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2019. 5. 27.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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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휴가 기간을 이용하여 유치원을 다니는 어린 아들과 단 둘이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저녁, 저는 아들과 함께 성산 일출봉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제 아들은 최선을 다해 한 걸음씩 올랐지만 중간중간 너무 힘들다고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저는 중간중간 아들을 안고 올라갔습니다. 비록 제 아들이지만, 한 여름 날씨에 그 녀석을 안고 계단을 오른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후회가 몰려오더라고요. ‘내가 뭐하러 아들을 데리고 여기에 왔나’ 그래도 저의 아들은 최대한 자신의 발로 걸었고 그날 저녁 저희 부자는 일출봉 정상에서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갔으니 오르는 것보다 내려올 때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계속 주의를 주었고, 아들은 한발 한발 조심하며 내려왔습니다. 마침내 다 내려왔을 때 저의 아들이 한마디 했습니다. “아 살았다” 아빠에게 말은 못했지만 오르고 내려오는 길에 내심 두려웠던 겁니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그날의 일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조그마한 몸으로 아빠와 함께 일출봉 정상까지 오르고, 또 함께 내려오면서 더 이상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힘들다고 짜증을 내지 않고 그저 묵묵히 따라와 준 아들이 눈물 겹도록 고마웠던 경험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하나님께서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그저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졸졸졸 따라가는 것이요, 그저 하나님의 품에 안겨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따라가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인도하심을 따라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그 시작점부터 바울의 계획과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라는 한 사람을 데리고 갈 것인지의 문제를 놓고 바울과 바나바가 의견 충돌이 일어나더니 결국에는 바나바는 바나바대로, 바울은 바울대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또한, 1차전도여행의 중심지였던 아시아 지역을 2차전도여행에서도 다시 방문하는 것이 바울의 처음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계속해서 바울이 가려고하는 길이 계속 막히고 맙니다. 사도행전은 그 장면을 설명하면서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했다’고 묘사합니다(16:6-7). 그러니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처음부터 순탄치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여곡절 끝에 빌립보라는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귀신들린 여종이 있었습니다. 그 여종은 점을 치며 주인에게 큰 수입을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아주었습니다. 비로소 이 여인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장면을 바라보며 광분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 여종의 주인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고소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탐욕으로 오히려 선한 일을 한 바울을 고소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빌립보 도시의 관리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벗기고 심하게 매질을 하고는 깊은 지하 감옥에 가두어버립니다. 

이때 바울은 자신에게 가하는 억울한 매질과 투옥을 매우 간단하게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곧, 바울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당시 로마의 법에 의하면 로마 시민은 재판을 통해 유죄판결을 받기 전에는 매를 때리거나 감옥에 가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와 같은 간단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몰랐느냐고요? 아닙니다. 당연히 알고 있었고 이 일이 있은 바로 그 다음날도 자신의 권리를 사용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채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2차전도여행을 출발하여 지금까지 자신의 계획이 계속해서 수정되고 변경된다는 것을 의식하였던 것 같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2차전도여행에서는 별로 되는 일이 없잖아요. 뜻대로 잘 안 되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이 따로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디까지 인도하시는 지 따라가 보기로 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울의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계획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막혀 버리는 경험을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자신의 계획을 계속 변경하며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요, 그래도 답이 보이지 않으면 그저 절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냅니다. 바로 자신의 계획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날 때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겼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너무도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계획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계획을 세웁니다.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좋은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내가 세운 계획이니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고집입니다. 계획이 세워졌고 모두가 합의한 것이니 그 계획은 최대한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동의하였고, 우리 모두가 합의하였지만 과연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합의에 하나님도 동의하셨는지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잠언 16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그러므로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위대한 일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빈틈없이 준비한 철저한 계획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철저한 순종입니다.  곧,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을 위한 마스터 플랜(master plan)이 아니라, 우리의 마스터(Master)가 되시는 –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 그분의 계획, 곧 Master’s plan인 것입니다.[각주:1]   


