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시리즈설교2020. 6. 16. 17:15
반응형

우리는 지난주, 로마서 1장 15절과 16절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복음을 전하기 원했다는 사실을 묵상했습니다. 바울은 왜 이미 예수님을 알고, 믿고, 구원받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다시금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까? 로마 교회 성도들이 복음의 감동, 구원의 감격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면 내 마음에 기쁨이 샘솟듯 솟아납니다. 너무나도 즐겁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감히 눈을 들 수조차 없는 죄인인데 나의 그 많은 죄악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깨끗해졌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이때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좋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고, 성경 읽고 내가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이것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기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시간이 오래 흐르면 내 마음에 불행히도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복음의 감격이 껍데기만 남아요. 복음이라는 것을 알지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알지요.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내 마음에 그 감격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의 신앙생활은 은혜가 아니라 율법이 됩니다. 감격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것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실 것 같고 교회 사람들이 흉볼 것 같아서 합니다. 그러니 은혜가 아니라 율법이죠. 

신앙생활이 오래되면서 내 마음에 있던 구원의 감격이 사라집니다. 그 과정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은 나의 신앙생활이 은혜에서 율법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누가복음 10장의 주인공 마르다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가 마르다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 10장 38절 이하의 말씀에 대해서 적지 않은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의 본문이 교회에서 봉사하고 일하는 것보다 말씀을 듣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더 고상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가르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것은 오해입니다. 어느 누가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모습을 본받는다고 자신의 가정을 돌보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늘 본문의 참된 의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와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한 율법사 사이에 있었던 대화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 율법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이웃의 참된 의미를 보여주시죠. 이웃의 참된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웃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르다는 분명 이웃 사랑의 실천가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8절 말씀을 우리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죠. 그것은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지만 그들에게 치료비를 받지 않으셨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선포하셨지만 그들에게 강사료를 받지 않으셨다고요. 그러니 예수님과 제자들이 무엇을 먹고 살겠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시죠? 한 번은 제자들이 길을 가면서 너무 배가 고프니 길 가에 있던 밀 이삭을 비벼서 먹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죠. 제자들이 배 부르게 먹으면서 예수님을 따라다녔다면 굳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손으로 비볐겠어요? 배가 고픈 거죠. 그렇게 허기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마르다가 영접한 겁니다. 

자,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지금 복음을 전하면서 기진맥진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마르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마르다는 예수님과 깊은 교제가 없었던, 말씀은 뒷전이고 그저 일만 하는 경건하지 못한 여자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랑의 실천가입니다. 


마리아와의 비교의식 

그런데 마르다의 동생이 등장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누가복음 10장 39절과 40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우리 시대에도 언니가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여동생이 귀한 손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면 언니 마음에 불평이 생깁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0장의 이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의 사건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일종의 노예이고, 남성의 재산이었습니다. 당연히 율법 교육의 대상자가 되지 못합니다. 당시 랍비들은 여자에게 가르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여자들과 대화하는 것조차 회피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어느 랍비보다도 존경받는 예수님께서 자기 동생 마리아에게 집중해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마리아는 당시의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 남성과 대등한 입장에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 곧 음식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는 마르다의 속이 뒤틀릴까요, 안 뒤틀릴까요? 당연히 뒤틀리죠. 

만일, 그날 마리아가 집에 없었다면 어떨까요? 만일 그랬다면 마르다는 기쁨으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대접했을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초대할 때에 마르다에게 기쁨이 있었잖아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마르다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자신의 마을로 들어오셨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급하게 나가서 예수님을 맞이했죠. 그리고 예수님과 그 일행을 급하게 자신의 집으로 모셨습니다. 왜요? 그 예수님이 너무 좋았거든요. 예수님에 대한 감격이 있었어요. 그 감격으로 말미암아 마르다는 예수님과 그의 열두 제자, 그리고 그 외에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 수 십 명을 기쁨으로 대접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가죠. 그런데 문제는 뭐예요? 자기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것이 문젭니다. 

