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1. 6. 6. 17:35

독일 비텐베르크에 위치한 시립교회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교회입니다. 루터는 그 교회에서 3천 번이 넘는 설교를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에는 이른바 ‘종교개혁 제단화’라 불리는 네 점의 성화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크고 중앙에 위치한 그림이 <최후의 만찬>입니다. 지금까지도 가장 대중적인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이지요.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에 걸려있는 <최후의 만찬>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매우 가까운 친구였던 루카스 크라나흐라는 화가가 그린 것입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왼편에 예수님께서 계시고,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이 ‘그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성경에 기록된 사도 요한이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맞은편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잡히시던 그날 저녁, 제자들과 나누셨던 유월절 식탁을 묘사하는 이 그림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림의 오른쪽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식탁을 바라보고 있는데, 유독 한 사람만이 식탁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는 손에 잔을 잡고 있는데,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어떤 사람에게 그 잔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성경이 기록한 예수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크라나흐가 이 그림을 드렸던 16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루터의 종교개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성만찬을 행하면서 일반 성도들에게는 잔을 주지 않고 떡만 주었습니다. 루터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생각했지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총은 사도들이나 몇몇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을 가리키는 성만찬의 떡과 잔도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루터는 확신하였고, 그는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금기 사항을 깨고 성만찬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에게 떡과 함께 잔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약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개신교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고, 우리는 성찬식을 행할 때 모든 성도들에게 떡과 잔을 모두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크라나흐는 마틴 루터의 든든한 후원자로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나누셨던 최후의 만찬 장면을 그리며,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누어 주신 성만찬의 잔을 일반 성도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첨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성만찬의 잔을 자신의 뒤에 있는 어느 젊은이에게 전달하는 사람의 얼굴은 당시 비텐베르크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곧 마틴 루터입니다. 
 
크라나흐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는 마틴 루터 외에도 당시 비텐베르크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또 한 명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16세기 비텐베르크에 살던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열 두 제자의 얼굴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실제 얼굴과 제자들의 실제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마틴 루터의 바로 왼쪽에 앉아 있는 인물은 당시 비텐베르크 주민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한스 루프트인데,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을 인쇄하였던 출판업자입니다. 한스 루프트는 당연히 사도도 아니요, 성직자도 아니요, 목회자도 아닙니다. 그는 책을 출판하는 사업가였습니다. 크라나흐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며, 출판업이라는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도움을 주었던 한스 루프트를 사도들만 참여했던 예수님과의 최후 만찬 자리에 당당하게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하여 크라나흐 역시 화가라는 자신의 직업을 통해 종교개혁의 핵심 가치를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 가치가 무엇입니까?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없이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총을 누리고 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없이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어진 직업을 통해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가르침, 곧 마틴 루터가 생명을 다해 전파하였던 ‘만인제사장’의 개념을 이 한 폭의 그림 안에 담아 놓았던 것입니다. 


속죄의 은혜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높은 보좌에 앉아 계셨고, 그분의 옷자락은 온 성전에 가득했지요. 하나님을 곁에서 섬기는 스랍의 천사들조차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히 대면하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발을 가리기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모든 천사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사야 6장 3절)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은 단 하나의 질문으로 온통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민족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 하나의 질문에 온 마음이 사로잡힌 이사야 선지자는 탄식하고 맙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 6장 5절) 

그런데 여러분, 이사야 선지지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건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악으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애통하며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찾아옵니다. 본문 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때에”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 6장 6-7절)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특별히 자신의 입술이 가장 부정하게 느껴졌어요.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그의 언어가 부정하고, 그의 언어생활이 죄로 가득하다는 의미이겠지요.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입술, 곧 자신의 언어생활이 가장 부정하다고 여겼던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그의 입술에 숯불을 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너의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니 자신의 입술이 그렇게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손이 부정하고 자신의 손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분도 계십니다. 손이 부정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손으로 행한 일이 죄악으로 물들어 있다는 의미겠지요. 그래서 이후 이사야서에는 이런 표현이 등장해요.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이사야 59장 6b절)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어떤 분들은 자신의 손이 그렇게 더럽고 부정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은 그러한 분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어느 부분을 정결하게 하실까요? 그의 손을 정결하게 하시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악이 제하여졌고 너의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발이 너무도 부끄럽게 여겨지곤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발이 부정하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죄악의 길을 걷고 마땅히 피해야 할 곳을 떠나지 않았다는 의미겠지요. 그래서 이후 이사야서에는 이런 표현도 등장해요.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이사야 59장 7a절)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나의 발이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분이 계신가요? 하나님은 그러한 분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우리의 발을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은 계속하고 있지만, 여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워 가리고 싶은 부분이 여러분에게도 있지 않으세요? 어제도 실패하여 오늘만큼은 또다시 잘못을 범하고 싶지 않은데 여전히 실패하고 넘어지는 지점이 있지는 않으세요? 이사야에게는 그것이 입술이었어요. 어떤 분들에게는 손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분들에게는 발이나 또 다른 곳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것이 무엇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그 모든 악을 제하시며 우리의 그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여 주실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명으로의 부르심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속죄의 은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이사야 6장 8a절)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사야를 선지자로 선택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질문을 던지며 이사야를 사명의 자리로 초대하시네요.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사야에게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라 명령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의 의향을 질문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었겠지요. 그리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의도에 정확히 부합하는 대답을 합니다.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 6장 8b절) 

