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0. 6. 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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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건망증이 심한 40대 아주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아주머니께서 아파트 단지에서 쓰레기를 버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경비원이 이렇게 소리 지르는 겁니다. “동수 어머니, 지금 뭐하세요!!” 그때야 이 아주머니께서 깨달으셨습니다. 지금 자신이 의류를 버리는 곳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고 하던 참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의류를 버리는 곳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 했다는 자신의 행동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 마음에 불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은 집에서 나오면서 음식물 쓰레기만이 아니라, 못 입는 옷가지들도 한 봉지 가지고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손에는 못 입는 옷가지들은 안 보이고 음식물 쓰레기만 들려있는 거지요. 

아주머니는 황급한 마음에 음식물 쓰레기장으로 달려가 코를 부여잡고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어보았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네, 그 안에는 음식 쓰레기와 함께 뒤엉켜있는 옷가지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자신의 건망증을 한탄하고 또 한탄하면서 코를 부여잡고 옷가지들을 치웠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이제는 정신을 좀 차리자.” “이제는 정신을 좀 차리자.” “내가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된다.” 계속해서 결심하면서 집에 들어왔지요. 그리고 이제 건망증은 멀리하고 스마트한 삶을 살려는 마음으로 시원한 냉수 한잔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냉장고 문을 활짝 여는 순간. 

냉장고 안에는 버젓이 섬유유연제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고 하여 건망증이 사라지고 스마트한 생활이 시작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죄성 역시 우리의 결심과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간절한 바람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이제는 정신을 좀 차려야지.” “이제는 정신을 좀 차려야지.”라고 결심하였지만, 냉장고 안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는 섬유유연제를 바라보며 절망하듯,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고자 결심하였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여전히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마음을 바라볼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잠 16:2)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예수님께서 하나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사람 가운데 한 명은 바리새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세리였지요.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들려주신 율법의 말씀을 가장 열심히 실천하고 지켰던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과는 상관없이 살았던 사람들, 나아가 주변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당했던 사람이 세리입니다. 이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먼저 바리새인이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가만히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죄를 전혀 짓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자랑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자랑합니다. 자신에게 수입이 생기면 그 가운데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한마디로 ‘자랑’입니다. 

그런데 함께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던 세리는 감히 눈을 높이 들거나, 큰 소리로 기도하지 못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그에게는 자랑 거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가슴을 치며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상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의 기도는 짧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바리새인은 정말 많은 자랑 거리를 늘어놓았지만 세리는 내세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그저 하나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신 이후에 이렇게 결론 내리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 18:14) 

적지 않은 크리스천들이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자기 자신을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의 모습과 일치시키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주인공은 세리가 아니라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 분명한 증거가 누가복음 18장 9절입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신 이 비유의 말씀은 세리와 같은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 있었습니다. 그는 여려서부터 성경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율법의 말씀을 거의 다 외우고, 그 말씀대로 자신의 행동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 기도했습니다. 금식기도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그들은 매주 두 번씩 금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소득 가운데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의롭게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이 정도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앙생활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고, 잘못을 저지르면 회개 기도를 올리기도 하고, 말씀에 비추어 나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교정하려는 노력을 하기에, 그래도 나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평가는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한 관원 

누가복음 18장에는 또 하나의 사건이 나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죠. 어떤 관리가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그는 큰 부자였으며 율법에 있어서도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열심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계명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모두 지켰던 사람입니다. 이 관리에 대해 이렇게 소개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중 딸이 있으신 분들에게는 정말이지 사위 삼고 싶은 사람, 그가 바로 이 관원입니다. 부자입니다. 관원이니 사회적 지위도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킬 정도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영원한 생명’, 곧 영생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떠세요? 우리가 결론을 다 알고 있어서 그렇지, 오늘 본문의 스토리를 배제한 채, 이 관원의 조건만 놓고 본다면 어떻게 해서든 사위삼고 싶은 사람 아니에요?  바로 그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18절입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관원은 재물을 많이 모으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율법을 다 지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생명,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더 높은 차원의 신앙이 필요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가 지금까지 성실하게 지키고 있는 율법, 곧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의 핵심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던 그는, 그 모든 계명을 지켜왔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는 아직 율법을 지키는 이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관원은 열 개의 계명을 잘 지켰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의 핵심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십계명이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는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명령이 십계명 1 계명부터 4 계명까지의 내용입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명령이 십계명 5 계명부터 10 계명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관리에게 십계명을 지키라고 다시 한번 명령하신 것은 그 관리가 십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십계명의 정신,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 관리는 아직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관리는 자신을 위해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지켰던 것도, 관리로서 열심히 일했던 것도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진정 영원한 생명, 영생을 얻기 원한다면 십계명과 율법이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인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과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는 재물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과 이웃을 ‘너를 위한 도구’가 아닌 ‘진실한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는 명령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찾아온 관원은 고민하며 머뭇거리기 시작합니다. 누가복음은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살아왔던 그에게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대나 보상도 없이 나누어주라는 말씀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어려서부터 열심히 율법을 배웠던 바리새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 대해 많은 비판의 말씀을 하셔서 우리는 바리새인 하면 대단히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묵상하고 공부하는 열심을 결코 따라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그 열심을 조금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관원은 어떻습니까? 그 역시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웠고, 열심히 실천했습니다. 예수님께 자신 있게 모든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마 성실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율법의 말씀을 지키는데 성실했고, 국가 공무원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할 때도 그는 성실했던 것 같습니다. 누가 보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딸 가진 부모가 사위 삼고 싶은 사람이었죠.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도, 그리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관원도 모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율법을 모르는 죄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바라보시고 너는 참 의롭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만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죄인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물론 노력합니다.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죄인 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능력 

기독교 복음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인정받을 수 없는 철저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19-21) 

같은 본문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롬 7:19-21) 

악이 붙어 있어요. 마치 건망증을 내보내고 싶지만 냉장고 안에 자리 잡은 섬유유연제를 보며 절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은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려 노력했던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 역시 고백하기를 자신은 선을 행하고 싶지만, 그 안에 죄가 있어서, 악이 있어서 죄를 짓도록 한다고 합니다. 하물며 우리야 어떻겠습니까? 우리도 작은 노력을 기울여 보지만 여지없이 죄의 유혹에 빠져드는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옛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1-22) 

이 본문 역시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롬 3:21-22)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행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다 살아가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살아가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 사실이 복음이요, 이 사실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은혜를 믿으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크리스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관원이 실망한 표정으로 되돌아가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눅 18:26)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 18:27) 

만일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삶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여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죄 많은 우리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았던 바리새인도 결국에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우리에 비해서 의로울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결국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었던 세리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을 때,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고 되돌아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세리가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전혀 없지만, 그러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 곧 죄인을 위한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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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