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0. 6. 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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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클레어몬트대학교의 신학부 학장을 맡고 있는 필립 클레이톤 교수는 자신의 저서『신학이 변해야 교회가 산다』(Transforming Christian Theology)에서 미국의 주류 교단이 쇠퇴하는 원인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미국 개신교의 주류 교단이 쇠퇴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교만’입니다. 클레이톤 교수는 한 가지 재미있는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그 유명한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를 부르면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은 자신과 다른 모습의 사람들 - 예를 들어 유색인종, 혹은 빈곤층이나 노숙자들 – 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Amazing Grace)가 전혀 임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비판입니다. [각주:1] 비록 자기 자신은 잘못을 범하고, 실수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기도 하였지만 나는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로 깨끗하게 되었고 의롭게 되었다는 확신이 가득합니다. 나는 이미 의인입니다. 그런데 나와 다른 사람들, 백인이 바라보는 유색인종들, 경제적인 중산층이 바라보는 빈곤층이나 노숙인들에게는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가 무효한 듯 여기는 경향이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는 지적입니다.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몬이라는 이름의 바리새인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한 사람은 시몬이라는 이름의 바리새인이요, 또 다른 사람은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여인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녀의 이름 대신 하나의 수식어를 붙여주었는데, 그것은 ‘죄를 지은 한 여자’입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7장 36절부터 39절까지를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찬찬히 묵상하다보면, 시몬이라는 이름의 바리새인과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서로 비교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 시몬이 사람을 비교하는 기준과 예수님이 사람을 비교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바리새인 시몬이 사람을 비교하는 기준입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의 바리새인은 사람들을 비교함에 있어서 ‘그가 얼마나 의로운 삶을 살고 있느냐’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36절을 보면 시몬에 대한 두 가지 설명이 등장합니다. 36절을 다시 보십시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무엇보다 시몬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단어의 뜻은 ‘분리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삶을 산다는 의미로 바리새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시몬은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하여 구별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뿐 아니라, 36절을 보면 시몬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지요. 구약 성경의 전통을 따라 하나님을 철저히 섬겼던 시몬은 예수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그분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는 성의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정도면 나무랄 데 없는 경건한 삶을 사는 듯하지요. 

반면에,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온 한 여인에 대한 수식어는 ‘죄’입니다. 37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죄를 지은 한 여자”입니다. 시몬의 이름 앞에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의미인 ‘바리새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면, 이 여자의 이름 앞에는 ‘죄를 지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 시몬의 눈에는 물론이고, 그 동네 모든 사람들의 눈에 바리새인 시몬과 이 한 여자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어떤 차이입니까? 한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죄인이라는 차이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 시몬은 사람들을 평가하고, 사람들을 서로 비교함에 있어서 ‘누가 의로운 삶을 살고 있는가,’ ‘그의 삶이나 행동이 의로운가 아니면 죄로 가득한가’를 기준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고 오늘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는 사람을 비교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누가 의로운 행동을 많이 했고, 누가 죄를 더 많이 범했는가로 사람을 평가하고 비교하기보다는, 누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가로 사람을 비교합니다. 자, 36절을 다시 보십시오. 36절에서 누가는 시몬이라는 이름의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위해 행했던 사랑의 표현이 무엇인지 기록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식사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누군가에게 식사를 대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지요.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은 예수님께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36절에 바로 이어서 37절부터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오지요, 그리고 38절입니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십니다.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마추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향한 그 여인의 마음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한 끼의 식사를 대접하는 정도의 적당한 사랑을 표현했다면, 이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뜨거운 사랑을 예수님께 드렸던 것이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이 여자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자신의 눈물로,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자신이 가져온 귀한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그 장면을 클로즈업(close-up)합니다. 예수님 역시 그녀의 행동,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에 집중하시죠. 

필립 클레이톤 교수는 미국의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자신에게만 임하였을 뿐,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의 많은 개신교인들 역시 나만이, 우리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인 것처럼 교만한 마음과 행동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 안에 교만한 마음이 들어오는 것은 우리의 관점이 예수님의 관점이 아니라, 바리새인 시몬의 관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나는 그래도 예수님을 믿고, 나는 그래도 교회를 출석하고, 그래도 나는 상식적인 선에서 큰 잘못 저지르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우리 그리스도인이 보기에 죄악 된 행동을 한두 가지 저지른다고 하여 우리가 그들보다 거룩하다는 마음이 우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관점은 누가 외관상으로,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에 더 거룩한 삶을 사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누가 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가입니다. 


