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강해2020. 6. 12.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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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전체 주제는 1절에 담겨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누구라도 한번 읽기만 하면 쉽게 이해가 되는 말씀이지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특별히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면 – 조금 더 풀어 볼까요?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낮아지셨지만 지금은 하늘의 영광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절의 말씀은 누구든 읽기만 하면 쉽게 이해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한 구절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하기는 왜 그토록 어려울까요? 너무도 단순한 이 한 구절의 말씀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천하는 것은 왜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까? 


차별하는 신앙인

야고보서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지요. 야고보서의 저자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라면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기에 야고보서의 기록 장소는 예루살렘이 유력합니다. 그리고 야고보서를 받아보는 독자는 예루살렘에 큰 박해(Cf. 행 8:1)가 일어난 후 팔레스타인이나 시리아에 흩어져 있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각주:1] 그들은 복음을 위해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이고, 박해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기나긴 여정을 떠났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렇게 믿음이 좋았던 사람들, 그렇게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까지도 감내하였던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2절)

2절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회당을 처음 찾아온 새가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 성도들이 그에게 자리를 안내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미 교회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에게는 굳이 자리를 안내해줄 필요가 없어요. 이미 자신들이 편한 자리가 다 있거든요. 그런데 새가족은 처음 교회를 오면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 잘 몰라요. 아마도 2절은 그와 같은 상황을 묘사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튼 두 명의 새가족이 회당을 찾아왔습니다. 

먼저 부유한 사람이 회당에 들어옵니다. 오늘 본문 2절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금 가락지를 깨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그의 손을 보니 금 가락지가 있고, 그의 옷을 보니 값이 나가는 아름다운 옷을 입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의 모습은 부티가 났습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 이제는 가난한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 모습을 2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그의 손에는 아무런 장신구가 없고 그의 옷은 누가 보아도 남루하여 그의 형편이 궁핍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는 복장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흩어져 있던 믿음 좋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행했던 모습을 오늘 본문 3절이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3절)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자가 회당에 들어올 때 그의 아름다운 옷, 값나가는 옷을 눈여겨보았다고 말씀합니다. 그 사람이 부자라고 누가 알려준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의 손에 있는 금가락지를 눈여겨보았고, 그의 아름다운 옷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의 사람이며 부유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각적으로 알아채고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초대교회의 리더급이었던 것 같아요. 부유한 사람에게 “여기,” 곧 자기와 가까운 자리에 에 앉으라고 하잖아요. 회당에서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고 있었던 교회의 리더급이 부유한 새가족이 오자 자기 곁으로 안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후 회당에 또 한 명의 새가족이 찾아옵니다. 그의 손에는 아무런 장신구가 없었고, 그의 옷은 남루하였습니다. 그러자 교회 성도들이 그의 가난한 형편을 직감적으로 알아채고는 교회의 리더가 다시 한번 이야기합니다. 3절입니다.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그와 같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오늘 본문은 ‘죄’라고 명백히 선언합니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4절)

이렇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악한 생각을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곧,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최후에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관점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최후의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스스로 올라가는 커다란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초대교회의 믿음 좋다고 하는 성도들의 모습이 오늘 날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서의 기록이 있은 지 약 20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명연설로 잘 알려진 미국의 흑인 해방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1960년 4월 17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종 차별이 벌어지는 현장은 매주 일요일 아침 11시 교회입니다. 
이러한 차별은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정신과 불일치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반하는 모습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각주:2]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백인들이 모이는 교회와 흑인들이 모이는 교회의 그 건널 수 없는 구분을 이렇게 아파했던 것이지요. 이에 대해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교의 학장이었던 필립 클레이톤(Philip Clayton) 교수는 믿음이 좋다는 수많은 미국의 백인 중산층 성도들이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라고 찬양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그 동일한 은혜가 흑인과 멕시칸을 비롯한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도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각주:3]  

너무도 쉽고 간단한 단 한 구절의 말씀.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000년 전 박해를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흩어져 있던 성도들은 이 간단한 한 절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1900년대 중반 미국의 믿음이 좋다고 평가를 받았던 백인 중산층 개신교도들 역시 이 간단한 한 구절의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는데 실패하고 말았지요. 
그렇다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그 누구보다도 믿음이 좋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우리는 이 간단한 한 구절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계십니까? 만일 화려한 옷을 입고 그 누가 보아도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으며 부유한 사람은 정성을 다하여 맞이하면서도 옷이 남루하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다하지 않는 차별이 우리에게 있다면, 오늘 본문 4절이 묘사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죄,’ 곧 ‘악한 생각으로 최후의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스스로 올라가 앉는 반역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신뢰하는 분명한 믿음이 있다고 하여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죄 – 곧 악한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죄 – 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 힘 없고 가난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그 어디에 하소연할 수 없는 그러한 분들에게 더욱더 의도적으로 여러분의 관심을 집중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까지도 감내하였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회당에서 부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였던 것처럼, 믿음으로 신대륙을 개척하며 세계 초강대국을 이루었던 믿음 좋았던 미국의 백인 개신교인들이 인종차별에 앞장섰던 것처럼, 우리 역시 교회 안에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는 커다란 잘못을 범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최후의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나 스스로 올라가는 무거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시는 하나님 

야고보서는 교회 안에 있는 차별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행동은 그저 하나의 잘못을 저지르는 것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경제적인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가난의 역설에 대해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5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가난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누구를 통해 이루어집니까?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비단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구약성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주제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그저 ‘가난한 자’라고 되어있지만, 구약성경의 전통에서 ‘가난한 자’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면서도 그 마음으로부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경건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만, 그래서 회당에 올 때 무엇하나 아름다운 장신구를 걸치지 못하고 남루한 옷을 입을 수밖에 없지만 마음으로부터 마음으로부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경건한 사람들로부터 이 땅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여러분의 마음에 반론이 생기겠지요.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날 수 있는가? 가난한 사람이든 부한 사람이든 상관 없이 누구든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이 생각하면서 성경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구별하는 구절들을 애써 외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러한 생각에 대해 명확히 답을 줍니다. 

