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2021. 2. 7.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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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장면을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당시 서기관이나 율법 교사에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참된 권위가 예수님께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회당에 있던 귀신 들린 사람도 고쳐주셨지요. 이번에도 예수님은 참된 권위를 가지고 귀신을 꾸짖으시며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명령하시니 귀신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 다시 한번 예수님에게 참된 권위가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상이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마가복음 1장 21절부터 28절까지의 내용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1-28절 “권위 있는 새 교훈”)


예수님께서 이처럼 참된 권위를 가지고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뒤, 예수님은 곧 이어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이지요. 지난주 본문이었던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축귀 사건과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오늘의 본문, 곧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사건을 하나의 흐름에서 읽으면, 이 두 사건은 예수님의 치유라는 공통의 주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는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그가 겪고 있었던 문제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아픔이었습니다. 반면, 시몬의 집에서는 열병으로 괴로워하는 그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번에는 열병이라는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셨던 것이지요. 또 하나의 대조점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사람은 남자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 사람의 성별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헬라어 원문은 여러 언어들이 그런 것처럼 사람을 나타내는 명사에 성별 구분이 명확하거든요. 그래서 영어 성경만 보아도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귀신 들린 사람을 남성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한 사람은 시몬의 장모였으니 당연히 여자입니다. 이처럼, 지난주 본문이었던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축귀와 오늘 본문인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사건을 하나의 흐름으로 읽어보면 예수님은 귀신 들린 사람, 곧 영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에 사로잡혔던 사람도 치유하시고 열병 들린 사람, 곧 육신의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남자도 치유하시고 여자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건의 결론으로 마가복음 1장 3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마가복음 1장 34a절) 

여기에 각종 병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에도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예수님은 각종 병, 곧 육신의 아픔이든 마음의 상처이든 영혼의 질병이든 그 모든 것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 곧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능력이 많은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치유하여 주십니다. 
모든 질병은 다 치유받아도 내가 겪고 있는 이 아픔만큼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여러분,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은 다 치유하셔도 나는 아닐 것이라는 의심이 드세요? 아닙니다. 각종 병으로 아파하는 모든 사람을 고치셨던 예수님은 지금 여러분의 아픔도 넉넉히 치유하여 주십니다. 


공적 장소에서 사적 장소로

귀신들린 남자를 고쳐주신 사건과 열병으로 앓아누웠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는 사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곧,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입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마가복음 1장 29절)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공적 활동이 행해지는 회당에서 개인의 공간인 가정으로 장소가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되어있으니, 한 형제였던 시몬과 안드레는 이 집에서 함께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자,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당연하지요. 시몬과 안드레의 집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 그들만의 사적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본문 29절은 예수님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간 사람이 야고보와 요한뿐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가버나움 회당이나, 시몬과 안드레의 집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셨던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서도 병자를 고치며 말씀을 가르치셨겠지요. 그러나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과 나의 사적인 공간인 가정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 사이에는 너무도 큰 차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과의 친밀감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회당에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있겠지만, 주님과의 개인적인 친밀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가정을 방문하셨을 때 그들이 주님과 나누었을 그날의 식탁을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을 모신 그 식탁에는 시몬과 안드레가 주님을 마주 보았고 그 곁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겠지요. 그렇게 네다섯 명이 식탁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그 친밀함이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은 회당에서 많은 사람을 가르치며 많은 사람을 고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 ‘곧’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는 것보다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함께 둘러앉아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친밀함을 누리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유진 피터슨이 생전에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고 있었던 자신의 아들과 나누었던 편지가 최근 출판되었습니다. 우리말로도 번역이 되었는데 책의 제목이 <젊은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한번은 멀리 이사를 가면서 새로운 교회를 찾는 성도를 유진 피터슨이 상담했나 봅니다. 유진 피터슨이 여러 가지로 권유했음에도 그들은 무조건 큰 교회, 잘 짜인 교회 프로그램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그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유진 피터슨이 평가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중에 한 문장만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알고 그들이 아는 목사는 아마 절대 갖지 못할 것이다.”(p. 133) 이 문장에서 제 마음에 참 오래 각인되어 있는 표현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을 알고 그들이 아는 목사” 성도의 입장에서 ‘나를 알고 또 내가 아는 목회자’를 만나 함께 신앙생활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한편, 목회자의 입장에서 ‘나를 알고 또 내가 아는 성도’들과 친밀히 교제하며 목양하는 일은 또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그래서 이 축복을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겼던 유진 피터슨은 규모가 큰 교회가 제공하는 수많은 장점들을 다 포기하더라도 이 ‘친밀함’만큼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값진 보물이라고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회당에서 예수님의 권위있는 새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그 일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면 안돼요.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과 같이 자신의 가정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들어가야 합니다. 나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예수님과 교제하며 지금도 나를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비로소 회당에서만 예수님을 만났던 무리들의 자리에서 벗어나, 내가 주님을 알고 주님이 나를 아시는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셔오는 용기

