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18. 7. 3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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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켈리포니아에 위치한 세쿼이야 국립공원은 규모가 작아 크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매우 멋진 공원입니다. 세쿼이야 국립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제너럴셔먼트리’(General Sherman Tree) 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나무가 살아온 세월은 자그마치 이천 2,600년이라고 하니 제 아무리 100세 인생을 살아가는 시대라 할지라도 제너럴셔먼트리의 연수를 가늠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2,600년 된 제너럴셔먼트리는 높이가 83m, 나무 밑둥의 둘레가 31m에 이른다고 합니다. 제너럴셔먼트리와 거의 동시대의 나무들의 나이테를 조사한 연구자들은 제너럴셔먼트리 역시 지금까지 83번의 화재를 겪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2,600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지역에 화재가 일어났고 제너럴셔먼트리는 83번이나 큰 화재를 이겨내고 지금까지 생존해 왔던 것이지요.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제 부터입니다. 세쿼이야 국립공원의 안내문에 의하면 제너럴셔면트리가 지금도 여전히 자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원 안내문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져 있습니다. “나무는 끝없이 자란다.”(X2) 이것이 나무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징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물 가운데 동물들은 태어나 성장하여 성체가 되면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더 흐르면 노쇠해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지요. 그러나 나무만큼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끝없이 자라고 제너럴셔먼트리는 2,600년 동안 83번의 큰 화재를 겪으면서도 그 모든 시련과 아픔을 이겨낸 채 지금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 두 가지 형태의 성장으로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의 믿음은 대부분의 동물들이 자라나는 경향과 동일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어린 아이들이 성장하듯, 어린 동물이 성장하듯 우리의 믿음도 성장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고점에 이르면 정체기를 맞이하고 결국 믿음이나 신앙이 그 상태로 머무거나 혹은 쇠퇴하는 경향을 보이지요. 대부분의 동물들이 성장하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장은 이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것은 동물의 성장이 아니라 나무의 성장과 같습니다. 세쿼이어 국립공원의 안내문처럼 나무는 끝없이 자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요, 우리의 영혼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어린시절을 지나며 성장하지만 어느 순간 성장이 멈추는 시기가 찾아오고 시간이 더 흐르면 점점 노쇠해지지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영혼만큼은 육신의 모습과 상관 없이 끝없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6)

 

우리의 겉사람인 육신은 생로병사의 주기를 따라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만큼은 그렇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나무와 같이 끝없이 자라날 수가 있고 그것이 신약성경이 이야기하는 믿음의 진보입니다. 여러분의 믿음, 여러분의 속사람은 어떠하십니까? 세쿼이야 국립공원의 제너럴셔먼트리처럼 지금도 자라나고 계십니까? 아니면, 우리의 육신이 시간이 흐르면서 노쇠해지는 것처럼 여러분의 속사람까지도 믿음의 진보를 멈추고 정체기, 아니 쇠퇴기를 맞이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마음의 집을 채우라

 

어느 날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그 사람은 귀신에게 놓였고 비로서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서 떠난 귀신이 자신이 머물며 쉴 곳을 찾아 헤맸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귀신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이 나왔던 사람을 다시 찾아가보았습니다. 가서 보니, 자신이 나온 집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고 수리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 안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 귀신은 잘됐다고 소리를 지르며 자신보다 더 악한 귀신을 일곱이나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이전 형편보다 더 심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던 귀신이 쫓겨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특별히 신약성경은 사람에게서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을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하여 설명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자 귀신이 쫓겨났던 것이지요. 그러나 조금 전 말씀드렸던 예수님의 이야기는 귀신이 쫓겨난 이후, 곧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이후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아무 것도 담지 않은 진공상태 혹은 중립의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채우지 않는다면 깨끗이 청소하고 수리한 우리 마음의 집에 다시금 악한 귀신이 찾아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과 어둠의 세력을 이겨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청소하고 수리한 우리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 어제보다는 오늘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왔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시작되었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의 집에 경건의 마음을 가득 채우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우십시오.[1] 날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 마음의 집을 가득 채우지 않는다면 깨끗이 청소하고 잘 수리한 마음의 집에 더욱 악한 것들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신앙생활에 대해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한 가지 사실. “믿음은 진보하지 않으면 쇠퇴합니다.”(X2)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뒤로 후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믿음의 진보를 위해 노력하고 또다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사람에게 귀신이 한명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후에는 자신만 들어간 것이 아니고 일곱 귀신을 데리고 옵니다. 그것도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려오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하시죠.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11:26b)

