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0. 6. 10.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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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세쿼이아 국립공원은 규모가 작아 크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매우 멋진 공원입니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제너럴셔먼트리’(General Sherman Tree)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나무가 살아온 세월은 자그마치 2,600년이라고 하니 제 아무리 100세 인생을 살아가는 시대라 할지라도 제너럴셔먼트리의 연수를 가늠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2,600년 된 제너럴셔먼트리는 높이가 83m, 나무 밑동의 둘레가 31m에 이릅니다. 제너럴셔먼트리와 거의 동시대의 나무들의 나이테를 조사한 연구자들은 제너럴셔먼트리 역시 지금까지 여든세 번의 큰 화재를 겪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2,600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여든세 번이나 거대한 화재를 이겨내고도 지금까지 생존해 왔던 것이지요.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제부터입니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의 안내문에 의하면 제너럴셔면트리는 지금도 여전히 자라고 있습니다. 공원 안내문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나무는 끝없이 자란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나무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징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물 가운데 동물들은 태어나고 성장하여 성체가 되면 더 이상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더 흐르면 노쇠해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지요. 그러나 나무만큼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끝없이 자라고 제너럴셔먼트리처럼 2,600년 동안 여든세 번의 큰 화재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성장하는 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 두 가지 형태의 성장 곡선으로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의 믿음은 대부분의 동물들이 자라나는 경향과 동일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어린아이들이 성장하듯, 어린 동물이 성장하듯 우리의 믿음도 성장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정도 믿음이 성장하고 나면 정체기를 맞이하고 결국 믿음이나 신앙이 그 상태로 머무거나 혹은 쇠퇴하는 경향을 보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장은 동물의 성장 곡선이 아니라 나무의 성장 곡선과 유사합니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의 안내문처럼 나무는 끝없이 자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 우리의 믿음, 우리의 영혼도 끝없이 자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하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비록 우리의 육신은 시간이 지나며 쇠약해지지만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오늘도, 내일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자라나는 믿음과 사랑

사도 바울은 우리의 겉사람이 쇠약해지더라도 우리의 영혼만큼은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통해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3절이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그치지 않는 감사의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3절을 다시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이제 그 이유가 등장합니다.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여기에 ‘더욱’이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십시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그 마음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랐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믿음이 자랐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는 믿음이 더욱 자라났다는 뜻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자라나니, 그 믿음과 더불어 풍성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곧 성도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본문 3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그다음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이 성장하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풍성해집니다. 바로 이것이 데살로니가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32)

그러므로 여러분 기독교의 믿음, 기독교의 신앙은 결코 정체되어 있거나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자라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과거에 자라나셨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오늘도 자라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과거에 성장하였습니까? 오늘도 여러분의 믿음은 ‘더욱’ 성숙해지고 ‘더욱’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아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할수록 성도들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도 더욱 풍성히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

데살로니가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더욱 자라나고 성도들 서로 간에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사랑이 풍성해진 것은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데살로니가 지역에 복음을 전하였고 지금은 그곳을 떠나 있지만 여전히 그들을 그리워하였던 사도 바울의 기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를 위하여 어떻게 기도하였는지는 데살로니가전서 3장에 나타납니다. 우리 데살로니가전서 3장을 찾아서 10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살전 3:10)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주야로, 밤과 낮으로 쉬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였던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나 바울로 하여금 데살로니가를 다시금 방문하여 성도들의 믿음이 여전히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할 때 바울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한절 내려오셔서 데살로니가전서 3장 11절에도 사도 바울의 기도제목이 등장합니다.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살전 3:11)

