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0. 6. 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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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단지 책의 제목이 흥미로워서 잠시 훓어보게 된 책이 한 권 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고수의 생각법>입니다. 바둑에 큰 관심이 없는 분들도 한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보셨을 만한 바둑의 전설적인 고수 조훈현 9단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기록한 책입니다. 그 책에 이른 내용이 있습니다. 바둑을 두다보면 이른바 ‘수읽기’를 하쟎아요. 내가 여기에 돌을 놓았을 때, 상대방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그것들을 머리속으로 그려보는 것이 수읽기인데, 바둑의 전설적인 고수인 조훈현 9단은 바둑에서 수읽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 ‘욕심’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 부분을 잠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수읽기를 방해하는 건 욕심이다. … 꼭 이겨야 한다는 욕심이 꿈틀거리면 수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면 서너 수 앞이 안 보인다. 그래서 수읽기를 제대로 한다는 건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수읽기를 제대로 한다는 것은 어떠한 뜻이랍니까? 마음 속에서 솟아오르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둑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에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한 사람의 청원 

오늘 본문에서도 마음에 가득한 욕심 때문에 주변 환경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3절의 말씀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한 사람이”라고 시작하나요? 아닙니다. 성경을 다시 자세히 보시면 “무리 중에 한 사람이”라고 시작합니다. 성경은 이 사람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직접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알려주지 않아요. 이사람이 몇세였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아요. 그런데 성경이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은 무리 가운데 섰여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무리들 가운데 섞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행위를 보았던 사람들 가운데 한명이었어요. 

그런데 여러분, 참으로 놀랍지요. 이 사람은 자신의 눈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도 바라보고, 자신의 귀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고, 자신의 손으로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신 떡과 물고기를 직접 만져보았어요. 그러면 예수님께 손을 들어 질문을 할 때 어떤 질문을 던져야 되겠어요? 영생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질문해보아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행동을 보아도 그의 마음에 있는 관심사가 변하지를 않는 거에요. 그의 관심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어디에 있었습니까? 돈에 있었죠. 재물에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요청하는 거죠.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우리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귓가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지금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역사가 멈춰버렸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 교회를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나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욕심, 물질에 대한 탐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나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4절과 15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이 사람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14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라고 말씀하셨어요. 단호한 거절이죠. 예수님은 재산 나누는 일을 거절하셨어요. 그러면 예수님은 재물에 대해서, 돈에 대해서 아무런 말씀도 안하시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14절에서 한 사람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셨지만, 15절에서는 재물과 물질에 대해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15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예수님은 물질을 나누는 일은 거절하셨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정말하고 싶으셨던 일, 꼭 하셔야만 하는 일을 지금 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탐심의 문제’를 해결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기도하면 로또에 당첨이 되고, 교회에 헌금하면 이 땅에 살면서 더 크고 좋은 집으로 이사하게 되고, 주님을 위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면 자자손손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계세요? 여러분, 잘못 오셨어요. 그런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계신 분이 계시다면, 여러분의 로또는 꽝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잖아요. ‘나는 물질을 나누러 온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에게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계신 것이 놀라운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로또에 당첨되는 것보다 더 큰 복을 여러분에게 주시거든요. 그 복이 무엇입니까? ‘탐심을 물리치는 복’입니다. 

“아니, 목사님! 해도 너무 하십니다. 탐심을 무리치는 것이 무슨 복이에요, 내 손에 재물이 들어오는 게 복이지요.” 이런 생각이 사실 마음에서 일어나시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이 마음에 일어나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왜 탐심을 물리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인지 곧 이어 설명하시잖아요. 오늘 본문 15절을 다시 보세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왜 탐심을 물리치는 것이 놀라운 축복인지 설명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세요. 물질도 있고, 재물도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데 조그마한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 정도면 충분히 행복할 것같은데, 아니 저 사람이 가진 재산의 절반만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춤을 출 것 같은데 그 사람의 마음에는 조금도 기쁨이 없고 오히려 슬픔과 걱정과 탄식의 소리가 가득한 모습을 우리가 많이 보잖아요. 여러분, 물질이나 재물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하박국의 고백도 기억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아요. 그리고 무엇이라고 기도합니까?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가득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나요? 아니잖아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예수님은 우리에게 남부러울만한 물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으셨어요.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시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의 감격으로 말미암아 나의 마음이 모든 탐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오직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감격하며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축복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예수님께서 이 정도 말씀하시면 좀 알아들어야 하는데, 우리 인간들이 참 어리석어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주 쉬운 비유를 통해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지요. 이 비유는 한 부자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16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부자가” 여러분, 부자는 이미 재산이 그득한 사람입니다. 이미 그에게는 풍성한 재물이 있어요. 쓰기에 부족하지 않은 재물이 그에게 있어요. 그래서 그는 부자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에게 더 많은 재물이 찾아옵니다. 16절을 다시 보세요.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그러니 물질의 축복을 얼마나 많이 받은거에요. 하나님께서 이 부자에게 물질을 마구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부자에게는 무엇이 문제입니까? 물질이 부족해서 문제도 아니고, 지금 먹고 입을 것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물질도 있고 재물도 있지만 그의 마음에는 그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탐심과 욕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문제지요.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복, 곧 예수님을 만나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우리 마음에 도사리는 탐심을 물리치는 참된 축복을 받지 못한 이 부자는 물질이 채워지면 채워질 수록, 물질을 더욱 많이 소유하면 소유할 수록 더큰 걱정과 근심에 사로집히게 됩니다. 오늘 본문 17절의 말씀입니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하고” 

