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0. 4. 6.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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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을 움직이셔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어느 그리스도인 여자 교수님께서 그리스도인 청년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셨습니다. 강의 중간에 그 여자 교수님은 자신이 청년 시절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한 남자를 마음속으로 사모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교회에서 청년들이 함께 신앙 생활하는 이성을 마음에 두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야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그 교수님은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었던 남자 청년과 단 둘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한 뒤 정제된 언어로, 매우 아름답고 로맨틱한 언어로 그 남자 청년에게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랑의 감정을 고백했습니다. 

그 모든 고백을 다 들은 남자 청년이 이제 대답을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저도 당신을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그때 그 교수님은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한 가지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아, 주 안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게 아니구나.” 여러분, 옆에 계신 분들에게 이렇게 고백해보시겠습니까? “사랑합니다.” 자, 이제는 옆에 계신 동일한 분에게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주 안에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 표현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마음에 드시나요? 그 교수님의 깨달음이 크게 틀리지 않지요? ‘주 안에서 사랑한다’는 표현은 때로 ‘사랑하지 않습니다’는 의미를 전달하기도 하고, 때로 ‘저는 당신을 형식적으로 사랑합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추고 숨기는 표현으로 사용되더라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조금 부담스러운 부탁을 받았다고 해봅시다. 혹은 목사님께서 성도님에게 모든 사람들이 마다하는 교회의 봉사 가운데 하나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부탁을 받았습니다.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의 부탁이고, 때로는 목사님의 부탁이니 그 자리에서 거절하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도 없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지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도해보고 말씀드리지요.”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반드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거절하고 싶은 마음을 ‘기도해 보겠다’는 표현으로 감추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자신의 속내를 감추는 언어적 표현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 3계명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33절입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씀은 정확한 율법이요 십계명의 제 3계명을 탁월하게 해설해 놓은 구절입니다. 구약 성경에 오늘 본문 33절과 정확하게 동일한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에서 맹세와 관련된 구절들을 두 가지로 정확하게 정리를 해 놓은 조항이지요. 그 첫째가 무엇입니까?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레위기 19장 1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된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해놓고는 그것이 참말이라고 우기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계명의 제 3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는 구약의 율법이 맹세에 대해 가르치는 두 번째 내용도 정확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민수기 30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 당연하지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약을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으면 어떠한 손해를 보더라도 그 서원과 맹세를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말씀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된 맹세를 하지 마십시오. 아울러,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 서원하고 맹세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꼭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거짓 맹세하지 말라 

그러데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는 것은 분명하게 율법에서 금지하는 사안이요, 십계명의 제 3계명을 정면으로 어기는 일이 되다보니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하늘을 두고 거짓말을 하고, 땅을 두고 거짓말을 하고, 혹은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거짓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4절과 35절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이 구절은 참으로 오해하기 쉬운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종류의 맹세, 심지어 옳은 일이요, 옳은 증언임에도 불구하고 맹세하지 말라고 금지하신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맹세를 다 금지하지 않으셨습니다. 특별히 옳은 일을 옳다고 주장하는 일, 사람들이 거짓에 속고 있을 때 그것이 아니라고 사실을 이야기하며 맹세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금지하신 바가 아니요, 오히려 예수님의 강한 명령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37절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표준새번역은 37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예’라고 말해야 할 때에는 ‘예’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맹세 자체, 특별히 옳은 일을 옳은 일이라고 맹세하는 것까지도 금지한 조항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 곧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명령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특별히 율법의 박사라고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동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 대신 하늘을 두고 맹세를 한다든지, 땅을 두고 맹세를 한다든지, 혹은 예루살렘 성을 두고 자신의 거짓말이 참말이라고 맹세를 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만, 굳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하늘을 두고, 땅을 두고, 예루살렘 성을 두고 거짓말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동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물론이요,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도 도무지 거짓말로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998년 이른바 ‘옷로비의혹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동아그룹 최순형 회장이 외화밀반입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그의 아내가 당시 검찰총장의 아내에게 고가의 옷값을 대신 지불하면서 로비를 시도했다는 의혹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 사건은 전국민적 관심사가 되었고, 이러한 의혹을 풀기 위해 국회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출두했던 핵심 증인들은 모두 교회의 권사님들이셨지요. 그들은 많은 국민이 TV를 통해 청문회의 전 과정을 지켜보는 가운데 성경책에 손을 올려놓고 진실만을 이야기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맹세한 것이죠. 당시 핵심 증인들이 모두 성경에 손을 얹고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면, 그들의 증언이 서로 일치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책에 손을 얹고 진실만 밝히겠다고 맹세하였던 권사님들의 증언은 그 어느 것 하나 서로 일치하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바로 그 사건이 있은 직후부터 한국 교회의 성장이 크게 후퇴하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당시 청문회의 증인으로 나섰던 권사님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지요. 만일 그 분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고 그저 성경에 손만 얹고 거짓말을 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요? 아니요. 조금도 달라질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권사님들이 성경에 손을 얹고 거짓맹세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만일 국회청문회에서 하나님의 이름도 거론하지 않고, 성경에 손을 얹지도 않고 그저 거짓말만 했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았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는 교회 권사님들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다 알려졌어요. 그런데 그들이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전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거짓말을 합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행동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던 유대인들이 하늘을 두고, 땅을 두고, 혹은 예루살렘 성을 두고 거짓 맹세하는 행동은 그 가운데 어떤 것도 언급을 하지 않고 거짓 맹세하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하는 행위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동이라고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땅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맹세를 하는 것은 곧 누구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무엇일까요? 교회의 성도들이 거짓을 이야기하기 때문이지요. 특별히 저와 같은 목회자들이 가장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래도 말이 많다보면 실수도 많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런 점에서 먼저 저와 같은 목회자들이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계신 분들이 조심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말과 행동에 거짓이 보이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자만하지 말라 

