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인문학2020. 5. 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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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비전은 우리말로 사명이다. 사명의 사(使)자는 심부름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심부름인가? 하나님의 심부름이다. 다시 말해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부름을 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명이나 비전의 시작점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야망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 야망의 시작점에는 내가 있을 뿐이다. 


요셉은 열일곱 살에 꿈을 꾸었다. 그 꿈이란 열 명의 형들, 나아가 부모님까지 그에게 절하는 꿈이었다. 이로써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하신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요셉은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의 마음을 산산이 부서뜨리는 쓰라린 경험을 한다.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을 찾아갔고 형들은 그를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린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을 보았지만,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은 그의 꿈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다. 

약 십 년이 지났다. 요셉의 나이도 스물일곱 혹은 스물여덟 살이 되었다. 이십대 청년 요셉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 그의 잘못으로 감옥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보디발 아내의 악랄하고, 비열한 술책에 넘어갔다. 십 년 전, 형들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당했고 아직 그 아픔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억울한 일을 당해 감옥에 갇혀있다. 과연 내일에 대해 어떠한 꿈을 품을 수 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청년 요셉에게는 한 가지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그 꿈의 해석과 성취 역시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믿음이다. 

요셉은 감옥에서 다른 죄수들을 시중드는 일을 했다. 그 감옥에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왕의 미움을 받아 잠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요셉이 이집트 왕의 떡 굽는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을 시중들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요셉이 그들을 시중들기 위해 들어가 보니, 그들의 표정이 완전히 우거지상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묻는다. “밤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지난밤에 뭔가 의미 있는 꿈을 꾸었는데, 그 해석을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이때 요셉이 한마디 던진다. “해석은,” 꿈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창 40:8) 

십년십 년 전,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이지 요셉은 알지 못했다. 요셉은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았지만 억울하고, 가슴 답답한 일만 계속 일어난다. 그때, “나는 꿈을 해석할 수 없지만, 나에게는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지만, 나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께는 내일에 대한 비전과 소망이 있을 것이다. 십 년 전 나에게 주셨던 그 꿈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라는 믿음이 요셉에게 있었다. 만일 요셉이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 아닌 자신의 야망을 따라가는 사람이었다면 형들이 자신을 팔아버렸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자신을 교활한 올무에 빠뜨려 감옥에 가두었을 때 자신의 꿈과 야망을 모두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았던 그는 오늘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간다. 

요셉이 모진 고생을 딛고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된지 9년이 지나 그는 형들을 만났다. 그리고 오래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셨던 꿈을 드디어 해석할 수 있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창 45:4) 그런데 요셉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형들이 자신을 이집트로 팔아버렸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이 있었다는 고백이다. 이처럼 십칠 세의 소년 요셉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꾼 이후 그 꿈의 해석을 아는데 약 이십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기간 요셉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붙잡아야 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요셉을 향하신 하나님의 비전과 사명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집트와 그 주변 지역에 칠 년의 극심한 가뭄이 몰려올 때 요셉을 통하여 이집트와 그 주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비전이 전해져 내려오는 아브라함 가족이 큰 민족을 이루는 장소로 이집트의 고센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길을 여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위해 요셉은 반드시 이집트로 가야 했고, 형들의 시기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하나의 방법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께는 나를 향하신 비전이 있고, 그 비전을 이루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비전의 사람은 요셉과 같이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절망적일지라도 꿈을 잃어버리지 않고 오늘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간다. 왜냐하면 나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비전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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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