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시리즈설교2020. 6. 1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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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신앙에서 십자가의 신앙으로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에 의하면, 마가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부분을 구분하는 분기점이 바로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마가복음 8장입니다. 마가복음 8장이 마가복음 전체를 두 부분으로 구분하는 분기점이라고 평가하는 첫 번째 이유는 지역적인 특성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는 중요한 지리적 배경은 갈릴리와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8장까지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에서 활동하십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8장부터 10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시고, 마가복음 10장 이후부터는 예루살렘에서 주로 활동하십니다. 그러니 지역적으로 보았을 때, 마가복음 8장이 그 분기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와 예루살렘은 서로 지역이 다르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지명이 상징하는 바가 정반대입니다. 갈릴리는 이른바 소외계층, 빈민계층이 생활하던 지역입니다. 반면 예루살렘은 유대 나라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입니다. 갈릴리가 주변이라면 예루살렘은 중심입니다. 
마가복음을 순서대로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병도 고쳐주시고,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상의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반면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께서 유대 나라의 종교 지도자들을 서슴없이 비판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든 물건 파는 사람들을 쫓아내기도 하시죠. 결국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충돌하게 되고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십니다. 어디에서요?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마가복음 전체에 있어서 8장이 8장 이전의 사건과 8장 이후의 사건을 구분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이유를 한 가지만 더 소개하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마가복음 8장 이전까지 제자들은 예수님께 절대 순종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딸 오라' 말씀하시니 제자들이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8장 이후부터 제자들이 예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고 하니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는 베드로의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제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 곁을 떠나갑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마가복음 8장 이전까지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병 고쳐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마음을 위로하셨습니다. 그때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합니다.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여러분, 이것도 믿음입니다. 지금 당장 나의 눈에 무엇 하나 보이는 것이 없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도 중요한 믿음입니다. 지금 내 삶은 로마의 식민지 유대인의 삶을 살고 있고, 헤롯 왕의 폭정 속에서 고생 고생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마음의 위로를 얻고,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치료의 손으로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회복되고,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시는 물고기와 떡으로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도 중요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은 마가복음 8장 이전의 믿음입니다. 마가복음은 결코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신앙이 마가복음 8장 이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마가복음 8장 이후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이때부터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고 순종하는 일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섭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로운 말씀을 주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너무도 배가 고플 때 떡과 물고기를 풍족하게 나눠주실 때는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마가복음이 장말 이야기하고자 하는 믿음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길이지요. 

여러분의 믿음은 지금 어떻습니까? 마가복음 8장 이전의 믿음, 곧 은혜의 신앙입니까? 아니면 마가복음 8장 이후의 믿음, 곧 십자가의 신앙입니까? 마가복음 8장 이전,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시고, 음식을 나누어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전파하실 때조차,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과 수많은 무리들은 그 은혜로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으니 얼마나 귀한 신앙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거기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믿음이란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 그 사실을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마가복음 8장 27절 말씀을 우리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매우 중요한 문제 하나를 끄집어내십니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시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은 마가복음 8장 이전까지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병을 고쳐주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고,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8장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여러분, 이 질문이 우리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만드는 질문입니다. 이슬람도 알라의 정의와 은혜를 믿습니다. 불교도 부처님의 자비를 믿고 열심히 기도하지요.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기에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합니다. 비슷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여기에 한 가지가 덧붙여집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능력, 혹은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도우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등으로만 이야기하고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건 불교의 믿음이 되고, 이슬람의 믿음은 될지라도 기독교의 믿음은 아닙니다.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째 질문은 던지십니다. 29절입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예수님께서 구세주요, 구원자인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믿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떡 주고, 물고기 주시기 때문에 그분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은혜의 말씀을 주시고 책망과 저주의 말씀은 주지 않으시기에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시기 때문에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이 아닌 책망과 경고의 말씀도 주십니다. 때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궁핍한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두실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아픔, 우리의 슬픔, 우리의 눈물을 못 본 척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포기한다면 그것은 마가복음 8장 이전의 믿음에 머물러 있는 것이요, 마가복음 8장 이후의 믿음으로 나아가지는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이지요. 