 

신약성경을 보면 이와 같은 가르침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시작하였지만 지속적으로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면, 그래서 믿음이 후퇴하거나 파선하면 믿음의 길을 시작하기 이전보다 더욱 비참한 형편이 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은 새신자들은 마음이 순수합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도 크게 다가와 감사와 감격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무엇이든지 교회가 지도하는 대로 따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시작하였지만 믿음이 진보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분들은 그 마음을 다시금 새롭게 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신앙생활에 대해 아는 것 같고, 기독교의 믿음에 대해 아는 것 같지만 그러한 지식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해요. 그러니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조차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시작하였지만 그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진보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옛모습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재물에 대한, 물질에 대한 욕심이 가득했던 분이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계속해서 성장하지 못하면 그가 소유한 신앙은 자신이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재물에 대한 욕심을 정당화하고 포장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하고, 예수님은 모든 탐심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그의 믿음은 성장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기에 그 어떠한 성경말씀으로도 그 마음 깊이 자리잡은 탐심을 뿌리뽑지 못합니다. 그 대신 자신이 알고 있는 얄팍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그저 물질적으로 경제적으로 신자들을 축복해주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믿음의 길을 들어서지 않았다면 자신의 탐심과 욕심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었을 텐데, 믿음을 가졌다고 하니 자신의 탐욕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이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믿기 전부터 세상적인 성공을 꿈꾸며 살아왔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부리며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으면 과거에 가졌던 권력에 대한 욕구, 세상적인 성공에 대한 갈망을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그런데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기도하며 자신의 신앙 인격을 다듬어가는 노력이 없으니 이와 같은 강력한 말씀도 그의 마음에 자리잡은 지배하려는 세상적인 출세에 대한 욕구, 권력에 대한 욕구를 제거하지 못해요. 오히려 하나님을 그저 자신의 세상적인 성공을 보장해주시는 분으로 왜곡시켜버리고 마는 거에요.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이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길을 시작하였지만 그 믿음이 성장하거나 진보하지 못하여 믿음의 길에 들어서기 이전의 모습보다 더욱 악한 모습으로 변하는 최악의 경우는 이단에 빠지는 경우가 아닐까 싶어요. 이것이 베드로후서 2장이 다루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지요. 베드로후서 222절은 두 개의 속담을 인용합니다. 첫번째 속담은 개가 토하였던 것에 돌아간다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속담은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다입니다. 구약성경 잠언에 등장하는 이 속담은 과거의 더러운 행실을 벗어난 듯 하지만 정작 다시 돌아가는 행태를 묘사하지요. 하나님과 상관 없이 살아가던 불신자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과거의 더러운 행실을 버렸습니다. 마치 개가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토해 내버린 것처럼, 마치 돼지가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살펴보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도 다시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더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개가 태한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마치 돼지가 깨끗이 씻은 몸으로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워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특별히 베드로 사도는 이 두 가지 속담은 이단에 속한 사람들에게 적용합니다. 베드로후서 222절의 마지막에 “(이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라고 선언하는데, 여기서 그들은 베드로후서 2장 전체가 묘사하는 이단자들을 말합니다. 이단의 특징이 불신자들에게 전도하지 않고 주로 신앙인들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믿음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성경에 근거하여 바르게 성장하지 못하고 그만 이단의 잘못된 가르침에 넘어가버린다면 그것이야 말로 나중 형편이 이전보다 훨씬 더 못하게 된 경우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이단의 가르침을 배격하고 그들의 속임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끊임 없이 우리의 믿음을 말씀과 기도 가운데 성숙시키는 것, 곧 믿음의 진보입니다.

