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인문학2020. 6. 17.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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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일교회 청년부의 2009년 여름수련회 특강 원고입니다. 

 

2009년을 살고 있는 신일교회의 청년들이 교회의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우리가 소속되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교회’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함이다. 역사야 말로 오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이다. Karl Heyssi는 「세계 교회사」 서문에서 자신이 서술하려는 교회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교회사에서 문제 삼고 있는 교회란 교의학적(종교적) 의미에서 표현된 교회나 교의학적 의미에서의 교회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도 일치하지 않는다.”[각주:1] 우리가 이해하려는 신일교회와 한국 교회의 역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성경이 가르치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 교회의 모습이 궁금하고 역사를 통하여 신일교회의 오늘을 정확히 바라보고 싶은 것이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이 기독교로 회심하기까지, 교회는 당시 세계를 다스리던 로마의 박해를 받았다. 당시 교회의 신앙생활은 지하 카타콤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지하로 끌어내리는 일이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던 크리스천들의 모임, 곧 교회는 부족하지만 성경이 추구하는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313년 콘스탄틴이 밀라노 칙령을 공포함으로써 기독교는 지하의 종교에서 벗어난다. 이때부터 기독교 예배는 궁정 의전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황제에 대한 존경의 표시인 향불이 교회 예배에도 사용되었고, 교역자들이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했으며 성가대가 발전하였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순수한 믿음과 신앙만을 추구하는 사람들보다는 기독교 제국인 로마에서 출세하기 원하는 이들로 북적되기 시작하였다. 

4세기 후반, 5세기 초에 활동했던 어거스틴은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하기에 이른다. 현재 ‘보이는 교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 중에도 가라지와 같은 이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보이는 교회’에는 속해있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에는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로서 후일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모두 포함한 ‘보이는 교회’와 의로운 사람이 그 핵심이 되는 ‘보이지 않는 교회’ 사이를 구별함으로써 “제도적 교회 개념이 더 이상 타당성이 없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각주:2]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천상의 교회가 아니라 눈에 분명히 보이는 지상의 교회가 아닌가? 이 시간만큼은 기독교의 교리가 읊어대는 교회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 교회와 신일교회만을 이야기하자. 


청년의 눈으로 읽는 신일교회의 역사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내한으로 공식적으로 출발한다. 그로부터 2009년까지, 120여 년의 한국 교회 역사를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하라면 1945년이 그 분기점이다. 한국 교회의 역사는 1945년을 기점으로 큰 단절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1885년 선교사들의 내한으로 시작된 한국 개신교는 1910년대까지 크게 성장하였다. 사회의 지도층 가운데 조선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지켜보면서 기독교 정신 속에서 구국의 희망을 보았던 이들이 많았다.[각주:3] 한편, 병원과 학교를 설립했던 선교사들의 노력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의료 및 교육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던 이들이 기독교에서 안식처를 찾는 계기가 되었다.[각주:4] 그리고 그 위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나타나 기독교는 한국 땅에 전파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부흥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부흥은 교회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선봉에 설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그 하나의 열매가 1919년에 일어났던 3․1 독립운동이다. 

그러나 1920년대 조선인들의 눈으로 볼 때,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평화적 반폭력의 방법을 채택하였던 3․1 독립운동은 실패였다. 민족은 여전히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 아래에 있었고 일본 제국주의는 문화 정치라는 이름으로 더욱 철저한 통제와 감시를 실시하였다. 3․1 독립운동의 실패 원인이 기독교의 반폭력적 방법에 있다고 평가한 당시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반기독교세력이 되어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폭력을 통한 혁명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의 공격,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기독교 분열 정책이 어우러져 기독교는 1920년대부터 크게 쇠퇴한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점한 이후 줄곧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 제국주의는 신사 참배를 더욱 강하게 요구하였고, 이에 불응하였던 기독교 학교들이 문을 닫아야 했다. 더 이상 신사 참배를 거부할 경우 교단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조선의 거의 모든 교단이 신사 참배를 공식적으로 가결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기독교는 완전히 붕괴하는데, 이것이 일제 시대 말기 한국 교회의 모습이었다. 

