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2020. 6. 7.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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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섬기는 목사님들이나 기독교 단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박천응 목사님이 대표로 있는 안산이주민센터입니다. 그런데 안산이주민센터는 매년 성탄절을 맞이하면 한 가지 특이한 행사를 진행합니다. 그곳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거리 구석구석을 다니며 버려진 플라스틱 PT병을 줍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거한 PT병을 깨끗이 세척하여 버려진 PT병으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드는 것이지요. 
이러한 행사의 의미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버려진 PT병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버려진 빈병 하나에 그 어떠한 가치도 두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깨끗하게 세척하고 씻어주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찬양하는 아름다운 성탄 장식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버려진 플라스틱 PT병과 같이, 사람들이 보기에 이제는 끝이라고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그저 버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절망의 순간이 우리의 삶 속에 때로는 찾아옵니다. 그러나 버려진 PT병을 이주노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주어 깨끗이 세척하듯이, 우리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져주시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씻어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면 우리의 삶은 여전히 소망이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마침표에 선을 하나 그어 잠시 쉬어가는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는 쉼표로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로암미를 암미로, 로루하마를 루하마로 

이와 같은 예는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구약 성경에서 그 하나의 예를 찾아본다면 호세아서를 꼽을 수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고멜이라는 여인으로부터 딸을 낳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딸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곧, ‘로루하마’이지요. 그리고 그 이름의 뜻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입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호세아는 고멜로부터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아들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이번에는 ‘로암미’입니다. 그리고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였는지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자녀들의 이름을 주시면서 ‘로암미,’ ‘나의 백성이 아니다’ ‘로루하마,’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 자’라고 부르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로암미, 로루하마라는 이름은 단지 호세아 선지자의 자녀들을 부르는 이름이 아니고 범죄 한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호칭이 되었습니다. 호세아의 아들에게 주어진 이름, 곧 로암미는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에 대한 이름이고, 호세아의 딸에게 주어진 이름, 곧 로루하마는 모든 이스라엘 여자들을 부르는 이름이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은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너희는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도 받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여러분, 이쯤 되면 마침표입니다. 하나님의 판결은 명확합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돌이킬 수 없으며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끝이 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마침표가 찍힌 거죠. 

그런데 여러분, 호세아 1장에서 로루하마, 로암미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하나님께서 호세아 2장으로 접어들면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뜻의 로루하마에게 ‘로’자를 지우시는 거예요. 히브리어로 ‘로’가 ‘아니다’라는 뜻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로루하마’에서 ‘로’라는 글씨를 지워서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여성들에게 ‘루하마,’ 곧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라고 부르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의미의 ‘로암미’에서 여전히 ‘아니다’라는 의미의 ‘로’자를 지우십니다. ‘로암미’에서 ‘로’자를 지워 ‘암미,’ 곧 ‘나의 백성이다’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시거든요. 

여러분, 이것이 오늘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아닌가요?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하여 잘못된 선택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로암미,’ ‘나의 백성이 아니라’고 ‘로루하마,’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했다’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을 때도 있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이 마침표라고 생각을 하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고, 거기에서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로암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라는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에 붙어 있는 ‘로’ (아니다)라는 글씨를 지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로루하마’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 자)라는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금 거룩하고 성결하게 바꾸시어 우리의 이름에 있는 ‘로’ (아니다)라는 글씨를 지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 속에 ‘로’ (아니다)라는 글씨가 그려져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 같고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한 것 같이 느껴진다면, 여러분의 삶 속에 그려진 그 ‘로’ (아니다)라는 글씨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여전히 사랑하시며 여러분의 삶에 그려진 ‘로’ (아니다)라는 글씨를 지워 암미 –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루하마 –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라고 선언하여 주십니다. 


실패한 선교를 성공한 선교로 

오늘 본문 사도행전 17장 1절부터 9절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에서 사도 바울이 행한 전도와 선교 활동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아무리 보아도 데살로니가에서 행한 바울의 사역은 좋게 말해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것처럼, 나쁘게 말해서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사도 바울의 전도, 특별히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몇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머문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이 선교를 위해 데살로니가라는 지역에 머물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선교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먼저 기도해야겠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 데로 복음을 전해야겠지요.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생기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경도 가르치고 기도 생활도 가르치고 신앙생활 전반에 대한 교육과 양육의 과정이 있어야겠지요.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른 신앙인으로 세워서 그들을 중심으로 교회의 기틀을 마련하겠지요. 그리고 교회가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직이나 재정이나 건물 등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모든 과정을 진행하려면 여러분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한달? 일 년? 십 년? 선교사가 파송을 받아 선교지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곳에서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선교해야 한다. 그래서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는 선교사에게 너무 빨리 선교의 열매를 요구해서는 안된다고. 선교는 시간이 걸리고 선교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우리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만큼 선교 활동은 오랜 시간을 두고 지속해야 열매가 맺히는 법인 것이죠.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선교는 어떠했을까요?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머무르며 선교 활동을 했을까요? 10년? 5년? 아니면 1년? 그 대답이 오늘 본문 2절에 등장합니다.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2절)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세번 돌아오는 동안 바울이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세 번 맞이했으니 아무리 길게 잡아도 한 달이 채 되지도 않는 기간 동안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눈을 피해 사도 바울은 밤의 어두움을 틈타 데살로니가를 떠나 뵈뢰아로 도망을 갑니다. 사도행전 17장 10절입니다.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 더 머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유대인의 반대가 너무도 커요. 그래서 도저히 그곳에 더 머물러서 선교활동을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 3주, 혹은 한 달 동안 무슨 선교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어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데살로니가에서 행한 사도 바울의 전도를 실패라고 평가할 수 있는 두번째 이유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는 사람보다 거부한 사람이 더욱 많았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4절) 

