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강해2020. 6. 7.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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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돼었는가? 』 

영국의 철학자였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1927년 사우스 런던(South London)의 시청에서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제목으로 대중연설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Why I am not a Christian” 버트런드 레셀이라는 사람은 당시 워낙 유명한 사상가였기에 그 파장은 온 유럽을 뒤덮었습니다. 이후 그의 연설은 책으로도 출판되었고, 그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서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에서 꾸준히 판매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러셀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의 연설과 책이 큰 반향을 일으켰기에 그에 대한 기독교 내의 반응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표적인 영국 복음주의 사상가였던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입니다. 

존 스토트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Why I Am A Christian)라는 책에서 자신의 회심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그는 기독교 배경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기독교 교육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루터교 교인으로서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매우 열심이 있었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존 스토트는 자신이 크리스천이 된 중요한 이유로 제일 먼저 그의 기독교적 배경을 꼽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덧붙여 이런 설명도 합니다. 자신의 기독교적 배경, 곧 자신이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기독교 배경의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하나의 이유는 될 수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존 스토트는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 되었을까요? 그는 자신이 크리스천이 된 두 번째 이유로 자신이 회심을 경험했던 어느 날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고, 기독교적 배경의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마음에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938년 2월 13일, 존 스토트는 성서유니온이라는 단체가 주관하는 집회에서 한 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때 설교를 하셨던 배쉬라는 분은 이렇게 선포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빌라도를 따라 나약하게 예수를 거부하든지, 그분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그 집회가 끝나고 존 스토트는 배쉬라는 바로 그 분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속 마음을 털어놓자, 배쉬는 다시 한번 존 스토트에게 요한계시록의 말씀으로 권면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을 들은 존 스토트는 그날 밤 자신의 숙소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에 모시는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각주:1] 존 스토트는 자신의 회심 과정에 있었던 바로 이 사건도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배쉬라는 분의 말씀을 듣고, 권면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했지만, 자신의 결단이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 되는 데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존 스토트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 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했을까요? 존 스토트의 글을 잠시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는, 궁극적으로 제 부모나 스승의 영향도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저 자신의 결단 때문인 것도 아니며, 바로 ‘천국의 사냥개’ 때문입니다. 즉, 제가 원하는 길로 가고자 도망할 때조차도 끈질기게 저를 쫓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사냥개이신 그분이 은혜롭게도 저를 추적하지 않으셨다면, 오늘날 저는 헛되고 버림받은 인생들의 쓰레기더미 위에 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왜 크리스천이 되셨습니까?” “당신은 왜 지금도 크리스천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중에 혹 이렇게 대답하실 분도 계십니까? ‘나는 모태신앙이요,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을 배웠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믿는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렸을 때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신앙을 가지고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혹 이렇게 대답하실 분도 계십니까? ‘저는 친구의 전도를 받아서, 혹은 가족 식구 가운데 누군가의 전도를 받아서 신앙생활을 했고, 지금은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을 교회로 인도하신 그 누군가의 매우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혹 이렇게 대답하실 분도 계십니까? ‘몇 년 전, 하나님께서 설교로, 혹은 성경 말씀으로, 혹은 전도자의 권면으로 내 심령에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졌고 바로 그때 저는 하나님의 위대한 초청에 응답하였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 그분을 여러분의 구세주로 영접하시는 바로 그 결단도, 사실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하만 장군 