여러분, 인간의 마음이 참 연약합니다. 우리는 한 때 은혜를 받아요. 예수님이 너무 좋은 거죠. 그분에 대한 감격이 우리 안에 넘쳐흐릅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순간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안에 있는 은혜와 감격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구원의 감격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을 하루 빨리 제거하고 싶어 하는 존재가 누구이겠습니까? 사단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율법으로 신앙생활을 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존재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사단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무기를 개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비교의식입니다. 은혜받았다고 생각되면, 꼭 다른 사람과 비교할 일이 생깁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받은 은혜를 한 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는 함정을 파놓은 거죠. 

누군가 예수님을 믿고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에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하던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에 상처를 입고 신앙생활을 멀리합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의 열정이 자연스럽게 식을 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뭐죠?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 은혜를 받은 사람만큼 교회 안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러면서도 교회 안에서 대접받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오랜 시간 신앙생활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막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은 성도가 교회 안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다가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죠. 내가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교회 안에서는 대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있던 은혜와 감격이 다 사라지고, 신앙생활은 은혜가 아니라 율법이 되어 버립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을 축복하기 원합니다. 여러분, 먼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으십시오.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다는 사실로 감동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그 뒤에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사단은 언제라도 우리의 은혜를 빼앗아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다시금 여러분을 축복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빼앗기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과의 비교의식 속에서 은혜를 소멸하지 마십시오. 


잘 보이려는 허세 

마르다가 예수님과 그 일행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마르다의 행동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부터 나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동네를 찾았다는 그 감격 속에서 나온 자발적인 행동이잖아요. 그런데 마르다의 이 은혜로운 행동이 율법의 행동으로 뒤바뀝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이미 살펴본 것처럼 마리아와의 비교의식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40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마르다가 살고 있는 마을로 오셨습니다. 그 소식을 듣지 마르다가 급히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모셨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계획되지 않았던 식사 손님이 한 분이라도 오게 되면, 주부들은 그때부터 분주해지죠.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니고, 수 십 명이 되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급하게 자신의 집으로 모셨으니 마르다는 급한 일이 얼마나 늘어났겠어요. 그러면 음식 종류가 조금 적어도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우리와 같은 밥에 반찬을 먹는 것이 아니니, 떡만 나누어도 돼요. 그런데 마르다는 많이 준비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많다는 것은 수십 명이 먹을 만큼 많이 준비한다는 뜻이 아니라, 많은 종류의 음식을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대답으로 더욱 분명해 집니다. 41절입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여기서 '한 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분명한 의미 하나는 음식의 한 가지 종류입니다. 마르다는 짧은 시간에 다양한 음식을 준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세입니다. 이미 급하게 손님이 초대되었고, 수 십 명의 손님이 이미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몇 가지만 하든지 하나만 해도 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것으로 만족하십니다. 마르다의 형편을 뻔히 알면서 예수님께서 음식 종류가 왜 이렇게 적으냐고 나무랄 예수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르다의 마음에, 처음 초대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후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해드리고 싶었던 거지요. 그것 때문에 마음이 분주해졌어요. 그리고 급기야 예수님에 대한 감격에서 시작된 은혜의 행동이 그 많은 음식을 다 해야만 하는 율법의 행위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형편과 처지를 무시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면 족합니다. 그러한 우리의 사랑을 우리의 형편에 따라 표현하면 됩니다. 그것이 때로는 화려할 수도 있고, 때로는 소박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그것보다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마르다의 형편을 뻔히 아는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과 그 일행을 마른 떡 조각으로 대접하면 어때요? 그 마음을 예수님이 기뻐하신다고요. 그런데 마르다는 더 많은 것을 하려고 했습니다. 처음의 의도는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마음이 분주해지고, 결국에는 처음의 감사와 감격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는 이러한 마르다의 실수가 오늘의 한국교회 안에도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교회가 아름다운 건물을 건축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교회가 최고의 음향과 영상과 조명 시설을 갖출 필요는 없어요. 형편에 따라 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 우리 주님을 향한 사랑이 변치 않는 게 중요해요. 그런데 다른 교회와 우리 교회를 비교하죠.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비교합니다. 다른 사람은 예수님께 양고기로 대접해드렸는데, 내가 어떻게 마른 떡으로 예수님을 대접할 수 있는가라고 경쟁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었으나 나중에는 사른 사람들과의 경쟁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분주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을 다시 한 번 축복하기 원합니다. 여러분, 먼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으십시오.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다는 사실로 감동하십시오. 뿐만 아니라 우리 예수님께서는 나의 형편을 다 아시고, 나의 조그마한 정성에도 감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위로하시는 예수님