이 말씀에 의하면 바울의 전도를 듣고 복음을 받아들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건한 헬라인’입니다. 유대인이 아니지요. 유대인은 아니지만 유대인들을 섬기는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래서 오늘 본문이 ‘경건한 헬라인’이라고 표현한 사람들이 주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장소는 유대인의 회당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이에요. 그러면 안식일을 맞아서 유대인의 회당에 참여하여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유대인들이 더 많았을까요? 아니면 헬라인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더 많았을까요? 당연히 유대인들이 더 많지요. 대부분은 유대인이었어요. 그리고 그들 사이에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궁금해하는 헬라인들이 조금 섞여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경건한 헬라인’들이 주로 믿고 유대인들은 거부합니다. 오늘 본문 5절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5절)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더니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바울과 실라를 백성 앞에 데리고 가서 그들을 고발하려고 찾아나섭니다. 그저 유대인의 회당에 손님으로, 그저 궁금해서 그 자리를 찾아온 ‘경건한 헬라인’들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장면을 놓고 사도 바울이 전도와 사도 바울의 선교를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에서의 선교활동이 성공적이니 못하고 오히려 실패에 가깝게 보이는 이유, 그 세번째는 바울의 전도로 말미암아 기독교에 대해서, 특별히 예수님에 대해 오해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7절입니다.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6-7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했던 유대인들이 바울과 그 일행을 고발하면서 했던 이야기입니다. 6절 뒷부분을 다시 보십시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곧 기독교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분란이 일어난다고 공격하는 것이죠. 7절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거역하고 로마 제국이라는 체제를 전복하려는 사람들이라고 공격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러한 반란의 주동자가 누구라고 주장합니까? 7절 을 다시 보세요.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누구입니까?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예수님이 갑자가 체제를 전복하고 로마 황제의 자리에 앉으려는 정치적 반란꾼이 되었습니다. 

물론, 바울을 시기했던 유대인들의 이러한 공격은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보십시오. 8절입니다.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당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믿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러니 예수님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에게 대해서 커다란 오해가 쌓이고 있었던 것이죠.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과 기독교인들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바울과 실라는 채 한 달도 그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한 밤의 어두움을 틈타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실패한 거 아닙니까? 이 정도 되면 데살로니가에서의 선교는 막을 내렸다고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여러분, 참 놀랍지요. 하나님은 마침표를 쉼표로 고치십니다. 이쯤되면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와 선교에 대해서는 마침표가 찍히고 신약성경에 더 이상 데살로니가라는 지역에 대한 언급이 없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데살로니가라는 지역 이름으로 제목이 붙여 있는 성경 두 권을 알고 있습니다. 곧,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후서를 보면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행해진 선교 활동에 마침표가 찍혔을 때, 하나님께서 마침표를 쉼표로 고쳐 잠시 멈추기는 했지만 다시금 전도와 선교가 이루어지게 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부터 보시겠습니까?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살전 1:2-3)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딱 세 주만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데살로니가에 남겨진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감사의 기도가 넘쳐나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있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의 소식이 사도 바울에게 계속해서 들리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내려가서 데살로니가전서 1장 8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살전 1:8)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딱 3주 머물렀어요. 그것도 거의 실패에 가까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 다시금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시작되고, 8절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곧 데살로니가 성도들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져나가고 있어요.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선언합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그럼요. 사도 바울이 한 게 아니잖아요. 어떤 인간의 수고와 인간의 계획으로 된 것이 아니잖아요.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실패였잖아요. 데살로니가 선교, 이제 끝이었잖아요. 마침표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마침표를 고쳐 쉼표로 만드셨고, 복음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일으켜 주셨습니다. 

여러분, 실패했다고 생각되세요. 마치 모든 가능성이 닫혀버렸다고 생각하세요? 이제는 더 이상 해볼 수 없다고 마침표를 찍고 계신가요? 하나님은 마침표를 고쳐 쉼표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쉼표이기에 때로는 머뭇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이기에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바로 그 길을 향해 지속적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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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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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2020. 6. 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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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기를 언제나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의 부흥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하곤 합니다. 의도적이기보다는 인식하지 못하면서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 속에서 꼭 그와 같은 예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6절) 

무엇인가 초대 교회에 큰 이슈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컸는지 사도들과 장로들이 함께 모여서 이 일을 의논할 만큼 중요한 문제였고,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7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지요.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자, 그들 사이에서 의견이 일치되지 못하고 서로 많은 변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문제이기에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의 역사가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급박하게 진행되는 이때에 모든 사도들과 장로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해야 했을까요? 그들이 다루었던 의제는 단 하나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사도행전 15장 5절에도 그와 비슷한 주장이 등장합니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을 향하여 전파되다보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교회 안에 있던 어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그것이 선행조건이 되어야 그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행전 15장 1절에 등장하는 유대 출신의 교사들이었고, 15장 5절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으로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바울과 같은 사람들이 그 반대편에서 반박을 하고 나섰지요. 그러나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고 율법을 지키도록 명령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모든 사도들과 장로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 문제를 놓고 뜨거운 논쟁을 펼쳐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논쟁이 뜨거우면 뜨거울 수록 전도의 문은 활짝 열릴까요? 아니면 전도의 문이 꽉 막히고 말까요?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아니지만,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할례를 비롯한 율법의 조항들을 지켜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하면 할수록 이방인들은 교회에 출석하려는 생각을 접게 되지 않겠어요? 유대인들이야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니까 상관이 없지만, 이미 성인이 된 이방인 남성들도 예수님을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누가 할례를 받으면서까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겠어요? 유대인들이야 그들의 문화 자체가 율법에 맞추어져 있지만 이방인은 유대인과 문화가 달라서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버리고 유대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누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냐고요? 