 

이단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하는 비유가 있지요. 바로 위조 지폐를 어떻게 감별하는가입니다. 위조 지폐를 감별하기 위해서는 위조지폐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그 대신 진짜 지폐, 위조되지 않은 바른 지폐를 유심히 관찰하고 깊이 있게 연구합니다. 그러면 위조지폐를 만났을 때 금방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는 거에요. 그러므로 여러분, 세대가 갈수록 악해지면서 이단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는 지금 여러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도 여러분 자신의 믿음이 진보할 수 있도록, 여러분 마음의 집을 말씀과 기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은혜로 가득 채우기 위해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이단을 비롯한 거짓된 가르침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어가 되는 것입니다.

 

 

햇볕과 영양분과 수분이 공급되기만 하면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방을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채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지속적인 믿음의 진보를 이룰 수 있을까요? 너무나도 쉽고 단순한 답이지만 그렇기에 너무도 쉽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놓치고 있는 바로 그것이 정답입니다. 곧 말씀과 기도이지요. 지금 나에게 말씀 생활, 기도 생활이 풍성하면 내 마음의 집에 선한 것들이 채워지고 있는 거에요. 반대로 지금 말씀 생활과 기도 생활이 무엇인가 막혀있는 것처럼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지금 나의 마음은 고갈되고 있는 것이죠. 말씀과 기도로 말미암아 내 마음에 선한 것을 가득 채울 때 우리는 비로서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없어요. 말씀 생활과 기도 생활이 믿음의 진보를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하실 점이 있습니다. 믿음의 진보를 위해서는 말씀 생활과 기도 생활이 반드시 필요한데,  여기서 말하는 말씀과 기도는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오는 ‘Aha-Moment’로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 말씀과 기도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을 준다는 점이죠. 그런데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만 또 좋아하며 묵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내가 익숙한 방식으로 익숙한 내용으로만 기도합니다. 그러니 새로운 깨달음으로 무릎을 치는 ‘Aha-Moment’가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면 당연히 내가 알고 있던 하나님의 모습으로부터 조금도 진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셨다면 이번에는 믿음의 성숙을 위해 고난도 주시는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로마서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능력을 묵상했다면, 이제는 야고보서를 통해 복음을 소유한 성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했다면, 죄를 미워하시고 반드시 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도 깊이 묵상해볼 때 우리의 믿음은 더욱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믿음의 진보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세쿼이야 국립공원에 있는 제너럴셔먼트리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 공원 앞에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나무는 끝없이 자란다.” 그러나 이것은 문장의 일부를 제가 누락한 것입니다. 세쿼이야 국립공원에 있는 안내문은 정확하게 이렇게 쓰여져 있어요.

 

나무는 충분한 햇볕과 영양분과 수분이 공급되기만 하면 끝없이 자란다.”

 

나무는 동물의 몸과 달라서 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끝없이 자랄 수 있습니다. 2,600년이라는 거대한 세월을 지나와도 제너럴셔먼트리는 자랄 수 있어요. 그 오랜 세월 80회가 넘는 화재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나무는 끝없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 하나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충분한 햇볕과 영양분과 수분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10년 전, 20년 전에 공급되었던 햇볕과 영양분과 수분은 지금의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한 달 전, 일년 전에 공급되었던 햇볕과 영양분과 수분도 지금의 성장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단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영혼에 말씀과 기도로 말미암은 햇볕과 영양분과 수분이 공급된다면 지금도 여러분의 믿음은 끝없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1] 데럴 보크(Darrell L. Bock)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을 청소하고 수리하였다면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응답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Darrell L. Bock, Luke (IVP: 1994),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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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