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s2018.02.05 07:30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표면적으로 너무도 쉽게 이해가 되는 내용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너무도 익숙했던 장면을 예수님께서 그저 언어로 표현한 것뿐이었지요. 어쩌면 바닷가에 앉아 계신 예수님( 13:1)을 찾아오는 길에도 목격했던 장면일 지 모릅니다. 혹은 해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지금도 무리들의 눈에는 저 멀리 씨를 뿌리는 농부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무리 가운데 대부분이 농부로서 씨앗을 뿌려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농업이 주된 생산 수단이었던 당시 사회에서 가장 익숙했던 하나의 장면을 서술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의 농부는 씨앗 주머니를 목에 걸고 밭고랑을 따라 씨를 뿌렸습니다. 농부가 뿌린 씨앗의 일부는 길 위에 떨어지기도 하였고 흙이 별로 없는 돌밭이나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지곤 하였습니다. 당시 농부는 그러한 씨앗을 다시금 좋은 밭에 뿌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농부는 하루 종일 동일한 일을 반복하였기 때문입니다.[1] 이것은 지금 우리 시대에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너무도 익숙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예수님께서 어떠한 장면을 묘사하시는 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었지요(9). 너무도 익숙한 장면이었지만 그 말씀이 담고 있는 영적인 의미는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 주십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들어도 깨달음이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앗은 말씀이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을, 가시떨기에 뿌려진 사람은 세상의 염려와 유혹에 넘어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세 가지로 구분하였지만 길가, 돌밭, 가시떨기는 모두 하나의 분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길가, 돌밭, 가시덤불과 마지막의 좋은 밭은 분명히 구분이 됩니다.

 

그런데 농부의 입장에서는 씨앗을 뿌릴 때, 혹은 씨앗을 뿌린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는 처음 세 개의 밭과 마지막의 좋은 밭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씨앗을 뿌릴 때, 혹은 씨앗을 뿌리고 이제 막 싹이 올라오는 시점에서는 네 가지 종류의 땅 가운데 오직 길가에 떨어진 씨앗만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도 싹이 나오고 줄기가 올라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니,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돌이 간직하고 있는 열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보다 먼저 싹을 틔우기도 했다고 해요.[2] 그러므로 씨앗을 뿌리는 농부는 어느 것이 열매를 맺게 될 것인지 결코 속단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감당하는 사역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복음의 씨앗을 뿌립니다. 사람들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다른 마음의 밭을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뿌리는 사람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한가지는 내가 지금 말씀의 씨를 뿌리는 사람의 마음이 길가인지, 돌밭인지, 가시덤불인지, 아니면 좋은 밭인지 결코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농부는 어느 땅에서 열매가 맺힐지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도 30배의 결실을 맺을지 아니면 60배나 100배의 결실을 맺을지 알지 못합니다. 어느 땅에서 어느 정도의 결실을 맺게 될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자 칼뱅은 오늘 본문을 주석하면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양의 결실을 하는 것은 아니며, 누군가 더 적게 결실한다고 멸시를 받는 것도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3] 하나님은 좋은 땅이 되어 결실하는 사람이라면 그 결실의 양을 떠나서 칭찬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당시 회중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장면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에서 당시 회중들이 깜짝 놀랄 만한 대목이 딱 한 곳이 있습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는 장면, 그 가운데 일부가 길가에 떨어지는 장면, 혹은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장면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좋은 밭을 설명하시는 대목에서 그 비유를 처음 들었던 유대인들 대부분이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바로 어떤 씨앗이 100배의 결실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평균적인 수확의 양은 뿌린 씨앗의 10배 정도였다고 합니다.[4]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 농부들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결실을 이야기하십니다. 100배의 수확입니다.[5]

 

씨 뿌리는 비유는 천국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당시의 농업 기술로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100배의 결실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다만 어느 밭에서 100배의 결실이 나올지 모릅니다. 때로는 내가 뿌리는 씨앗이 길가에 뿌려져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새가 와서 먹어버리는 모습에 절망감을 느낄 지도 모릅니다. 싹이 나고 줄기가 올라오는 모습에 잔뜩 기대하였지만 돌밭과 가시덤불로 판명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농부가 된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말씀을 뿌려야 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곳에서,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하나님은 100배의 결실을 허락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사이먼 J. 키스트메이커, <예수님의 비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44-45.

[2] 사이먼 J. 키스트메이커, <예수님의 비유>, 55.

[3] John Calvin, Commentary, Mathew 13:22.

[4] 사이먼 J. 키스트메이커, <예수님의 비유>, 46.

[5] 창세기에는 이삭이 100배의 수확을 얻었고 그 결과 거부가 되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26:12-13). 이처럼 100배의 수확이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