율법을 지킨다는 것, 좋은 일이죠? 구약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죠? 그래서 사도행전 15장 1절에 등장하는 유대 출신 교사나, 15장 5절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마음의 확신을 가지고 주장했겠지요.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율법은 지켜야지,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할 것은 해야지! 뭐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여러분, 그들이 선한 동기를 가지고 확신 속에서 주장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이방인을 위한 전도와 선교에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 안에는 사도행전 15장 1절에 등장하는 유대 출신 교사나, 사도행전 15장 5절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같은 모습은 없을까요? 선한 의도에서 시작된 거지요. 그 주장이 전적으로 틀린 것도 아니요. 그래서 본인은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신의 주장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때로는 우리 자신이 전도와 선교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이방인을 위한 목적이다 

이방인에게 율법을 지키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를 가지고 사도들과 장로들 사이에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 사도가 드디어 결정적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베드로는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유대인인 자신을 사도로 불러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선택이지요.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읽은 7절에는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신 목적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이제 하나님의 목적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네, 이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셨어요. 그리고 베드로를 사도로 세우기 위해 예수님께서 3년 동안 베드로와 동거동락하셨지요. 여러분, 인류 역사에서 베드로만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린 사람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거동락했어요.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으면서,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3년 동안 풍성히 받아 누렸던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바로 그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베드로 자신을 선택하고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인데, 그 이유와 목적이란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게 하신 것은 여전히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우리 시대의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즐겁고 기쁘신가요? 우리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즐겁고 기쁘신가요? 여러분, 오랜 시간 우리 교회를 출석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많고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가정을 위해 행하신 일들에 대한 간증이 풍성하신가요?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먼저 선택하여 주시고 교회 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먼저 누리게 하신 것은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특권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무거운 사명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누리는 은혜가 풍성하면 풍성할 수록 여러분은 아직도 교회 밖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그 증거다

베드로는 먼저 하나님께서 베드로 자신을 선택하신 목적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베드로는 그 점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성령의 역사를 지적합니다. 오늘 본문 8절입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만 성령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성령을 주어 증언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품으셨어요.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도 선택하신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은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는 강력한 의지를 어떻게 보여주셨는지 아세요?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면서 이방인들도 하나님께서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도록 –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던 고넬료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고넬료를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었어요. 그랬더니 고넬료의 가정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베드로가 전해준 예수님을 믿는 거예요. 그리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유대인들에게 임하셨던 성령님이 고넬료를 비롯한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임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베드로가 깨달은 거죠. 하나님께서 성령을 유대인들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부어주시니,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시는구나.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증거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에도 성령의 역사는 분명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전도의 현장에서 그리고 선교의 현장에서 성령의 역사가 불처럼 일어나고 있어요.  멀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 주변에도 성령께서 우리 시대의 이방인들에게 임하시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수많은 불신자들에게 믿음을 복음이 전해질 때 우리에게 주셨던 동일한 성령을 그들에게도 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시면서 우리에게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관심은 지금도 복음이 전해지는 바로 그 현장, 곧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는 바로 그 현장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실에 차별은 없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신 목적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방인에게 성령께서 임하는 것이 그 증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논쟁의 핵심을 찌르는 선언을 합니다. 오늘 본문 9절입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이방인의 마음을 믿음으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담대히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수긍하실 수 있으신가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지난 수천년 동안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려온 유대인이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왔던 이방인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 차이가 없을까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들이 죄인이지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 없이 살았지요. 그러니 그들이 죄인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어떻습니까? 유대인은 율법을 알고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실천했기에 의인일까요? 과연 구약성경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순종하는 의인들이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주범이었다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죄인이지요.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다고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주일을 성수하고, 여러 가지 기도회에도 참여하고, 나름대로 교회를 위해 봉사도 하신다고요? 그것이 이제 막 교회에 등록한 새가족이나 아직도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자들과의 차이라고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했을 지라도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언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우리는 불신자들과 다를 것이 없어요. 

이방인과 유대인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가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차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11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믿노라” 

여러분, 신앙생활을 10년, 20년, 30년을 하신 분들 혹은 교회를 위해 대단히 크고 위대한 업적을 이루신 분들이나 이제 막 예수님을 믿어 교회에 등록한 새가족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없고,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합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이나 이제 등록한 새가족이나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아울러, 우리 교회를 위해 온갖 봉사와 충성을 다 바쳤던 분이나 이제 교회에 막 등록한 분이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라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에 모인 교회 지도자들에게 간곡하게 권면했던 것처럼, 저도 여러분 모두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우리 교회 주변에 있는 불신자나 새가족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경험이나 신앙의 경륜 등을 가지고 새가족과 불신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 10절입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그 무거운)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그 무거운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여러분, 하나님 관심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알지못했던 죄인 한 사람이 돌이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에 우리의 모든 관심과 주의를 집중시켜서 복음의 거치는 자가 아니라 전도와 선교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우리 모두와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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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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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2020. 6. 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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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은 초대 교회의 큰 부흥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120명의 성도들이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어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숫자가 3,000명이었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4장으로 가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의 숫자가 남자만 5,000명이었다는 보도가 등장합니다. 남자만 5,000명이었으니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까지 합하면 만 명이 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교회가 시작되는 날 3,000명 이상의 교회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0,000명의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로 급격히 성장합니다. 큰 부흥이 초대교회에 임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초대교회는 어떻게 그토록 급격한 성장이 가능했을까요? 초대교회는 어떻게 그 대단한 부흥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저는 오늘 한 가지 비유로 그 대답을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소나 말을 사육하는 목장이 있지요. 그런데 호주나 미서부에서는 소를 정말 대규모로 사육하는 목장들이 있는데, 그 목장을 Ranch라고 부릅니다. Ranch는 작은 규모가 아니라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규모의 목장을 주로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소나 말을 사육하는 목장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목장을 관리하기 위해서 울타리(fence)를 설치하는 겁니다. 울타리를 쳐서 소나 말이 목장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가두고, 그 안에서 가축을 사육하는 형태입니다. 이것이 목장을 관리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그런데 두번째 방법도 있습니다. 특별히 호주나 미서부의 Ranch와 같이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울타리로는 도무지 가축을 관리할 수 없는 규모에서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이 두 번째 방법입니다. 여러분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농장을 관리하는 두 번째 방법, 특별히 광활한 농장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방법은 울타리를 치는 것이 아니라 우물(well)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좋은 우물을 개발하는 거죠. 그러면 소나 말과 같은 가축이 어느 정도 거리를 벗어나도라도 결국에는 좋은 우물이 있는 곳, 그래서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제공되는 장소를 과도하게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Ranch와 같이 광활한 농장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방법입니다. [각주:1]   


교회나 목회에도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하나는 울타리(Fence)를 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모임에 제대로 출석하는 지를 쉴 새 없이 체크하고 확인합니다. 주일 예배를 한 번이라도 빠지면 전화나 문자를 수십 번 받게 되지요. 성도들을 계속해서 채근하고, 조직을 만들어서 성도들을 관리하면서 성도들이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울타리(fence)를 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우물을 개발하는 거지요. 깨끗한 생수를 충분히 공급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도록 하는 목회입니다.  


