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0. 4. 8.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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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며 그분을 따르는 제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하는, 필수적인 습관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 듣고, 그 복음을 마음에 받아들였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나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내가 들은 복음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실이 믿어졌습니다.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복음에 감각하였던 우리는 무엇을 하였지요? 바로 기도입니다. 복음을 깨달은 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의 삶을 돌아보며 회개기도, 그 많은 나의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다 용서되었다는 사실로 감격의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나요?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마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길 때 주님께 나의 영혼을 받아주시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그 시작점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는 그 순간까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려는 모든 발걸음 위에 언제나 기도가 함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선물로 받은 그분의 백성들, 곧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다양한 사명과 비전을 주십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선교의 사명을 주십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구제하는 사명을 주십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특별히 전도의 은사와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경제 정의를 실천하는 사명도 주시고, 어떤 이들에게는 이 땅의 교육을 바로 세우는 사명도 주십니다. 이처럼 사명은 다양합니다. 비전이 다양해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어떠한 사명, 어떠한 비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든 상관없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엇이 필요할까요?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우리 모두가 상담의 은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 환대하고, 위로하고, 양육하는 은사는 몇몇 분들에게만 주어줘도 괜찮습니다. 그분들이 소그룹의 리더로 세워지면 됩니다.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은사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몇몇 분들이 계세요. 그들이 교회 학교의 교사로 세워지면 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목소리와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여 찬양하는 은사가 모든 사람에게 다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계신 몇몇 분들이 성가대를 서고, 찬양팀에서 봉사하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은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훈련을 받으며,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할 영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기도에 있어서 탁월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십시오. 여러분 모두는 기도에 있어 전문가가 되십시오.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여러분 모두는 기도의 깊은 경지에 도달하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기도의 자세, 그 첫 번째는 ‘하나님께 집중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중’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중요한 원인을 지적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주변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6장 5절과 6절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은 회당이나 큰 거리의 모퉁이에서 기도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말씀인가요?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은 기도는 무조건 아무도 없는 골방에서만 기도하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회당은 처음부터 기도하는 장소가 맞습니다. 큰 길의 한쪽 어귀, 길을 가다가 한쪽에 서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왜 안 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자칫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외식으로 기도하는 자들의 특징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에게 보이려 한다는 것이 중요하죠. 회당이나 큰 거리는 기도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기도입니다. 회당과 큰 거리에서 기도하면 자꾸 다른 사람을 인식하게 되니, 그렇다면 차라리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연약하여서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나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나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될 주변 사람들을 인식합니다. 그러니 기도에 집중하지를 못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시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열심히 기도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를 하니,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집중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냥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형식적인 기도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기도는 더더욱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드리는 기도, 바로 그러한 기도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쏟으라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기도의 자세, 그 두 번째는 ‘기도 내용에 마음을 쏟으라’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진심, 자신의 마음을 기도에 쏟지 않고 마음에도 없는 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많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경우를 ‘중언부언’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우리 시대의 용어로 보다 실감나게 표현하자면 주문을 외우듯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주기도문을 외웠던 것은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후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저는 누군가로부터 주기도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다만 이따금 교회 예배에 참여하면 꼭 주기도문을 같이 외우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옆의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따라 주기도문을 그저 읊조리다보니 외워진 겁니다. 당연히 주기도분의 의미를 다 알지 못했어요. 예를 들어 과거 개역성경에는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의미의 어구를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번역했습니다. 주기도문을 처음 외울 당시 제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의 의미를 스스로 알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 주기도문을 외우라는 이야기도 제가 어린 시절에 언듯 들었단 말이죠. 그래서 그 의미를 알지도 못하면서 혼자서 주기도문을 외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의미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기도문을 외운 것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까요? 아니요.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주기도문 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가 뒤따르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려는 마음으로 주기도문을 열심히 외우면, 기도의 내용이 아니라 열심히 하나님을 찾으려는 그 마음과 자세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주기도문의 소리만을 외우는 것, 딱히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 입버릇처럼 나오는 여러 가지 표현들은 우리의 마음이 그 안에 담겨 있지 않습니다. 당연히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언부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7절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여기서 이방인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방인들은 중언부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을 많이 해야, 기도의 시간이 길어져야 무엇인가 위대한 신이 자신들에게 복을 내려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방인들이 중언부언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매년 1월 1일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듯,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저리주저리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혹시 나에게 복이 오지 않을까라는 기대로 말입니다. 

