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그룹과 말씀묵상2020. 4. 4.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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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목회 01 _ 큐티의 신학적 이해

큐티 목회 01 _ 큐티의 신학적 이해 큐티 목회 02 _ 큐티의 목회적 이해 큐티 목회 03 _ 소그룹 나눔방의 명암 큐티 목회를 위한 첫 번째 단계는 큐티에 대한 신학적 이해다. 그런데 큐티는 성경에 접근하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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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의 목회적 이해를 위해 사도 바울의 교회론이 담겨 있다고 평가를 받는 에베소서의 한 구절로부터 시작해보자. 에베소서 2장 20절이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너희”는 좁은 의미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지칭하지만, 에베소서가 바울의 교회론을 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너희”는 에베소교회, 나아가 바울의 교회론이 지향하는 바로 그 교회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교회의 터와 모퉁잇돌에 대해 이야기한다. 곧,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하며 교회의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제시할 수 있지만, 신약성경 27권이 정경으로 채택된 근거가 사도성이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사도들의 터’는 신약성경으로 그리고 ‘선지자들의 터’는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에서 구약성경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든든한 터(기초)는 신구약성경이다. 나아가 바울은 교회의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한다. 교회의 터와 연관하여 본다면, 신구약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어야 한다. 

교단 및 신학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기초는 신구약 성경이며 교회의 모퉁잇돌은 신구약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신념이다. 그러나 목회적 관점은 여기에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지역교회를 신구약성경에 그 기초를 든든히 둔 교회로 만들 수 있으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만을 지역 교회의 모퉁잇돌로 자리 잡게 할 수 있는가? 


교회의 터와 모퉁잇돌을 든든히 놓기 위한 목회적 방안 

먼저 지역교회가 신구약성경에 그 기초를 든든히 놓기 위한 목회적 방안이다. 목회자는 자신의 교회(성도)가 언제나 성경에 근거하여 모든 일을 바라보고 결정하기를 기도한다.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성경을 연구하며 매주 설교를 준비한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의 설교로 모든 성도의 영적 필요를 채우기란 역부족이다. 그래서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등 다양한 예배와 기도회 시간마다 성경에 근거한 설교를 충실하게 준비하여 선포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성도 개인이 마주치는 다양한 사건과 상황에 대한 성경적 대답을 다 제공할 수 없음을 알기에, 목회자는 가가호호를 심방하며 그곳에서도 성경을 읽고 설교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성실하고 뛰어난 목회자라도 모든 성도가 신구약성경에 근거한 삶을 살도록, 나아가 교회가 신구약성경에 그 기초를 든든히 두도록 돕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대부분 한국교회에서 전임 목회자 대 성도의 비율은 1:100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도들이 매일의 삶을 성경에 근거를 두고 살아가게 하며, 나아가 지역교회가 신구약성경이라는 분명한 기초 위에 세워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가능한 대답 가운데 하나가 ‘큐티 목회’다. 지역 교회 안에 큐티를 정착하면 이 과제가 많은 부분 해소될 수 있다. 목회자가 매일 모든 성도에게 꼭 필요한 성경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해줄 수는 없지만 성도들이 매일 큐티를 하며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찾을 수 있도록 훈련시킬 수 있다. 한 명의 목회자가 매일 100명이 넘는 성도들을 먹이기 위해 물고기를 잡아주려고 노력하는 대신 100명의 성도들에게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매일 자신에게 필요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기술을 전수하는 방법이다. 바로 이것이 큐티를 지역 교회에 정착하였을 때 목회적으로 누리는 풍성함이다. 