물론 교회는 성도들에게 울타리를 쳐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이단과 같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울타리를 치는 일과 깨끗한 생수를 공급하는 우물을 개발하는 일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이 두 가지 중에서 우선순위를 매겨야 한다면, 당연히 울타리를 치는 일보다는 좋은 우물을 개발하는 일이 더욱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거대한 부흥의 물결은 울타리(fence)를 쳐서 가능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조직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교구조직이나, 남선교회, 여전도회가 없었어요. 그들에게는 건물도 없었고, 그들에게는 재물도 없었고,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단 한 가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의 우물(well)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의 생수가, 생명의 우물이 터져나오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때 우리 교회에 거대한 부흥의 물결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 가정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족 식구들, 여러분의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채근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어떻게 해서든 교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는 데 그것이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왜 이리 많은지요? 여러분, 가장 좋은 방법은 울타리를 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의 능력이 강물과 같이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들이 생수의 강물을 흘러 보내는 생수의 근원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이 잠시 방황하더라도 결국에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가정이 잠시 하나님을 떠난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에는 생수의 근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날개 잃은 새의 운명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은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던 바로 그 생명의 우물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루살렘 성전 동편에 고린도식 건축 양식을 따라 매우 아름답게 건축된 문, 그래서 ‘아름다운 문’이라는 의미의 ‘미문’이라 불렸던 바로 그 장소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 1절과 2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자신의 발로 도무지 걸을 수 없었던 한 사람이 등장하지요. 그리고 성경은 이 사람이 언제부터 도무지 걸을 수 없었는지를 알려줍니다. 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다가 불의의 사고로 걸을 수 없게 되었다면, 자신이 겪는 장애의 원인이라도 알 수가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도부터 – 도무지 자신의 장애가 왜 시작되었는지 이유도 알 수 없는 그 시절부터 – 도무지 걸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와 같은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나게 하셨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 사람의 운명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을까요? 날개 없이 태어난 새의 운명,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새는 자신의 날개로 창공을 날아다니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새에 날개가 없습니다. 새라는 모습은 가지고 있었지만 날개가 없어서 날 수 없는 형편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던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신의 아픔, 자신의 장애, 자신의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돈벌이로 이용하는 사람들에 둘러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2절을 다시 보시면, 태어나면서부터 걸을 수가 없었던 이 사람을 예루살렘의 성전 문 앞에 데려다 놓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몇 명이었는지를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사람들이 걷지 못하는 사람을 성전 문 앞에 데려다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은 불쌍한 장애인이 돈벌이를 할 수 있도록 성전에 데려다주고는 그가 구걸하여 사람들로부터 받은 돈을 한 푼도 남김없이 모두 이 장애인의 소유로 넘겨주었겠지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들은 앉은뱅이를 매일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게 하고, 그 수입의 일부를 – 어쩌면 대부분을 – 자신들의 주머니로 가져갔을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너무도 큰 아픔이요, 인생의 절망인데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아픔을 자신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도 이와 비슷한 구조가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라는 지역에서 귀신 들린 한 여인, 귀신 들린 한 여종을 고쳐주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여종을 치유하여 준 것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 여종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놀라운 장면이었죠.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그 여종에게서 귀신이 나간 사실을 알고 광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여종의 주인들입니다. 성경은 그 주인이 광분했던 이유를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 여기에서도 복수의 사람들입니다 –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행 16:19) 한 여인은 자신에게 붙은 귀신으로 말미암아 더없는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종의 비극을 자신의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여종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절망합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나의 그 한계, 나의 그 아픔, 나의 그 비참한 슬픔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만 삼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죄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요. 

 


절망의 현장에 복음의 빛을 비추다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그 사람, 날개를 잃어버린 새의 운명과 같이 절망의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그 사람, 자신의 아픔과 슬픔과 절망이 다른 사람의 돈벌이로 사용되고 있던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람, 베드로와 요한이 다가갑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 3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하자,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무엇을 했습니까? 구걸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이 장애인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무엇을 구걸했을까요? 하나님의 사람,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곧 복음을 구했을까요? 아니면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은전 한 닢을 구걸했을까요?  이 장애인은 자신의 눈 앞에 예수님의 사도들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구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누구인지, 그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 지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더욱 놀라운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장애인은 그저 한 끼 식사라도 해결할 수 있는 몇 개의 동전을 구걸했는데, 이 장애인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능력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권능을 조금도 기대하지 못했는데, 하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그 사람에게 위대한 구원의 메시지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교회의 사명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역할에 무관심합니다. 세상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복음의 능력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세상 속에서 교회의 역할이나 사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은 복음을 기대하지 않을 지라도, 아니 때로는 세상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능력을 오히려 싫어할지라도 교회의 사명은 그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맛보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요,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자 이제 베드로가 입을 열어 그 장애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구절인 사도행전 3장 6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가 이렇게 선언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얼마나 멋진 선언입니까? 얼마나 위대한 선포입니까? 