1945년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였고, 기독교는 이때 문자 그대로 ‘재건’(reconstruction)된다. 일제시대 본국으로 돌아갔던 선교사들이 재입국하여 설교 활동을 시작하였고, 일제 말기 신사 참배를 가결했던 교회의 지도자들도 이제는 한국의 교회가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교회 재건의 강력한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 교회 역사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009년 지금까지 한국 교회 역사에 있어서 1945년과 같은 역사의 단절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한국 교회와 오늘의 신일교회를 알고자 한다면, 1945년 이후의 역사 흐름을 탐구해야 한다.[각주:5]

그런데 문제는 1960년 이후, 한국 교회는 진보와 보수의 양 극단으로 나뉘었다는 점이다. 1950년대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일치된 목소리를 내었다. 곧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이다. 그런데 1960년 4․19 혁명을 계기로 일부 크리스천들이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주장하며 사회구조의 개혁 및 변혁을 앞세우는 기독교의 진보진영을 형성하였다.[각주:6] 이후 군사정권의 등장과 남북 분단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진보와 보수의 양 극단으로 나뉘어 서로에 대한 편협된 생각으로 한국 교회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하였다. 

진보와 보수의 극단적인 대립의 양상은 1980년대에 이르러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있던 기독교에 심각한 자기반성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먼저 진보진영의 기독교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한국의 민주화 운동 진영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여 강경한 투쟁노선을 견지하기 시작하자, ‘과연 기독교적 운동’이란 무엇인가라는 소위 ‘정체성 논쟁’에 빠져들고 만다. 아울러 보수진영의 기독교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며 기독교인으로서 정교분리 원칙만을 내세운 채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이 과연 기독교적 책임인가라는 소위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 문제’로 고민한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약 30년이 지난 2009년 오늘, 한국 사회 속에서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적 구분으로는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뚫어보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1945년 이후의 교회 역사에 대해서도 진보와 보수의 어느 한 가지 관점에 묶여 있다면 바른 역사관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진보와 보수의 구분을 뛰어넘는 새롭고 창조적인 관점으로 교회의 역사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1980년대 이후에 출생하여서 과거의 진보와 보수라는 관점에서 자유로운 청년들이다.[각주:7] 곧 2009년 현재 신일교회의 청년들이 신일교회의 역사를 바르게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신일교회의 창립과 한국 전쟁 

상술한 바와 같이 한국 교회의 역사는 1945년을 기점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해방 이후 한국 교회의 재건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재건을 위해 노력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한국 교회는 물론이요, 한국 사회 전체의 큰 비극이 일어난다. 곧 1950년 시작되었던 한국 전쟁이다. 한국 전쟁을 계기로 한국의 교회는 크게 두 가지의 특징을 띄게 되었다. 그 첫째는 철저한 반공주의요, 둘째는 사회봉사이다. 

일제시대부터 기독교는 공산주의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해방 정국에서 교회와 공산주의의 갈등은 더욱 노골화되었고, 한국 전쟁을 계기로 교회와 공산주의 사이의 적대의식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전 세계가 양분되었던 냉전 체제 속에서 한반도가 무력 충돌의 장이 되면서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였던 한국 교회는 공산주의를 악마화하는 반공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1953년 휴전에 대한 협상이 시작되자 한국 기독교가 휴전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던 것은 당시 한국 교회의 반공정서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각주:8] 
 
한국전쟁은 한반도 전역을 폐허로 만들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조차 어려웠던 것이 대다수 국민의 생활이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전쟁 피난민을 위한 구제 사업과 전쟁으로 인한 고아와 미망인들을 지원하는 사업이 모두 교회의 역할이었다.[각주:9] 당시 교회가 사회 구제의 제 일선에 나설 수 있었던 배경은 외국(특별히 미국) 교회의 원조에 있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한 한국 국민들의 참상이 외국 크리스천들에게 알려지면서 많은 구호물자들이 한국에 들어왔고, 그것을 분배하는 일이 한국 교회에 맡겨졌기 때문이다. 

신일교회는 공교롭게도 한국 교회 역사를 크게 구분하는 분기점인 1945년에 창립되었다. 그리고 신일교회의 출발 역시 해방 이후 한국 교회의 재건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각주:10] 미군부는 일제시대의 천리교당이었던 자리를 교회의 재건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신당동 분소이고 그 자리에서 1945년 11월 신일교회가 시작된다. 한국 교회의 재건 과정에서 시작된 신일교회 역시 한국 전쟁이라는 소용돌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신일교회 역시 이 과정에서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것과 동시에 사회적 봉사에 힘을 썼는가? 