큐티 목회라는 이 글의 주제에서는 조금 벗어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교회의 모퉁잇돌로 세우는 목회적 대안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하겠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역교회의 모퉁잇돌이 된다는 것은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며 복음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누리며 살아간다는 의미요, 나아가 교회의 모든 활동이 복음의 감격 위에 진행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생동감 있게 성도들의 삶과 교회의 모든 활동을 이끌게 할 수 있는 목회적 방안은 무엇인가? 어느 목회자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주일 설교 시간에 복음의 내용을 힘있게 선포했다고 생각해보라.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 설교를 통해 복음을 새롭게 경험할 것이다. 그렇게 한주가 지났고 목회자는 그 다음 주일에도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있게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에도 목회자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였다. 그렇게 매주 복음의 내용만을 설교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가 제 아무리 뛰어난 설교 능력을 갖추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성도들은 설교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될 것이다. 교회의 모퉁잇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매주 동일한 회중을 대상으로 설교해야 하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주일 설교가 다양한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역교회 성도들의 마음에 지속적으로 반복될 수 있는 목회적 대안이 필요하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전도와 일대일제자 양육이다. 노방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것부터 시작하여 사회복지나 문화행사를 통해 불신자의 마음을 얻는 것까지 전도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지역교회의 모퉁잇돌로 분명히 자리매김하기 위한 목회적 방안으로서의 전도는 특별히 ‘복음제시’(presenting the Gospel)를 말한다. 평신도 개인이 자신의 입을 열어 다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야기할 때 복음의 은혜를 다시금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일대일제자 양육 역시 좋은 목회적 대안이다. 여기서 말하는 일대일제자 양육이란 어떠한 교재, 혹은 특정 교회나 단체가 시행하는 제자 양육 프로그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평신도가 다른 평신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점적으로 양육하는 시스템을 총칭하는 용어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한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듣게 된다. 만일 하나의 지역교회에 100팀의 일대일제자 양육이 시행된다면 목회자가 복음의 정수를 강단에서 설교하지 않을지라도 200명의 성도들은 매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든지 듣든지 하게 된다. 결국 전도와 일대일제자 양육의 핵심은 복음제시에 있으며, 교회 성도들이 복음의 은혜를 늘 기억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자신의 입술로 복음을 제시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목회적 기술이 필요하다.[각주:1]


큐티 목회의 인간 이해 

큐티는 신구약 성경을 지역교회의 기초로 확립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목회 방법이지만, 여기에는 성경에 대한 신념과 다른 한편으로는 평신도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성경에 대한 신념이란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아도 ‘성경’은 누구나 읽기만 하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특별 계시)을 들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아울러, 인간에 대한 긍정적 관점이란 ‘대부분의 인간’이 전문적인 신학 지식이 없더라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는 긍정적 인간론을 말한다. 

만일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에 대항하여 ‘원죄론’을 주장하였던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늘날의 큐티 방법론을 알게 되었다면 평신도들의 자유로운 해석과 평신도들만의 큐티 나눔방(대부분의 큐티 나눔방은 평신도가 인도한다)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릴까? 실례로, 인간론에 있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따랐던 16세기 종교개혁자 존 칼뱅은 재세례파의 모임에 대해 몹시 회의적이었다.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이나 펠릭스 만츠(Felix Mantz)를 비롯한 재세례파들은 개인 가정에서 성경을 공부하였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성경공부를 통해 유아세례를 거부하면서 그레벨이 만츠의 집에서 이미 세례를 받은 조지(George)에게 (재)세례를 주었기 때문이다.[각주:2] 칼뱅은 이러한 재세례파의 출현을 바라보면서 개인의 가정에서 사적으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검증되지 않은 가르침이 확산될 위험성이 있음을 인식하였고, 재세례파의 신학과 신앙생활을 정죄하였다.[각주:3] 칼뱅의 신학을 따르는 칼뱅주의는 인간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전전으로 타락한 인간은 결코 자신의 이성으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칼뱅의 신학을 따르는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 서 있는 목회자와 교회는 큐티 목회를 시행함에 있어 자신의 신학적 인간론이 큐티 목회와 상충하는 것은 아닌지 반드시 점검해보아야 한다. 

신학적 인간론에 있어서 칼뱅과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존 웨슬레의 아르미니안 주의를 꼽을 수 있다. 존 웨슬레의 아르미니안 주의는 당시 영국 성공회가 주로 받아들였던 신학적 결정론을 반대하면서 인간의 행동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의 본성 안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웨슬레의 인간론은 케드먼이 ‘웨슬리 가르침의 왕관’이라고 표현한[각주:4] ‘그리스도인의 완덕’(Christian perfection)이라는 교리로 이어진다.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분명한 인식이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완덕을 실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웨슬리는 긍정적 인간론을 견지하였기에 평신도가 인도하는 소그룹 모임인 속회(class meeting)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각주:5] 그러므로 우리 시대, 평신도들이 주도하는 큐티와 큐티 나눔방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자와 교회가 존 웨슬리의 아르미니안 주의와 같은 긍정적 인간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전적 타락으로 요약할 수 있는 존 칼뱅의 인간론과 아르미니안 주의로 표현할 수 있는 존 웨슬리의 인간론 가운데 어느 하나는 옳고 어느 하나는 그르다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다만, 존 칼뱅은 웨슬리와 비교했을 때 부정적인 인간론을 견지하였기에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성경공부 모임을 지양하였고, 그 대신 제네바 아카데미(Genevan Academy)와 같은 신학생 및 목회자들의 말씀 훈련의 장에 더욱 집중하였다. 반면, 존 칼뱅에 비해 긍정적인 인간론의 입장에 있었던 존 웨슬리는 평신도들의 모임인 속회(class meeting)를 조직하여 활성활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목회자의 신학적 인간론은 그에 따르는 목회 방법론을 추구하게 되는데, 목회자가 평신도를 바라보는 자신의 인간론에 대한 성찰 없이 단지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큐티를 채택한다면 신학적 혼란을 초래함은 물론이요, 큐티 목회라는 방법론이 갖고 있는 역동성도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큐티라는 방법론을 목회적으로 도입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 가운데 하나는 목회자 자신의 신학적 인간론이다. 