베드로의 이 선포와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의 대가였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톨릭교회의 추기경 한 사람과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가에는 돈을 구걸하는 걸인이 있었지요. 그때 추기경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은화를 하나 꺼내 그 걸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죠. “얼마나 다행입니까? 초대교회의 베드로 사도는 은과 금이 내게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걸인들을 구제할 수 있는 은과 금이 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지금 교회는 베드로 사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베드로 사도께서 외치셨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이 없었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은으로 촛대를 만들고, 금으로 교회의 기둥을 세우며, 대리석으로 교회의 바닥을 깔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능력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부터 말미암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거에 비해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어느 정도의 물질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손을 열어 물질로 누군가를 구제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 세상에서 참으로 해야 할 일은 구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참으로 해야 할 일은 돈 몇 푼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세워진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그 위대한 이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위대한 이름으로 말미암아 아픔과 장애와 절망 속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담긴 그 위대한 능력을 소유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까? 내 주머니에 다른 사람에게 식사 한 끼 대접할 돈은 있지만, 나를 찾아온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줄 믿음과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아닙니다.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다 


베드로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다리로 걸은 적 없었던 이 장애인에게 위대한 선언을 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런데 베드로의 위대함은, 초대교회의 위대함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한 뒤에, 손을 내밀어 그 앉은뱅이를 일으켜 줍니다.  오늘 본문 7절과 8절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이것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가 소유했던 생수의 강, 생수의 우물의 핵심적이 내용입니다. 그들은 화려한 프로그램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잘 짜인 조직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은도 없었고, 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건물도 없었고, 좋은 음식을 사람들에게 대접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모든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 날개를 잃어버린 새의 운명에서 도저히 헤쳐 나올 수 없었던 사람들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자, 그들이 절망의 자리, 슬픔의 자리, 아픔의 자리, 고통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달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러한 근원적인 변화가 날마다 체험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교회는 출석을 하고 있지만, 신앙생활은 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부터 시작되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신 분이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분의 부활로 말미암은 죄 용서의 체험을 아직 경험하지 못하신 분이 계신가요? 주일을 맞이해서 교회당에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내 삶을 날개 잃은 새와 같은 절망의 자리에서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창공을 나르는 새 희망의 자리로 옮기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깨닫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하나님 앞으로 나와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 충만하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체험으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다시 한번 여러분이 새로운 꿈과 비전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신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에 집중하십시오. 교회는 세상의 사람들, 오늘 본문의 걷지 못하는 장애인과 같이, 날개를 잃어버린 새와 같이, 절망의 자리에 앉아 그 어느 곳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복음의 능력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깨닫고 체험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들이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이 되는 그 장면이 우리 가운데 날마다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변화로 모든 사람이 놀라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태어나면서부터 단 한 번도 일어나 걷지 못했던 사람을 일으켜 세우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랍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 9절과 10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사람이 변화되었습니다. 단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절망의 자리, 슬픔의 자리, 아픔의 자리 – 곧 날개를 잃어버린 새의 운명 – 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러자 9절 말씀을 보시면, “모든 백성이,” 모든 백성이 요동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절 뒷부분을 보십시오.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여러분, 이 세상을 뒤흔드는 것은 단 한 사람의 변화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저는 바로 여러분이 그러한 변화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날개를 잃어버린 새의 운명에서 벗어나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모습으로 비상하십시오. 바로 그때, 여러분 한 사람의 변화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가정이 변하고 여러분의 직장이 변화고 이 세상이 변화될 것입니다. 

 

 

  1. Jim Belcher, Deep Church: A Third Way Beyond Emerging and Traditional (IVP Books, 2009), 8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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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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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2019. 6. 5.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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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잠시 유학을 하는 동안 체험했던 여러 가지 경험 가운데 지금까지도 가장 인상 깊게 남아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Florida) 주의 올렌도(Orlando)에서 Exponential Conference가 개최되었는데, 제가 공부하던 학교의 학생들이 하나의 팀을 이루어 콘퍼런스의 스텝으로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Exponential Conference 는 당시 2,000명 이상의 북미지역 기독교 지도자들이 참여한 대규모 집회였습니다. 첫번째 주제 강연은 프란시스 챈(Francis Chan)이라는 목사님이 강사로 나섰는데, 그가 강연을 통해 제기했던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왜 성령을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우리의 삶에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을까요?’ 

챈 목사님은 계속해서 인도에서 만난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인도와 중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는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는 사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믿음이 실제로 역사하는 현장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전통 위에 세워져 있는 북미에서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 어떠한 것도 포기하거나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기독교의 신앙은 더 좋은 설교자와 더 좋은 목회 프로그램을 찾아 그것을 선택하는 것일 뿐 그 어떠한 진지함도, 그 어떠한 헌신도 없다는 뼈아픈 지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프란시스 챈은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것은 단지 예배 처소에 모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따르는 그분의 제자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8년이 지난 그때의 강연이 새삼스럽게 제 마음에 떠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까지 세 주에 걸쳐 사도행전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현장을 묘사해줍니다. 초대교회에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든 사람을 치유하였고, 귀신을 내어 쫓았으며,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역사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묵상하면 할수록 저의 마음에 사라지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는 왜 사도행전과 같은 성령의 역사,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어쩌면, 8년 전 프란시스 챈 목사님이 북미 기독교를 진단하였던 것처럼,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신앙생활하는 우리 역시 기독교 신앙을 소유한다는 것이 단지 더 좋은 교회, 더 편안한 교회시설, 더 듣기에 좋은 설교를 찾아가는 하나의 소비형태가 되었을 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지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은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변화 - 복음의 역사

사도 바울의 3차전도여행을 묘사하는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허울 좋은 이름이었을 뿐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지 못했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요한의 세례는 받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몰랐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는 무엇인지, 그리고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지 설명하지요. 오늘 본문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바울은 요한의 세례를 언급하면서 중요한 하나의 키워드를 삽입합니다. 곧, “회개의 세례”입니다. 요한은 세례를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사람들에게 베푼 세례의 핵심은 회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의 피를 깨닫고 죄를 고백하는 회개만으로는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죄인의 자리에서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납니다. 곧, 거듭남입니다.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아래 있었지만 이제는 하늘의 은총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갔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친히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 삶을 이끌어가시니 그 주님과 함께 걷는 걸음이 행복하고 기쁨이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의 세례를 넘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례에 담겨있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곧, 거듭남의 은혜입니다. 