한밤의 기도

흠씬 두들겨 맞고 어둡고 차가운 깊은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이 되어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계속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여러분, 여기에 등장하는 바울과 실라의 기도, 그리고 그들의 찬양은 지금 억울하게 매를 맞고 깊은 지하감옥에 갇혀 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달라고 부르짖는 기도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로마시민권만 사용하면 지금이라고 그 감옥에서 나올 수 있어요. 그러나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감옥에서 벗어나는 게 아닙니다. 나의 계획은 다 무너졌어요. 나의 계획은 하나님의 계획과 달랐기에 더 이상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계획을 찾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아직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나타나지 않았으니, 나를 어디까지 인도하시는 지 지켜보기 위해 인내하며 여기까지 따라왔습니다. 그 순간순간 바울은 기도하였고, 그 순간순간 하나님을 찬양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폭풍우가 지나고 저 깊은 지하의 감옥에 갇혀있지만 아직 하나님이 자신을 어디로 인도하시는 것인지 주님의 계획을 다 알 수 없으니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기도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한 밤중이었습니다. 그곳은 깊은 지하 감옥입니다. 아무런 모습도 안보이고,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리는 모든 것이 정막하기만 했던 그 깊은 지하 감옥에 비로소 바울과 실라로 말미암아 찬양의 소리, 기도의 소리가 조금씩 울리기 시작하여 그곳에 갇혀있는 죄수들의 귀에까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를 이끌고 그 깊은 감옥에 함께 내려가셨던 성령 하나님의 귓가에도 그들의 찬양과 기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닫는 기도와 찬양,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와 찬양은 나의 계획을 끝까지 고집하다가 그 계획이 실패할 때 다시 한번 하나님께 자신의 뜻과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켜 달라고 떼를 쓰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신의 계획과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 장면을 보면서 더 이상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만일 기도라는 강력한 도구를 사용하여 내가 원하는 계획, 내가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면, 오늘 본문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수입을 얻었던 사람들, 여종에게서 귀신이 나가자 수입이 끊어진 것 때문에 관리들을 충동하여 바울과 실라를 깊은 감옥에 쳐넣은 그 여종의 주인들과 도대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지만,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는 그때, 지금도 하나님께서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기에 나의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할 수 있는 경로를 바꾸는 기도. 경로를 바꾸는 찬양. 바로 그것이 어둡고 적막하기만 했던 그 깊은 감옥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소로 바꾸는 참된 기도와 참된 찬양이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현장