우리는 이 장면에서 신앙의 매우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속죄와 사명의 관계인데,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속죄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속죄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소명을 진실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겉모습은 유사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나의 모든 죄악을 용서해주시는 속죄의 은혜가 가득하지 않으면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나의 유익만을 쫓으며 내가 원하는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에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 속죄의 은혜가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속죄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던 이사야에게 이제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선지자의 사명을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상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사야 6장 9절)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여러분은 이해가 되세요? 물론, 문자적인 의미는 이해가 되지요. 그러나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이라니, 이것이 이사야가 선지자로 한 평생 감당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십니까? 이사야가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알 수 없다.’ 이러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이사야의 사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러한 말씀을 전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도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이사야 6장 10절)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백성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겨서 마침내 그들의 마음이 둔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왔던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사명이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유와 목적이 그들의 마음이 열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신 사명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백성들에게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라고 말하고 싶었겠지요. 백성들에게 귀를 열어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선포하고 싶었겠지요. 모르기는 몰라도 그것이 선지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여 ‘나를 보내소서’ 헌신하지 않았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말씀을 전하면 백성들의 마음이 열려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선교사의 소명을 받아들였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사명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이 사명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지금 나에게는 사명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나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명을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내가 거부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지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저것입니다. 저 정도는 되어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저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것을 맡기고 계시거든요.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 사이에 차이가 있으니,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요. 그런데 여러분, 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속죄의 은혜, 대속의 은혜, 구원의 은혜를 받으셨다면 여러분에게는 바로 지금 감당해야 할 사명이 반드시 주어져 있습니다. 때로는 직장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가정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주어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교회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여러분 자신이 결코 하고 싶지 않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그 자리로 부르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어 주십니다. 마치 이사야 선지자에게 온갖 죄악에 빠진 유대인들을 향해 징벌과 심판을 선언하라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마침내 동일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회복과 치유의 때도 선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식탁

설교를 시작하며 크라나흐가 그린 <최후의 만찬>을 함께 보았지요? 이 그림에는 오늘 설교의 두 가지 주제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속죄의 은혜입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식탁을 나누고 계시네요. 그래서 식탁의 한 중앙에는 유월절 어린양이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이 그림에 담긴 또 하나의 주제는 사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고 있는 제자들은 사도의 사명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 그림에는 마틴 루터와 같은 성직자도 있지만 한스 루프트와 같은 사업가도 있어요.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들의 역할이 무엇이든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속죄의 은혜를 누리는 모든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따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속죄의 은혜 그리고 사명으로의 부르심이라는 오늘 설교의 주제가 이 한 폭의 그림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다시 보니, 속죄의 은혜와 사명으로의 부르심이 함께 담겨 있는 장소는 다름이 아닌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부르며 초대하시는 은혜의 식탁이네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고 싶으시나요? 지금도 우리에게 속죄의 은총을 한 없이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식탁으로 오십시오. 과거에 실패하셨더라도 괜찮습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여 저지르셨더라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식탁에서 예수님은 여러분의 모든 과거를 용서하시며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영혼의 양식을 풍성히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를 원하시나요? 그리하여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참으로 원하시나요? 그러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에게 사명을 주시며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 주시는 주님의 식탁으로 오십시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에 어떻게 쓰임 받을지 알 수 없어 답답한 마음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시는 일이 서로 달라 어리둥절하여도 괜찮아요. 주님과의 친밀한 식탁의 교제를 누리며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주님께서 맡겨 주시는 그 소명에 응답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속죄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도 우리 주님이시요, 
여러분을 사명으로 부르시는 분도 우리 주님이시니, 
마침내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가 여러분의 삶에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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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1. 5. 30. 19:46