여러분은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이었던 나아만 장군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 ‘큰 용사’였다고 묘사합니다. 또한 성경은 그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였다고 묘사합니다. 그는 큰 용사였습니다. 실력이 있어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시대 대부분의 가장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웠습니다. 당시의 직업이라는 것이 대부분 농업이나 축산업 밖에는 없었어요. 그런데 당시 남자들이 출세를 하려면, 농업 기술과 축산 기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출세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술이 필요할까요? 네, 당시로는 전쟁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나아만은 당시 출세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그리고 가장 중요했던 기술, 곧 전쟁기술이 탁월했던 실력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뭐지요? 그가 나병 환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나아만 장군이 나병에 걸린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나아만 장군이 몸에 질병, 그것도 나병이 걸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연히 일어난 일일까요? 아닙니다. 그가 재수가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깊은 섭리였습니까? 네, 바로 그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나라는 아람 나라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람 나라로 잡혀온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다. 아람 나라에 끌려온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남달랐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아람에 포로로 끌려오면서 신앙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나아만의 집에서 나아만의 아내가 심부름을 시키던 이스라엘 소녀의 믿음은 어떤 상태였어요? 비록 아람 나라에 끌려와 있지만 그 마음에는 아직 믿음이 있어요. 하나님은 나아만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요. 그래서 그의 주인에게 말하잖아요. 이스라엘 나라에 엘리사라는 분을 찾아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나아만의 아내가 심부름 시키던 종이 이스라엘 소녀였고, 또 그 소녀가 하나님과 엘리사에 대한 믿음이 마음에 확고했던 사람이었던 것이 우연입니까? 아닙니다. 나아만이 재수가 좋기 때문이었나요?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온 그 여종의 말을 듣고 나아만이 이스라엘로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집 문에 이르렀어요. 그러자 엘리사가 직접 나오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사가 종을 보내서 요단 강에 7번 몸을 씻으라고 말을 전합니다. 요단 강에 몸을 7번 씻으면 나병이 깨끗해진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나아만 장군이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요단 강에 뛰어들었지요? 아닙니다. 나아만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선지자가 직접 나온 것도 아니고, 선지자가 자신의 환부를 붙잡고 기도해준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무 화가 나서 나아만은 그만 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바로 그때 나아만의 부하들이 나아만을 말립니다. 그리고 한 번 해보자고 설득하죠. 
여러분, 이 장면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십시오. 나아만의 곁에, 그것도 엘리사를 찾아가는 바로 그 시점에 나아만을 수행했던 부하들이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바로 그때 나아만의 곁에는 지혜로운 부하들이 있었단 말이죠. 여러분, 이것이 우연입니까? 아닙니다. 나아만이 재수가 좋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뭐지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입니다. 

결국 나아만은 요단강에 자신의 몸을 7번 씻고 나병에서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왕하 5:15) 

아람 사람 나아만이 나병에서 깨끗하게 된 이 사건의 핵심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병이 나았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아니, 하나님이 병을 고쳐주실 거면 처음부터 병에 들지 않도록 해주시면 더 좋잖아요. 병이 낫는 것, 나병이 깨끗해지는 것만 중요하다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나아만이 어떻게 고백합니까? ‘아~,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구나’ 바로 이 고백이 나아만의 입술을 통해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믿음을 고백할 때까지 치밀하게 몰고 가셨던 거죠. 존 스토트의 표현대로라면 하나님께서 마치 ‘천국의 사냥개’가 되신 것처럼 양들이 다른 길로 가려고 할 때 양의 다리를 깨물어서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몰고 가셨다는 겁니다. 몰고 가셨어요. 

여러분, 나아만으로 하여금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도록 몰고 가셨던 그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 모두의 삶을 몰고 오시지는 않으셨습니까? 나아만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넣어주기 위하여 천국의 사냥개가 되셨던 그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한 천국의 사냥개가 되어 우리를 믿음의 길로 이끌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선물 특별히,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인 구원은 초라한 포장지에 쌓여있는 듯합니다. 포장도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그 위대한 선물을 지금 당장이라도 받을 텐데, 포장이 초라해요. 나아만의 경우가 그렇지요. 하나님에 대한 신앙,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하나님은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선물을 무엇으로 포장하셨어요? 나병, 한센병으로 포장하셨다고요. 
나아만의 때로부터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나오미와 룻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오미와 룻에게 위대한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위대한 선물이란 그들을 통하여 다윗 가문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그 위대한 선물의 포장지가 뭡니까? 그 위대한 선물을 싸고 있는 포장지는 바로 남편의 죽음입니다. 나오미도 룻도 남편의 죽음을 경험해야 했지요. 바로 그 초라한, 아니 너무도 거북한 포장지 안에 하나님은 위대한 선물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으로부터 다시 한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또다시 요셉이라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도 정말 위대한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 선물이란 요셉을 통하여 요셉 가족의 생명은 물론이요, 이집트 지역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위대한 사명, 이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은 어떠한 포장지에 싸여 있었을까요? 형제들로부터 받는 배신, 그리고 감옥, 누명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선물이 초라한 포장지, 아니 너무도 거북한 포장지에 쌓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사냥개 되시는 하나님께서 존 스토트 목사님을 몰아가 결국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하신 것처럼, 천국의 사냥개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아만 장군을 결국은 믿음의 자리에 서게 하셨던 것처럼, 비록 겉에 보이는 포장지가 초라하고 때로는 거북할 지라도 천국의 사냥개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의 여정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그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치 천국의 사냥개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아만 장군을 몰고 가셨던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였다고 하여 만족하시지 않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우리를 또다시 말아가십니다. 바로 믿음의 성숙을 위해서 말이죠. 그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지 25년, 하나님은 그 기나긴 훈련의 기간을 거쳐 드디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100세에 아들을 낳는 기적을 경험했으니,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과 신뢰가 얼마나 깊었겠습니까? 나아만 장군은 몸에 나병이 찾아오고,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 몸이 깨끗하게 고침을 받고, 그 모든 과정에서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였다면, 아브라함은 이미 25년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어요. 믿음의 여정을 시작했다고요. 그리고 25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겪었던 그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결국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 있는 아들 이삭을 얻게 됩니다. 그러니 그의 지금 믿음은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나아만과는 차원이 달라요.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제 아무리 25년 전에 믿음 생활을 시작했고, 아브라함이 제 아무리 신앙의 깊이가 있고, 아브라함이 제 아무리 믿음의 구체적인 열매인 그의 아들 이삭을 양육하고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그보다 더욱 깊은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깊고 더욱더 높은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도록, 천국의 사냥개 되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아브라함을 몰아가십니다. 어떻게요?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 놓으라고 명령하시잖아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하신 바로 그 장면에서, 하나님이 여호와 이레, 곧 준비하시고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준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한 계획 속에서 아브라함을 몰고 가십니다.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이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최고봉에 이르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 고민과 괴로움을 더하면서까지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원하셨던 것은 그의 아들 이삭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이었던 것이지요(창 22:12). 

