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2019. 6. 5.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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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잠시 유학을 하는 동안 체험했던 여러 가지 경험 가운데 지금까지도 가장 인상 깊게 남아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Florida) 주의 올렌도(Orlando)에서 Exponential Conference가 개최되었는데, 제가 공부하던 학교의 학생들이 하나의 팀을 이루어 콘퍼런스의 스텝으로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Exponential Conference 는 당시 2,000명 이상의 북미지역 기독교 지도자들이 참여한 대규모 집회였습니다. 첫번째 주제 강연은 프란시스 챈(Francis Chan)이라는 목사님이 강사로 나섰는데, 그가 강연을 통해 제기했던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왜 성령을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우리의 삶에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을까요?’ 

챈 목사님은 계속해서 인도에서 만난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인도와 중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는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는 사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믿음이 실제로 역사하는 현장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전통 위에 세워져 있는 북미에서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 어떠한 것도 포기하거나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기독교의 신앙은 더 좋은 설교자와 더 좋은 목회 프로그램을 찾아 그것을 선택하는 것일 뿐 그 어떠한 진지함도, 그 어떠한 헌신도 없다는 뼈아픈 지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프란시스 챈은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것은 단지 예배 처소에 모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따르는 그분의 제자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8년이 지난 그때의 강연이 새삼스럽게 제 마음에 떠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까지 세 주에 걸쳐 사도행전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현장을 묘사해줍니다. 초대교회에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든 사람을 치유하였고, 귀신을 내어 쫓았으며,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역사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묵상하면 할수록 저의 마음에 사라지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는 왜 사도행전과 같은 성령의 역사,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어쩌면, 8년 전 프란시스 챈 목사님이 북미 기독교를 진단하였던 것처럼,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신앙생활하는 우리 역시 기독교 신앙을 소유한다는 것이 단지 더 좋은 교회, 더 편안한 교회시설, 더 듣기에 좋은 설교를 찾아가는 하나의 소비형태가 되었을 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지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은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변화 - 복음의 역사

사도 바울의 3차전도여행을 묘사하는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허울 좋은 이름이었을 뿐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지 못했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요한의 세례는 받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몰랐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는 무엇인지, 그리고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지 설명하지요. 오늘 본문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바울은 요한의 세례를 언급하면서 중요한 하나의 키워드를 삽입합니다. 곧, “회개의 세례”입니다. 요한은 세례를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사람들에게 베푼 세례의 핵심은 회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의 피를 깨닫고 죄를 고백하는 회개만으로는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죄인의 자리에서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납니다. 곧, 거듭남입니다.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아래 있었지만 이제는 하늘의 은총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갔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친히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 삶을 이끌어가시니 그 주님과 함께 걷는 걸음이 행복하고 기쁨이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의 세례를 넘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례에 담겨있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곧, 거듭남의 은혜입니다. 

세례만이 아닙니다. 성만찬에도 우리가 믿고 따르는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4-55) 

우리는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남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하늘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공급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다 내어주셨습니다. 그분은 다시 살아나셔서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복음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늘의 은총을 누리며 하루 하루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세례는 받았지만, 여전히 세례에 담겨 있는 복음의 핵심, 곧 거듭남의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니 체험하지도 못합니다. 매월 베풀어지는 성만찬에 참여하지만 성찬에 담겨있는 복음의 핵심, 곧 하늘의 양식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니 체험하지도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허울뿐인 제자들, 허울뿐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딱 그러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았어요. 그러나 세례 안에 담겨있는 복음을 깨닫지도 못하고 체험하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어쩌면 성만찬에 참여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만찬에 담겨있는 복음을 깨닫지도 못하고 체험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사도행전의 모습을 참으로 체험하기를 원하신다면 그 무엇보다도 복음의 진리를 믿으십시오. 세례에 담긴 거듭남의 은혜를 믿으십시오. 성만찬에 담긴 복음, 곧 날마다 필요한 영적인 양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으십시오. 비록 나의 모습은 여전히 부족하고, 때로는 나도 나의 모습이 싫고 미워질 만큼 여러분 안에 죄성이 가득할지라도 여러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여러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며 하늘의 양식을 풍성히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빋으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는 사람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여러분은 더 이상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를 풍성히 베풀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믿으십시오. 그 믿음 위에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복음의 역사가 바로 여러분의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변화 – 성령의 역사

