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2020. 6. 16.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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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기도의 가장 좋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라기보다는 ‘기도의 중보자’가 되시는 분으로 받아들입니다. 성경은 많은 기도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중보기도 하였습니다. 야곱은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였는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의미로 ‘이스라엘’이라는 별명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모세는 민족을 위하여 여러 차례 40일 금식기도를 하였으며, 사무엘은 민족을 위한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 외에 얼마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더없이 좋은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들은 얼마나 바르고 합당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까? 우리가 본받을 만한 훌륭한 기도의 사람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며, 우리가 배워 유익할 만한 기도의 방법도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지금까지 열거한 사람들, 혹은 그들의 기도와 같은 선상에 두기를 거부합니다. 아무리 많은 기도의 사람들이 있고, 아무리 많은 기도의 지침이 있을 지라도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모세가 회막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회막이 어떤 곳이었는지 아십니까? 영어성경(CEV)은 회막을 “meeting tent”로 적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회막이란 “만남의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와 누구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특히 모세를 만나신 장소가 바로 회막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그런데 그 다음 11절의 말씀은 더욱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약속 장소, 곧 “meeting tent”였던 회막에서 하나님과 대화하였는데,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함께 있을 때처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다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를 조금만 더 읽어 보면 모세가 얼마나 깊이 하나님과 대화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또 등장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이 적힌 두 돌판을 받아 들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광채가 나는 것입니다.(출 34:29) 얼굴의 광채가 얼마나 강했는지 모세는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이만하면 모세가 하나님과 정말 깊은 영적 교감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우리 가운데 모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하나님과 더불어 마치 친구와 함께 있는 것처럼 말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광채가 내 얼굴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부러운 마음이 드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 히브리서는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9:8)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첫 장막, 곧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만들었던 성막의 제도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내용은 모세의 율법으로는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아무리 회막에서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성막을 지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하였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주시는 약속,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히브리서는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우리는 모세 시대 만들어진 회막이나 성막, 혹은 여러 가지 제사의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가지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었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빠로 모시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참고 갈 4:6) 

또한 모세는 하나님과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였을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빛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에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영광은 이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율법의 시대에는 모세가 자기 얼굴에 나타나는 광채를 수건으로 덮어야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새로운 약속, 곧 복음에 의한 영의 직분에는 더욱 큰 영광이 있기에 수건으로 덮을 필요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우리에게 이점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후 3:15-16) 모세는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여러 번 40일 금식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에 다른 어떠한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며 그 어떤 수건도 그 찬란한 영광의 빛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누구의 공로입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모세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에, 하나님을 당당하게 아빠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기도의 중보자로 확신하기에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저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 제자들과 성만찬도 나누셨고, 또 그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섬김의 도를 직접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얼마나 진지하고, 얼마나 엄숙한 분위기였겠습니까? 그날 저녁 예수님은 진심을 다하여 한 마디 한 마디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전해주고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은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 예수님께서 진심으로, 진심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말씀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분명히 약속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받을 것이요, 우리에게 기쁨이 흘러넘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이런 말씀도 덧붙이십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요 16:26) 예수님께서 굳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는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조금 서운하게 들리십니까? 만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내게 서운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약속을 백퍼센트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온 마음으로 믿지 못하기에 “그래도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한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내 기도의 중보자로 확신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누구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모세가 하나님과 가까이서 기도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기도의 성자들이 있을 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언제라도 하나님은 우리 앞에 나의 아빠로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고 알려줍니다. 요한복음 17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모든 말씀을 마치신 직후, 제자들과 이후 예수님을 믿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이니라”(롬 8:26)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의 기도, 성령님의 기도, 다른 사람들의 중보기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여러분들이 되지 마십시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주시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여러분들의 삶을 위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아니 오히려 여러분들이 주변의 이웃들을 위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는 기도의 용사가 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며 영적 전투의 좋은 군사로 나설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이미 갖추어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자, 이제 당당히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우리에게는 기도의 무한한 특권, 곧 예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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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