부자가 말합니다. ‘내가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구나, 어떻게 할까?’ 곡식이 많아지니 오히려 큰 걱정과 근심에 싸여요. 이 말씀에서 ‘어찌할까’라는 말은 단지 ‘어떤 좋은 방법이 있을까’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어느 성서 주석가는 오늘 본문을 해설하면서 ‘어찌할까’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한끼의 식사를 어디에서 해결해야 할지 몰랐던 그 지방에서 가장 가난한 거지라도 이것보다 더 걱정스러운 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지 못해서 어떻하지, 우리 가족들 식사를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하는 그 지방의 거지보다 이 부자의 걱정과 근심이 더 깊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진리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급기야 그는 아주 어리석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 18절과 19절입니다.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이 부자는 자신의 재산이 들어날수록 더욱 고민이 깊었졌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아주 어리석은 결정을 내립니다. 18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습니까?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여러분, 지금 당장 소출이 많아서 곳간의 공간이 부족해요.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부자는 제일 먼저 곳간을 헐겠데요. 여러분, 지금 있는 곳간을 헐면, 지금 당장 곳간을 허는 동안에는 곡식을 어디에 저장할 건데요? 곳간을 헐고 다시 짓겠다는데 그 과정에서 필요한 인력이나 자제 등은 어떻게 조달할 건가요? 더 크게 곳간을 만들었다면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과 정성이 필요할텐데 그건 어떻게 하죠? 이 부자는 풍성한 소출을 저장할 곳이 없다는 고만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서 곳간을 아예 부서버리고 다시 더 크게 짓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재물을 더많이 모아두려고 곳간을 더 크게 지으면 고민거리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고민 거리가 생겨나고 더 많은 걱정 거리가 생기는 거에요. 

19절도 보십시오. 부자가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여러분, 지금 부자가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새로 지었나요? 더큰 곳간을 만들고 매년 그 곳간을 채월만큼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있나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저 자신의 마음에서만 더 큰 곳간을 만들었고, 그의 마음 속에서만 곡식과 재산이 풍성해요. 혼자 생각에, 그의 마음에서만 곳간을 더 크게 지어놓으면 만사가 형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과정과 결과가 자신의 생각되로 될지 안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자신의 계획대로 더 많은 재산을 모아놓기만 하면 나의 인생에 평안이 찾아오리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어리석은 생각이죠. 

이 부자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전도서 5장 11절과 12절 말씀입니다. 전도서 5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재산이 많아지면, 그래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생각처럼 곳간을 더 크게 짓게 되면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요. 그러면 어리석은 부자의 곡식은 누가 먹게 될까요? 부자가 아무리 많이 먹어도 하루에 밥은 세끼밖에는 못먹어요. 그 많은 곡식은 그 집에 일하는 사람들이 먹는 거에요. 그러니 전도서의 말씀처럼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냐”고요. 저 사람들이 먹는 곡식 저거 내거야라고 생각하는 유익밖에는 없어요. 전도서 5장 12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지금 있는 곳간을 부수고 새로 큰 곳간을 지으면 평안히 쉬고 즐거워할 수 있을 것 같지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가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 집에 일하는 노동자들은 만든지 적든지 주는 만큼 먹고 마음 편하게 잠들 수 있어요. 그러나 부자는 그렇지 못해요. 누군가 나의 재산을 노리고 있지는 않을까? 이 큰 재산을 어떻게 관리할까? 계속해서 걱정이고, 계속해서 스트레스예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는 바로 이 사실을 몰랐어요. 그래서 그의 이름은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자, 드디어 하나님께서 이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20절과 2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나님은 이 땅에 자신의 재물을 가득가득 쌓아놓으려고 아둥바둥하는 이 부자를 향해 어떻게 부르십니까? “어리석은 자여” 이 부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 부자가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그래서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 부자는 이 세상의 재물만을 모으려고 노력했지 죽음 이후의 문제를 조금도 준비하지 않았다기에 그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물론이요, 죽음 이후의 삶에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돈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재물이 많다고 천국에서 풍족하게 생활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어나, 저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을 받아누리는 일이나 그 어디에도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았느냐는 결코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죽음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았느냐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했느냐에 달려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분의 재물을 사용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이 땅의 재물이 많고 적음을 떠나 저 영원한 천국을 위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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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