식이 욥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5절은 그 답답한 심정이 해결되었다는 선언을 하고 있잖아요. 예전에는 그저 하나님께 대해 귀로 들은 풍월 밖에는 없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에 대해 입술로만 이야기할 뿐이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내가 눈으로 주님을 직접 뵈옵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들은 풍월만을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했던 모습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직접 뵙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된 이 장면 사이에 과연 어떠한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는 욥기 전체를 통해 두 가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째는 고난입니다. 여러분은 욥의 고난을 다 알고 계시잖아요. 의인으로 살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쳐왔어요. 그러나 그 이전까지 하나님에 대해 알았던 지식이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수가 없는 거에요. ‘하나님, 왜 나에게 이와 같은 고난이 찾아왔나요?’ 아무리 기도를 하고, 아무리 나 자신을 돌아보고, 아무리 친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봐도 답이 나오지 않아요. 그 어디에서도 답을 얻을 수 없는 고난의 현장이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고난이 전부가 아닙니다.

두번째, 매우 중요한 과정이 필요했어요. 바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가 평생선을 그리며 끝도 없이 달려가고 있던 그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욥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욥이 당한 고난의 사건이나,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에 대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선언하십니다. 바다를 창조하신 하나님,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안에 일어나는 수많은 자연 현상들을 주도하시는 하나님, 나아가 수많은 생물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언하는 것이죠.

욥에게는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이 있었는데, 첫째는 고난의 현장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비유를 생각해보십시오. 마차 안에 있는 부유한 남성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조그마한 지식을 가지고 그 안에 안주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등불과 같은 조그마한 진리의 빛 가운데 살아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마차 안에 있는 따뜻한 공기를 누리며 살아가는 거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고난의 광풍이 찾아와요. 그 거대한 광풍은 마차를 지금이라도 뒤집어 놓을 것처럼 무섭게 휘몰아칩니다. 그 거대한 광풍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러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아무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아요. 사람들은 지금 일어나는 고난의 광풍에 대해 다양한 분석을 내어놓기도 하지만 그 어떠한 분석도, 그 어떠한 해석도 그 무서운 광풍을 피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차 안에서는 도무지 지금 불어닦치는 광풍을 이겨낼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마지못해 조그마한 마차로부터 밖으로 뛰어나오는 거에요. 처음 마차를 뛰쳐나올 때에는 어두움의 공포가 몰려옵니다. 처음 마차에서 뛰쳐나올 때에는 한 밤의 차가운 바람이 우리의 온 몸을 엄습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의 눈에는 비로서 하늘에 가득한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들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안락한 마차를 벗어나게 되었고, 그의 눈을 들어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았던 것이죠.

 

그러고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교재의 내용을 글로 읽고 암기하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방식은 고난이었고, 아픔이었고, 인생의 광풍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자부하였지만 실상은 하나님께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전한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깨닫지도 못한 일을 입술로만 떠들어 댔던 우리에게 강풍을 보내어 조그마한 마차를 벗어나라고 비록 칠흑같은 어두움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싸워야 하며, 차가운 밤의 기운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하지만 조그마한 마차를 벗어난 바로 그 자리에서 온 땅을 뒤엎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는 오늘 본문 5절의 이 고백은 성경 말씀을 달달 암기한 사람들의 고백이 결코 아닙니다. 교재의 내용을 달달 외운 사람들은 오늘 본문 5절이 아니라 3절을 고백해야 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그러나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건강의 문제, 재정의 문제,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문제로 눈물 흘리고 괴로워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셨던 분들, 그래서 그동안 안주하였던 조그마한 마차를 박차고 나아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더 이상 나를 막아주는 조그마한 마차라는 보호막이 사라져버렸을 때 비로서 등장하는 하늘의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았던 바로 여러분들이야말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인생의 광풍 앞에서 눈물 흘리셨던 분들이 많으시죠? 지금도 고난의 광풍을 만났지만 아직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신 분들 많으시죠? 여러분, 여러분이 안주하고 계신 그 조그마한 마차를 박차고 나가십시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조그마한 등불도 안락하지만, 때로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할 때가 있어요. 그곳에는 등불이 주는 편안함도 없고, 그곳에는 차가운 밤바람을 막아주는 천막 하나 없지만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여러분에게 보여 주십니다.