이 시간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을 마지막으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41절과 42절입니다. 우리 다 함께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저는 이 말씀에서 마르다와 마리아 두 사람을 모두 아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먼저는 마르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마르다야 마르다야" 여러분, 이것은 질책의 어조가 아닙니다. 간절함이요, 안타까움입니다. 마르다를 향한 안타까움이요, 마르다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면서 마르다의 마음을 위로하시죠.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여러분, 지금 마르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마리아의 일손일까요? 아닙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길 원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10명의 일꾼, 100명의 노예가 있어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다른 일들을 만들면서 마음이 분주해집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그러한 마음을 위로하십니다. 어떻게요?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으로도 예수님은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많은 일을 해야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것으로 우리 하나님은 기뻐하세요. 만족하신다고요. 그러므로 주님의 일을 한다고, 교회의 일을 한다고 마음이 분주하신 분들은 마르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니라" 

또한 예수님은 마리아도 위로하십니다. 마리아가 지금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당시는 2천 년 전 유대사회입니다. 제 아무리 마리아라 할지라도 여성이 노예나 재산으로 취급받고, 교육의 대상자가 될 수 없던 시절에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집중적으로 듣고 있는 것이 마음에 불안할까요, 불안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불안하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외면할 수 없잖아요. 급기야 자기 언니가 예수님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뭡니까? 42절 뒷부분입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리아가 앞으로 주방 일을 하나도 하지 말고 무조건 말씀만 들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이후에도 마리아가 주방에서 일을 하죠. 집안일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일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이 기쁨은 빼앗길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은 누가 일을 하고, 누가 놀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인간들은 누가 일을 화려하게 했고, 누가 일을 소박하게 했는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 일을 할 때에도 은혜로 시작했던 일이 율법의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다릅니다. 마르다가 하루 저녁 일하는 것, 마리아가 하루 저녁 일하지 않는 것, 그것은 예수님께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마리아든 마르다든,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을 하든, 은혜로 하지, 율법으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질문하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신앙생활이 은혜입니까? 아니면 율법입니까? 여러분은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기쁨이 넘치는 자발적인 행위입니까? 아니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 같고, 또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있으니까 하는 타율적 행동입니까? 

만일 교회의 여러 가지 일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은혜가 아닌 율법으로 바꾼다면 일을 줄이십시오. 교회에 일꾼이 없다고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은 한 가지를 하더라도 율법이 아닌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율법이 아닌 은혜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다면 그것을 끝까지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 은혜를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마십시오. 

믿음이란 율법이 아니라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1) / 로마서 1장 15-17절 "복음, 하나님의 능력"

믿음이란(2) / 누가복음 10장 38-42절 "율법이 아닌 은혜"

믿음이란(3) / 이사야 7장 1-9절 "믿음이 아니고서는"

믿음이란(4) / 히브리서 11장 1-3절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능력"

믿음이란(5) / 마가복음 8장 27-35절 "십자가의 길"

믿음이란(6) / 다니엘 9장 1-2절 "믿음의 열매"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