이일선 목사가 신일교회를 개척한 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신일교회는 약 30여 명의 장년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북한 지역에서 월남하신 분들이 계셨다. 해방정국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월남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북한에서 내려온 분들이 신일교회의 교인이 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교회 안에 반공의 감정이 있었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반공의 감정은 한국 전쟁 동안 더욱 증폭되었을 것이다. 신일교회를 개척하였던 이일선 목사가 전쟁 중에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끌려가고,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했던 성도들이 인민군으로부터 강제동원을 당했으며, 교회 건물은 노동당이 강제로 수용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이다.[각주:11] 
 
한국 전쟁 속에서 나병환자 역시 큰 아픔을 겪어야 했다. 당시 전국에 약 10만 명의 나병환자가 있었는데 나환자수용소의 규모는 총 2만 여 명이었다고 한다. 전쟁 속에서 건강한 사람조차 살아가기 힘든 시절, 나병환자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런데 신일교회를 개척했던 이일선 목사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으로, 한국 전쟁의 와중에서도 학업을 마치고 의사가 된다. 이일선 목사는 ‘나병 이동 진료반’을 조직하여 공동묘지나 다리 밑에 우거하는 나병환자를 찾아다니며 1천 여 명을 진료하여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 이후 신일교회가 예배당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10여 명의 나병환자들이 교회에서 숙식하며 예배실 장의자를 만들었다고 하니,[각주:12] 당시 이일선 목사와 신일교회가 어떻게 나병환자들을 돌보았는지 짐작케 한다.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과 신일교회의 내부 갈등 

한국의 장로교회는 일제 통치 기간 하나의 교단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1950년대에 이르러 3차례에 걸친 한국 장로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난다. 첫 번째 분열의 씨앗은 신사 참배 문제였다. 일제통치 기간 중에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신사 참배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크리스천들은 마지막까지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고, 그 결과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들을 가리켜 이른바 ‘출옥 성도’라고 부르는데, 신사를 참배했던 성도들과 출옥 성도들 사이의 갈등이 불거져 1952년 예수교장로회(고신) 교단이 시작되었다. 

해방 직후 장로교 신학교는 조선신학교가 유일하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신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치던 김재준 교수에 대하여 고등비평에 근거한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진정서를 학생들이 조선신학교 총장에게 제출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재준 교수의 신학 사상에 대한 다양한 논쟁들이 있었고, 이 논쟁이 불거져 조선신학교의 신학을 지지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장로회 교단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1954년에 있었던 한국 장로교회의 두 번째 분열이다. 

195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세 번째 분열은 예수교장로회(통합)과 예수교장로회(합동)의 분열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WCC 창립대회에 참여하였던 김관식이 한국 장로교회의 WCC 가입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당시 보수적인 교회 인사들은 WCC가 공산주의를 용납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고, 보다 진보적인 교회 인사들은 WCC에 대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오해라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좁히지 못한 채, 예수교장로회는 1959년 통합 교단과 합동 교단으로 분열하고 만다. 

한국 장로교회가 이와 같이 분열을 거듭하고 있을 때 신일교회는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려고 노력했다. 예수교장로교회와 기독교장로회가 분열하였던 1954년, 예장과 기장이 재통합될 때까지 그 어느 편에도 가입하지 않겠다고 중립을 선언했던 교회들이 있었다. 신일교회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가운데 또 다시 예수교장로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신일교회는 더 이상 무소속으로 교회를 유지할 수는 없으니 어느 교단이든 가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합동보다는 통합에 가입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당회원 중에는 많았다고 한다.[각주:13] 
 
계속되는 장로교회의 분열 속에서도 중립적인 위치를 유지하려 노력하던 신일교회였지만, 교회 내부로부터 시작된 갈등은 피해 갈 수 없었다. 1963년 신일교회의 3대 담임 목사로 취임한 송치헌 목사의 열정적인 설교와 목회로 신일교회는 큰 성장을 이룩하였다.[각주:14] 그 결과 1965년에는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성인 성도가 약 700여 명에 이르는 중형교회가 되었다. 이때 송치헌 목사는 급격히 증가하는 교인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젊은 여전도사인 김은신 전도사를 영입하였다. 그런데 이 것이 내적 갈등의 도화선이 된다. 