오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한 마디로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지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 6장 1절) 

하나님께서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이사야는 그 장면을 보기 위해 얼마나 높이 머리를 들어야 했을까요? 저 높은 하늘 보좌에 하나님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그 장면만으로도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그분의 옷자락을 통해 그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계셨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대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그가 입고 있는 의복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의복을 통해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는 옷의 색깔이었습니다. 당시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청색에 가까운 옷을 입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구약 성경은 제사장의 옷을 청색으로 만들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청색이 높은 신분을 나타냈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푸른빛을 내는 염료가 당시로서는 너무도 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짙은 청색의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은 한눈에 그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지요. 색깔과 함께 의복을 통해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는 방식이 또 하나 있었는데, 옷의 길이입니다. 옷이 길면 길수록 그 사람의 신분이 높다는 뜻이었지요. 그 이유 역시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옷감이 귀했던 시대잖아요. 그런데 많은 옷감을 들여 옷을 길게 지어 입을 수 있다면 당연히 높은 신분이라는 것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하나님의 모습은 저 높은 하늘 보좌로부터 이 땅의 성전까지 그 옷자락이 이어졌고, 본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하나님의 옷자락이 온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사야 선지자가 눈을 들어 바라보았던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하시고, 가장 높으시며, 가장 거룩하신 온 세상의 통치자였습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이사야 6장 2절) 

여기에 스랍이라 불리는 천사가 등장하네요. 우리는 스랍이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들은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중요하게 묘사하는 장면은 그들의 날개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두 6개의 날개가 있었습니다. 두개의 날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또 두 개의 날개는 자기의 발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두 개의 날개로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또 두 개의 날개로 그들의 발을 가렸을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랍이라 불리는 천서까지도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발을 드러낼 수가 없었고, 자신의 얼굴과 발을 가리기에 바빴습니다. 본문 2절은 스랍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만 본문의 의도는 스랍이라 불리는 천사들의 존재를 자세히 소개하기 위함이 아니라, 스랍들조차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얼굴과 발을 가리기 위해 분주할 만큼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높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장면입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사야 6장 3절) 

본문이 묘사하는 하나님,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거룩하시고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곧 세상의 모든 나라와 민족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통치자이십니다. 그분은 온 땅에 영광이 충만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6장을 읽으며 우리가 배우게 되고 우리가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모습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보살핌 등 지금도 우리의 삶을 세밀하고 따스하게 감싸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경향이 이해가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우리도 분문에 등장하는 스랍들처럼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가리기에 급급하겠지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힘들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사랑의 하나님을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하늘 보좌에서 세상 만물을 통치하시며 모든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사랑으로 우리를 세밀하게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모습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절뚝발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신 분이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고 구분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시에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신약성경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선포하지만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하시는 모습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로마서 11장 22절) 예수님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사랑과 은혜만을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지금도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우리를 정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지요. 그러면 이제부터 그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이사야 6장은 이사야가 선지자의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러면 이후로 그가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때 그의 자세와 그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오늘 본문 이사야 6장에서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1절 처음입니다. 본문 1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오늘 우리에게는 이 표현이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지만, 이사야 시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상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웃시야 왕은 대단히 상징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무려 52년이 남유다를 다스렸던 웃시야는 다윗과 솔로몬 이후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던 왕입니다. 그가 왕위에 앉아 있을 때 국방은 튼튼했습니다. 경제의 핵심이었던 농업은 융성했습니다. 에시온게벨이라는 항구를 장악하여 국제무역을 통해 큰 수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한 번성과 융성의 시기를 이끌었던 웃시야 왕이 죽었으니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하여 당시 남유다의 지도자들은 이제 나라의 운명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웠습니다. 

