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0. 5. 19.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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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여러 나라들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다르기에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도 조금씩 차이가 나죠. 우리나라는 태평양의 서쪽에 위치해 있기에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매우 일찍 새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새해를 맞이하고 약 2시간 정도가 흘러야 동남아의 나라들이 새해를 맞이하고, 우리나라가 새해를 맞이한지 약 8시간 정도가 더 흘러야 서유럽에 있는 나라들이 새해를 맞이하죠. 우리 나라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미국의 경우에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가 새해를 맞이하고 약 15시간 정도가 지나야 비로소 새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전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이 다른 것처럼,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도 다양하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우리 나라의 보신각 타종 행사처럼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를 울리기도 하고,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에서는 불꽃놀이를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새해를 알리는 열두번의 종소리에 맞춰 포도알을 열 두 개 먹는데, 그렇게 하면 새해의 열 두 달 동안 행운이 찾아온다는 풍습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매운 음식을 먹는 것으로 새해를 시작하고, 어느 지역에서는 빨간색 옷을 입으면서 새해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세계의 다양한 나라와 문화에 따라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도 다르고, 새해를 맞이하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그 모든 풍습 안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인류의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출발”이 아니겠습니까? 과거의 잘못과 지난날에 대한 후회를 모두 떨쳐버리고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소망을 향하여 다시금 시작하는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출발이야말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 모두의 소원일 것입니다. 


야곱, 새로운 출발선에 서다

지금 야곱은 모든 것이 귀죽박죽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장인 창세기 34장이 그러한 분위기를 너무도 잘 그려주고 있지요. 창세기 34장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가나안 족속 가운데 하나인 히위 족속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합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디나와 어머니가 같은 형제들 곧, 시므온과 레위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히위 족속의 모든 남자들을 칼로 도륙하는 일이 발생하죠. 이때 시므온과 레위라는 두 형제가 히위 족속의 모든 남성을 살해할 수 있었던 것은 ‘할례’라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의 상징을 이용하여 히위 족속 사람들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창세기 34장에 등장하는 야곱의 가정에는 거룩이나 선이나 정의나, 선과 같은 덕복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창세기 34장의 분위기를 로날드라는 구약학자가 생생하게 표현해주었는데, 한번 들어 보시죠. “창세기 34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지저분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그 장은 강간, 분노, 속임, 탐욕, 살인, 폭력, 그리고 자기중심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로날드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34장 전체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리고,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것처럼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찾아볼 수 없었던 야곱의 삶, 그리하여 그 어느 때보다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출발이 간절히 필요했던 야곱에게 드디어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35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이제 하나님은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야곱에게 매우 중요한 명령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창세기 35장 1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새로운 출발이 간절히 필요했던 야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일어나 벧엘로 가서,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진정으로 새로운 출발을 원하십니까? 과거의 모든 잘못과 회한을 모두 던져버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야곱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나님을 향한 예배,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예배, 하나님만을 향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가 바로 우리의 삶에 새로운 출발선이 되는 것입니다.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야곱에게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새롭게 출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제단을 쌓으라고, 곧 예배의 장소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 오늘 본문 1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예배의 장소로 ‘벧엘’이라는 지명을 정확히 집어 말씀하시는 이유가 등장합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자, 이제 벧엘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을 언급하신 이유가 등장합니다.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그 다음에 어떤 단어가 등장하죠? ‘바로 거기에서 제단을 쌓으라.’ 

창세기 35장을 기준으로 약 30년 전의 사건입니다. 풍족한 아버지의 집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생활하던 야곱이 예상치 못했던 형 에서의 위협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집을 하루 아침에 떠나야 했습니다.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이 야곱은 하루 종일 달렸겠지요. 날이 저물어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야곱은 그 자리에 멈추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핸드폰이 있던 시대도 아니고,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이나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도 하나 없었습니다. 여기는 어디인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앞으로 나의 삶에 어떠한 일이 펼쳐질지 그 모든 것이 미궁 속에 빠진 채 야곱은 손에 잡히는 대로 돌멩이 하나를 베개삼아 길거리에서 잠을 청해야 했지요. 그런데 모든 것이 미궁 속에 빠져들었던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셨고 야곱은 비로소 아버지 이삭이 섬기는 하나님이 아닌 야곱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깊은 미궁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였던 바로 그 장소, 야곱에게 있어 벧엘은 모든 것이 실타레처럼 엉켜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와 믿음의 영정, 신앙의 여정을 시작했던 인생의 진정한 출발선이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참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약 30년의 세월을 지내며 야곱은 네 명의 아내를 맞이하였고 열한 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거대한 재산도 모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정처없이 떠나왔던 철부지가 아니라 많은 자녀들과, 많은 종들과 많은 가축을 이끄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삶의 경륜은 쌓이고,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는 쌓였지만 약 30년 전 그 어두운 밤 거리에서 자신을 만나 주셨던 하나님은 어느덧 그의 삶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을 말씀하시고, 그곳에서 제단을 쌓아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지금, 약 30년 전 벧엘에서 흘렸던 그 뜨거운 눈물, 약 30년 전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그 텅 빈 손으로 자신을 찾아오셨던 하나님을 온 힘을 다하여 꽉 부여잡았던 그 순수한 믿음만이 야곱의 삶을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출발선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또 다시 한 해를 흘려보내고 또 다시 한 해를 맞이하며 다시 깨닫게 됩니다. 그저 한 해가 지난다고, 그저 우리가 살아온 시간이 한해 더 늘어난다고 하여 우리의 속사람이 더욱 성숙해지는 것도 아니요, 그저 새로운 해를 맞이한다고 하여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새해를 맞이한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숙해지며, 우리의 믿음이 다시금 새로워지고, 우리의 영혼이 다시금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 대답은 너무도 단순합니다. 곧,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벧엘의 경험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어떤 분들에게는 벧엘의 경험이 최근의 일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떤 분들에게는 10년 전, 20년전, 혹은 야곱과 같이 30년 전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삶이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던 어느 날. 그 어디에서도 새로운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아와 주시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며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게 하셨던 바로 그 경험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새해를 맞이하고 있지만 다시금 우리의 삶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시는 참된 의미의 새로운 출발선에 서기를 원한다면, 여러분 벧엘로 올라가십시오. 그 곳에서의 뜨거운 눈물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예배를 드리십시오. 바로 그 자리만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출발선이 되는 것입니다. 