신일교회가 창립되면서부터 초대 담임 목사였던 이신일 목사를 도와 성도들을 돌보던 유숙렬 전도사가 있었다. 교회의 창립, 한국 전쟁, 그리고 교회의 재건축이라는 모든 과정을 함께 겪으며 신앙생활을 하였던 유숙렬 전도사와 그의 돌봄을 받았던 교회 여집사들 사이의 관계는 매우 돈독한 것이었다. 그런데 송치헌 목사의 부임 이후 새로운 신자들이 늘어나고, 당시 60세가 넘은 유숙렬 전도사를 대신할 젊은 여전도사가 부임하니 교회 초창기의 교인과 새로운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게다가 신일교회가 아직 어느 교단에 소속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송치헌 목사가 합동 측 목사들과 교류하고 있다는 소식이 교회에 퍼지자 교회 안의 갈등은 걷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각주:15] 
 
1965년 약 700여 명의 성인 성도가 출석하던 신일교회는 교회 안의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1년 만에 주일 예배 출석인원이 약 300명인 교회가 되었다. 1년 만에 약 60%의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상황 속에서 신일교회가 겪었을 고민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당회가 나섰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그 모든 책임을 지고 1966년 송치헌 목사가 신일교회를 떠난다.[각주:16] 
 

부흥의 시대 

1965년은 한국 교회가 개신교 선교 8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한국 교회는 대대적인 민족 복음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4년 10월 김활란 박사가 교계 지도자 75명을 이화여자대학교에 초청하여 ‘전국복음화운동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그해 12월 서울 YMCA회관 강당에서 신․구교 17개 교파의 대표들이 ‘전국복음화운동위원회’를 조직하여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 아래 1965년을 ‘복음화운동의 해’로 정하였던 것이다. 이후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교회는 큰 부흥을 경험하는데, 그 중심에는 부흥회와 전도 훈련이 있었다.[각주:17] 
 
첫째로, 부흥집회이다. 한국 CCC 대표였던 김준곤 목사는 1971년 1월 1일 기독교방송에서 공식적으로 민족복음화운동을 선언하였다.[각주:18] 그리고 1974년 한국 CCC는 여의도에서 대규모 전도집회인 엑스플로 ‘74를 개최하였다. 당시 대회본부가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마지막 날 밤에만 1백58만 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엑스플로 ’ 74 대회를 전후로 한국 CCC는 1천여 개 교회의 주보를 무작위로 수집하여 교회의 출석 교인 숫자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조사하였는데 엑스플로 ‘74를 전후로 한국 교회는 33%의 성장을 이룩하였다는 것이다.[각주:19] 엑스플로 ’74 외에도 1973년과 1980년에 있었던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도 한국 교회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교회의 부흥에는 부흥집회와 더불어 전도훈련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위에서 서술한 엑스플러 ‘74 대회도 1971년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1명의 성도들을 민족복음화운동을 위한 요원으로 훈련시키는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각주:20] 그리고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교회에는 한국기독학생회(IVF)에서 펴낸 「원투원」(one to one), 「행복에로의 초대」, 「새로운 삶의 길」 등 다양한 성경공부 교재가 등장한다. 이러한 성경공부 교재는 귀납법적 성경연구 방식을 기초한 것인데, 이 방법을 개인의 경건훈련으로 적용한 것이 QT이며, 그룹으로 활용한 것이 제자훈련이다. 이러한 성도의 양육과 전도 훈련이 한국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 교회가 개신교 선교 8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복음화운동’의 기치를 내걸었던 1965년 신일교회는 제4대 담임 목사로 현성초 목사를 모신다. 그리고 현성초 목사가 사임했던 1977년까지 신일교회는 주일예배 출석인원이 약 750여 명으로 부흥한다.[각주:21] 그리고 제5대 담임 목사로 이광선 목사를 모셨다. 이광선 목사의 사역이 시작된 후 약 10년 뒤인 1987년 12월 새성전을 봉헌하였는데, 이때 주일 예배 출석인원이 약 2,8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각주:22] 이것은 1970년대와 1980년대 크게 부흥하였던 한국 교회의 성장과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일교회의 부흥에도 각종 부흥회와 전도 훈련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첫째로 각종 부흥집회이다. 현성초 목사는 부흥사 출신답게 신일교회에 부임하면서 매월 다섯째 주일에 하룻밤 부흥회를 열었다.[각주:23] 이후 이광선 목사의 부임과 더불어 신일교회의 부흥회는 더욱 다양해졌다. 이광선 목사는 1978년 3월 인천 숭의교회 이호문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여 부흥회를 개최한데 이어, 1979년 3월과 1980년 4월에도 각각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이 외에도 이광선 목사는 학생 부흥회, 장년부 수련회, 여전도회 부흥회 등 다양한 형태의 부흥회를 실시하였고[각주:24] 이것은 신일교회의 부흥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65년부터 1980년대까지 신일교회의 부흥은 다양한 부흥회만의 결과는 아니었다. 현성초 목사는 제직과 구역장을 중심으로 3대 전도 운동을 실시하는 한편, 제직 세미나와 구역 교육 그리고 전도요원 훈련을 지속하였다.[각주:25] 이광선 목사는 신일교회에 부임하여 평신도 교육을 위한 두 개의 기구를 신설한다. 곧 평신도들이 교회의 성장과 선교의 사명을 실행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연경원과 교회 조직의 기초가 되는 구역을 강화하기 위한 제직 양성반이다.[각주:26] 이와 같은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 양육과 전도 훈련이 각종 부흥회와 연결되어 신일교회의 급격한 성장으로 이어졌다. 


