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0. 5. 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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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 유다 땅 베들레헴에는 요셉이라는 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청년에게는 주변의 모든 친구들로부터 축하를 받을 만한 이유가 있었지요. 같은 마을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름다운 여인 마리아와 약혼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주변의 모든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축복을 받으며 약혼식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셉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한 가지 소식이 들려옵니다. 자신의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입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마리아의 태속에서 자라는 아이는 요셉 자신의 아들이 아닙니다. 오만가지의 생각이 요셉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겠지요. 지금 마리아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과연 누굴까? 아니, 마리아는 자신과 한 평생을 함께 하기로 굳게 약속하고 자신과 약혼을 한 사람인데, 어떻게 나를 이렇게 배신할 수가 있단 말인가? 당시 요셉이 겪었을 괴로움과 고통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도, 요셉은 자신을 배신한 마리아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깜빡 잠이 든 요셉의 꿈속에 천사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너의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아이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그리고 천사는 계속해서 요셉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요셉은 자신의 꿈속에 찾아온 천사의 말을 믿었고, 그의 아내 마리아를 데려옵니다. 그리고 그가 낳은 아들에게 ‘예수’라는 놀라운 이름을 붙여주었던 것이지요. 

마태복음 1장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해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 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죄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축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치유사건: 죄 용서의 사건 

마태복음을 비롯한 사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어느 날 저녁,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머물고 계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동네에서 귀신 들린 사람들, 온갖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가득 그 집에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저녁 자신을 찾아온 수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손을 대어 위로하시며, 그들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사건이었음을 강력하게 선언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5절과 6절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중풍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 환자 주변에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의 질병이 깨끗해질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침상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를 누인 채로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야, 안심하라. 너의 죄가 용서를 받았느니라” 우리말 성경에 ‘작은 자야’라고 번역된 단어의 실제 의미는 ‘어린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어린아이에게 예수님께서 죄 용서를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서기관들이 속으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인간이 다른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신성 모독이다.’ 그들의 이러한 생각을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5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다음 구절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과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모든 아픔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개인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를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유 사건에 담겨진 더욱 깊은 의미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여주시는 죄인의 구세주라는 사실입니다. 


병 낫는 것보다

어느 시골 교회 여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젊은 시절 기독교의 복음을 전해 들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결혼을 하여 자녀를 여럿 낳은 뒤, 그만 남편이 아직 어린 자녀들을 남겨둔 채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그 옛날 시골에서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남겨진 자녀들을 돌보며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웬일이지요? 이번에는 그 여자분 자신의 몸에 중풍이 찾아왔습니다. 그 결과 남편이 살아 있었을 때,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산은 모두 소진하고 본인은 한쪽 몸을 전혀 사용하지 못한 채, 집안에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아주머니께서 그분에게 귀가 솔깃해질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교회 가면 병 낫는데.”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병이 낫을 수만 있다면 교회에 가보자는 심산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쪽 다리를 끌고 매일 아침 언덕을 넘어서 시골교회의 새벽기도에 계속해서 출석하였습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몸을 이끌고 새벽기도에 하루도 빠지지 않는 열심이었으니, 자연스럽게 그 교회에서 서리집사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분이 교회에 출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여집사님은 중풍을 앓으신 이후 날아계실 동안 몸 한 쪽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신 채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교회에 아무리 출석하고 새벽기도시간에 아무리 기도하였을 지라도 병이 낫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를 출석한 지 약 7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그 여집사님께서 자신의 딸에게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제 내가 병 낫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분은 자신에게 찾아온 중풍병을 치료하기 위해 교회 출석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분의 간절한 기도 제목 역시 자신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분이 간절히 원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처럼 병이 낫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집사님은 오늘 본문에서 중풍병자를 치료하신 그 주님을 분명 만나신 분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 지금 질병으로 아프세요? 여러분, 지금 마음의 상처로 울부짖으며 고통스러워하고 계십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치유하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에 우리 주님의 치유가 필요하신가요? 여러분의 가정에 우리 주님의 치유의 손길이 필요하세요? 여러분, 우리 교회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 개인의 삶과 여러분 가정과 우리 교회에 치유의 능력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는 나와 같은, 우리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죄인의 구세주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를 향한 발걸음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저는 예수님께서 먼저 서기관들에게 시비를 걸고 계시다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시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로 그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께 원하는 것은 죄 용서의 은혜입니까? 아니면 중풍병이 낫는 것입니까? 당연히 중풍병이 낫는 거예요. 죄를 용서받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데로 병만 고쳐주셔도 되잖아요. 마태복음 8장까지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지만, 그들에게 죄 용서를 명백하게 선언하신 적이 없었잖아요. 이번에도 그냥 병만 고쳐주시면 서기관과 대립각을 세울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굳이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죄의 용서를 먼저 선언하셨단 말이지요. 

여러분, 이후 마태복음 12장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안식일날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 회당에는 손이 마른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쳐주시는지 아닌지 유심히 지켜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시선을 다 아시면서도 조금도 주저함 없이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12장에는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사건 바로 다음 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여러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시면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모의를 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셨을까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먼저 선언하시면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적대감을 품고 그분을 결국에는 십자가로 몰아넣을 것을 모르셨을까요? 아니요. 다 알고 계셨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당당하게 선언하십니다. ‘어린아이여, 너의 죄가 용서받았느니라’ 

여러분, 우리 주님은 처음부터 십자가의 죽음을 작정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다 지켜보는 앞에서 중풍병자에게 죄 용서를 선언하실 이유가 없으시지요. 네, 맞습니다. 우리 주님은 처음부터 십자가의 길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여 너의 죄가 용서받았느니라’ 

복음서를 묵상하면 으레 떠오르는 찬양 가운데 하나가 찬송가 294장입니다. 이 찬양의 가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큰 죄에 빠진 나를 주 예수 건지사 그 넓은 품에 다시 품으신 은혜는

그러나 여러분, 정말 저의 마음을 울리는 가사는 바로 2절입니다. 

옛 날에 유대 땅에 주 예수 다닐 때 그 은혜 받으려고 큰 무리 모였네
눈먼 자 병든 자를 다 고쳐주셨으니
나 같은 죄인까지 그 은혜받도다

그래요. 우리 주님 예수께서 그 옛날 유대 땅을 거니실 때 그 은혜받으려고 큰 무리가 몰렸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손을 대시며 고쳐주셨어요.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쳐주시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죄 용서를 선언하면 서기관들이 자신을 가만 두지 않을 것도 다 아셨어요. 그러나 그분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고, 예수님은 중풍병을 앓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네가 죄 용서를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눈먼 자, 병든 자를 다 고쳐주셨으니, 
그 결과로 나와 같은 죄인까지 
그 은혜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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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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