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0. 7. 15.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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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의 중순을 보내고 있습니다. 벌써 한 해의 절반을 보낸 것인데, 돌이켜보면 눈에도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바이러스를 피해 다니다 6개월의 시간을 덧없이 흘려보낸 듯하여 아쉬운 마음입니다. 처음에는 한두 주, 길어야 한두 달이면 종식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이어서, 한해의 절반을 떠나보낸 지금도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은 조금도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론에서는 제2차 유행이나 가을 대유행과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또 한편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는 매우 빨리 변이를 일으켜 백신이나 치료제가 나오더라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들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코로나바이러스가 발생한 초기부터 인간의 생명과 일상을 크게 위협하는 이 바이러스가 하루속히 사라지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주 두 주가 이니라, 한 달 두 달이 아니라, 반년이 넘어서까지 확산세가 계속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탄식하게 부르짖게 됩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국내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급격히 확산되었던 지난 2월, 바이러스의 확산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신천지라는 이단의 실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하셨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교회와 성도들을 통한 집단 감염이 발생하였고, 과연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지 쉽게 답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급기야 이달 초 광주광역시에서는 50인 이상의 실내 모임이 금지되었고, 지난주 전국의 교회는 정규 예배 외의 각종 대면 모임과 활동을 금지한다는 정부의 방침이 발표되었습니다. 수련회, 기도회, 부흥회, 구역예배, 성경공부 모임, 성가대 연습 모임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니 교회로서는 그 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시금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성경을 보면,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동일한 기도의 제목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주인공 이사야 선지자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극심한 고통,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은 아픔,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도저히 알 수 없는 기나긴 인생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하나님의 사람들은 너 나할 것 없이 이렇게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그리고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뜻이 해석되지 않을 때, 그러면서도 극심한 고통이 멈추지 않고 지속되고 있을 때, 그리하여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탄식하며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본문이 가르쳐주는 믿음, 그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본문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라고 시작합니다. 남 유다를 다스렸던 웃시야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요담이 왕위를 이어받은 전환의 시기를 말합니다. 웃시야는 남 유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왕인데, 그의 치세를 평가하는 역대기의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대하 26:4-5)

실제로 웃시야가 다스리던 52년의 통치 기간, 남 유다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었고 경제적으로 번영하였습니다. 그런데 평화의 시대, 번영의 시대를 이끌었던 웃시야가 죽고 이제는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니 번영의 시기와 쇠락의 시가가 서로 교차하는 그 지점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자, 웃시야를 이어 요담이 왕위를 이어받는 시기, 그 전환의 시기에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눈을 열어 천상의 세계를 바라보게 하시죠. 그곳에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좌정하신 하늘 보좌 앞으로 스랍, 곧 천사들이 시립하여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한 나라를 통치하는 임금이 왕좌에 앉아 있고 그 앞에 신하들이 시립하여 있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가 바라본 이 위대한 장면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시어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분명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시립하고 있었던 천사들의 찬양은 이점을 더욱 분명하게 말해주는데요. 오늘 본문 3절에 그 찬양의 가사가 등장합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평화의 상징, 번영의 상징이었던 웃시야 왕의 치세 때에도 남 유다에게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허락하셨던 분은 인간 왕이 아니라,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제 웃시야의 시대가 지나 그의 아들 요담이 왕위를 이어받은 그 시대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이사야는 바로 그날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코로나의 시기를 보내며, 도대체 언제 이 사태가 멈출지 알지 못하여 하나님을 향해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믿음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평화의 시대 번영의 시대 풍요의 시대,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그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는 시기에도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주권자가 되신다는 믿음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불안의 시대 쇠락의 시대 궁핍의 시대, 그리하여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도저히 해석되지 않아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부르짖는 이 시대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의 인생길 붙들고 계시다는 이 믿음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

극심한 고통이 지속되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어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의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시하신 말씀만 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어떠한 말씀을 주시는지, 곧 이사야 선지자가 무엇을 선포해야 하는지 그 내용을 분명히 기록해 두었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 메시지입니다. 계속해서 10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이 어떠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지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쉽게 이해할 수도 없고, 쉽게 납득할 수도 없지만 그리하여 이사야 선지자도 결코 선포하고 싶지 않은 메시지였지만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전하신 말씀의 내용은 분명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대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사야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 백성은 그 마음이 더욱 둔하게 되고, 이사야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 귀가 더욱 막히게 되고, 이사야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 눈이 더욱 어두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고통의 시기,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때까지니이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유대 백성에게 하나님은 왜 굳이 이와 같은 부정적인 말씀을 전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어 아파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왜 굳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한다는 절망적인 말씀을 전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희망의 소식이 들리지 않고 내일이 보이지 않아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울부짖는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시고, 그들의 귀가 막히게 하시며, 그들의 눈이 어둡게 하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무리 묵상하고 묵상해 보아도,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보아도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요. 우리 인간은 말씀을 듣는다고 하지만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 영적인 세계를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깊은 의미를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정해진 운명적 한계라는 사실을 우리는 그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의 시대가 이제는 일상이 되었고, 교회의 여러 가지 활동은 더욱 위축되었으며,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날 선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는 이 시기를 보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자세가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지만, 그저 주어진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코로나 시대를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교회가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교회가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곳저곳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새로운 길,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나서기에 앞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뜻과 계획은커녕 그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 인간의 한계를 먼저 인정하고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울부짖었던 또 한 사람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노래는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애 3:26-28) 


인내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뜻이 해석되지 않을 때, 그러면서도 극심한 고통이 지속되고 있을 때, 그리하여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인내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3절입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여기에 그루터기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나무의 줄기가 잘려나간 뒤에도 여전히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 남아 있는 그 밑동 말입니다. 웃시야를 이어 요담이 왕이 되는 이 시기를 지나 마침내 남 유다는 바벨론 제국의 의해 멸망하고,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유대인들은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새롭게 세우는데, 이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무리들을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그루터기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본문에 등장하는 그루터기를 ‘거룩한 씨’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13절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잖아요.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작년 우리나라 동해안에 큰 산불이 났습니다. 온 산을 뒤덮었던 나무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거대한 화마 속에서도 생명의 씨앗이 남겨져 있으니 시간이 흐르면 그 씨앗이 발아하여 새로운 나무가 탄생하고, 새로운 숲을 조성하게 되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바로 그것이 거룩한 씨입니다. 

또한 종교개혁자 칼뱅은 오늘 본문 13절을 주석하며 ‘그루터기’를 한 겨울의 모진 한파를 견디어 내는 나뭇가지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글을 조금만 읽어보겠습니다. “겨울에 잎이 다 떨어져 버리면 죽은 나뭇가지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봄이 되면 잎은 다시 돋아난다. 즉 이 백성도 그와 같게 된다는 뜻이다.”

나무가 모두 베어져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그루터기, 온 산림이 불에 타 없어져도 여전히 남아있는 거룩한 씨앗, 겨울철의 한파가 모든 생명 현상을 질식시키는 현장에서도 여전히 봄을 기다리는 나뭇가지. 이들은 자연 현상의 원리를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고단한 역경의 세월을 그저 묵묵히 인내하여 마침내 새로운 생명을 발아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둔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우리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여전히 소망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기 때문이 아니라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성도 여러분, 이 믿음을 끝까지 지키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 인생의 주권자가 되어 주십니다. 
비록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다 깨닫지 못하지만, 
인내하며 이 아픔의 시기를 끈까지 견디어 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하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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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