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강해2018. 2. 2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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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편의 저자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4절에서는 불면증으로 인한 고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는 밤. 그의 마음은 큰 아픔과 괴로움으로 눌려 있습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 간구하고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해주시리라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오늘 시편은 바로 그 믿음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1) 그러나 시편의 저자는 자신의 믿음을 따라 아무리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여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다면 고난을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일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으니 더욱 무거운 마음을 끌어안고 밤을 지새우게 되는 것이지요.

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나니그 뒤에는 괄호 안에 이런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침묵하셨다그래서 2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기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위로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하나님을 기억했다면 마음에 소망이 넘쳐야 할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3절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구하였지만 여전히 나에게 찾아온 고난의 현실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에게도 소망을 찾을 수 없다면 그 어디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극심한 슬픔에 그는 지난 밤 단 한 숨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동안. 그의 마음에는 수많은 장면들이 스치듯 지나갑니다(5). 예전에, 아주 오래전 하나님께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펼쳐보이셨던 장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재앙과 고난이 찾아온 장면, 다시금 하나님을 기대하며 간구하였던 장면, 그러나 이번만큼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던 장면들. 이러한 장면이 스치듯 지나갈수록 그의 마음에는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질문들이 떠오르는 것이지요.

 

주께서 (나를) 영원히 버리실까?

(주께서)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하나님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을까?

하나님께서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7-9)

 

지금까지 배워왔던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은 자신을 향해 아니라고 외치지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곱씹어 볼 수록 그렇다고 대답을 하는 것 같습니다.[1] 그러고 보니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이 두 가지 사이의 갈등, 곧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 배웠던 교리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신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악인이 번성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수모를 당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악인을 멸하고 의인을 세우신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죄를 덮고 오히려 의인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만을 섬기며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형통의 길로 인도하여 주신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우리의 충성이나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봉사가 아무런 결실도 없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배웠던 신앙과 현실의 모습 사이에 이처럼 큰 간극이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끝까지 견지해 나갈 수 있을까요? 바로 이것이 시편의 저자가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마음 속에서 괴로워하였던 질문이지요.

 

저는 이 질문에 너무 쉽게 답을 내리고 싶지 않습니다. 내일 본문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주고 있지만, 그 답을 너무도 쉽게 나의 것을 취하기보다는 시편의 저자가 보내야 했던 고통과 번민으로 점철된 불면의 밤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한 가지

다만한 가지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께 기도하여보았기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았기에, 하나님께 간구하여 보았기에 그의 마음이 상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배운 신앙과 현실의 모습이 서로 갈등하고 조화되지 않기에 우리는 괴로워하지만 실상은 그러한 갈등과 뼈아픈 질문이 지금도 우리를 붙잡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신앙의 가르침이 없어 그저 현실의 모습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붙잡아 주신다는 신앙의 가르침이 없이 그저 현실의 고난 앞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면, 밤새워 침상을 적시며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어떻게 이러한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느냐고 불평조차 할 수 없었다면 우리의 마음은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의 심연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배운 신앙과 현실의 모습이 도저히 일치되지 않지만 다시금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향해 질문할 수 있기에 우리에게는 여전히 붙잡을 수 있는 끈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지라도 우리가 배운 신앙은 고난과 재앙 속에서 우리를 여전히 붙아주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손길인 것입니다.



[1] Walter Brueggemann, William H. Bellinger, Jr., Psalms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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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