세례만이 아닙니다. 성만찬에도 우리가 믿고 따르는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4-55) 

우리는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남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하늘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공급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다 내어주셨습니다. 그분은 다시 살아나셔서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복음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늘의 은총을 누리며 하루 하루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세례는 받았지만, 여전히 세례에 담겨 있는 복음의 핵심, 곧 거듭남의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니 체험하지도 못합니다. 매월 베풀어지는 성만찬에 참여하지만 성찬에 담겨있는 복음의 핵심, 곧 하늘의 양식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니 체험하지도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허울뿐인 제자들, 허울뿐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딱 그러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았어요. 그러나 세례 안에 담겨있는 복음을 깨닫지도 못하고 체험하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어쩌면 성만찬에 참여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만찬에 담겨있는 복음을 깨닫지도 못하고 체험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사도행전의 모습을 참으로 체험하기를 원하신다면 그 무엇보다도 복음의 진리를 믿으십시오. 세례에 담긴 거듭남의 은혜를 믿으십시오. 성만찬에 담긴 복음, 곧 날마다 필요한 영적인 양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으십시오. 비록 나의 모습은 여전히 부족하고, 때로는 나도 나의 모습이 싫고 미워질 만큼 여러분 안에 죄성이 가득할지라도 여러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여러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며 하늘의 양식을 풍성히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빋으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는 사람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여러분은 더 이상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를 풍성히 베풀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믿으십시오. 그 믿음 위에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복음의 역사가 바로 여러분의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변화 – 성령의 역사

사도 바울은 제자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세례에 담겨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고,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드디어 그들의 마음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십니다. 오늘 본문 6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바로 그 다음 절에 매우 짧지만 의미 있는 문장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십시오.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여러분, 여기에 등장하는 12라는 숫자를 들으셨을 때 무엇인가 떠오르는 개념이 없으신가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열두명의 제자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였던 사람들이 약 120명 – 여기에도 12라는 숫자가 등장하네요. - 120명의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오순절날 성령께서 강하게 임재하셔서 비로소 사도행전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금과 은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재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악한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며 복음의 역사를 체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난 지도 20여년이 지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1차 전도여행과 2차전도여행을 마치고 이제 3차전도여행으로 에베소에 와 보니, 거기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제자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복음의 능력이나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바울은 에베소에서 만난 열두명의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시금 전하였고 그들에게 성령께서 다시금 임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지 그 열두명의 제자만이 아닙니다. 3차 전도여행기간, 사도 바울은 주로 에베소라는 도시에 머물렀고 그곳에서도 두란노서원이라는 곳에서 소수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집중합니다. 뿐만 아니라, 두란노서원에서 사도 바울이 간절히 기도하였고, 12명의 제자들도 간절히 기도하였고, 두란노서원에 함께 모인 성도들도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오순절날 120명의 성도들에게 임재하셨던 성령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함께 두란노서원에서 말씀을 배우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임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 10절은 그 결과를 이렇게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10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곧 인종과 성별과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느냐고요? 사도 바울이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대신 그는 두란노서원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집중적으로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성령께서 임하자 비로서 다시금 강력한 성령의 역사,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무엇보다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마십시오. 그리고 너무나도 중요한 한가지, 성령 하나님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임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오순절 성령의 강림을 시작으로, 어디든지 성령께서 임재하셨던 장소, 언제든지 성령께서 임재하셨던 시간에는 예외없이 영적대각성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많은 성경공부를 하고, 제 아무리 제자훈련을 받고, 제 아무리 많은 훈련과 교육을 받는다 하더라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못한다면 우리의 마음만 분주해질 뿐 사도행전이 그려주는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현장은 결코 체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시대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체험하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무릎을 꿇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달라고,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변화시켜 달라고, 성령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충만하게 임하셔서 나를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의 자리에서 벗어나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탈바꿈시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언제 임하실 지 알 수도 없으며, 성령께서 어느 장소에 임하실지도 알 수 없으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임재하기만 하시면 우리의 삶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정에 임재하기만 하시면 우리의 가정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교회에 임재하기만 하시면 우리 교회는 물론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다시금 복음의 역사로 출렁이게 될 것입니다. 


프란시스 챈의 기도

미국 플로리다주의 올렌도에서 있었던 Exponential Conference의 프란시스 챈 목사님의 강연이 약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었던 것은 사실 그분의 강연 내용보다는 그분의 기도였습니다. 프란시스 챈은 강의를 마치자, 챈 목사님이 강대상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다시금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나님 당신을 참으로 경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챈 목사님의 기도가 계속되면서 이곳 저곳에서 사람들이 흐느껴 울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삽시간에 약 2,000명이 넘는 북미 기독교 지도자들이 회개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나름대로 교회의 지도자로 사역도 하고 있지만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뿌리 깊은 탐심,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제자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 나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2,000여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자신들이 속한 북미 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위하여, 새로운 성령의 역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저 역시 간절히 기도하였지요. 지구 반대편에 와 있었지만, 바로 그곳에서 이 땅 한반도와 이곳에 있는 수많은 교회들이 다시금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새로운 부흥의 역사를 허락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시금, 사도행전을 묵상하며 복음이 살아 움직였던 초대교회의 모습이 왜 지금 우리 시대에는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지금, 저에게 떠오른 대답은 약 8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예배당 바닥에 꿇어 앉아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위하여 기도하였던 바로 그 장면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행전의 역사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도 이루어지도록 함께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바로 그 역사가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개인의 삶 속에서 체험되고, 여러분이 속한 가정과 모임 속에서 실체가 되며, 우리가 섬기는 이 교회에서 실재하는 역사가 되도록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의 임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 오순절의 역사가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것처럼, 두란노서원에서 사도 바울과 함께 12명 정도의 제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였던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할 때 온 아시아에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처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에게 성령께서 임재하신다면 우리는 오늘도 사도행전이 그려주는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1장 1-18절 “복음, 생각을 바꾸다”