바로 그때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 선지자에게 찾아온 첫번째 변화는 그의 관심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웃시야의 죽음이 초래하는 정치적인 변화도 중요하지요. 그가 이루었던 경제적 번영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지요. 웃시야의 죽음을 틈타 남유다를 노리는 주변 나라들의 동태도 잘 살펴야겠지요.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이사야 선지자는 그 모든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민족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5절의 탄식이 나오게 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도다 (이사야 6장 5절)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관심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의 관심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도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 하나에 집약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 된 삶에 대해 탄식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관심사가 바뀌고 나니, 이제는 그의 행동이 하나씩 바뀝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한마디 한마디를 얼마나 신중하게 내뱉었을까요? 선지자로 매일의 삶을 살아갈 때 죄악을 멀리하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이후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야 말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거룩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48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의 구속자이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이사야 48장 17절) 

거룩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행동을 바르게 고쳐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게 된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며 이사야 선지자의 이 경험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동시에 이곳에서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그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도 체험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지요. 그러면 우리의 삶도 거룩으로 조금씩 바뀌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더 해보니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여주셨던 장면을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실 것 같아요. 여러분, 제 이야기를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이라도 영광 중에 이 성전에 임재하실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니 우리 인간이 그것에 대해 평가하고 예단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여주셨던 그 장면을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보여주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성경에 기록해두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 6장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읽고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아닌가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뵈었지만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항변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온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만군의 하나님,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우리는 지금 그 장면을 묵상하고 있으니 우리는 지금이라도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삶도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그루터기 _ 거룩하신 씨앗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며 거룩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회복의 역사를 일으켜 주십니다.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들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사야 6장 11-12절) 

본문 11절과 12절은 분명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온갖 죄악에 빠져있는 유대 나라를 황폐하게 만드시겠다는 심판의 선언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바로 이 구절 안에 유대인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셨나요?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하죠?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사야가 묻는 ‘때’는 회복의 때, 치유의 때, 구원의 때입니다. 지금은 죄악이 횡횡한 시대입니다. 지금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남 유다에게 여러 가지 형벌을 내리시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어둠과 죄악의 지나가고 새로운 회복의 때가 언제 도래하겠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놀랍게 하나님은 그때가 언제인지 대답해 주십니다. 12절의 마지막입니다.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때도 심판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치유하고 회복하시며 구원해 주시는 바로 그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의 때에 일어날 일을 마지막 1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6장 13절) 

여기에 그루터기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나무의 줄기가 잘려나간 뒤에도 여전히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 남아 있는 밑동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 구절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마침내 큰 죄악에 빠져있었던 남 유다를 심판 하셨고,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유대인들은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새롭게 세우지요. 이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무리들을 본문 13절이 말씀하는 그루터기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루터기라는 이미지에 집중하며 본문 13절의 의미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자 칼뱅은 13절을 주석하며 ‘그루터기’를 한 겨울의 모진 한파를 견디어 내는 나뭇가지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글을 조금만 읽어보겠습니다. “겨울에 잎이 다 떨어져 버리면 죽은 나뭇가지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봄이 되면 잎은 다시 돋아난다. 즉 이 백성도 그와 같게 된다는 뜻이다.”한 겨울 살이 베이는 듯한 추위 속에서 앙상해진 나뭇가지가 따뜻한 봄의 햇살 속에서 녹음으로 푸르러지듯,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황폐해진 유대 나라를 하나님께서 새롭게 회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13절 말씀에는 그루터기라는 단어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직접 설명해 놓으신 대목이 있습니다. 13절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여기에 거룩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요. 이미 충분히 말씀드린 것처럼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 선지자는 이후 자신의 삶과 자신의 행동을 거룩으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악 된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6장의 마지막 문장은 드디어 거룩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이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 한 사람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적용하네요.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거룩한 씨는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13절에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 만나고 체험하였던 사람들, 그리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도 최선을 다하여 거룩으로 바꾸어 가려는 사람들, 그 몇 명 되지 않는 거룩한 씨가 곧 그루터기가 되어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겠다 약속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출석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도 이사야 선지자가 경험하였던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외면하고, 그저 나에게 복을 주시고 그저 나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그저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하나님만을 원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사야 6장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동도 조금씩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바로 그때, 
거룩한 씨앗인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치유하여 주실 것입니다. 
거룩한 씨앗인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직장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거룩한 씨앗인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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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11. 6. 14:51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돌아보니 성경이 참으로 진리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풀은 봄철이 되면 녹음이 우거지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만 시간이 지나면 꽃이 떨어지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되어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맙니다. 젊었을 때에는 우리의 육신에 힘이 있고 활기가 넘칩니다. 젊은 시절에는 아름답고 멋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풀이 마르듯 젊음은 사라지고 건강했던 육신은 질병이 찾아옵니다. 마침내 더 시간이 지나면 꽃이 떨어지고 낙엽이 떨어지듯 우리의 육신도 떨어져 한 줌의 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참으로 성경의 말씀이 참으로 진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또 하나의 진리를 말씀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의 육신은 시간이 지나면 마르고 시간이 더 흐르면 마침내 떨어져 한 줌의 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있으니 주님의 말씀이요, 곧 세세토록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기에 그 누구도 죽음의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인을 비롯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셨다는 복음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고인을 비롯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주셨다는 복음은 세세토록 영원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날 다시 오시어 고인은 물론이요 유가족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복음의 말씀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유가족 여러분, 비록 고인의 육신이 마르고 떨어져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지금의 장면으로 말미암아 큰 아픔과 괴로움이 엄습할지라도 세세토록 변하지 않는 복음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인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게 고난 받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고인에게 영생을 선물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 다시 오시어 고인과 여러분 모두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에 여러분의 소망을 두십시오. 