오늘 본문 6절과 7절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 부자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 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말씀드린 것처럼 야고보서를 받아보게 되는 독자는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아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을 박해한 사람들이 누구였을까요?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라있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부유한 사람들 가운데,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오늘 본문 2절과 같이 초신자로 교회를 찾는 경우도 있지만, 오늘 본문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부유한 자들은 교회를 억압하고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들이다. 7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은 [부자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서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그 아름다운 이름을 – (어떻게 하나요?) 비방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6절과 7절이 묘사하는 부자들은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부자들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회당에 들어온 부자들을 대하는 성도들의 태도를 지적하면서 부자들의 특징을 이야기하는 본문이에요. 그러므로 6절과 7절이 이야기하는 부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교회 밖의 부자들이 아니라, 이미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곧 초대교회 성도들이 부자들이라고 환영을 하고 환대를 했던 바로 그 교회 안의 부자들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6절과 7절은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과연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이 교회에 출석한다고 그들을 통해 교회가 부흥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 같은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헛된 기대에서 벗어나라.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교회를 어렵게 하고 복음의 진보를 막는 주체다. 

참으로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설교자로서 오늘 본문인 야고보서의 말씀이 이야기하는 그대로 전할 수 밖에 없어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 그래서 어디를 가든 사람들로부터 환영받고 대접받는 사람들, 그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믿음을 박해하는 사람들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명백한 주장이에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지나오셨던 삶의 여정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여러분에게 풍성한 재물이 있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궁핍하고 가난하고 약했던 적도 많이 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만을 붙잡고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하루하루 살아오셨기 때문이 아닌가요?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지나온 역사도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우리 교회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 우리 교회에 그 누구와 도 비교할 수 없는 거액의 헌금을 하는 분들이 계셨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우리 교회에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굉장히 높은 자리에 올랐던 분들이 계셨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보다는 가난한 사람들, 약한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어디에 하소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매일매일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은 궂은일이라도 먼저 찾아가 헌신하고 봉사하셨던 분들이 요소요소에서 수고하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의 역사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지만 약하지만 그래서 아무런 힘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만을 붙잡고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존 위슬리의 중대한 결정

영국으로부터 시작된 감리교 운동의 선구자였던 존 웨슬리가 감리교 운동을 시작할 때 그의 마음 속에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조 웨슬리의 출신 성분을 보면 그는 영국의 최고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영국의 최고 명문, 지금도 세계적으로 최고의 명문 학교로 전혀 손색이 없는 옥스퍼터대학교(Oxford) 출신입니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도 뛰어난 리더여서 학교 동료들과 함께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였는데 그 이름이 “거룩한 공동체”라는 뜻의 Holy Club입니다. 그러니 영국의 최고 인제들이 모인 옥스퍼드에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던 동료들로 구성된 Holy Club의 리더가 요한 웨슬리였던 것이죠. 그리고 이 Holy Club이 웨슬리가 주도했던 감리교 운동의 산실이었다는 데에는 그 어떠한 역사가들도 이견이 없습니다. 

그런데 존 웨슬리가 본격적으로 감리교운동을 시작할 때, 그의 마음에 깊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주로 교제하였던 Holy Club을 중심으로, 곧 영국의 상류층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감리교 운동을 시작하여 그 운동의 영향력이 전 영국에 미칠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이른바 Top-Down의 전략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당시 산업화로 도시와 공장에 내몰렸던 수많은 블루 칼라들과 몸을 부대끼며 그들과 새로운 부흥운동인 감리교 운동을 시작하여 그 영향력이 영국 사회의 상층부를 강타하도록 할 것인가? 곧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Bottom-Up의 전략을 선택할 것인가? 그 기로에 서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존 웨슬레는 자신이 익숙하였던 옥스퍼드 출신의 상류층보다 산업화의 그림자였던 공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새로운 부흥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역사는 존 웨슬리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지요. 

여러분, 여러분은 참으로 우리 교회가 오늘날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열방을 축복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은 참으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손에 들려 열방에 복음의 빛을 전하는 구원의 도구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은 세상의 부한 사람들, 세상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통해, 그들이 가진 재물과 그들이 가진 사회적 지위와 그들이 획득한 세상의 지식을 가지고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세상의 천하게 여겨지는 사람들, 세상의 어리석게 여겨지는 사람들, 곧 그 무엇도 내세울 것 없고 자랑할 것 없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부유한 자가 되지 마십시오. 영적으로, 그리고 심령으로부터 가난한 사람이 되십시오.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경건한 사람이 되십시오. 바로 그때 하나님을 여러분을 통해 일하십니다. 나아가 우리 교회를 방문하는 새가족을 그들의 외모나 그들의 옷차림으로 차별하지 마십시오. 아니, 오히려 허름한 옷차림의 약하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정성 어린 마음을 보여주십시오. 바로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펼쳐 보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시고, 곧 가난의 역설을 경험한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진리를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8-29)


  1. 야고보서의 저자, 독자, 저술 시기 및 장소에 대해서는 Douglas J. Moo, <야고보서>, trans. by 이승호, vol 16 of TNTC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46-48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2. www.youtube.com/watch?v=1q881g1L_d8 [본문으로]
  3. Philip Calyton, Transforming Christian Theology: For Church and Societ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9), 10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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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