지금으로부터 약 160년 전, 유럽의 도심에 위치한 병원 산부인과에서는 산모들이 분만을 한 뒤에 산욕열로 사망하는 비율이 매우 높았다고 합니다. 산욕열이란 출산 이후 약 6주간의 회복기간 동안 상처가 감염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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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6장 16-34절 “복음, 경로를 바꾸다”

작년 여름, 휴가 기간을 이용하여 유치원을 다니는 어린 아들과 단 둘이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저녁, 저는 아들과 함께 성산 일출봉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제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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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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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2019. 5. 27.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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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휴가 기간을 이용하여 유치원을 다니는 어린 아들과 단 둘이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저녁, 저는 아들과 함께 성산 일출봉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제 아들은 최선을 다해 한 걸음씩 올랐지만 중간중간 너무 힘들다고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저는 중간중간 아들을 안고 올라갔습니다. 비록 제 아들이지만, 한 여름 날씨에 그 녀석을 안고 계단을 오른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후회가 몰려오더라고요. ‘내가 뭐하러 아들을 데리고 여기에 왔나’ 그래도 저의 아들은 최대한 자신의 발로 걸었고 그날 저녁 저희 부자는 일출봉 정상에서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갔으니 오르는 것보다 내려올 때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계속 주의를 주었고, 아들은 한발 한발 조심하며 내려왔습니다. 마침내 다 내려왔을 때 저의 아들이 한마디 했습니다. “아 살았다” 아빠에게 말은 못했지만 오르고 내려오는 길에 내심 두려웠던 겁니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그날의 일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조그마한 몸으로 아빠와 함께 일출봉 정상까지 오르고, 또 함께 내려오면서 더 이상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힘들다고 짜증을 내지 않고 그저 묵묵히 따라와 준 아들이 눈물 겹도록 고마웠던 경험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하나님께서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그저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졸졸졸 따라가는 것이요, 그저 하나님의 품에 안겨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따라가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인도하심을 따라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그 시작점부터 바울의 계획과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라는 한 사람을 데리고 갈 것인지의 문제를 놓고 바울과 바나바가 의견 충돌이 일어나더니 결국에는 바나바는 바나바대로, 바울은 바울대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또한, 1차전도여행의 중심지였던 아시아 지역을 2차전도여행에서도 다시 방문하는 것이 바울의 처음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계속해서 바울이 가려고하는 길이 계속 막히고 맙니다. 사도행전은 그 장면을 설명하면서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했다’고 묘사합니다(16:6-7). 그러니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처음부터 순탄치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여곡절 끝에 빌립보라는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귀신들린 여종이 있었습니다. 그 여종은 점을 치며 주인에게 큰 수입을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아주었습니다. 비로소 이 여인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장면을 바라보며 광분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 여종의 주인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고소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탐욕으로 오히려 선한 일을 한 바울을 고소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빌립보 도시의 관리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벗기고 심하게 매질을 하고는 깊은 지하 감옥에 가두어버립니다. 

이때 바울은 자신에게 가하는 억울한 매질과 투옥을 매우 간단하게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곧, 바울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당시 로마의 법에 의하면 로마 시민은 재판을 통해 유죄판결을 받기 전에는 매를 때리거나 감옥에 가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와 같은 간단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몰랐느냐고요? 아닙니다. 당연히 알고 있었고 이 일이 있은 바로 그 다음날도 자신의 권리를 사용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채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2차전도여행을 출발하여 지금까지 자신의 계획이 계속해서 수정되고 변경된다는 것을 의식하였던 것 같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2차전도여행에서는 별로 되는 일이 없잖아요. 뜻대로 잘 안 되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이 따로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디까지 인도하시는 지 따라가 보기로 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울의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계획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막혀 버리는 경험을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자신의 계획을 계속 변경하며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요, 그래도 답이 보이지 않으면 그저 절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냅니다. 바로 자신의 계획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날 때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겼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너무도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계획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계획을 세웁니다.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좋은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내가 세운 계획이니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고집입니다. 계획이 세워졌고 모두가 합의한 것이니 그 계획은 최대한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동의하였고, 우리 모두가 합의하였지만 과연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합의에 하나님도 동의하셨는지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잠언 16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그러므로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위대한 일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빈틈없이 준비한 철저한 계획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철저한 순종입니다.  곧,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을 위한 마스터 플랜(master plan)이 아니라, 우리의 마스터(Master)가 되시는 –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 그분의 계획, 곧 Master’s plan인 것입니다.[각주:1]   


한밤의 기도

흠씬 두들겨 맞고 어둡고 차가운 깊은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이 되어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계속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여러분, 여기에 등장하는 바울과 실라의 기도, 그리고 그들의 찬양은 지금 억울하게 매를 맞고 깊은 지하감옥에 갇혀 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달라고 부르짖는 기도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로마시민권만 사용하면 지금이라고 그 감옥에서 나올 수 있어요. 그러나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감옥에서 벗어나는 게 아닙니다. 나의 계획은 다 무너졌어요. 나의 계획은 하나님의 계획과 달랐기에 더 이상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계획을 찾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아직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나타나지 않았으니, 나를 어디까지 인도하시는 지 지켜보기 위해 인내하며 여기까지 따라왔습니다. 그 순간순간 바울은 기도하였고, 그 순간순간 하나님을 찬양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폭풍우가 지나고 저 깊은 지하의 감옥에 갇혀있지만 아직 하나님이 자신을 어디로 인도하시는 것인지 주님의 계획을 다 알 수 없으니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기도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한 밤중이었습니다. 그곳은 깊은 지하 감옥입니다. 아무런 모습도 안보이고,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리는 모든 것이 정막하기만 했던 그 깊은 지하 감옥에 비로소 바울과 실라로 말미암아 찬양의 소리, 기도의 소리가 조금씩 울리기 시작하여 그곳에 갇혀있는 죄수들의 귀에까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를 이끌고 그 깊은 감옥에 함께 내려가셨던 성령 하나님의 귓가에도 그들의 찬양과 기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닫는 기도와 찬양,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와 찬양은 나의 계획을 끝까지 고집하다가 그 계획이 실패할 때 다시 한번 하나님께 자신의 뜻과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켜 달라고 떼를 쓰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신의 계획과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 장면을 보면서 더 이상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만일 기도라는 강력한 도구를 사용하여 내가 원하는 계획, 내가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면, 오늘 본문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수입을 얻었던 사람들, 여종에게서 귀신이 나가자 수입이 끊어진 것 때문에 관리들을 충동하여 바울과 실라를 깊은 감옥에 쳐넣은 그 여종의 주인들과 도대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지만,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는 그때, 지금도 하나님께서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기에 나의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할 수 있는 경로를 바꾸는 기도. 경로를 바꾸는 찬양. 바로 그것이 어둡고 적막하기만 했던 그 깊은 감옥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소로 바꾸는 참된 기도와 참된 찬양이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현장