엘벧엘, 벧엘의 하나님

하나님은 새로운 전기가 간절히 필요했던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아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야곱은 온 가족과 함께 벧엘로 올라가는 결단을 내리며 다시금 믿음의 출발선에 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벧엘에 올라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 선행조건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이에 자기 집과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고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저 벧엘에 올라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아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도, 곧 예배를 인생의 우선순위에 두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방신상을 버리고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모든 우상을 버리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4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여기에 이방 신상과 더불어 귀고리가 등장하죠? 당시 귀고리는 우리 시대의 부적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귀고리를 장식을 위하기보다는 액운을 쫓아내고 복을 가져온다는 믿음 때문에 하고 다녔다고 해요. 그러므로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자기 손에 있는 이방 신상과 귀에 있는 귀고리를 모두 세겜 땅에 묻어버렸다는 것은 벧엘로 가는 그들의 발걸음에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소지하지 않으려는 강한 결단이었습니다. 

자, 이 대목에서 야곱과 그 가족이 내린 믿음의 결단은 칭찬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칭찬에 앞서 야곱으로 대표되는 우리 인간들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요동칠 수 있는지를 먼저 지적하고 싶습니다. 자, 약 30년 전 야곱은 벧엘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장면에는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야곱이 하나님께서 서원한 내용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그 첫번째는 하나님께서 야곱 자신을 고향 땅에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면 여호와 하나님만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는 서원입니다. 두번째는 야곱 자신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 곧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라는 것이죠. 곧 벧엘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겠다는 서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십일조에 대한 것이었어요.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하나님은 야곱을 무사히 고향땅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은 물론이요 그에게 많은 자녀들과 풍성한 재물도 주셨어요. 그러면 서원을 지켜야 하잖아요. 여호와 하나님만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벧엘을 중심으로 예배하는 삶을 살고 물질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고향 땅으로 돌아인 지 약 1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야곱은 자신의 서원을 지키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가족들은 손에 우상을 쥐고 있었고, 그들의 귀에는 오늘날의 부적에 해당하는 귀고리가 걸려 있었다고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이러한 야곱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하나님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가족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알라가자” 그 다음에 야곱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묘사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여기서 말하는 환난 날은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의 사건을 말하죠. 곧, 벧엘에서 자신이 만났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내용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그 다음,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단지 30년 전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약 30년 전 벧엘에서 야곱을 만나주셨던 하나님은 지금까지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야곱 자신이 가는 길에서 자신과 함께 하셨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약 10년 전 하나님은 야곱을 고향 땅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하셨어요. 그리고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과 약속했던 서원을 단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었어요. 그런데 야곱 자신이 환난을 당할 때는 물론이요, 무사히 고향 땅에 돌아온 이후 야곱 자신이 여전히 서원을 지키지 않고 있던 그 10년의 세월 동안도 하나님은 변함 없이(X2) 야곱 자신이 가는 길에 함께 하여 주셨다는 눈물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야곱의 삶이 뒤죽박죽이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서원을 지키지 않는 야곱에게 벌을 내리셨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집’ 벧엘에서 야곱을 기다리고 계세요. 문제는 야곱이 세속의 도시 세겜에서 하루하루를 너무도 바쁘게 살아가는 나머지 벧엘의 하나님을 더 이상 찾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그리고 그곳에서 제단을 쌓으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원하신다면 세겜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손에 있는 모든 신상과 귀에 걸려있는 모든 귀고리를 땅에 묻어버린 채 벧엘로 올라가는 야곱의 결단이 여러분의 결단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삶의 중심에 두고, 기도와 찬양과 말씀 가운데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그 예배의 자리에 최우선순위를 두십시오. 바로 그때, 새롭게 시작한 신년, 우리는 믿음의 새로운 출발선에 다시금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한 우리 모두가 엘벧엘, 곧 벧엘의 하나님과 다시금 깊이 교제하며 우리의 믿음이 새롭게 도약하는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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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