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2020. 6. 16.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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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며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성경의 첫 번째 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장 1절)는 이와 같은 믿음을 천명한다. 창조주와 주권자에 대한 신앙고백은 세상을 향한 신앙인의 야심 찬 비전을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주권을 행사하시는 대상은 온 우주 만물이기에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삶이나 종교계라는 좁은 경계선에 갇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중세 유럽과 같이 기독교가 세상의 권력을 획득하는 것은 결코 기독교의 비전이 될 수 없다. 다만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과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지성의 제자도>(Mere Discipleship, 한글 번역서의 제목에 '지성'이라는 단어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지성은 흔히 인격의 전체가 아닌 일부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에서 주장하는 제자도의 모습이다. 

맥그래스는 지식인 혹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기독교 정신이 어떻게 자신들의 전문 영역에 빛을 비추는지를 고민하고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신학적 지식과 전문적 실력으로 이 두 영역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p. 34)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자신이 주장하는 제자도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이미지를 차용한다. 

'기독교 정신'(Christian Mind)은 핸리 블레마이어즈(Harry Blamires)가 저술한 책의 제목이다. <지성의 제자도>를 번역한 노진준은 이 책의 제목도 <기독교 지성>이라고 번역하였는데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Mind라는 단어는 '이성'보다는 이성적 측면을 포함한 단어인 '정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블레마이어즈가 제시한 기독교 정신은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마음에 품고 세상을 바라보며 다양한 이슈에 대해 기독교적 대답을 제시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정신은 단순한 이성적인 작용이 아니라 전 인격을 통한 기독교적 헌신이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기독교 정신'이 제자도의 중요한 일부분이며, 오늘날의 기독교는 신무신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할 사명이 있다고 강조한다. 

'렌즈'(glasses) 17세기의 시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는 이렇게 노래했다. "유리를 보고 있는 한 남자 / 그의 눈은 그저 유리만 보네 / 하지만 유리 너머를 보고자 한다면 / 하늘을 찾게 되리라"(p. 53)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위의 시를 인용하며 기독교 진리 혹은 신조를 '유리'에 비유한다. 신조나 신앙고백서에 붙들려 있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 진리는 하나의 렌즈이기에 세상을 보다 가까이, 그리고 정확히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16세기 종교개혁가 존 칼뱅은 성경을 안경(glasses)에 비유했는데, 인간의 이성으로는 만물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르게 볼 수 없기 때문이요, 성경이라는 안경을 쓰면 우주 만물을 분명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칼뱅의 설명을 왜 인용하지 않았는지 의아했다. 

'발코니'와 '길'은 존 맥케이(John Mackay)가 <기독교 신학 서론>이라는 책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발코니는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이 길에서 일어나는 일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장소이다. 위에서 설명한 렌즈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발코니라는 이미지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곧, 집 안이라는 안전함이다. 발코니는 안전한 장소에 머무르며 발아래 펼쳐지는 세상을 응시하는 이미지다. 그러나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존 맥케이의 논거에 따라 참된 제자도의 위치는 발코니가 아닌 길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 제자도는 세상을 전망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고, 길 위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며 성도들과 함께 걸어가는 도상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중 귀 기울임'(double listening)은 존 스토트(John Stott)의 선교학을 형성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기독교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서는 안되고 동시에 세상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존 스토트는 '이중 귀 기울임'을 선교학뿐 아니라 설교학에도 적용하는데, 그의 설교학 저서 <두 세계 사이에서>(Between Two Worlds)의 제목이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존 스토트를 자신이 주장하는 제자도를 실천했던 한 사람으로 소개하면서 '문화적 번역이라는 예술의 달인'이라고 존 스토토를 극찬한다.(p. 152)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여러 사상가와 그들의 개념을 차용하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었던 인물은 C. S. 루이스인 듯하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는 독자라면 맥그래스가 C. S. 루이스의 한 글귀를 수차례 반복하여 인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글귀는 이것이다. 

"나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믿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C. S. 루이스도, 그리고 알리스터 맥그래스도 태양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그 자체로 영광스럽지만 온 세상에 빛과 열을 내뿜는 기독교의 확장성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기독교가 공적 영역에서 위축되면서 점차 기독교만의 세계로 게토화 되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복음으로 세상을 비추며 냉랭한 이 세상에 복음의 온기를 발하기를 열망한다. 이 열망은 C. S. 루이스나 알리스터 맥그래스만이 아니라, 이 시대 복음의 사역자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의 열망이다. 

"자신을 신학자로 여기는 사람들은 책과 강의, 설교를 통해 어떻게 이 진리들을 표현할지를 오랫동안 힘들게 숙고해야 한다. 그렇다. 나는 '설교'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설명할 수 없는 풍성함을 설교하고 싶은 열망 없이 어떻게 기독교 신학을 공부할 수 있단 말인가!" (p. 167) 

지성의 제자도
국내도서
저자 : 앨리스터 E.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 / 노진준역
출판 : 죠이북스 2019.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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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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