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강해2020. 6. 12.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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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과 수다쟁이

기독교의 영원한 고전 가운데 하나인 <천로역정>이라는 책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은유적으로 풀어놓고 있지요. 존 번연이 기록한 <천로역정>에는 순례자인 크리스천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길에 신실(faithful)이라는 사람을 만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은 자신을 앞서가는 ‘신실’이라는 인물을 힘껏 찾아가 그의 매우 유익한 신앙의 대화를 나눕니다. ‘신실’은 자신이 겪은 수많은 어려움, 유혹, 모욕 등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그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고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신실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노래를 한 곡 부르기 시작하지요. 

거룩한 부르심을 좇아 순종하는 자들에게 
때마다 시험이 찾아오네 
육신의 평안을 갈망하는 수많은 유혹이 
쉼 없이 나를 공격해오니, 
때로는 유혹에 사로잡혀 
굴복당한 채 버려지는 구나. 
오, 주의 길을 가는 순례자들이여! 
항상 깨어 담대하게 유혹에 맞서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에는 시험도 찾아오고, 유혹도 찾아옵니다. 때로는 시험과 유혹에 넘어지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존 번연은 ‘신실’이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오, 주의 길을 가는 순례자들이여! 항상 깨어 담대하게 유혹에 맞서세” 그리고 마침내 ‘신실’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시험과 유혹을 넉넉히 이기게 하여 주신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런데,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이 ‘신실’이라는 이름의 사람을 만나 신앙의 유익한 대화를 하고 있을 때 그들 곁을 지나가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러 가지 유혹과 여러 가지 시험을 모두 이겨내었던 ‘신실’이란 사람까지도 거의 넘어트릴 뻔 했던 한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은 ‘수다쟁이’(talkative)입니다. ‘수다쟁이’는 하나님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거침없이 아름다운 언어들을 쏟아 놓습니다. 그러자 ‘신실’이라는 사람이 ‘수다쟁이’의 말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수다쟁이’와의 대화에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는 것처럼 그의 말을 믿고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이 ‘신실’이라는 사람이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영혼이 없는 육체는 시체나 다름없듯이,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말 또한 시체에 불과하지.
실천이야말로 종교에서는 영혼이나 다름 없다네.”

그리고 존 번연은 이 장면을 저술하면서 성경구절을 하나 인용하는데, 그 구절은 우리가 계속해서 묵상하는 야고보서의 핵심 구절, 곧 야고보서 1장 27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약 1:27)

여러분, 야고보서가 강조하는 참된 경건은 입술의 화려한 언어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존 번연이 ‘신실’이라는 인물과 ‘수다쟁이’라는 인물을 대조시켜 이야기하는 것처럼, 화려한 언변이나 능숙한 말이나 박식한 지식이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신실’이라는 사람의 입술을 통해 ‘수다쟁이’에 대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수다쟁이가 처음에 얼마나 득의양양했는지 기억하는가! 
무엇이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아니하고, 
그 누구를 만나든지 거칠 것이 없었도다! 
그러나 신실이 영혼의 은혜를 논하자
마치 달이 기울 듯 그도 허망하게 쓰러져 가는구나. 
영혼의 은혜를 모르는 자 모두 그와 같이 되리. 

입술로 제 아무리 교회 생활에 대해, 신앙생활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성경에 대해 줄줄 읊어대어도 그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신실하게 경건의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마치 달이 기울어지는 것처럼 한 순간에 그의 믿음도 넘어지게 되리라는 경고입니다. 


입술의 경건

오늘 본문은 경건에 있어 우리의 입술,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한 번 더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 주제가 되는 구절이 바로 2절에 등장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나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2절)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나”라는 구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건한 삶을 이루어나감에 있어서 사람들에 따라 다양한 영역에서 실수하고 넘어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에 따라서 쉽게 이기지 못하는 유혹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 경건에 장애물이 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명예에 대한 욕심이 경건에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취미생활이, 어떤 분들은 특별히 음식이, 어떤 분들은 술이나 담배가. 이렇게 다양한 영역에서 유혹을 받아 넘어지게 되더라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마다 경건한 삶을 위해 나아가다 보면, 다양한 영역에서 넘어지게 되는데 공통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영역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언어의 실수, 말의 실수입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곧, 사람들마다 다양한 영역에서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넘어지고 실수하는 영역이 어디라고요? 언어의 실수이고, 말의 실수입니다. 2절을 계속보십시오. 그런데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 전한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말에 술수가 없는 사람이라면 “능히 온몸도 굴레”를 씌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들은 재물에 대한 욕심, 다른 분들은 명애에 대한 욕심, 또 다른 분들은 술이나 담배, 또 다른 분들은 식탐이나 취미활동 등. 우리가 경건을 이루는 데 다양한 영역에서 유혹을 받아 실수도 하고 넘어지지만, 그러한 실수와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첫걸음이 있는데 그것은 입술에 대한 절제입니다. 언어에 대한 절제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실을 3 가지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첫째로 말의 입에 물린 재갈입니다.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3절)