본문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절)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무엇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만일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인식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그래 하나님께서 주셨구나’라는 생각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의 유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방인들의 기도를 본받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주저리주저리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높은 기도의 단계라는 생각에서 자유하십시오. 물론 기도의 시간이 중요합니다. 매일 5분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 매일 1시간 이상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똑같은 30분을 기도하여도 중언부언하며 30분을 보낸 사람과 기도 제목 한 가지 한 가지에 자신의 마음을 쏟은 사람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의 기도 시간이 계속해서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해온 연수가 길어질수록 우리의 기도 시간 또한 길어지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가 기도하는 각각의 기도 제목에 우리의 마음이 담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처지를 아신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마음을 쏟아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러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가 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기도의 자세, 그 마지막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6장 14절과 15절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여기에서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능력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사랑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용서의 은혜를 받게 되고, 그 결과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이 우리 안에 일어납니다. 이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죠.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일에 인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지 못할까요? 우리는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너그러울 수가 없는 걸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 회개의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이미 그리스도인 된 여러분들은 지난 한 주 동안 하나님께 수많은 기도를 드리셨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회개의 기도는 얼마나 하셨습니까? 혹시 간구의 기도만 있었을 뿐 회개의 기도가 빠져 버리지는 않으셨나요? 

누군가 회개의 기도는 생략한 채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만을 열심히 드렸다고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가 간구한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그러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도의 응답을 받은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될까요? 네, 교만해집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넘치도록 부어 주신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요. 맞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을 받은 그 사람이 선하고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가 풍성하시고, 그를 극진히 사랑하시기에 응답을 주신 것 아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마음은 교만해집니다. 자신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빠집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의 기도에 회개가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누군가 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가 용서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마음이 교만한 사람에게는 용서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이 지난 한 주를 보내면서 회개의 기도를 끊임없이 드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일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분에게 누군가 잘못을 했다면 회개의 기도를 드렸던 그분은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이미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겸손해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 겸손한 마음, 다른 사람을 언제라도 용서할 수 있는 바로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죄용서의 확신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외식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왜 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를 하겠습니까? 그의 기도 안에 회개의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아무리 회당에서 큰 소리로 기도를 하라고 하여도 골방에 들어가 조용히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회개 거리를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외식하는 자들은 기도를 열심히 하였지만 그 안에 회개가 없습니다. 그러니 회당에서 기도하고, 큰 길 가에서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마음이 교만해지죠. “나는 이 만큼 기도하고 있으니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는 경건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입니다. 어느덧 내 안에 찾아온 교만은 헛된 자랑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분명 기도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만 있을 뿐,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의 행동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요?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고통 받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구원의 은혜가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향해 기도는커녕 고개도 들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은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숨길 수 없는 자신의 죄악을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을 향해 당당히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우리의 자세는 언제나 회개하는 마음이어야 하고, 회개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의 잘못도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구 

구약성경에서 깊은 기도의 경지를 경험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모세입니다. 성경에는 모세가 회막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회막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만남의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특히 모세를 만나신 장소가 바로 회막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그런데 그 다음 11절의 말씀은 더욱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가 회막에서 하나님과 대화하였는데,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함께 있을 때처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다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를 조금만 더 읽어 가다보면 모세가 얼마나 깊이 하나님과 대화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또 등장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이 적힌 두 돌판을 받아 들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광채가 났습니다(출 34:29). 얼굴의 광채가 얼마나 강했는지 모세는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이만하면 모세가 하나님과 정말 깊은 영적 교감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우리 가운데 모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하나님과 더불어 마치 친구가 친구와 함께 있는 것처럼 말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광채가 내 얼굴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부러운 마음이 드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9:8) 다시 말해 첫 장막, 곧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만들었던 성막의 제도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내용은 모세의 율법으로는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아무리 회막에서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성막을 지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하였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주시는 약속,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히브리서는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우리는 모세 시대 만들어진 회막이나 성막, 혹은 여러 가지 제사의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가지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었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빠로 모시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참고 갈 4:6) 

또한 모세는 하나님과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였을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빛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에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영광은 이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율법의 시대에는 모세가 자기 얼굴에 나타나는 광채를 수건으로 덮어야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새로운 약속, 곧 복음에 의한 영의 직분에는 더욱 큰 영광이 있기에 수건으로 덮을 필요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우리에게 이점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후 3:15-16) 

모세는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여러 번 40일 금식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에 다른 어떠한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며 그 어떤 수건도 그 찬란한 영광의 빛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모세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에, 하나님을 당당하게 아빠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기도의 중보자로 확신하기에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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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