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2020. 6. 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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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은 초대 교회의 큰 부흥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120명의 성도들이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어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숫자가 3,000명이었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4장으로 가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의 숫자가 남자만 5,000명이었다는 보도가 등장합니다. 남자만 5,000명이었으니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까지 합하면 만 명이 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교회가 시작되는 날 3,000명 이상의 교회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0,000명의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로 급격히 성장합니다. 큰 부흥이 초대교회에 임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초대교회는 어떻게 그토록 급격한 성장이 가능했을까요? 초대교회는 어떻게 그 대단한 부흥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저는 오늘 한 가지 비유로 그 대답을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소나 말을 사육하는 목장이 있지요. 그런데 호주나 미서부에서는 소를 정말 대규모로 사육하는 목장들이 있는데, 그 목장을 Ranch라고 부릅니다. Ranch는 작은 규모가 아니라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규모의 목장을 주로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소나 말을 사육하는 목장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목장을 관리하기 위해서 울타리(fence)를 설치하는 겁니다. 울타리를 쳐서 소나 말이 목장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가두고, 그 안에서 가축을 사육하는 형태입니다. 이것이 목장을 관리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그런데 두번째 방법도 있습니다. 특별히 호주나 미서부의 Ranch와 같이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울타리로는 도무지 가축을 관리할 수 없는 규모에서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이 두 번째 방법입니다. 여러분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농장을 관리하는 두 번째 방법, 특별히 광활한 농장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방법은 울타리를 치는 것이 아니라 우물(well)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좋은 우물을 개발하는 거죠. 그러면 소나 말과 같은 가축이 어느 정도 거리를 벗어나도라도 결국에는 좋은 우물이 있는 곳, 그래서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제공되는 장소를 과도하게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Ranch와 같이 광활한 농장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방법입니다. [각주:1]   


교회나 목회에도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하나는 울타리(Fence)를 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모임에 제대로 출석하는 지를 쉴 새 없이 체크하고 확인합니다. 주일 예배를 한 번이라도 빠지면 전화나 문자를 수십 번 받게 되지요. 성도들을 계속해서 채근하고, 조직을 만들어서 성도들을 관리하면서 성도들이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울타리(fence)를 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우물을 개발하는 거지요. 깨끗한 생수를 충분히 공급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도록 하는 목회입니다.  


물론 교회는 성도들에게 울타리를 쳐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이단과 같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울타리를 치는 일과 깨끗한 생수를 공급하는 우물을 개발하는 일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이 두 가지 중에서 우선순위를 매겨야 한다면, 당연히 울타리를 치는 일보다는 좋은 우물을 개발하는 일이 더욱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거대한 부흥의 물결은 울타리(fence)를 쳐서 가능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조직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교구조직이나, 남선교회, 여전도회가 없었어요. 그들에게는 건물도 없었고, 그들에게는 재물도 없었고,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단 한 가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의 우물(well)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의 생수가, 생명의 우물이 터져나오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때 우리 교회에 거대한 부흥의 물결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 가정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족 식구들, 여러분의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채근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어떻게 해서든 교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는 데 그것이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왜 이리 많은지요? 여러분, 가장 좋은 방법은 울타리를 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의 능력이 강물과 같이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들이 생수의 강물을 흘러 보내는 생수의 근원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이 잠시 방황하더라도 결국에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가정이 잠시 하나님을 떠난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에는 생수의 근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날개 잃은 새의 운명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은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던 바로 그 생명의 우물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루살렘 성전 동편에 고린도식 건축 양식을 따라 매우 아름답게 건축된 문, 그래서 ‘아름다운 문’이라는 의미의 ‘미문’이라 불렸던 바로 그 장소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 1절과 2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자신의 발로 도무지 걸을 수 없었던 한 사람이 등장하지요. 그리고 성경은 이 사람이 언제부터 도무지 걸을 수 없었는지를 알려줍니다. 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다가 불의의 사고로 걸을 수 없게 되었다면, 자신이 겪는 장애의 원인이라도 알 수가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도부터 – 도무지 자신의 장애가 왜 시작되었는지 이유도 알 수 없는 그 시절부터 – 도무지 걸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와 같은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나게 하셨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 사람의 운명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을까요? 날개 없이 태어난 새의 운명,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새는 자신의 날개로 창공을 날아다니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새에 날개가 없습니다. 새라는 모습은 가지고 있었지만 날개가 없어서 날 수 없는 형편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던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신의 아픔, 자신의 장애, 자신의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돈벌이로 이용하는 사람들에 둘러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2절을 다시 보시면, 태어나면서부터 걸을 수가 없었던 이 사람을 예루살렘의 성전 문 앞에 데려다 놓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몇 명이었는지를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사람들이 걷지 못하는 사람을 성전 문 앞에 데려다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은 불쌍한 장애인이 돈벌이를 할 수 있도록 성전에 데려다주고는 그가 구걸하여 사람들로부터 받은 돈을 한 푼도 남김없이 모두 이 장애인의 소유로 넘겨주었겠지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들은 앉은뱅이를 매일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게 하고, 그 수입의 일부를 – 어쩌면 대부분을 – 자신들의 주머니로 가져갔을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너무도 큰 아픔이요, 인생의 절망인데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아픔을 자신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도 이와 비슷한 구조가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라는 지역에서 귀신 들린 한 여인, 귀신 들린 한 여종을 고쳐주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여종을 치유하여 준 것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 여종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놀라운 장면이었죠.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그 여종에게서 귀신이 나간 사실을 알고 광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여종의 주인들입니다. 성경은 그 주인이 광분했던 이유를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 여기에서도 복수의 사람들입니다 –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행 16:19) 한 여인은 자신에게 붙은 귀신으로 말미암아 더없는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종의 비극을 자신의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여종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절망합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나의 그 한계, 나의 그 아픔, 나의 그 비참한 슬픔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만 삼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죄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요. 