신일교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신일교회가 창립되던 1945년부터 부흥의 시대를 겪었던 1980년대까지 신일교회는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특징을 그대로 견지해 왔다. 부분적인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해방 이후 한국 교회가 재건되는 과정, 한국 전쟁을 지나며 교회 안에 반공주의 정서가 확대되는 모습, 전쟁의 폐허 속에서 적극성을 띄었던 교회의 사회봉사, 한국 장로교회의 잇따른 분열 양상, 그리고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폭발적인 성장까지 신일교회의 역사는 한국 교회의 역사 흐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심지어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교회의 성장이 교회의 예배당 건축으로 상징되었고, 보수적 교회의 복음화 운동과 진보적 교회의 민주화 운동이 1987년 6·10 항쟁을 기점으로 크게 변화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신일교회가 1987년 새로운 성전 건축을 완공하였다는 점도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만일 신일교회가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역사의 흐름을 따라간다면, 오늘의 신일교회도 오늘의 한국 교회가 걸어가는 발걸음의 그 보폭과 방향에 있어서 비슷하지 않을까? 오늘의 신일교회 모습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필자는 1990년대 이후 한국 교회의 모습과 2000년대 한국 교회에 주어진 과제를 소개하면서 그러한 특징들이 오늘의 신일교회에도 동일한지 여부를 신일교회 청년부가 판단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 교회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것이 ‘해외 선교’이다.[각주:27] 1965년 ‘민족복음화’를 선언하였던 한국 교회는 1970년대와 1980년대 큰 부흥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 축적된 교회의 역량이 해외 선교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1988년 해외여행자율화 조치가 취해지면서 한국 교회는 앞 다투어 단기선교에 열을 올렸다. 1990년대 한국 교회를 표현하는 단어는 단연 ‘해외 선교’였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해외 선교에 집중하였던 1990년대가 지나고 2000년대로 접어들자 교회는 지금까지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환경을 접하게 되었다. 새로운 환경이란 더 이상 한국 사회가 한국 교회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는 눈에 보이는 통계로 확인할 수 있는데, 2009년 3월 한국 교회는 해외 선교사 2만 명 시대를 맞이하였지만[각주:28] 한국 교회는 성도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각주:29] 이에 대한 정확한 원인 분석과 대안이 2009년을 살고 있는 한국 교회의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한국 교회의 구체적인 과제로 ‘신앙의 계승 문제’와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신앙의 계승 문제이다. 과거 한국 교회의 조직은 전통적인 가정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구역 조직이 그 대표적인 예로, 지역을 기준으로 가족단위 소그룹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구역 조직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세대 간 특성이 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한국 사회는 가족단위로 움직일 때 강력한 결속력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세대간 문화적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으며, 전통적 구역조직은 그 한계를 드러내었다.[각주:30]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세대와 세대를 이어 신앙을 계승해야 할 청년 및 젊은 부부들이 교회에서 이른바 ‘낀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둘째로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이다. 1980년대까지 한국 사회는 민주화와 경제 성장이라는 두 가지 거대 담론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이러한 거대담론을 이끌어가는 주체세력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를 접어들면서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다양한 미시 담론이 우리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한국 교회는 다양한 미시 담론을 기독교적 정신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이 부재하다. 교회 지도자들은 다양한 미시 담론을 성경적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으며, 각 분야의 평신도 전문가들은 자신의 전문성과 신앙을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 그 접촉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신앙 계승의 문제’와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의 열쇠는 2009년 을 살아가는 한국 교회 청년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점이다. 