비록 고인의 육신, 그리고 우리의 육신도 시간이 지나 한줌의 재로 돌아가겠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영원한 복음의 말씀과 같이 고인을 구원하여 주시고 여러분 모두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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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11. 5. 17:23

죽음의 문제

오늘 본문의 주제는 ‘죽음’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13절)

여기에 등장하는 ‘자는 자들’은 곧 죽음을 당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주제는 죽음이지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분명한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  변하지 않는 진리란 한번 태어난 인생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누구도 죽음이라는 마지막 운명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왜  죽음이라는 무서운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인간의 죽음이 인간이  범한 죄의 결과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친히 죽음을  경험하셨지만, 돌아가신 지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의 운명을 넘어 부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할 최후의 운명은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할 최후의 운명은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으로 말미암은  영생입니다. 이것이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믿고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인간의 죽음에 대해 편지를  보내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당시에 우리가 알고 믿는 복음의 내용, 곧  죽음의 원인과 죽음을 극복하는 복음과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요? 그들도 당연히 알고 있었고, 그 복음의 내용을 확신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주변 지역에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cf 살전  1:9-10).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도 우리처럼 복음의 내용을 알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 마음에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자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던  교회의 형제자매가 원치 않는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심지어 성도들  가운데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그의 인생을 꽃피우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큰 슬픔 속에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마치 소망이 없는 이방인들과 같이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cf. 살전 4:13b)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하며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다시금 그 마음을 추스르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소망을 품을 수 있도록 안내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은 저 영원한 천국에 있다고 고백하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과 같이 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크고 작은 아픔 속에서  마음이 흔들리고 때로는 믿음까지도 흔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을 것만 같은 큰 아픔이 찾아오면 우리의 신앙도 위기를 맞이하는  모습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기다린다고 말은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은 너무 멀게만 느껴져 오늘 나의 눈 앞에 펼쳐지는 희로애락에  우리의 마음이 빼앗기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금 기독교의 궁극적인 소망, 곧 성도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소망의 근거 – 예수님의 부활

죽음의 문제, 곧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실존인 죽음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문을 엽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 곧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이라는  뜻이지요. 네, 이것이 죽음의 문제에 답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혹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한 마디로 과거에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그 어떠한 대답도 내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비극적인 실존에 대해 성경이 내어놓는 모든 대답은  하나의 전제가 필요한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 아직 믿어지지  않으신다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켜 주셔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분명히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히 믿는다면  우리는 비로소 미래에 일어날 성도의 부활도 믿고 확신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14절) 

사도 바울은 성도의 부활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15절) 

사도 바울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비록 이 세상을 살면서 죽음이라는 거대한  세력에게 삼켜진 성도들이라도 그 마음에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들보다 잠자는 성도들을 먼저 일으켜 주시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보다 죽음을 맞이한 성도들이 먼저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죽음을 당한 성도들이 먼저 일어나고, 이후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이 공중에 올려진다는 이 순서가 그렇게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죽음을 경험한 성도들이나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이나  모두가 다 함께 주님을 영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7b)

여기에 등장하는 “우리”는 이 세상을 살다가 죽음을 경험한 성도들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살아남은 성도들 모두를 말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아픔과 고통과 마지막 죽음까지도 이겨내고 마침내 주님과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참으로 믿는다면 지금 여러분 앞에  당한 고통과 아픔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가장 비참한 운명인 죽음을 당한  성도들까지도 주님께서 버려두지 않고 일으키신다면,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누리고 있는 여러분들을 주님께서 어찌 잊으시겠습니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보다 죽음을 당한 성도들을 먼저 앞세워 일으켜주시고 그들을 먼저  만나주시는 주님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형통과 번영을 누리는 성도들만  보호하여 주시고 고난을 당하고 아픔을 겪는 여러분들은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을 믿는다면
죽음과 같은 아픔을 겪는 순간이라도 소망을 품으십시오.
그리고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십시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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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10. 17. 20:49

