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시리즈설교2020. 6. 1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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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명한 주간지인 <타임>(Time)은 매년 한 해 동안 있었던 사건들을 각 분야별로 구분해서 10대 뉴스를 선정하고 합니다. 2008년 종교계 10대 뉴스 가운데 1위를 차지한 사건이 여전히 기억에 납니다. 당시 1위를 차지한 사건은 종교계 안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서 <타임>이 표현한 영문 제목을 그대로 옮기면 “The economy trumps Religion”입니다. ‘경제라는 폐가 종교라는 폐를 이겼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자를 선출하는 경선에서 존 멕케인과 마지막까지 경쟁했던 사람이 마이크 허커비라는 목사님이었습니다. 허커비는 미국에서 나름대로 탄탄한 지지기반을 갖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공화당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존 멕케인에게 참패하고 말죠. <타임>은 그 사건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10월의 경선은 유권자들이 누구에게 표를 던질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국가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상태를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사람이 전체 미국인의 10%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여러분, 미국은 기독교 국가입니다. 유럽에서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신대륙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국가가 미국입니다. 그런데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서 영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전체 미국 인구 가운데 10%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보다 눈에 보이는 경제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그러하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한국은 기독교 국가도 아닙니다. 한국은 미국과 같이 기독교적 정신 위에 세워진 국가도 아닙니다. 그렇다 보니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서 영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10%는커녕, 5% 혹은 그 이하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보다 눈에 보이는 경제적인 요소를 더욱 중요하게 여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음을 중요하게 여기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교회를 평가함에 있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상태, 곧 이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크리스천 공동체의 특징을 갖추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고려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 곧 교회의 건물이나 시설 그리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의 숫자나 그들의 사회적 지휘를 고려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모두 크리스천이고 우리 교회는 크리스천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면서 그것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 


오늘 본문이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다 함께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정의입니다.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여러분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말씀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 말씀에 근거하여 저는 여러분들에게 선포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입니다. 여러분은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 곧 크리스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크리스천 된 여러분이 아직 크리스천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눈에 보이는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자, 나의 얼굴이 변해서 그 누가 보아도 우리 동네 최고의 미녀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자 나의 얼굴이 왕과 같이 빛나고, 제사장과 같은 인품이 흘러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나의 변화된 얼굴을 보면서 마을 사람들이 ‘야, 저분은 정말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구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실망스러워하는 것은 똑같다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를 크리스천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겉모양은 똑같습니다. 우리에게 제사장 같은 화려한 복장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왕이 쓰는 왕관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똑같아요.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던, 넌크리스천이 되던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크리스천이라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곧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말씀을 너무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족속이라고 부르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르시니, 제사장의 옷도 왕관도 없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나라라고 부르시니, 우리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선언하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꼭 눈에 보이는 변화가 일어나고, 꼭 눈에 보이는 재물이 내 손에 들어오고, 꼭 눈에 보이는 대학 합격통지서를 받고, 꼭 눈으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거액의 예금 통장을 확인하고, 꼭 직장에서 승진되었다는 통보를 받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크리스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크리스천입니다. 우리 교회는 크리스천 공동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과 환경과 처지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우리를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그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기에,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말씀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임을 믿습니다. 눈에 보이는 차이는 없지만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하나님의 축복이 바로 나의 것임을 확신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러한 믿음으로 성경이 소개하는 다양한 축복의 말씀을 믿음으로 여러분의 것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보지지 않는 것들의 증거


자, 우리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열왕기하 6장을 보면 아람 왕이 엘리사를 붙잡기 위해 군대를 파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람 왕이 군대를 보내면서까지 엘리사를 그토록 두려워했던 이유는 엘리사가 아람 왕의 전략을 미리 다 알고 그것을 북 이스라엘의 왕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람 왕은 엘리사가 살고 있는 도단에 군대를 파견합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살던 성을 완전히 포위하죠. 그 장면을 보면서 엘리사의 사환 한 사람이 엘리사에게 큰 일 났다고,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때 엘리사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죠. 그 사환의 눈이 열리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람의 군대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불 병거와 불말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 엘리사는 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람 군대를 구성하는 군인들의 눈을 어둡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를 잡기 위해 도단을 둘러싼 아람의 군대를 오히려 사마리아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람 군대의 눈이 열리도록 합니다. 아람 군대는 자신들이 큰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더 이상 아람은 북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처음에 아람 군대를 둘러싸고 있는 불말과 불병거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기도하자 그의 눈이 떠졌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그제야 불말과 불 병거를 볼 수가 있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에 하나님의 불말과 불 병거가 아람 군대를 공격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렇죠? 엘리사의 사환이 믿음의 눈이 열려서 그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불말과 불 병거를 바라보지 못하여도,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구성하는 군인들의 눈을 어둡게 해서 그들을 사마리아로 인도할 수 있었을 것이고, 아람 군대의 위협으로부터 충분히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엘리사는 굳이 자신의 사환이 눈이 열려 그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불말과 불 병거를 볼 수 있도록 했을까요? 

여기에 매우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아마 열왕기하의 이 사건은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 시대의 사건인 듯합니다. 북 이스라엘 왕 아합의 부인은 그 유명한 이세벨입니다. 시돈이라는 나라의 공주였던 이세벨로 말미암아 북 이스라엘은 온통 바알과 아세라라는 우상을 섬기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대에 엘리야의 활동으로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불이 내리는 놀라운 기적이 발생하죠. 그 외에도 엘리야와 엘리사로 말미암아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북 이스라엘에 가득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데 익숙한 북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기적을 본다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포위했던 열왕기하 6장의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사가 아람 군대의 눈을 어둡게 해서 그들을 사마리아로 인도한다 할지라도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북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우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 저 산을 가득 채운 하나님의 불말과 불 병거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언제나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눈이 없이는 제 아무리 많은 기적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분명한 증거가 있으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업에서 크게 실패했는데, 그 위기를 극복하고 사업이 번창하는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으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기적적으로 그 질병이 치유 받으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년의 경우라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이상형을 단 하나의 조건도 어긋남 없이 만나 결혼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어떠한 기적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갈멜산의 기적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대한 증거는 눈에 보이는 기적이 아니라 오직 믿음뿐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11장 1절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나의 마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들고, 그 믿음이 내 삶을 아름다고 행복하게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많은 기도의 제목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기도의 제목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지는 것은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이 응답하시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믿음의 성숙은 우리가 믿음의 눈을 열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일어납니다. 

끝으로 히브리서 11장 3절의 말씀을 우리 함께 묵상하기 원합니다. 우리 3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그렇습니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죠? 우리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기에 아는 것입니다. 동일한 논리로 히브리서 11장 3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보이는 것은 타나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 과거에도 다 눈으로 볼 수 있었고,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과거에 나타났던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이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아직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분명히 나타날 사실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크리스천 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선언하시지만 이 약속이 눈에 보이는 지금 당장의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세계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라거나, 무의미한 거짓말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이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우리의 인생을 바꿉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의 세계가 우리의 인생을 값지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바꾸는 유일한 지름길입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믿음이란(1) / 로마서 1장 15-17절 "복음, 하나님의 능력"

믿음이란(2) / 누가복음 10장 38-42절 "율법이 아닌 은혜"

믿음이란(3) / 이사야 7장 1-9절 "믿음이 아니고서는"

믿음이란(4) / 히브리서 11장 1-3절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능력"

믿음이란(5) / 마가복음 8장 27-35절 "십자가의 길"

믿음이란(6) / 다니엘 9장 1-2절 "믿음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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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