민주화와 복음화라는 거대 담론에 익숙한 기존 세대가 아닌 198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들, 그리하여 진보와 보수라는 과거의 개념이 전혀 없는 세대들, 한국 사회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몸으로 익힌 세대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찾아 나설 때 한국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이 살아날 수 있다. 그리고 각자에게 주신 다양한 사명을 중심으로 동질적 집단이 형성되어야 그 공동체 안에서 신앙의 계승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 Karl Heyssi, Konpendium der Kirchengeschichte, 손규태 역, 「세계 교회사」, 한국신학연구소, 2004, p. 22. [본문으로]
  2. 어거스틴의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분은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에 기원을 둔 것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개념으로부터는 유추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본문으로]
  3. 그 대표적인 인물로 이상재를 꼽을 수 있다. 이상재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계기로 일본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자 YMCA 종교부 총무로 활동하면서 기독교 청년 운동에 투신한다. 그때 이상재의 나이는 59세였다. 전택부, 「이상재 평전」, 범우사, 1985, 120-126. [본문으로]
  4. 1885년 내한하였던 언더우드는 그 다음 해인 1886년에 고아원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1905년 경신학당으로 정착되어 오늘의 경신중고등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아펜젤러 역시 1886년 영어학교를 개설하였는데 1887년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학교의 이름을 하사하여 오늘의 배재중고등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본문으로]
  5. 그 하나의 예로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을 들 수 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위대한 성령의 역사였지만 2009년 현재의 한국 교회 부흥과는 역사적 연결점이 약하다. 현재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의 모습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부흥의 결과이다. [본문으로]
  6. 강원용 목사는 4·19 혁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 나와서 데모를 하도록 고려대 학생들을 주동한 학생이 경동교회 박상원입니다. 그리고 4월 19일 국회의사당 앞 데모를 주동한 서울대학의 학생회 위원장 윤식과 간사장인 윤영일, 둘 다 경동교회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외에도 4·19의 주동학생들 가운데 다는 아니지만 기독학생들의 영향력이 제일 컸습니다.” 조병호, 「한국기독청년학생운동 100년사 산책」, 땅에쓰신글씨, 2005, p. 77. [본문으로]
  7. 이와 관련하여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의 주장은 참고할 만하다. “저는 신세대를 향해서 보수냐 진보냐를 묻는다면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과거의 냉전적 보수, 냉전적 진보의 개념으로 질문한 겁니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그런 상황이 없었지요. 그들에게는 미래만 있습니다.” 김병혁, 박종화, “허구와 수구를 넘어 함께하는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목회와신학」, 2009년 7월호 시국대담. [본문으로]
  8. 한국 교회는 휴전을 반대한다는 분명한 입장을 표출하였는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휴전이 된다면 아시아와 전 세계의 공산화를 방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휴전재론과 우리의 태도”, 「기독공보」, 1953년 4월 20일자; “38선 정전 반대”, 「기독공보」, 1952년 1월 21일자. 또한 1953년 6월 탑골공원에는 약 7,000여 명의 크리스천이 참석한 가운데 북진통일 기원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9. 전쟁고아를 위한 기구로 기독교아동복지회(Christian Children's Fund), 스와슨복음전도회(Everett Swanson Evangelistic Association), 기독교선명회(World Vision), 그리고 홀트아동복지회 등이 이때 설립되었다. 그리고 국제연합한국재건단, 기독교세계봉사회, 감리교, 동양선교회, 메노나이트, 월드비전, 캐나다연합교회, YWCA, 메리놀수녀회 등의 지원으로 미망인을 위한 시설이 설립되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기독교의역사」(3),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pp. 66-67 [본문으로]