인간이 길들인 짐승들 중에서 특별히 성공적인 사례가 바로 말이라고 합니다. 강아지 같은 경우는 크기가 작잖아요. 그런데 말은 얼마나 몸집이 커요, 그리고 특별히 야생의 습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동물이 말이랍니다. 그런데 그 말을 인간은 아주 작은 하나의 도구, 곧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을 통해 길들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말로 하여금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이것이 목적입니다. 인간에서 순종하게 하려고 입에 재갈을 물린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입술을 제어한다면, 마치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처럼 우리의 입술을 제어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언어를 제어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온몸과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의 시작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언어를 절제하는 것, 우리의 입술을 절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동일한 내용을 설명하는 두 번째 비유는 선박의 방향을 정하는 작은 키입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4절)

여기에 등장하는 배는 작은 돛단배가 아닙니다. 거대한 유람선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웬만한 광풍에는 끄떡도 없고요, 바다 위의 얼음도 다 뚫고 나아가는 거대한 유람선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거대한 유람선이라도 그 배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조그마한 키, 선장이나 선원의 손에 잡혀있는 조그마한 키로 거대한 유람선이 나아갈 방향이 정해진다는 말씀입니다. 4절에서 특별히 관심을 기울일 단어는 “사공의 뜻대로”입니다. “지극히 작은 키로서”, 그 다음에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사공의 뜻대로” 운행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입술, 우리의 언어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기만 한다면 우리의 몸,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조롭게 항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제어하고, 우리의 입술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으면 마치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린 것처럼, 마치 거대한 유람선을 작은 키가 조절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동 모두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의 삶으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제 아무리 경건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더라도 우리의 입술을 제어하지 못하면, 우리의 언어를 제어하지 못하면 그 모든 경건을 위한 노력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바로 그 사실을 보여주는 비유가 오늘 본문에서 세 번째로 등장하는 비유, 곧 많은 나무를 태워버리는 불의 비유입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5-6절)

6절을 다시 보십시오. 제어할 수 없는 입술, 제어할 수 없는 언어, 제어할 수 없는 혀는 곧 무엇입니까? “불”입니다.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 곧 경건을 위한 수레바퀴를 다 불살라버립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르는 불이 얼마나 무서운지 우리의 입술과 우리의 혀가 내뿜는 불의 출처를 어디라고 이야기합니까?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입술에 경건이 전혀 없는 사람, 언어를 조금도 제어할 수 없는 사람, 그래서 입술에서 불을 뿜는 사람이 다른 영역에서 제 최선을 다해 경건을 연습한다면 하나님은 그의 경건을 기쁘게 받으실까요? 오늘 본문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입술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경건에 이를 수 없습니다. ‘내가 말만 조금 세게 말하지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성경은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다른 영역은 사람들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입술의 경건은 예외가 없습니다. 입술이 먼저 경건하지 못하면, 여러분의 삶 전체도 경건할 수 없습니다. 


혀를 제어하는 지혜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우리 삶의 경건, 우리 온몸의 경건은 어디로부터 시작할까요? 바로 우리의 입술로부터 시작됩니다. 제 아무리 경건한 삶을 위해 노력을 해도 입술을 제어하지 못하면 그 모든 노력을 허사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입술을 제어할 수만 있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경건의 항로에 접어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입술의 경건을 이룰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잠언에 등장합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 10:19) 

입술의 경건을 이루는 단 하나의 방법, 말을 적게 하시는 겁니다. 말을 안 하면 더 좋습니다. 최근 어느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교회 안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질문하고는 이렇게 답하셨어요. “교회 안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전화를 걸 때마다 언제나 통화 중인 사람이다.” 마치 <천로역정>에 나오는 ‘수다쟁이’(talkative)와 같은 사람들이지요. 말이 많으면 나의 영혼을 파괴하고, 교회 공동체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침묵하는 사람, 침묵 가운데 하나님과 깊이 대화하는 사람에게는 경건이라는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중세 수도원에서 사용하였던 경건 훈련의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침묵입니다. 침묵이에요.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침묵 속에서 내 안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잠잠한 음성을 들을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존경받는 고대 교부 가운데 한 분이신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을 때는 당신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다.” 

어느 성자는 말을 하기에 앞서 늘 스스로에게 세 가지 질문을 먼저 던졌다고 하지요? 첫 번째,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 사실인가?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다면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가? 사실이라도 덕을 세우지 못하면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 꼭 내가 해야 하는가? 사실이고 그것이 덕을 세운다 하더라도 꼭 내가 해야 할 말이 아니라면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한다면 할 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그러니 침묵하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감사의 말, 사랑의 말, 칭찬의 말은 참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 속에 그와 같은 말은 그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 알고 계시잖아요. 그러므로 잠언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 10:19)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입버릇처럼 이렇게 기도하잖아요.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 19:14)

특별히 다윗은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악인이 자신의 눈 앞에 있을 때 더욱 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시편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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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