사도 바울은 제자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세례에 담겨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고,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드디어 그들의 마음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십니다. 오늘 본문 6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바로 그 다음 절에 매우 짧지만 의미 있는 문장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십시오.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여러분, 여기에 등장하는 12라는 숫자를 들으셨을 때 무엇인가 떠오르는 개념이 없으신가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열두명의 제자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였던 사람들이 약 120명 – 여기에도 12라는 숫자가 등장하네요. - 120명의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오순절날 성령께서 강하게 임재하셔서 비로소 사도행전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금과 은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재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악한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며 복음의 역사를 체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난 지도 20여년이 지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1차 전도여행과 2차전도여행을 마치고 이제 3차전도여행으로 에베소에 와 보니, 거기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제자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복음의 능력이나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바울은 에베소에서 만난 열두명의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시금 전하였고 그들에게 성령께서 다시금 임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지 그 열두명의 제자만이 아닙니다. 3차 전도여행기간, 사도 바울은 주로 에베소라는 도시에 머물렀고 그곳에서도 두란노서원이라는 곳에서 소수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집중합니다. 뿐만 아니라, 두란노서원에서 사도 바울이 간절히 기도하였고, 12명의 제자들도 간절히 기도하였고, 두란노서원에 함께 모인 성도들도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오순절날 120명의 성도들에게 임재하셨던 성령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함께 두란노서원에서 말씀을 배우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임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 10절은 그 결과를 이렇게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10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곧 인종과 성별과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느냐고요? 사도 바울이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대신 그는 두란노서원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집중적으로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성령께서 임하자 비로서 다시금 강력한 성령의 역사,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무엇보다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마십시오. 그리고 너무나도 중요한 한가지, 성령 하나님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임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오순절 성령의 강림을 시작으로, 어디든지 성령께서 임재하셨던 장소, 언제든지 성령께서 임재하셨던 시간에는 예외없이 영적대각성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많은 성경공부를 하고, 제 아무리 제자훈련을 받고, 제 아무리 많은 훈련과 교육을 받는다 하더라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못한다면 우리의 마음만 분주해질 뿐 사도행전이 그려주는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현장은 결코 체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시대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체험하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무릎을 꿇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달라고,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변화시켜 달라고, 성령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충만하게 임하셔서 나를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의 자리에서 벗어나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탈바꿈시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언제 임하실 지 알 수도 없으며, 성령께서 어느 장소에 임하실지도 알 수 없으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임재하기만 하시면 우리의 삶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정에 임재하기만 하시면 우리의 가정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교회에 임재하기만 하시면 우리 교회는 물론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다시금 복음의 역사로 출렁이게 될 것입니다. 


프란시스 챈의 기도

미국 플로리다주의 올렌도에서 있었던 Exponential Conference의 프란시스 챈 목사님의 강연이 약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었던 것은 사실 그분의 강연 내용보다는 그분의 기도였습니다. 프란시스 챈은 강의를 마치자, 챈 목사님이 강대상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다시금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나님 당신을 참으로 경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챈 목사님의 기도가 계속되면서 이곳 저곳에서 사람들이 흐느껴 울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삽시간에 약 2,000명이 넘는 북미 기독교 지도자들이 회개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나름대로 교회의 지도자로 사역도 하고 있지만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뿌리 깊은 탐심,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제자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 나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2,000여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자신들이 속한 북미 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위하여, 새로운 성령의 역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저 역시 간절히 기도하였지요. 지구 반대편에 와 있었지만, 바로 그곳에서 이 땅 한반도와 이곳에 있는 수많은 교회들이 다시금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새로운 부흥의 역사를 허락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시금, 사도행전을 묵상하며 복음이 살아 움직였던 초대교회의 모습이 왜 지금 우리 시대에는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지금, 저에게 떠오른 대답은 약 8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예배당 바닥에 꿇어 앉아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위하여 기도하였던 바로 그 장면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행전의 역사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도 이루어지도록 함께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바로 그 역사가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개인의 삶 속에서 체험되고, 여러분이 속한 가정과 모임 속에서 실체가 되며, 우리가 섬기는 이 교회에서 실재하는 역사가 되도록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의 임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 오순절의 역사가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것처럼, 두란노서원에서 사도 바울과 함께 12명 정도의 제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였던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할 때 온 아시아에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처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에게 성령께서 임재하신다면 우리는 오늘도 사도행전이 그려주는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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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