  10. 신일교회를 개척했던 이일선 목사는 일제에 의해 폐쇄된 교회 문 앞에서 기도하던 중 “너는 교회의 종을 다시 울리게 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신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지광원 편, 「신일교회 50년의 발자취」, 신일교회 홍부출판부, 1995, p. 37. 이처럼 신일교회의 시작은 한국 교회의 재건이라는 비전과 일치하였다. [본문으로]
  11. 신일교회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신일교회 60년사」, 신일교회, 2007, p. 20-26. [본문으로]
  12. 지광원 편, 「신일교회 50년의 발자취」, pp. 52-53. [본문으로]
  13. 신일교회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신일교회 60년사」, pp. 34-39. [본문으로]
  14. 송치헌 목사의 열정적인 목회 외에도, 교회당의 완공 및 신당중앙교회의 내적 분규로 말미암아 제직들과 교인들이 신일교회로 전입해왔던 것 등도 신일교회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Ibid., 43. [본문으로]
  15. 지광원 편, 「신일교회 50년의 발자취」, pp. 61-62. [본문으로]
  16. 신일교회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신일교회 60년사」, pp. 44-45. [본문으로]
  17.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교회가 큰 부흥을 이룰 수 있었던 원인으로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 미국으로부터 소개된 교회 성장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그리고 부흥회 및 전도 훈련을 비롯한 교회 내부의 노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 역사의 흐름을 따라 신일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이 글에서는 교회의 내적 노력에 초점을 맞추었다. [본문으로]
  18. “방금 울린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60년대가 70년대로 넘어오는 이 엄숙한 순간에, 나는 나의 사랑하는 한국 교회와 함께 우리들의 지상 과제인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비상한 헌신과 결심을 하고 싶습니다.” 김준곤, 「김준곤 문설집」(1), 순출판사, 1984. p. 61. [본문으로]
  19. 김준곤, “제3의 성령폭발 엑스플로 ’74를 조명한다”, 「CCC편지」, 1997년 11월. [본문으로]
  20. 엑스플로 ‘74 팸플릿에 나타난 대회 7대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의 지상명령인 전도의 폭발점을 만든다. 둘째, 전민족 복음화를 위한 전신자정예화훈련을 한다. 셋째, 사도행전적 교회부흥의 폭발점을 만든다. 넷째, 예수혁명운동을 세계적 차원으로 폭발시킨다. 다섯째, 학생, 청소년층에 신앙운동의 폭발점을 만든다. 여섯째, 사랑의 새 물결을 일으킨다. 일곱째, 전도를 위한 크리스천의 힘의 총화로 집약된다. 한국준비위원회, 「EXPLO 74 세계기독교대회 안내」, 1974, p. 8. [본문으로]
  21. 지광원 편, 「신일교회 50년의 발자취」, p. 72. [본문으로]
  22. 신일교회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신일교회 60년사」, p. 66. [본문으로]
  23. 현성초 목사가 신일교회에 부임하여 온 과정에도 부흥회가 있었다. 1966년 여름, 신일교회에서 기독교선교회 성동구연합부흥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부흥회의 강사가 현성초 목사였다. 이 부흥회에서 큰 은혜를 받은 신일교회가 현성초 목사를 담임 목사로 청빙한 것이다. 지광원 편, 「신일교회 50년의 발자취」, p. 63. [본문으로]
  24. 신일교회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신일교회 60년사」, pp. 54-55. [본문으로]
  25. 현 목사가 주장했던 전도 운동이란 첫째로, 전도지 나누어주기(심기 운동) 둘째로, 데려오기(자라기 운동) 셋째로, 결신자 찾아보기(김매기 운동)이었다. 지광원 편, 「신일교회 50년의 발자취」, pp. 63-64. [본문으로]
  26. 신일교회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신일교회 60년사」, p. 55. [본문으로]
  27. 2009년 현재 한국 교회에서 ‘선교’란 곧 해외 선교를 내포하고 있지만, 한국 교회 역사에서 해외 선교가 일상화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본문으로]
  28.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2009년 1월 발표한 통계이다. 2009년 1월 한국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는 총 1만 9,413명으로 2009년 3월이면 2만 명이 넘을 것으로 계산하였다. [본문으로]
  29. 2006년 6월 발표된 인구조사통계자료에 의하면 1996년부터 2006년까지 천주교가 78%, 불교가 3.9% 성장한데 반하여 한국 기독교는 1.6% 감소하였다. [본문으로]
  30. 이에 대한 대안으로 셀그룹 운동, 가정교회 운동 등이 한국 교회에 등장하고 있지만, 젊은 부부와 청년들 그리고 그 이후의 세대를 품을 수 있는 교회의 조직 구성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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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