 

 

[결과] 인식의 확대

 

욥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었고, 비로서 하나님에 대해 들었던 풍문 정도를 넘어,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만나뵙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욥은 새로운 영적인 단계로 진입하게 되지요.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6)

 

여기에 등장하는 거두어들이고라는 말은 풀어졌다, 녹았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욥의 마음에 있던 갈등과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의미죠.[2] 아울러, 6절 마지막에 등장하는 회개라는 단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1차적 의미의 회개가 아닙니다. 실제로 욥은 자신의 구체적인 행동이나 말에 대해 회개한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회개는 하나님에 대해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깨달음, 도저히 그 무엇과 비교할 수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체험[3], 곧 영적으로 크게 성숙하는 거대한 발걸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6절의 의미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욥이 자신의 마음에 있던 문제가 해결되었고,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이 놀랍도록 성숙하였다고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단어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티끌과 재라는 구절입니다. 욥은 고백하지요.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티끌과 재라는 구절은 욥기를 제외하면 구약성경에서 딱 한번 등장하는데 바로 창세기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소돔 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소돔성에 의인 50명만 있어도, 아니 45, 아니 40, 아니 30, 아니 20, 하나님 소돔성에 의인이 최소한 10명만 있어도 그 성을 멸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아브라함이 소돔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죠. 바로 그때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을 묘사하며 티끌과 재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 18:27)

 

아브라함은 소돔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서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티끌과 같다고 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 의미는 분명하지요. 온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한 없이 나약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고백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욥 역시 동일한 의미로 티끌과 재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았던 욥은 자기 자신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티끌로 보이고 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티끌과 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표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두 번째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 자신은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 그래서 티끌이요 재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티끌과 재와 같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대화 파트너로 삼아주십니다. 하나님은 티끌과 재와 같은 아브라함을 소돔성을 멸망시킬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함께 의견을 나누는 협상의 대상자, 대화의 파트너, 더 나아가 하나님의 동역자로 삼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사용했던 티글과 재라는 용어에는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수치스럽고 나약한 인간의 연약함이 표현되어 있는 동시에, 그러한 인간을 하나님의 파트너요 하나님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고난 앞에서 자신이 만족하고 안주하였던 마차 안이 작은 등불로부터 뛰쳐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자리는 어두운 밤 길을 헤매는 방황의 장소였고 칠흑간은 어두움 속에서 살갗을 애이는 온갖 추위를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하늘에 가늑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장소였지요. 비로서 욥은 하나님에 대한 풍문을 듣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영적 성숙을 경험합니다. 나아가 바로 그때로부터 하나님은 티끌과 재와 같은 욥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파트너요, 하나님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일꾼으로 인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풍문을 듣고 마치 다 깨달은 듯 유창하게 이야기는 하지만, 깨닫지도 못한 바를 말하는 것이요 스스로 알 수 도 없는 일을 말하는 미련함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서 그동안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던 마차 안의 작은 등불을 과감히 벗어버리는 그 경험을 통해 여러분은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그저 풍문으로 들은 정도가 아니라 여러분이 직접 경험하고 깨달은 바를 마음으로부터 진실되게 선포하는 참된 전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은 그러한 여러분을 하나님의 파트너,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십니다.

  

 

 


 

[1]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비유. 필립 얀시, 홍종락 , <수상한 소문> (서울: 포이에마: 2013), 21.

[2] J. Gerald Janze, <욥기> (한국장로교출판사, 2007), 333. 

[3] Francis L. Anderson, Job: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Downers Grove, Illinois: IVP Academic, 2015), 287. 한편, 이군호는 욥의 회개가 교만에 대한 회개였다고 주장한다. 이군호, <욥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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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