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0. 4. 4.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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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불행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고, 우리의 고통과 괴로움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행복해지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중에도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하죠. 특별히 구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며 율법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의 율법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함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산상보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닫게 되는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약의 율법을 주신 이유가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다주기 위해,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명기 10장의 말씀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 구약의 율법은 무엇을 위해 주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행복을 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주어진 율법이 오히려 사람을 불행하게 하고, 사람을 억누르는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참뜻을 잃어버린 채 율법의 규정에만 얽매여 있다면 그 율법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율법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고통과 괴로운 짐이 되어 버리는 것이죠. 


살인에 대한 잘못된 교훈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참뜻을 왜곡하여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작용해야 하는 율법을 사람들의 삶을 옭아매는 율법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율법의 바른 의미를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새롭게 해석하시는 율법은 십계명의 제 6계명인 살인에 관한 계명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1절) 

제자들이 평소에 들었던 율법의 조항입니다. 살인에 대해서 어떻게 배우고 들었다는 것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십계명의 제 6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정확한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의 구절입니다.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여러분,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이 구절이 등장하나요? 아닙니다.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구절은 구약 율법에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사람을 죽인 사람을 두 부류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경우이고, 둘째는 실수로, 성경의 표현을 사용하면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 경우입니다.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입니다. 사형에 처하는 것이죠. 반면에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 곧 부지중에, 의도하지 않았는데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도피성이라는 지정된 장소로 피할 수 있도록 했지요. 왜냐하면 그 사람을 사형시키지 않았을 때 죽은 사람의 가족들이 보복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율법은 살인이라는 하나의 계명을 다루더라도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 시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율법의 전문가들은 살인에 있어서 의도와는 상관없이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정확하게 가르친 것이 아니죠. 그러면, 왜 예수님 당시 율법의 전문가들은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이야기를 했을까요? 그들이 구약의 율법이 고의로 사람을 죽인 사람과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구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오늘 우리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도피성의 제도에 대해서 율법의 전문가들인 그들이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그들의 불순한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그들의 가르침은 역으로 살인만 저지르지 않으면 심판을 변하게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기본적인 사항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소극적으로 살인하지 말라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지요.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의도적으로 한 행위가 아니라면 그의 생명이 보존될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도 우리가 적극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어구를 계속 되뇌기면서, 그들이 살인을 저지른 과정과 상황에 대해서는 조금도 묻지 않은 채, 살인을 저지른 몇몇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자로 정죄합니다. 그러면서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안전지대를 마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2절) 

당시 유대인들이 자신은 살인하지 않았으니,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너희가 비록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을지라도 형제에게 화를 내면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게 머저리라고 욕을 하면 공회에 잡혀가고,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욕을 하면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머저리라고 욕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무시와 멸시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자신도 자신의 마음에 다른 사람을 향한 악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요.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다투고, 서로 욕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점을 꼬집으셨습니다.  살인한 사람을 비판하면서, 자신은 최소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대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그들에게 형제를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난 한 주 동안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살인을 행하신 단 한 분도 없으시죠? 여러분 가운데 지난 한 주 동안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거나 막대한 손해를 끼친 악한 행동을 하신 분도 없으시죠? 그러나 여러분,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이나 이웃 사랑하기를 나 자신과 같이 하라는 율법의 말씀에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히 요구하시는 바는 나의 마음에 미움과 다툼과 시기심을 모두 벗어나고 나아가 이웃을 나 자신처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의 갈등과 화해

예수님은 계속해서 형제와 갈등이 빚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3-24절) 

하나님께 제사하고, 그분을 예배하기 전에 형제와 화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을 놓고 어떤 분들은 형제와 화목하지 못한 채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해석합니다. 옳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서로 싸우고 다투던 성도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또한 옳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설명 위에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곧 형제와 화목하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서먹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형제들과 최소한 서로 원망하고, 다투고, 미워하는 마음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일 어느 교회 안에 서로 원망하고, 다투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교회는 제 아무리 성령 충만한 목사님이 설교를 해도, 우리 시대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나 과거 스펄전 목사님이 설교를 해도 그 교회, 그 회중들은 은혜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것들 중에 믿음이 가장 중요하지요? 신앙이 제일 중요하지요?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도 중요하다고 우리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믿음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화해하십니다. 최소한 다투거나,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마십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의 믿음이 성장합니다. 

그러면 형제와 다투고, 싸우고는 관계가 우리 안에 발생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5절)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고발을 당했습니다. 오죽하면 고발까지 당했겠습니까? 그 두 사람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서로 싸우고, 다투고, 욕하고, 원망하는 관계입니다. 다툼이 일어나서 그 문제가 법정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한시라도 빨리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재판관 앞에 서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재판관이 너를 옥에 가두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재판관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성도들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당사자들 사이에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미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줄 만큼 주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면 오히려 거북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관 앞에 서게 되면 늦으니 그 전에 하루빨리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다행히 예수님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은 재판관 앞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화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기회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만일 화해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그 문제를 처리하기 시작하면 서로 다투고 갈등하던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두 사람이 갈등을 빚었다면, 어찌 단 한 사람의 잘못만 있었겠습니까? 경중이 다를 수는 있겠으나 양쪽에 다 갈등과 다툼의 책임이 있죠. 재판정 앞에 가기 전에 화해하면 그 모든 책임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화해하지 못한 채, 그 문제가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면 거기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와 갈등을 겪고 있다면 잘잘못을 따지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아직 길을 가고 있을 때에 하루빨리 화해하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른 모습으로 설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

하나님은 구약의 율법을 통해서 살인을 금지하셨습니다. 살인이 돌이킬 수 없는 범죄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창 9:6). 그런데 신약성경은 형제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성도들이 형제와 자매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과 근거는 구약의 율법이 가르치듯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헌신하고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고전 8:11b)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길 이유가 충분합니다. 하물며, 그들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와 자매라면 우리가 어찌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신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곁에 있는 이웃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갈등과 다툼을 하루빨리 화해하십시오. 나아가 그들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바로 이것이 여러분의 행복을 위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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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