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그룹과 말씀묵상2020. 4. 3.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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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옛 언약(구약)과 새 언약(신약)을 극명하게 대비하여 설명한다. 옛 언약은 돌에 쓴 것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역할을 하지만, 새 언약은 마음에 쓴 것으로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옛 언약이 영광은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없어질 유한한 것이었다면, 새 언약은 영원히 있을 것으로 더욱 영광이 있다(고후 3:6-11). 바울의 이와 같은 설명은 기독교인들에게 구약 성경은 ‘옛 언약의 책’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곤 하였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한 권으로 편집된 성경 가운데 신약 성경은 새 언약의 책으로, 구약 성경은 옛 언약의 책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한가? 

사도 바울의 논리는 옛 언약와 새 언약을 뚜렷이 구분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곧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라는 구체적인 책의 종류를 구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바울의 문장 속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점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로 ‘문자’(letter)와 ‘영’(Spirit)이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6b)  성경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어느 책이든,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린다. 곧, 구약 성경을 문자로만 대하면 구약의 율법이 사람을 죽이지만, 구약 성경을 영으로 읽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말씀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은 신약 성경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구약 성경의 전문가로서 그 내용을 완전히 암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문자적 지식이었을 뿐 영적 지식은 아니었다.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알고 있었지만, 그 뒤에 감춰진 영의 세계는 알지 못했고, 무엇보다 구약의 예언이 그들의 눈앞에서 활동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없었다. 그들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았지만 그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고’(눅 12:56)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렇다면, 신약 성경을 읽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을 영이 배제된 문자로만 읽을 위험성은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구약 성경을 읽든, 신약 성경을 읽든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다.’ 

성경을 영으로 읽는다는 의미는 성경의 문자 뒤에 담긴 의미를 읽는다는 의미요, 그 문자들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읽는다는 의미다. 나아가, 오늘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며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성경 공부(Bible Study)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영으로서의 말씀이 될 수 없다. 성경의 세계(then and there)를 넘어 독자의 세계(now and here)를 파고드는 말씀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성경은 문자를 넘어 영이 된다. 

바로 여기에서 말씀묵상(QT)에 내포되어 있는 위험성과 더불어 방향성을 발견하게 된다. 곧, 말씀을 묵상한다고 하면서도 성경을 지식으로만 접근한다면, 그리하여 성경이 문자가 되어버린다면 그러한 말씀묵상은 우리를 교만의 늪에 빠지게 만든다. 오히려 말씀 묵상이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문자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 묵상을 통해 성경 지식을 쌓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고 그저 한 구절이라도 나의 삶에 적용하여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는다면 비로소 우리가 묵상하는 말씀은 영이 되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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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