사랑의 깊이가 곧 은혜의 깊이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외관상으로,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에 누가 더 거룩한가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가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사람들을 비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가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은 것입니까? 그 대답이 오늘 본문 41절부터 43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등장합니다. 41절부터 43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비유입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한 사람에게는 약 5000만원 정도를 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약 500만 원 정도를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500만 원을 빌려 쓴 사람이든, 5000만 원을 빌려 쓴 사람이든 도저히 돈을 갚을 수가 없어요. 아무리 봐도, 아무리 애를 써봐도 이자도 못 냅니다. 그래서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한 사람에게는 5000만 원 빌린 것을 다 탕감해주고, 500만 원을 빌린 사람에게도 다 탕감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이야기를 말씀하신 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42절입니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예수님의 질문은 누가 더 고마워하겠느냐는 질문이 아닙니다. 누가더 시름을 덜겠느냐고 질문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누가 더 빚을 탕감하여준 사람을 무엇이요? 사랑하겠느냐? 질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핵심은 주님을 향한 사람의 마음과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누리는 깊이가 서로 비례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47절입니다. 47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7절 마지막을 보십시오. 사함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죄의 용서를 적게 받은 사람은, 죄 용서의 은혜를 적게 누리는 사람은 그 결과로 우리 주님을 적게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뒤집으면 누군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적게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뜨겁게 사랑하지는 않는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풀어주신 죄 용서의 은혜를 적게 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그토록 뜨겁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죄 용서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제 질문에 답을 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시몬은 왜 왜 예수님을 적당히 – 그저 식사 한끼 대접하는 정도로 – 적당히 사랑했을까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반대하고 미워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왜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적당히 사랑했을까요? 왜 바리새인 시몬은 자신의 집에 들어온 그 여인과 같이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죄 용서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고, 외관상으로는 바리새인 – 곧 거룩히 구별된 사람 – 처럼 보이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죄 용서의 풍성함이 없어요. 외면적인 경건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반면에, 죄를 지은 한 여자는 누가 보아도 죄인입니다. 실제로 동네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죄를 지었습니다. 명백하게 죄인이고, 자신도 자신의 죄를 압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여인의 마음에는 자신의 그 큰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지 못할까요? 우리는 왜 주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지 못할까요? 우리는 주님을 믿고 그분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 적당한 사랑일까요? 우리는 왜 바리새인 시몬과 같이 예수님을 우리의 집에 초대하여 식사 한끼 대접하는 정도의 적당한 사랑만을 베풀고 있을까요? 우리는 왜 이 여인과 같이 나의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기는 뜨거운 사랑이 없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교회를 출석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식사 한 끼 대접하는 정도의 적당한 사랑만을 드릴뿐, 우리의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기고 우리의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으며 울의 가장 귀한 보물을 그분의 발에 부어드리는 뜨거운 사랑을 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에 나의 큰 죄를 용서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의 은혜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대역전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듯 하였지만, 예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식사 한 끼 대접하는 적당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한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하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뜨거운 사랑을 드렸지요. 그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선언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누가복음 7장 48절부터 50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무엇이라고 선언하십니까? 48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에 여자에게 이르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여자는 무엇인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이 모두가 인정하는 큰 죄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신이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간절히 찾았고, 자신의 그 큰 죄를 용서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뜨겁게 살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50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죠.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그 여인의 믿음, 자신의 죄악이 크지만 그 죄악을 예수님께서 용납하시고 받아주셨다는 그 믿음, 그리고 그 믿음으로부터 비롯된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그 여인을 구원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그 여인은 자신의 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예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을 비롯하여 그날 시몬의 집에 초대받았던 시몬의 친구들 – 그 친구들 가운데 대부분은 시몬과 같은 바리새인이었을 것입니다 – 은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했지만 적당히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죄 용서의 깊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장면이 49절에 등장하죠. 49절을 다시 보십시오.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죄 용서의 은혜를 누리며 기쁨과 감격에 젖는 것은 고사하고,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듯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죄악의 뿌리를 예수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두 제거할 수 있다는 그 놀라운 복음의 신비를 알지도 못하고 있는 거지요.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눈 앞에 분명히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구원의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구원의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 시몬을 비롯하여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죄악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계십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실하게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하실 것입니다. 매주 주일이면 어김 없이 예배에 참석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술이나 담배도 멀리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당할 죄악을 다 피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계시죠. 그러나 만일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죄 용서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세는 죄 용서의 풍성한 은혜가 넘쳐흐르지 않는다면 – 여러분이 비록 교회를 출석하고 외관상 거룩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죄의 속성, 죄의 본성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 존 칼뱅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위선자들은 자신의 죄를” 어떻게 고백할까요? “형식적이고 일반적으로 고백함으로써, 숨겨진 자신의 엄청난 죄악을 감추려는 속임수를 쓰고 있다.” 그 옛날 바리새인 시몬이 그러했지요. 그는 자신 안에 감추어진 엄청난 죄악을 숨기려고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였지만 그저 일반적으로 그저 형식적으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필립 클레이톤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미국의 보수적인 개신교인들 중에는 자신의 죄를 그저 일반적으로 그저 형식적으로 고백하면서 너무도 빨리 하나님의 놀라우 은혜 (Amazing Grace)를 찬양하였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에는 자신의 그 엄청난 죄악을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힘 있게 역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도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웁니다. 우리는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술과 담배를 멀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와 형식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의 잘못과 죄악을 고백하면서 우리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다면 – 그저 식사 한 끼 대접하는 정도의 그럭저럭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 우리의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기고 우리의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으며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그분의 발에 부어드릴 수 있는 뜨거운 사랑이 없다면 우리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의 은혜가 풍성하지 못한 것이요, 곧 우리 마음의 큰 죄악은 여전히 우리 안에 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시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 시몬과 대비되는 또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간 한 여인입니다. 그의 수식어는 ‘죄를 지은 한 여인’이었지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람들 앞에는 물론이요, 하나님 앞에도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간절히 붙들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 여인은 마침내 자신의 그 큰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계십니까? 

예수님을 그저 우리 교회에, 우리 가정에 한번 모시고 식사 한끼 대접하면서 내 안에 있는 깊은 죄의 본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우리의 알량한 외형적인 거룩만을 내어 놓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모습 속에서는 복음의 능력도,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일 바리새인 시몬의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찾아와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으며, 자신의 가장 귀한 보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던 그 여인의 자리로 옮긴다면, 내 안에 있는 모든 죄악을 우리 주님 앞에 내어 놓고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십지기의 능력을 구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교회 안에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우리 안에 넘쳐 흐르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비로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1. Philip Clayton, Transforming Christian Theology: for church and societ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10), 10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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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