예수님은 회당을 나와 곧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그들의 집에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어 있는지라 (마가복음 1장 30a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열병’은 온몸에 열이 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현대의 의학적 상식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의 질병이라기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체온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증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오늘과 같은 의학 지식이 없었기에 열이 나는 원인을 알 수 없어 그와 같은 모든 증상을 그저 열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해열제나 항생제가 있을 리 없으니 열이 펄펄 끓어오르면 그 원인도 모른 채 그 큰 괴로움이 다행히 모두 지나가기까지 그저 견디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니 본문에 등장하는 열병은 우리 시대에는 대수롭지 않은 증상으로 여길지 모르나, 당시로서는 너무도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시몬이 예수님을 자신의 사적인 장소인 가정으로 모셨습니다. 이제 회당에서는 불가능한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나누려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에 모시니 예수님의 눈에 열병이라는 무서운 질병에 걸린 식구가 보이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을 나의 사적인 장소, 나의 가정으로 모시며, 그분과 친밀함을 나누려 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우리 가정의 가장 연약한 장면이 드러나게 됩니다. 나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을 예수님께 보여드릴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오시자,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목격하는 것은 별로 불편한 일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고,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을 목격하였지만, 회당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일은 놀라운 일, 깜짝 놀랄 일은 되어도 나의 문제나 우리 가정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 집으로, 예수님을 나의 개인적인 삶의 공간으로 모셔들이면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어요. 나의 치부가 드러납니다. 나의 연약함이 드러납니다. 마침내 나의 죄성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나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주님께 드러내지 않으면 주님을 나의 개인 공간에 모실 수도 없고, 그 주님과 친밀함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그 주님을 가까이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원한다면 우리 가정에 병자가 있어도, 나에게 큰 문제 거리가 있어도,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심각한 죄악이 도사리고 있어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을 모시고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아픔, 나의 문제,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죄에 대해 예수님께 솔직히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마가복음 1장 30절)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오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있었잖아요. 예수님께서 그 장면을 보기만 해도 상황 파악을 하셨겠지요. 모르실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의 반응을 주목해보세요. 사람들이, 곧 시몬을 비롯한 제자들이 그 여자에 대해 곧 예수님께 다 아룁니다. 

예수님을 회당에서 만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의 가정으로 모셔들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이와같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아픈 상처가 있으시나요? 여러분, 용기를 내어 바로 그 자리로 예수님을 모셔들이십시오. 여러분의 과거가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까?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을 모셔들이십시오. 아직 떨쳐버리지 못하여 여전히 여러분의 영혼을 옥죄어 오는 습관적인 죄악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바로 그 자리에 모셔들이고 주님께 여쭈십시오.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내 깊은 내면의 모습과 우리 가정의 오랜 상처를 주님께 내어 놓고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예수님을 여러분의 사적인 공간으로, 여러분의 깊은 내면으로 모실 때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위대한 치유의 역사는 단지 회당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삶 속에서 펼쳐지는 여러분 인생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변화된 가정

시몬과 그 주변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열병으로 앓아 누운 여인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 예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그녀를 치유해 주십니다.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마가복음 1장 31a절)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자신의 사적인 공간으로 모셔들이며 예수님과 친밀함을 나누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은혜입니다. 본문 31절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결과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마가복음 1장 31b절)

그저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선 정도가 아니라, 온몸에 활력이 넘쳐서 자신의 역할을 힘 있게 감당하고 손님을 즐겁게 접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치유는 즉각적이고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의 서술은 단지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육신을 완벽하게 치유하셨다는 의미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여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 예수님의 제자들로 구성된 신앙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이미 결혼을 했어요. 오늘 본문에 장모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연히 아내도 있었고 자녀들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가정을 돌보기보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늘 동행해야 해요. 만일 시몬이 식구들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면, 그래서 식구들이 시몬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면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사복음서를 보면 시몬 베드로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 본문의 사건 외에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시몬의 가족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을 동의하고 지원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의 사건이 그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회당에서 만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아요.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초대합니다. 물론, 그의 가정은 완벽하지 않았지요. 부끄러워서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면도 있었지요.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을 자신의 가장 개인적인 장소까지 모셔들였고, 그 가정의 가장 아픈 부위를 주님께 아뢰었어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실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예수님을 섬기며 신앙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가정으로 바꾸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회당을 나와 여러분의 가정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곳에서 여러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회당이라면 예수님께서 언제든 들어가 가르치실 수 있지만, 여러분의 가정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초대하고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해야 우리 주님께서 들어가실 수 있지 않겠어요? 물론 우리 가정에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가 있지요. 우리의 마음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지요.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죄악이 있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기를 내어 바로 그 자리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어 들이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 가정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아픔을 치유하시고, 
예수님께서 여러분 영혼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죄악을 치유하시며 
예수님께서 친히 여러분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은 물론이요, 여러분의 가정은 
주님을 섬기며 봉사하는 축복의 가정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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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21-34절 “회당에서 가정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막 1:21-34) 본문에서 여러 마을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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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