그런데 이번에는 데살로니가교회를 방문하고자 하는 목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데살로니가전서 3장 12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 3:12)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그토록 보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었어요. 그러나 바울의 보다 궁극적인 기도의 제목이 있다면 그것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성장하는 것이요, 그들의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게 해 달라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1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셔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자라나고 그들의 사랑이 더욱 풍성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과 같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나고,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날수록 서로를 향한 사랑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을까요? 과연 무엇이 우리의 믿음을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만들며, 과연 무엇이 성도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의 답을 단 하나의 단어로 대답한다면 우리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요,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믿음이 참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신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분의 믿음과 신앙이 더욱 자라나기를 원하신다면, 우리의 사랑도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더욱 풍성해지기를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을 본받아 여러분과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믿음을 위하여, 여러분과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풍성한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밤과 낮으로 기도하시고, 더욱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에 반드시 귀를 기울여 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여러분의 믿음은 반드시 성장할 것이요, 여러분의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박해와 환난 가운데 더욱 빛나는 믿음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지나치고 싶지만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제목이 두 가지로 등장합니다. 그 첫 번째는 데살로니가교회를 방문하여 성도들을 만나고 싶다는 기도제목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그들의 사랑이 풍성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지요.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는 사도 바울의 두 번째 기도제목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기도 제목이 하나 남았네요. 과연 사도 바울은 자신이 기도한 것처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방문할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나온 후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 데살로니가를 방문하려는 사도 바울의 발걸음은 계속해서 막혔던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데살로니가로 가는 길이 계속 막히자 자신의 발로 갈 수 없는 그곳을 향하여 자신의 손으로 편지를 쓰는 것이 오늘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방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데살로니가를 방문할 수 없었던 현실적인 문제가 그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물론 선교지의 바쁜 일정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었으니 데살로니가에는 사도 바울을 내어 쫓았던, 그리고 여전히 바울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많은 유대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바울은 꿈에도 그리던 데살로니가를 결코 방문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도록 사도 바울을 공격하였던 유대인들이 그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가만히 두었을 리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은 그들이 처한 환경을 ‘박해’, 그리고 ‘환란’이라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지금 데살로니가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도 동일하게 박해를 받고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리만치 바울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의 악의적인 공격을 막아달라는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것처럼 보여요. 이처럼 박해를 계속 받으면 그들의 믿음이 약해질 텐데, 이처럼 계속하여 환난을 당하면 그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 같은데, 하루빨리 사도 바울이 그들을 방문하여야 그들의 믿음과 사랑이 더욱 성장하고 더욱 풍성해질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 간절한 바울과 성도들의 기도를 외면하고 계셨단 말이에요. 과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믿음의 역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 사람들은 박해와 환난을 당하면 그들의 믿음이 약해지고 그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토록 바울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박해하였습니다. –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오히려 너희의 인내가 빛이 나고, 오히려 너희의 믿음이 자라나 너희의 믿음과, 너희의 사랑과, 너희의 인내가 하나님의 여러 교회 앞에 자랑거리가 되었노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환난과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시기도 하지요. 그러나 더 많은 경우 지금 당장 우리를 그 모든 괴로움에서 건져내기보다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당하는 고난과 역경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을 우리에게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이 힘이 들죠. 물론 그 과정이 어렵죠.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그 과정을 벗어나고 싶지요. 그러나 그 과정을 너무도 쉽게 벗어나면 삶의 모진 풍파를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으니 어떡하겠습니까? 지금 당하는 아픔과 역경을 벗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우리의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며 우리의 인내가 더욱 강건해진다면, 그리하여 인생의 수많은 고비와 난관 앞에서 신앙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거목이 된다면 그것이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2,6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여든 번이 넘는 거대한 산불의 화마를 온몸으로 이겨내며 지금까지도 성장하는 제너럴셔먼트리처럼, 아니 여든 번을 훨씬 뛰어넘는 거대한 산불의 화마를 온몸으로 맞이하였기에 모든 병충해를 다 이겨내고 더욱 견고하게 뿌리를 내려 이제는 그 어떠한 산물도, 그 어떠한 비바람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거대한 고목이 되었던 것처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모든 환란 속에서도 우리가 기도의 줄을 놓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날마다 새 힘을 주신다면 비록 우리의 삶에 고난과 역경이 멈추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더욱 성장할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더욱 풍성해져 삶의 모든 풍파를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거목으로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설교는 아래의 설교로 이어지는 감사절 시리즈 설교입니다>

 

[감사절]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14절 “마땅한 감사”

영국의 철학자였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1927년 사우스 런던(South London)의 시청에서 매우 중요한 대중연설을 하였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이라는 사람은 당시 워낙 유명한 사상가였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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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