 


절망의 현장에 복음의 빛을 비추다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그 사람, 날개를 잃어버린 새의 운명과 같이 절망의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그 사람, 자신의 아픔과 슬픔과 절망이 다른 사람의 돈벌이로 사용되고 있던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람, 베드로와 요한이 다가갑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 3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하자,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무엇을 했습니까? 구걸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이 장애인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무엇을 구걸했을까요? 하나님의 사람,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곧 복음을 구했을까요? 아니면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은전 한 닢을 구걸했을까요?  이 장애인은 자신의 눈 앞에 예수님의 사도들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구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누구인지, 그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 지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더욱 놀라운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장애인은 그저 한 끼 식사라도 해결할 수 있는 몇 개의 동전을 구걸했는데, 이 장애인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능력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권능을 조금도 기대하지 못했는데, 하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그 사람에게 위대한 구원의 메시지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교회의 사명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역할에 무관심합니다. 세상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복음의 능력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세상 속에서 교회의 역할이나 사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은 복음을 기대하지 않을 지라도, 아니 때로는 세상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능력을 오히려 싫어할지라도 교회의 사명은 그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맛보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요,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자 이제 베드로가 입을 열어 그 장애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구절인 사도행전 3장 6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가 이렇게 선언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얼마나 멋진 선언입니까? 얼마나 위대한 선포입니까? 


베드로의 이 선포와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의 대가였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톨릭교회의 추기경 한 사람과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가에는 돈을 구걸하는 걸인이 있었지요. 그때 추기경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은화를 하나 꺼내 그 걸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죠. “얼마나 다행입니까? 초대교회의 베드로 사도는 은과 금이 내게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걸인들을 구제할 수 있는 은과 금이 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지금 교회는 베드로 사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베드로 사도께서 외치셨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이 없었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은으로 촛대를 만들고, 금으로 교회의 기둥을 세우며, 대리석으로 교회의 바닥을 깔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능력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부터 말미암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거에 비해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어느 정도의 물질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손을 열어 물질로 누군가를 구제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 세상에서 참으로 해야 할 일은 구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참으로 해야 할 일은 돈 몇 푼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세워진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그 위대한 이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위대한 이름으로 말미암아 아픔과 장애와 절망 속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담긴 그 위대한 능력을 소유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까? 내 주머니에 다른 사람에게 식사 한 끼 대접할 돈은 있지만, 나를 찾아온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줄 믿음과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아닙니다.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다 


베드로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다리로 걸은 적 없었던 이 장애인에게 위대한 선언을 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런데 베드로의 위대함은, 초대교회의 위대함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한 뒤에, 손을 내밀어 그 앉은뱅이를 일으켜 줍니다.  오늘 본문 7절과 8절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이것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가 소유했던 생수의 강, 생수의 우물의 핵심적이 내용입니다. 그들은 화려한 프로그램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잘 짜인 조직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은도 없었고, 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건물도 없었고, 좋은 음식을 사람들에게 대접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모든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 날개를 잃어버린 새의 운명에서 도저히 헤쳐 나올 수 없었던 사람들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자, 그들이 절망의 자리, 슬픔의 자리, 아픔의 자리, 고통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달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러한 근원적인 변화가 날마다 체험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교회는 출석을 하고 있지만, 신앙생활은 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부터 시작되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신 분이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분의 부활로 말미암은 죄 용서의 체험을 아직 경험하지 못하신 분이 계신가요? 주일을 맞이해서 교회당에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내 삶을 날개 잃은 새와 같은 절망의 자리에서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창공을 나르는 새 희망의 자리로 옮기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깨닫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하나님 앞으로 나와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 충만하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체험으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다시 한번 여러분이 새로운 꿈과 비전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신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에 집중하십시오. 교회는 세상의 사람들, 오늘 본문의 걷지 못하는 장애인과 같이, 날개를 잃어버린 새와 같이, 절망의 자리에 앉아 그 어느 곳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복음의 능력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깨닫고 체험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들이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이 되는 그 장면이 우리 가운데 날마다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변화로 모든 사람이 놀라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태어나면서부터 단 한 번도 일어나 걷지 못했던 사람을 일으켜 세우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랍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 9절과 10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사람이 변화되었습니다. 단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절망의 자리, 슬픔의 자리, 아픔의 자리 – 곧 날개를 잃어버린 새의 운명 – 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러자 9절 말씀을 보시면, “모든 백성이,” 모든 백성이 요동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절 뒷부분을 보십시오.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여러분, 이 세상을 뒤흔드는 것은 단 한 사람의 변화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저는 바로 여러분이 그러한 변화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날개를 잃어버린 새의 운명에서 벗어나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모습으로 비상하십시오. 바로 그때, 여러분 한 사람의 변화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가정이 변하고 여러분의 직장이 변화고 이 세상이 변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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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04 “토마스 아퀴나스”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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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im Belcher, Deep Church: A Third Way Beyond Emerging and Traditional (IVP Books, 2009), 8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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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