큐티 목회의 위험성 – 큐티 율법주의 

큐티는 지역 교회의 기초를 신구약 성경에 든든히 세우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큐티 목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모든 성도들이 공유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부작용이 큐티 율법주의다. 일반적으로 큐티 율법주의는 교회 안에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첫째는 다른 사람을 향한 자세요 또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세다. 

먼저 큐티 율법주의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큐티가 교회에 아무리 잘 정착되어도 지속적으로 큐티를 하지 않는 성도들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대부분은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그런데 큐티를 깊이 경험한 성도들 가운데, 혹은 큐티를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여기는 목회자 가운데 큐티를 하지 않는 것을 불완전한 신앙생활로 여기는 경향이다. 마치 새벽기도회를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성도가 새벽기도를 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판단하거나, 전도의 결과가 많은 성도들이 그렇지 못한 성도들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다. 

또한 큐티 율법주의는 자기 자신이 큐티에 얽매이는 경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큐티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다. 일찍이 큐티 목회를 하면서 이러한 현장을 많이 경험하였던 하용조 목사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큐티를 하지 못할 때 죄책감이나 좌절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큐티를 안 한다고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큐티를 본의 아니게 하지 못했다고 해서 너무 자기를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율법주의적인 큐티를 해서는 안 됩니다.”[각주:6]


큐티와 목회 리더십 

큐티의 목회적 이해를 위해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목회자의 역할이다. 정성국 교수는 큐티 목회에 있어 목회자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성경 해석학 훈련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본문의 역사적 배경과 성경 언어에 대한 집중적 훈련이라고 보다는,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프레임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각주:7] 목회자가 본문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해석을 성도들에게 제공하려는 자세는 성도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부정적 인간관(아우구스티누스나 칼뱅과 같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큐티 목회가 보다 역동적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묵상과 적용의 역할을 성도들에게 맡겨야 한다. 비록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묵상과 적용이 등장하겠지만 그러한 과정을 포용하며 목회자는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거대한 이야기(Meta-Narrative)에 집중해야 한다. 결국, 큐티 목회에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큐티의 세세한 진행이 아니라 예배 설교자로서의 역할이다. 설교자로서 자신이 바라보는 성경의 거대한 관점을 제시해준다면, 성도들의 개별적인 묵상과 적용은 교회 공동체가 공유하는 복음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된다. 

 

 

큐티 목회 03 _ 소그룹 나눔방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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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큐티 나눔방을 통해 복음제시가 가능할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보다 효과적인 복음제시를 위해서는 일대일의 만남이 필요하다. 귀납법적 성경공부 모임 가운데 하나인 ‘커피 브레이크’는 그 목적을 전도에 둔다. 소그룹 모임의 목적 자체가 전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 브레이크의 지도자 뎁 페네마는 복음제시를 위해 일대일로 만날 수 있는 소그룹 외의 별도의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Deb Fennema, <커피 브레이크 성경공부 안내서> 전지현 역 (서울: 도서출판 커피브레이크, 2008), 26-27. [본문으로]
  2. Timothy George, Theology of the Reformers (Nashville: Broadman, 1988), 255-256. [본문으로]
  3. 재세례파에 대한 칼뱅의 비판에 대해서는 John Calvin, Institutes, 4. 12. 12.를 보라. [본문으로]
  4. S. Parkes Cadman, The Three Religious Leaders of Oxford and Their Movement: John Wycliffe, John Wesley and John Henry Newman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16), 341. [본문으로]
  5. 존 웨슬리의 인간론과 속회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D. Michael Henderson, A Model for Making Disciples: John Wesley’s Class Meeting (Nappanee: Evangel, 1997), 85-86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6. 하용조, <큐티하면 행복해집니다> (서울: 두란노, 2008), 161. [본문으로]
  7. 정성국, <묵상과 해석> (서울: 성서유니온, 2018), 2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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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