그리스도의 길, 십자가의 길 

마가복음 8장 31절부터 33절입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믿음은 너무도 귀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모르고 있었던 것, 아니 크게 오해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성공과 영광과 능력의 길이라는 착각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31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물론 그 뒤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32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내 놓고’라는 말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 불러놓고 이야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열두 명의 제자들만 있는 자리지만 돌려서 이야기하지 않고 분명하게 이야기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신 말씀은 비유적인, 어떤 영적인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자기가 고난을 받고, 버림 당하고, 죽는다고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셨다는 거지요. 그러니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여러분, 베드로의 모습을 잘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사람입니다. 가족을 떠났습니다. 재산도 버렸습니다. 어부라는 직업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단 몇 발자국이지만 걸을 수 있었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No'라고 대답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가 지금은 예수님께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항변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십자가의 길은 아니라는 거죠. 

여러분, 교회 안에서 믿음이 좋다고 평가받는 분들에게 베드로와 같은 모습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믿음이 무척 좋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주신 구세주요,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조금의 의심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를 믿어 나는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사실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요. 어디 그뿐입니까?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확신이 있지요. 그리고 믿음의 눈을 활짝 열어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영적인 일들을 바라보고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리고 교회의 목사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든 절대 충성입니다.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고, 교회에서 중요한 직임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뭐, 대장이나 부장이라는 말이 들어간 직임은 다 해요. 목사님께서 무엇을 맡기듯 '아!! 제가 순종해야지요, 순종하는 마음으로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교회에서 믿음 좋다고 평가되는 분들이 절대 순종하지 못하는 딱 한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목사님께서 연말에 새해 계획을 세우면서, 혹은 당회가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인사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그렇게 믿음 좋다는 분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집사님, 혹은 권사님, 혹은 장로님, 내년에는 교회 봉사를 좀 쉬시죠'라고 이야기하면 순종할 수 있을까요?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분이 진짜 믿음의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봉사를 쉬라는 말을 어떻게 듣는지 아십니까? ‘집사님, 이제 교회를 옮기시죠’라고 듣습니다. 자신이 교회에서 믿음 좋다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자신이 교회를 위해 많이 봉사한다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영광을 내려놓고 그저 평범하게 예배만 드리고, 모임만 참석하면서 신앙생활하라고요? 내가 지금까지 교회를 위해 어떻게 헌신하고 봉사했는데 이제 와서 나를 찬밥신세, 새신자 보듯 하느냐는 거죠. 여러분, 그러한 사람들이 이른바 ‘교회 안의 섭섭이’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란의 원인이 뭔지 아십니까? 섭섭한 마음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당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나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은 너무도 섭섭하고, 견디지를 못합니다. 우리 교회는 어떠한 일이든 했으면 하니까 그와 같은 일이 없다고 반문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다시 반문하죠. 정말 우리 교회에는 섭섭한 마음을 가지신 분들이 한분도 안 계시나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개척교회라도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교회 안의 섭섭이’는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분란을 일어납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무엇 때문에 섭섭하다고 말은 하지 않아요. 그러나 섭섭한 게 문제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시키시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힘든 일을 시키셔도 수제자라는 입지, 예수님의 칭찬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라는 비참한 현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존심이 무너지면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교회 안에서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입니다. 


제자의 길, 십자가 

우리 마가복음 8장 34-35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하였더니,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결국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십자가의 길은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길일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크리스천의 길이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 크리스천들 역시 예수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그 길은 곧 우리가 가야 할 그 길입니다. 

물론 이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고, 이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분들에게는 마가복음 8장 이전의 믿음, 마가복음 8장 이전의 신앙이면 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지 10년이 되고, 20년이 되었는데 여전히 마가복음 8장을 넘어서지 못하는 수님을 계십니다. 그러면서 마가복음 8장 이전의 복음만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기를 버리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차피 우리가 실천할 수 없는 이상일 뿐이라고 괴변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여러분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크리스천이 되고자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넘어야 우리는 마가복음 8장 이전의 믿음에서 마가복음 8장 이후의 믿음으로 넘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1) / 로마서 1장 15-17절 "복음, 하나님의 능력"

믿음이란(2) / 누가복음 10장 38-42절 "율법이 아닌 은혜"

믿음이란(3) / 이사야 7장 1-9절 "믿음이 아니고서는"

믿음이란(4) / 히브리서 11장 1-3절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능력"

믿음이란(5) / 마가복음 8장 27-35절 "십자가의 길"

믿음이란(6) / 다니엘 9장 1-2절 "믿음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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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