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2020. 6. 3.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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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회 사역을 하면서 누리는 다양한 복 가운데 하나는 장례식에 자주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 전도서에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전 7:2)라고 말씀하지요. 그리고 이어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유익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전 7:2) 

장례식에 참여하면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지금이라도 나 역시 저 자리에 있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오늘 하루도 이 세상의 없어질 것에 얽매이는 삶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삶으로 영위해 나가려는 마음 가짐을 되새기게 됩니다. 

여러분,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죽는 것은 순서가 없습니다.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개인의 종말, 곧 개인의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종말, 곧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모든 역사를 종결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시는 바로 그 날이 반드시 찾아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날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3장 33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여기서 “그 때”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셔서 이 땅을 하나님의 공의로 심판하시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기독교인들이 믿고 소망하는 마지막 종말의 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종말의 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하십니다. 35절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예수님께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 오실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한 밤중일 수도 있어요. 내일 새벽에 예수님이 오실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36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너희는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니,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날짜를 계산해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계산을 해도 우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 앉아서 그 날과 시간을 계산하지 말고, 그 대시 언제든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때를 위해 준비를 마치셨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를 준비하며 오늘도 깨어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다시 오신다면 ‘마라나타,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라고 이야기하며 영광의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계십니까?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떻게 해야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 있는 것입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 있는 것은, 첫째로,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말씀하시고는 곧이어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 비유의 말씀이 34절에 등장합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34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어디로 갑니까? “타국”으로 갑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타국’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누가복음 19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비유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누가복음 19장 12절의 말씀을 함께 찾아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예수님 시대에 유대 땅을 다스리는 분봉 왕이 있었습니다. 왕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유대 땅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대 땅의 분봉 왕을 임명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곧 당시 지중해 세계 전역을 다스리고 있었던 로마 제국의 황제입니다. 유대 땅을 다스리는 왕을 임명하는 권한이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드리죠. 예수님 당시 유대 땅에 대한 실질적인 주인은 유대 백성들이나 그 땅의 분봉 왕입니까? 아니면 로마의 황제입니까? 로마의 황제죠. 로마 황제가 자신의 마음대로 유대의 왕을 언제라도 갈아치울 수 있잖아요. 

다시 누가복음 19장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어디로 갑니까? “먼 나라”로 갑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왕이 되고자하는데,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왕이 되기 위해서 먼 나라로 가서 왕의 직책을 받아 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 여러 왕들이 있고 통치자들이 있지만 실제로 이 땅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따로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믿고 기다리며 그날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요, 하늘 위에 있는 저 하늘나라를 바라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다보면, 교회가 처해있는 역설적인 현실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온갖 박해와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카타콤이라고 불리는 지하 무덤에서 예배를 드렸겠어요. 당시의 신앙생활을 보면 비참해요, 처참해요, 초라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보면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이 하늘에서 드려지는 천상의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이 땅의 현실은 비참하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저 하늘에서 드려지는 천상의 영광스러운 예배의 일원이었던 거지요. 

여러분,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조금 부하게 살 수도 있고, 이 세상에서 조금 가난하게 살 수도 있어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사람들의 눈에 귀하게 보일 수도 있고, 때로는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많고, 큰 재산을 소유한 사람도 많으며,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 위에 올라가 세상을 호령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알고 믿습니다. 이 세상을 참으로 다스리시는 분은 권세를 부리는 몇몇 사람들이 아니라, 저 하늘의 보좌에 앉아계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찬송가 9장의 마지막 절인 4절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옵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여러분, 고난도 슬픔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어요?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마지막까지 순결하게 지켜낼 수 있는 비결이 어디에 있냐고요? 우리가 영원에 잇대어 살아갈 때,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저 위에 있는 하늘 나라를 바라볼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고 준비하며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권한과 재물이 곧 사라진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있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나에게 주어진 권한과 재물이 곧 사라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3장 34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첫 번째로 우리가 집중했던 단어는 ‘타국’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두 번째로 집중하고 싶은 단어는 ‘권한’입니다. 집주인이 종들에게 각자의 권한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권한’의 의미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또 하나의 비유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어떤 부자가 자신의 재산을 관리할 청지기를 고용했습니다. 참고로 이 청지기라는 자리는 주인을 대신해서 그의 모든 재산을 대신 관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능력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그는 주인의 재산을 늘려주지 못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주인이 청지기를 불러 해고를 통지합니다. 해고 통지를 받은 청지가는 깊이 고민을 하던 중,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냅니다. 그리고 그는 아직 청지기의 자리에 있을 때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기름 100말을 빚진 사람은 50말로 고쳐주고, 밀 100석을 빚진 사람은 80석으로 고쳐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이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른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입니다. 

자, 예수님의 이 비유는 성경을 읽는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본문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이 비유가 성경을 읽는 이들에게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순합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누구도 주인의 입장에 있다면 청지기를 칭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만약 이 주인의 자리에 있다면 예수님은 이 청지기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칭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우리의 생각의 차이입니다.

