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17. 11. 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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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훔서의 하나님

 

나훔서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곧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면서 시작합니다.[1]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1:2a)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1:3a)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인간의 죄악을 인내하시지만, 그렇다고 벌을 거두어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기에 노하기를 더디하시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죄에 대해 벌을 내리시는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훔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1:6a)

 

우리 자신이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비로서 두번째 교훈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1:7a)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의로운 사람도 없으며, 하나님의 분노를 이겨낼 수 있을 만큼 힘이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재앙과 환난의 날에 하나님께 피할 수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피할 바위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뿐입니다.[2]

 

 

역사 속에 들어나는 하나님의 성품

 

나훔서가 묘사하는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 곧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환난 날에 피난처가 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이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나훔서의 주제이기도 한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 성의 멸망입니다.

 

나훔 선지자가 니느웨 성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 시기는 아마도 앗수르제국의 힘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3] , 니느웨 성을 수도로한 앗수르 제국이 전 오리엔트 지역을 점령하고 지배하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앗수르 제국의 화려한 겉모습에 감추어진 죄악상을 정확히 꿰뚤어

보고 계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3:1)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3:3)

 

그들의 겉모습은 힘이 넘치고 화려하고 영광스러웠지만 그들의 도성에는 거짓, 포악, 탈취가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죽은 시체만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니느웨의 죄악을 직시하셨던 하나님은 결국 니느웨 성을 심판하시고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것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 (3:5-6)

 

모든 사람들이 니느웨 성의 화려함과 강한 군사력에 넉을 놓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바라보시고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 오래 참으시지만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앗수르 제국은 먼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나훔 선지자는 이것을 깨우치기 위하여 니느웨 백성들에게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 애굽의 오랜 수도였던 노아몬입니다.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으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

구스와 애굽은 그의 힘이 강하여 끝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3:8-10)

 

애굽의 수도였던 노아몬(지금의 테베)는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보다 더욱 힘이 강하였고 동맹국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니느웨 백성들에게 나훔 선지자는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자신의 의로움이나 능력으로 재앙을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나 니느웨 백성은 나훔 선지자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들이 알아야 했던 두 번째 진리 곧 하나님만이 환난 날에 피할 산성이 되어주신다 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앗수르 제국은 메대와 바사 연합군에 의해 철저하게 무너지게 되지요.

 

 

재앙의 날을 이겨내는 두 가지 진리

 

재앙과 아픔의 시간이 때로는 우리 앞을 막아 설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요. 그러면 기도를 통해 깨닫는 첫번째 진리는 이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재앙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아무런 능력이 없구나.” 기도를 통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재난과 아픔을 당하지 않을 만큼 스스로가 의로운 삶을 살았노라고 자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과 재앙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겨낼 수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 또 하나의 진리를 듣게 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1:7a) 사방이 막혀있는 현실 속에서도 이 하나의 진리가 들려오기에 우리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새로운 피난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1] 나훔 1:2-8은 운율을 갖춘 알파벳노래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묘사다.

[2]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 공의와 사랑, 심판과 용서 은 니느웨에 대한 두 권의 예언서(나훔&요나)가 상호 보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나훔서가 끝까지 거스르는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강조하고(1:3) 요나서가 죄인이라도 회개한다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4:2), 나훔서 역시 하나님을 환난 날에 피난처가 되어주신다고 선언하며(1:7) 요나서 역시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등장한다(1:2). Cf. 노세영, <나훔, 하박국, 스바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48-49. 

[3] Ralph L. Smith, <미가-말라기>, vol. 19 of WBC (서울: 솔로몬: 200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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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