마태복음 5장 36절입니다.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누군가에게 큰돈을 빌릴 때 무엇이라고 이야기하죠? “나를 믿고 빌려줘라” 나 자신을 믿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자신으로도 맹세하지 말라.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가 한 터럭도, 머리카락 한 가닥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 자신의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것 하나도 막지 못하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무엇으로 나 자신을 믿어 달라고 호언장담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말과 모든 행동은 우리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호언하고 장담하였다가 이후에 그 말을 지키지 못하면 누구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될까요? 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시 초대교회 안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여러 가지 이유로 남편을 잃어버린 과부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었지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당시 과부들은 경제적인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에서 기도하며 생활을 하고 있거든요. 그렇다보니 그들을 위한 헌금이 필요했고, 집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팔아서, 땅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땅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였습니다. 바울과 1차 전도여행을 함께 떠났던 바나바가 대표적인 사람이었지요. 

당시 자신의 밭을 팔아서 헌금했던 사람은 바나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재력이 되는 사람들이 큰 금액을 헌금합니다. 그리고 그 헌금으로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안에서 자신의 재산을 팔아 크게 헌금했던 사람들은 교회에서 존경의 대상이 되었겠지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인 소유의 땅을 가지고 있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신들의 땅을 팔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맹세하는 것이죠. 내가 땅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자신들의 땅을 팔아서 헌금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 속에 있었던 욕심이 자신이 말한 바를 실천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고 교회를 속이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지요. 자신의 땅을 팔아 그 일부를 헌금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땅을 팔아 그 전부를 헌금한다고 허언장담 했기에, 그렇게 큰 소리를 좀 쳐야 교회에서 인정받을 것 같아 먼저 맹세부터 하였기에 오히려 하나님을 속이고 교회를 속이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한국의 교회에는 없지요? 우리 교회에는 더더군다나 없지요? 한국 교회에서 많이 일어났던 가장 흔한 예로, 교회가 건축을 비롯해 큰 비용이 들어가는 사업을 구상할 때, 교인들이 무엇을 합니까? 작정 헌금이라는 것을 합니다. 지금 당장은 돈이 없으니 하나님께 얼마를 헌금하겠다는 작정을 헌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름다운 일이지요. 이 점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헌금을 작정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자존심을 세우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교회가 힘들어지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이 보아 왔습니까?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해보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허세를 부리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이제 예수님께서 결론을 내리시지요. 마태복음 5장 37절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 말씀은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라는 의미입니다. 기준이 단순합니다. 옳은 일이면 옳다고 말하고, 그른 일이면 그르다고 이야기하면 됩니다.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여러분들이 원하는 선택이 옳으면 밀고 나가십시오. 그러나 여러분들이 원하는 선택이 옳지 않으면 포기하십시오. 기준은 단순합니다. 

청년들 가운데 어떤 이성이 나를 좋아한다고,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는데 나의 마음은 별로 움직이지 않으면 ‘나는 당신에 대한 마음이 없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지, ‘나도 당신을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버거운 부탁을 했다면, 아무래도 힘들겠다고 단순하게 말씀하십시오. 굳이 기도해 보겠다고 둘러 될 필요 없습니다.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시는가?” 이 질문에 ‘네’라는 답이 나오면 나의 행동은 그 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기준이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시는가?”라는 질문에 ‘아니요’라는 대답이 나오면 깨끗이 포기하면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봐도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시는지 아닌지 모르겠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직까지는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고 깔끔하게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고, 이런 저런 수식 어구를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 

저는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온유’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한국의 교회들이 크게 잘못 가르치고, 또 잘못 배운 개념이 있다면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온유’에 대한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또 사도 바울은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나열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로 ‘온유’를 지적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온유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다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하다고 할 때, 조금 바보스러운 것을 떠올립니다. 자신의 권리가 박탈당해도 그저 참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그저 침묵하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조금 바보스러운 어떤 성품을 우리는 온유라고 생각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입니다. 자신이 수고해서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시기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아버리죠. 이삭은 그것에 대해 크게 싸우지 않고 그냥 다른 곳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우물을 파요. 그랬더니 이제는 그랄의 목자들이 와서 우물을 빼앗습니다. 이삭이 그들과 다투나요? 아니죠. 또 다른 곳으로 떠나 우물을 새로 팝니다. 우리는 이삭의 이러한 모습, 조금 바보스러운 모습을 온유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면 맞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구약의 인물은 바로 모세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이 말씀은 바로 앞의 구절, 곧 민수기 12장 1절과 2절을 염두에 두신 것이 분명합니다. 곧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 모세의 형 아론과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지요. 그런데 모세는 잠잠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놓고 성경은 모세가 온유한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만나는 모세가 언제나 조용하고, 어떠한 일에도 화를 단 한 번도 내지 않는 사람이던가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에 제사하자 하나님께서 친히 써 주신 두 돌판을 깨트리면서까지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하여 사형을 명령하고, 하루아침에 약 3,000명을 죽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할 때 그토록 분도하고 분개했던 그가 미리암과 아론이 자신을 비방할 때는 침묵합니다. 그 전체적인 모습을 바라보면서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온유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온유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는 분노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는 잠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온유에 대해 잘못 가르치고, 잘못 배웠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무조건 침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이 가리어질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는 그저 침묵합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의 용기 없음을 온유한 성품이라고, 교회에서는 그러해야 한다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라고 말해야 할 때는 예라고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 개인이 손해를 보고, 여러분 개인이 누군가로부터 비방을 받을 때는 침묵하세요, 그것이 온유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는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 용기가 우리를 참으로 온유한 사람으로 바꾸고, 그렇게 온유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유업을 약속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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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