왜 우리가 주인의 입장에 있다면 이 청지기를 칭찬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청지기를 고용하는 것도 그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에 손해만 입혔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관점에서 이 청지기는 주인에게 칭찬은 고사하고 큰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이야기를 들어도 누구의 재산이 늘어났는지, 혹은 줄어들었는지에만 큰 관심을 갖습니다. 그렇기에 이 주인의 입장에 섰을 때 자신의 재산에 손해를 끼친 이 청지기에게 벌을 내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재산이 늘어나느냐? 줄어드느냐? 에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강조점은 주인의 재산이 줄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의 강조점은 청지기가 해고 통지를 받았고, 청지기로서의 지위를 모두 잃어버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바로 이 상황 설정입니다. 이러한 때, 곧 자신의 청지기 직분을 잃어버릴 그때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자신의 청지기 지위를 이용해 무엇을 행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3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표현한다면, 집 주인이 종들에게 권한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권한은 집주인이 돌아올 때까지만 유효합니다. 그렇다면 그때를 준비하기 위해, 지금 내 손에 있는 모든 재물이 사라지고, 주님께서 주신 권한이 사라지는 그때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손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재물이든, 권한이든, 사회적 지휘이든 상관 없이 우리의 손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모든 선물이 사라지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손에 있는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때가 속히 옵니다. 

한때 제가 즐겨 보던 드라마가 있습니다. <정도전>이라고 하는 사극입니다. 한 회 한 회 볼때마다 흥미가 진진합니다. 한 나라의 권력을 놓고 서로 암투를 벌이는 모습이 재미가 있어요. 고려라는 나라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인가? 이런 주제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고 있는 동안에는 재미있게 봐요. 그리고는 잠자리에 누워서 생각합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새벽기도 가야 되는데 내가 이걸 왜 보고 있었나. 이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지만, 오늘 밤에도 아마 그 드라마를 볼 거 같아요. 그러면서 한편으로 드는 생각이 있어요. 국가의 권력을 놓고 그렇게 암투를 벌이며 서로 으르렁 거리며 싸우고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에 와서는 그들이 누리던 권력과 그들이 누리던 권세가 다 어디에 갔느냐는 겁니다. 다 사라지고 말았어요.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언젠가 무너집니다. 우리가 소유한 재물과 권세도 어느 순간 한 번에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완성하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베드로전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벧전 2:24) 

시간이 지나면 모두 말라버리고 시들어 떨어지고마는 세상의 영광을 구하다가 모든 시간을 허비하는 인생이 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잠깐 우리에게 맡기신 재물과 권한을 영원히 내 것인 양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또 하나님께도 모두 돌려드려야 할 것들입니다. 


나의 소유로 선을 행하라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있는 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나에게 주어진 권한과 재물이 곧 사라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 우리의 소유로 최선을 다하여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3장 34절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우리는 제일 먼저 ‘타국’이라는 단어를 보았고, 둘째로 ‘권한’이라는 단어에 집중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목할 단어는 ‘사무’입니다. 집주인이 종들에게 무엇을 나누어주었나요? ‘사무’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무’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마태복음 25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비유를 한 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첫번째 비유가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열 처녀의 비유를 모두 말씀하신 뒤에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13절입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 25:13) 

오늘 말씀과 동일한 말씀이지요. 다시 말해 열처녀의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는 마지막 때를 준비하며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과연 마지막 때를 준비하며 깨어있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있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열 처녀의 비유 바로 직후에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곧 달란트 비유입니다. 어느 주인이 타국으로 가면서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겼다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의미는 명확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면서 깨어있는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하여 그것으로 많은 수익을 남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3장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우리의 사무, 곧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며 우리에게 명령하신 사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이 더 떠오릅니다. 주님, 그렇다면 나에게 주신 달란트로 최선을 다해 이윤을 많이 남긴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입니까? 과연 우리가 무엇을 남겨야 할까요?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떠한 사무에 최선을 다해야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마태복음 25장에 등장하는 마지막 세 번째 비유입니다. 곧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마지막 날 우리 주님께서 세계 만민을 심판하시면서 양과 염소로 구분하십니다. 그리고 양의 무리에 들어온 사람들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헐벗고 주리실 때 예수님을 돌보아 주었다는 칭찬입니다. 그러나 양에 속한 사람들은 반문하죠. “주님, 도대체 언제 주님께서 헐벗고 주리실 때 우리가 주님을 돌보아 드렸습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 말씀을 함께 찾아서 봉독하겠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주님께서 이번에는 염소에 속한 무리들에게 화를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헐벗고 주리실 때 그들이 예수님을 돌보아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염소에 속한 사람들도 주님께 반문합니다. “주님, 도대체 언제 우리가 주님께서 헐벗고 주리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대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5절 말씀도 함께 찾아서 봉독하겠습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 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여러분,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우리의 사무, 우리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최선을 다해 감당해야 하는 직무는 무엇입니까? 우리 주변에 있는 작은 자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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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