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2020. 6. 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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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기를 언제나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의 부흥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하곤 합니다. 의도적이기보다는 인식하지 못하면서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 속에서 꼭 그와 같은 예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6절) 

무엇인가 초대 교회에 큰 이슈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컸는지 사도들과 장로들이 함께 모여서 이 일을 의논할 만큼 중요한 문제였고,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7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지요.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자, 그들 사이에서 의견이 일치되지 못하고 서로 많은 변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문제이기에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의 역사가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급박하게 진행되는 이때에 모든 사도들과 장로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해야 했을까요? 그들이 다루었던 의제는 단 하나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사도행전 15장 5절에도 그와 비슷한 주장이 등장합니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을 향하여 전파되다보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교회 안에 있던 어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그것이 선행조건이 되어야 그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행전 15장 1절에 등장하는 유대 출신의 교사들이었고, 15장 5절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으로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바울과 같은 사람들이 그 반대편에서 반박을 하고 나섰지요. 그러나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고 율법을 지키도록 명령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모든 사도들과 장로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 문제를 놓고 뜨거운 논쟁을 펼쳐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논쟁이 뜨거우면 뜨거울 수록 전도의 문은 활짝 열릴까요? 아니면 전도의 문이 꽉 막히고 말까요?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아니지만,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할례를 비롯한 율법의 조항들을 지켜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하면 할수록 이방인들은 교회에 출석하려는 생각을 접게 되지 않겠어요? 유대인들이야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니까 상관이 없지만, 이미 성인이 된 이방인 남성들도 예수님을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누가 할례를 받으면서까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겠어요? 유대인들이야 그들의 문화 자체가 율법에 맞추어져 있지만 이방인은 유대인과 문화가 달라서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버리고 유대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누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냐고요? 

율법을 지킨다는 것, 좋은 일이죠? 구약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죠? 그래서 사도행전 15장 1절에 등장하는 유대 출신 교사나, 15장 5절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마음의 확신을 가지고 주장했겠지요.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율법은 지켜야지,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할 것은 해야지! 뭐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여러분, 그들이 선한 동기를 가지고 확신 속에서 주장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이방인을 위한 전도와 선교에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 안에는 사도행전 15장 1절에 등장하는 유대 출신 교사나, 사도행전 15장 5절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같은 모습은 없을까요? 선한 의도에서 시작된 거지요. 그 주장이 전적으로 틀린 것도 아니요. 그래서 본인은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신의 주장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때로는 우리 자신이 전도와 선교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이방인을 위한 목적이다 

이방인에게 율법을 지키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를 가지고 사도들과 장로들 사이에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 사도가 드디어 결정적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베드로는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유대인인 자신을 사도로 불러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선택이지요.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읽은 7절에는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신 목적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이제 하나님의 목적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네, 이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셨어요. 그리고 베드로를 사도로 세우기 위해 예수님께서 3년 동안 베드로와 동거동락하셨지요. 여러분, 인류 역사에서 베드로만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린 사람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거동락했어요.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으면서,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3년 동안 풍성히 받아 누렸던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바로 그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베드로 자신을 선택하고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인데, 그 이유와 목적이란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게 하신 것은 여전히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우리 시대의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즐겁고 기쁘신가요? 우리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즐겁고 기쁘신가요? 여러분, 오랜 시간 우리 교회를 출석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많고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가정을 위해 행하신 일들에 대한 간증이 풍성하신가요?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먼저 선택하여 주시고 교회 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먼저 누리게 하신 것은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특권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무거운 사명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누리는 은혜가 풍성하면 풍성할 수록 여러분은 아직도 교회 밖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그 증거다

베드로는 먼저 하나님께서 베드로 자신을 선택하신 목적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베드로는 그 점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성령의 역사를 지적합니다. 오늘 본문 8절입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만 성령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성령을 주어 증언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품으셨어요.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도 선택하신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은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는 강력한 의지를 어떻게 보여주셨는지 아세요?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면서 이방인들도 하나님께서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도록 –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던 고넬료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고넬료를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었어요. 그랬더니 고넬료의 가정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베드로가 전해준 예수님을 믿는 거예요. 그리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유대인들에게 임하셨던 성령님이 고넬료를 비롯한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임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베드로가 깨달은 거죠. 하나님께서 성령을 유대인들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부어주시니,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시는구나.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증거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에도 성령의 역사는 분명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전도의 현장에서 그리고 선교의 현장에서 성령의 역사가 불처럼 일어나고 있어요.  멀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 주변에도 성령께서 우리 시대의 이방인들에게 임하시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수많은 불신자들에게 믿음을 복음이 전해질 때 우리에게 주셨던 동일한 성령을 그들에게도 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시면서 우리에게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관심은 지금도 복음이 전해지는 바로 그 현장, 곧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는 바로 그 현장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실에 차별은 없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신 목적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방인에게 성령께서 임하는 것이 그 증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논쟁의 핵심을 찌르는 선언을 합니다. 오늘 본문 9절입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이방인의 마음을 믿음으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담대히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수긍하실 수 있으신가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지난 수천년 동안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려온 유대인이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왔던 이방인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 차이가 없을까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들이 죄인이지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 없이 살았지요. 그러니 그들이 죄인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어떻습니까? 유대인은 율법을 알고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실천했기에 의인일까요? 과연 구약성경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순종하는 의인들이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주범이었다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죄인이지요.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다고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주일을 성수하고, 여러 가지 기도회에도 참여하고, 나름대로 교회를 위해 봉사도 하신다고요? 그것이 이제 막 교회에 등록한 새가족이나 아직도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자들과의 차이라고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했을 지라도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언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우리는 불신자들과 다를 것이 없어요. 

이방인과 유대인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가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차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11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믿노라” 

여러분, 신앙생활을 10년, 20년, 30년을 하신 분들 혹은 교회를 위해 대단히 크고 위대한 업적을 이루신 분들이나 이제 막 예수님을 믿어 교회에 등록한 새가족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없고,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합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이나 이제 등록한 새가족이나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아울러, 우리 교회를 위해 온갖 봉사와 충성을 다 바쳤던 분이나 이제 교회에 막 등록한 분이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라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에 모인 교회 지도자들에게 간곡하게 권면했던 것처럼, 저도 여러분 모두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우리 교회 주변에 있는 불신자나 새가족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경험이나 신앙의 경륜 등을 가지고 새가족과 불신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 10절입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그 무거운)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그 무거운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여러분, 하나님 관심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알지못했던 죄인 한 사람이 돌이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에 우리의 모든 관심과 주의를 집중시켜서 복음의 거치는 자가 아니라 전도와 선교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우리 모두와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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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