드디어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바로 그 장소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을 쉬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진을 일으키셔서 옥터 전체가 움직이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을 묶어 두었던 모든 기구들이 다 풀어집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놀라운 기적은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의 모든 문이 열리고 모든 묶였던 것이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던 어느 누구도 감옥에서 도망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 곧 지진이 일어나고 모든 문과 모든 묶인 것이 풀리는 기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곳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렸던 바울의 행동. 이 기적적인 두가지 장면으로 말미암아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엽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를 향하여 그 마음의 깊은 질문을 토해냅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30절) 간수의 이 진실한 질문으로부터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복음의 내용을 가장 함축적으로 전파하기 위하여 무수히 반복하여 인용하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의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이 위대한 선포를 시작으로 바울은 복음의 말씀을 간수와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였고, 간수와 그의 가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전도의 현장, 복음의 현장은 바로 저 깊은 지하 감옥이었으며 복음이 선포되고 복음이 믿어지는 시간은 바울과 실라가 억울하게 매를 맞았던 바로 그날 깊은 밤이었던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우리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첫번째 선택지는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선택지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실 장소를 결정하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회퍼는 첫번째 선택지, 곧 내가 하나님을 만날 장소를 직접 선택하는 경우, 그곳에서 내가 만나는 하나님은 나와 닮은 하나님, 내가 좋아하는 하나님, 곧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만들어낸 우상이라고 강조했던 것입니다.[각주:2] 그러므로 여러분이 나의 생각과 나의 경험을 뛰어넘는 위대하신 참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두번째 선택지를 고르셔야 합니다. 곧, 내가 하나님을 만날 장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실 장소를 선택하실 수 있도록 모든 결정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오랜 세월 살아온 갈대아 우르를 떠나 저 멀리 변방이었던 가나안으로 가는 것은 거의 죽음을 무릎 쓰는 듯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야곱에게 형 에서를 피하여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간다는 것은 정처없는 피난길처럼 보았습니다. 요셉에게 애굽의 종으로 팔려간다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가정의 비극 중에 비극이었습니다. 모세에게 애굽의 궁궐을 뒤로하고 광야에서의 목동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소망이 사라지는 듯한 인생 경로의 변경처럼 보였습니다. 이후 유대 백성에게 성지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민족 바벨론의 포로가 된다는 것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가 끝나버렸다는 저주의 표시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앞으로 전진하십시오. 아브라함에게는 갈대아 우르가 아닌 가나안이, 야곱에게는 아버지의 집이 아닌 하란이, 요셉에게는 종으로 팔려가는 애굽이, 모세에게는 바로의 궁궐이 아니라 광야가, 그리고 유대 백성에게는 성지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벨론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기로 결정하신 장소라면, 나의 계획을 포기하고 경로를 바꾸어 우리는 바로 그 장소까지 내려 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외면당했던 장소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기로 결정하신 장소이시니 바로 그곳까지 도착해야 참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비로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경로를 수정하였습니다. 결국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시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장소에 있었고, 복음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장소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습니다. 고통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바로 그곳에 도착하여 복음의 역사를 경험하자 바울과 실라, 그리고 간수와 그의 가족들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오늘 본문의 마지막 결론이 무엇입니까?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크게 기뻐하니라”  바울과 실라의 상처는 여전히 후끈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아픔과 괴로움을 모두 보상하기에 충분한 기쁨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그날 밤 빌립보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행복을 누렸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그날 바울을 만나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난 여종도 행복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종의 주인들은 결코 그날 밤을 행복하게 지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여종의 주인들이 고소하자 그들의 말만 듣고 바울과 실라에게 매를 치라 명하고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은 빌립보의 고위 관료들도 그날 밤만큼은 행복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날 밤 빌립보의 하늘을 바라다보며 쏫아질듯한 별들을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겠지만, 간수의 집에 모여 함께 기쁨의 식탁을 나누었던 바울과 실라, 그리고 간수와 그의 가족들이야말로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분명한 믿음을 선포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1-32)

만일 우리가 사도 바울에게 이 구절을 내밀면서 바울 당신이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 억울하게 매를 맺고 옷이 벗겨지고 심한 매를 맞고 깊은 지하 감옥에 갇힌 것도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주시는 그 모든 좋은 것에 포함되느냐고 질문한다면, 바울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렇다”라고 대답하지 않을까요? 비록 억울하게 매를 맺고 옷이 벗겨지고 심한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힌 것은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그날 밤 빌립보에서 잠든 모든 사람보다 가장 큰 기쁨을 누렸기에 바울은 그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행복의 선물이라고 고백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때 복음의 내용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비록 지금 내가 가는 길이 깊은 감옥이라 할지라도, 비록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좁은 길이라도, 비록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의 손을 붙잡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나의 계획을 포기하고 경로를 수정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하나님을 만나기로 결정한 그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기로 결정한 바로 그 지점까지 내려가십시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내가 만든 우상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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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eil Cole, Journeys To Significance: Charting A Leadership Course From The Life Of Paul (San Francisco: Jossey-Bass, 2011), 70. [본문으로]
  2.  앤서니 티슬턴, <성경해석학 개론: 철학적 신학적 해석학의 역사와 의의>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2), 45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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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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