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2020. 10. 27.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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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독교는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충분히'라는 어정쩡한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기독교의 공적 역할에 있어 그 방향과 범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든 그렇지 않든, 기독교의 공적 역할에 대한 생각이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도 현재의 한국 기독교가 공적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공감대를 이룬 듯하다. <광장에 선 기독교>(A Public Faith)에서 미로슬라브 볼프가 지적하는 문제의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의 신학적 배경은 분명히 서구의 기독교이지만 기독교가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현실 인식은 한국의 기독교와 다르지 않다. 

 


기독교의 기능장애 

미로슬라브 볼프는 공적 역할을 바르게 수행하지 못하는 기독교의 모습을 '기능 장애'라고 표현한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예언자적 종교가 공적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상승'(ascent)과 '회기'(return)가 바르게 일어나야 하는데, "기독교 신앙이 신비주의 종교처럼 실천되어서 상승이 창조적인 회귀로 이어지지 않고 황량한 회귀가 될 때 기능장애가 일어난다"고 설파한다(p. 30). 볼프는 기능장애의 현상을 두 가지로 묘사한다. 그 하나는 나태함이고 다른 하나는 강요다. 나태함이란 신앙을 개인의 내면으로만 간직한 채 공적 영역에서는 세속적 가치관을 따라가는 신앙을 말하며, 강요란 기독교 신앙을 공적 영역에서 드러내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신앙을 강요하는 태도다. 

신앙의 기능장애인 나태함과 강요는 서로 상반된 개념인 듯 보인다. 이른바 신앙이 약하면 신앙을 그저 마음에만 간직하는 나태함에 빠지고 신앙이 강하면 다른 사람에게까지 신앙을 주입하려는 강요로 이어지는 듯 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양 극단의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의 범주에 속한다는 지적은 이 책이 선사하는 매우 탁월한 식견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볼프는 두 개의 대조적인 개념을 표층적 신앙과 심층적 신앙으로 제시한다. 신앙의 기능장애로서 나태함과 강요는 정반대의 현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표층적 신앙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기독교의 폭력에 대한 치유책은 기독교 신앙에 덜 충실한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정의된 의미에서의 기독교 신앙에 더 충실해지는 데 있다." (p. 70) 

"표층적이면서 열정적인 신앙의 실천은 폭력을 촉진하기 쉬우나 심층적이면서 전적으로 헌신된 실천은 평화의 문화를 낳고 유지된다." (p. 71) 


심층적 신앙 

기독교의 기능장애, 곧 나태함과 강요를 극복할 수 있는 심층적 신앙인의 공적 기능은 어떠해야 하는가? 기독교의 공적 역할에 대한 대안을 묻는 이 질문에 답하는 대목이 <광장에서 선 기독교> 제 5장 "정체성과 차이"다. 여기에서 미로슬라브 볼프가 제시하는 대안은 '내부적 차이'다. 

"기독교를 구분하는 차이는 늘 주어진 문화 세계에 내부적이어야 한다." (p. 132) 

저자가 주장하는 내부적 차이는 예시를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 

"식생활의 예를 계속 들자면, 식사라는 것은 꼭 개인 또는 공동의 본능적인 만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눔과 예배의 표현이 될 수 있다." (p. 135) 

"환대의 장소가 되려면 안방은 좀 줄이고 손님용 방을 만들고 거실을 크게 만들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어진 문화 안에서 다르게 살아가는 두번째 방식을 깨닫게 해 준다." (p. 135) 

식문화 및 주거문화와 같은 우리 사회의 문화로부터 기독교인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기독교의 공적 영역이 우리 시대 문화의 외적 요소를 거부하거나 변화를 강요하는 외적인 차이와 정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문화를 공유하지만 그 안에 기독교의 정체성을 담지하는 내적인 정체성과 차이를 말한다. 그러니 이러한 변화는 나태함이나 강요와 다르고, 표층적 신앙을 넘어 심층적 신앙으로 들어가야만 가능한 공적 역할이다. 

"그리스도인이 한 문화에서 갖게 되는 정체성이란, 크고 작은 거부, 차이, 전복들, 그리고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대안 제시와 시행을 통해, 많은 문화적인 제약을 수용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이루어가는 복잡하면서도 유연한 네트워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p. 137)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속해 있는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주어진 문화 속에서, 문화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으면서 그 문화에 이질적인 것을 계속해서 도입하는 것이다."(p. 138) 

 

광장에 선 기독교
국내도서
저자 :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 / 김명윤역
출판 : IVP 201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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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2225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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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