드디어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바로 그 장소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을 쉬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진을 일으키셔서 옥터 전체가 움직이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을 묶어 두었던 모든 기구들이 다 풀어집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놀라운 기적은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의 모든 문이 열리고 모든 묶였던 것이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던 어느 누구도 감옥에서 도망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 곧 지진이 일어나고 모든 문과 모든 묶인 것이 풀리는 기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곳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렸던 바울의 행동. 이 기적적인 두가지 장면으로 말미암아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엽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를 향하여 그 마음의 깊은 질문을 토해냅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30절) 간수의 이 진실한 질문으로부터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복음의 내용을 가장 함축적으로 전파하기 위하여 무수히 반복하여 인용하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의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이 위대한 선포를 시작으로 바울은 복음의 말씀을 간수와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였고, 간수와 그의 가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전도의 현장, 복음의 현장은 바로 저 깊은 지하 감옥이었으며 복음이 선포되고 복음이 믿어지는 시간은 바울과 실라가 억울하게 매를 맞았던 바로 그날 깊은 밤이었던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우리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첫번째 선택지는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선택지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실 장소를 결정하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회퍼는 첫번째 선택지, 곧 내가 하나님을 만날 장소를 직접 선택하는 경우, 그곳에서 내가 만나는 하나님은 나와 닮은 하나님, 내가 좋아하는 하나님, 곧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만들어낸 우상이라고 강조했던 것입니다.[각주:2] 그러므로 여러분이 나의 생각과 나의 경험을 뛰어넘는 위대하신 참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두번째 선택지를 고르셔야 합니다. 곧, 내가 하나님을 만날 장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실 장소를 선택하실 수 있도록 모든 결정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오랜 세월 살아온 갈대아 우르를 떠나 저 멀리 변방이었던 가나안으로 가는 것은 거의 죽음을 무릎 쓰는 듯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야곱에게 형 에서를 피하여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간다는 것은 정처없는 피난길처럼 보았습니다. 요셉에게 애굽의 종으로 팔려간다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가정의 비극 중에 비극이었습니다. 모세에게 애굽의 궁궐을 뒤로하고 광야에서의 목동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소망이 사라지는 듯한 인생 경로의 변경처럼 보였습니다. 이후 유대 백성에게 성지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민족 바벨론의 포로가 된다는 것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가 끝나버렸다는 저주의 표시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앞으로 전진하십시오. 아브라함에게는 갈대아 우르가 아닌 가나안이, 야곱에게는 아버지의 집이 아닌 하란이, 요셉에게는 종으로 팔려가는 애굽이, 모세에게는 바로의 궁궐이 아니라 광야가, 그리고 유대 백성에게는 성지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벨론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기로 결정하신 장소라면, 나의 계획을 포기하고 경로를 바꾸어 우리는 바로 그 장소까지 내려 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외면당했던 장소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기로 결정하신 장소이시니 바로 그곳까지 도착해야 참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비로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경로를 수정하였습니다. 결국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시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장소에 있었고, 복음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장소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습니다. 고통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바로 그곳에 도착하여 복음의 역사를 경험하자 바울과 실라, 그리고 간수와 그의 가족들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오늘 본문의 마지막 결론이 무엇입니까?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크게 기뻐하니라”  바울과 실라의 상처는 여전히 후끈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아픔과 괴로움을 모두 보상하기에 충분한 기쁨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그날 밤 빌립보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행복을 누렸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그날 바울을 만나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난 여종도 행복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종의 주인들은 결코 그날 밤을 행복하게 지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여종의 주인들이 고소하자 그들의 말만 듣고 바울과 실라에게 매를 치라 명하고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은 빌립보의 고위 관료들도 그날 밤만큼은 행복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날 밤 빌립보의 하늘을 바라다보며 쏫아질듯한 별들을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겠지만, 간수의 집에 모여 함께 기쁨의 식탁을 나누었던 바울과 실라, 그리고 간수와 그의 가족들이야말로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분명한 믿음을 선포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1-32)

만일 우리가 사도 바울에게 이 구절을 내밀면서 바울 당신이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 억울하게 매를 맺고 옷이 벗겨지고 심한 매를 맞고 깊은 지하 감옥에 갇힌 것도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주시는 그 모든 좋은 것에 포함되느냐고 질문한다면, 바울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렇다”라고 대답하지 않을까요? 비록 억울하게 매를 맺고 옷이 벗겨지고 심한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힌 것은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그날 밤 빌립보에서 잠든 모든 사람보다 가장 큰 기쁨을 누렸기에 바울은 그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행복의 선물이라고 고백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때 복음의 내용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비록 지금 내가 가는 길이 깊은 감옥이라 할지라도, 비록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좁은 길이라도, 비록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의 손을 붙잡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나의 계획을 포기하고 경로를 수정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하나님을 만나기로 결정한 그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기로 결정한 바로 그 지점까지 내려가십시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내가 만든 우상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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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eil Cole, Journeys To Significance: Charting A Leadership Course From The Life Of Paul (San Francisco: Jossey-Bass, 2011), 70. [본문으로]
  2.  앤서니 티슬턴, <성경해석학 개론: 철학적 신학적 해석학의 역사와 의의>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2), 45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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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