어느 교회에 참으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셨던 40대 중반의 집사님 부부가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그렇게 모범적인 분이 계시잖아요. 누가 보아도 아름답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족이 있는데, 바로 이 집사님 부부가 그러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 교회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부부의 아내 되시는 집사님께서 대장암 판정을 받으셨다는 겁니다. 이제 40대 중반이니 얼마나 젊습니까? 그 부부에게는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두 딸이 있었어요. 아직 자녀들을 돌보아야 하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여 집사님은 투병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겠어요. 많은 성도들이 문병을 가서 위로하곤 했습니다. 

집사님께서 투병을 시작한 지 약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주일 오후에 찬양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구역별로, 그리고 각 기관별로 준비한 찬양을 발표하였습니다. 모든 순서가 마치고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합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회를 보시던 분이 앞에 나오셔서 특별 순서가 준비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지난 1년여 간 투병하셨던 여 집사님의 찬양 시간이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그 여 집사님께서 앞에 나오셨는데, 피골이 상접하다는 표현 그대로였습니다. 투병을 시작하시기 전에 비해서 몸이 1/3로 마르셨던 거 같아요. 바람만 불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이었습니다. 온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여 집사님께서 앞에 나오셔서 찬양을 하기에 앞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너무도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서 그 동안 제가 얼마나 교회 성도님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셨는지를 새삼 경험하고 있습니다.” 집사님은 이렇게 간증하시고는 찬양을 부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찬양은 바로 “날 구원하신 주 감사”였습니다.  

몸은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엄마로서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은 두 딸을 돌보지 못하는 아픔도 있었겠죠. 그 모든 짐을 자신의 남편에게 남겨두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답답한 마음이 있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그분 마음에는 감사와 기쁨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누리며 기쁨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약 6개월 정도가 흐른 뒤, 그 교회 성도들은 여 집사님의 장례식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슬퍼하며 유족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장례식에 참여했던 성도들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위로가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약 6개월 전 고인의 간증과 찬양이 교인들의 마음에 여전히 감동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천국의 사냥개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도록 우리를 몰아가십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아요. 우리를 끝까지 몰아가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마치는 그 순간까지 믿음의 성숙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포장지가 초라할 수도 있지요. 때로는 거북합니다.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뒤돌아본다면 우리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나를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셨다고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그 첫째는 부활의 주님이 바울 자신에게 보이셨다는 것입니다(고전 15:8). 부활의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두 번째는 은혜는 바울 자신이 사도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망한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바울은 사도가 되었기 때문에 고생 문이 활짝 열린 사람이에요. 그가 만일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래서 여전히 유대교에 몸을 담고 있었다면, 그는 평안한 일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가 만일 사도가 되어 않았다면, 그렇게 모진 고난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고요.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에 자신이 과거에 누리던 모든 영광과 풍요로움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바울은 사도가 되었기에 고난과 핍박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그 모든 것이 크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었고, 그분의 사도가 되어 사명을 감당하는 그 길은 비록 고난이 따라오는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재물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정된 삶을 허락해주신 것도 큰 은혜지요. 그러나 비록 풍요롭지 못하고, 비록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 찾아오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하시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믿음의 성숙을 경험하게 하시는 은혜는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입니까? 바로 이러한 은혜를 충만히 받아 누리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 로저 스티어, 『존 스토트의 생애』(서울: IVP, 2010), pp. 47-4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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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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