본문은 예레미야 46장부터 시작된 이방민족에 대한 예언의 일부입니다. 46장 1절은 "이방 나라들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시작합니다. 이에 애굽, 블레셋, 모압, 암몬 그리고 에돔에 이르기까지 유대 민족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주고받았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예레미야 49장은 유대 민족과의 접촉이 비교적 적은 다메섹, 게달, 하솔 그리고 엘람에 대한 예언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예레미야 46장부터 이어지는 이방 민족에 대한 예언과 큰 흐름이 동일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유대 민족과 그 주변 나라들을 모두 심판하고 멸망하신다는 예언입니다.

 

 

역사의 큰 물줄기 

 

태초부터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가 바로 그와 같은 때였습니다. 과거에 애굽이라는 거대한 제국도 있었습니다. 과거에 앗수르라는 거대한 침략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역사의 큰 물줄기를 새롭게 조성하시면서 바벨론이라는 신흥 강대국을 통해 가나안 땅을 포함한 모든 오리엔트 지역을 점령하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느냐고요? 무엇을 위해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셨느냐고요? 무엇이 다른 나라가 아닌 바벨론을 선택하게 하셨느냐고요? 인간이 이와 같은 질문을 제 아무리 하나님께 던진다 할지라도 인간은 그 답변을 하나님께 받아낼 수 없습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기로 정하시면, 인간의 생각이나 의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정하신대로 역사는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 전 오리엔트 지역을 점령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러니 본문에 등장하는 다메섹, 게달, 하솔, 엘람도 그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본문에는 여러 민족이 왜 멸망해야 하는지, 그들의 구체적인 죄악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으로 우상을 숭배했다거나, 사회적으로 불의를 행했다거나, 개인적으로 음란의 죄를 저질렀다는 등의 이유가 본문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본문에 등장하는 민족이 죄가 없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였고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의 유무보다 그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더욱 중요한 것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역사의 흐름을 그렇게 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2020년는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이, 그리고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이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코로나 바이러스를 허락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왜 전 세계가 바이러스의 위협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이 사태를 허락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그 대답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역사의 큰 물줄기를 이렇게 바꾸어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고,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역사의 큰 물줄기를 역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새로운 소망의 근원 

 

하나님은 바벨론을 통해 오리엔트 전체를 점령하도록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유대 민족은 물론이요, 그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점령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운명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본문 23절에는 재앙의 소식을 듣고 그 마음이 평안이 사라지고 낙심이 찾아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다메섹에 대한 말씀이라

하맛과 아르밧이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흉한 소문을 듣고 낙담함이니라

바닷가에서 비틀거리며 평안이 없도다 

 

바벨론 군대가 몰려오자 마음만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나라마다 자신들의 강점으로 여기던 것들이 위기의 순간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맙니다. 본문 35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엘람의 힘의 으뜸가는 활을 꺾을 것이요 

 

엘람은 예로부터 활을 잘 쏘았던 민족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엘람의 힘의 으뜸가는 활"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어 위기의 시대가 찾아오자 그들의 활은 엘람이라는 나라를 그 위기로부터 구해내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대로 바벨론 군대가 몰려오는데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활을 잘 쏘니 궁수부대를 이용해서 바벨론 군대를 막아보겠노라 달려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창이나 활은 잘 쏘지 못하니 과거에 위세를 떨치던 애굽의 도움을 받아 바벨론 군대를 막아보려 해도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물줄기를 그렇게 바꾸어 놓으셨으니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 민족이든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민족이든 상관없이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그저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기만 해야 할까요? 성경이 가르치는 섭리에 대한 교훈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기력한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는 것일까요? 물론 섭리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계획이나 노력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은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소망을 포기하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소망을 품게 합니다.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39절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힌트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말일에 이르러 내가 엘람의 포로를 돌아가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지금 당장은 엘람이든, 다메섹이든, 게달이든, 하솔이든 모두 포로가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민족도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엘람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 민족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2020년 하나님께서 정하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우리에게 소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셨으니, 그 모든 아픔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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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9. 24. 19:28

요시야, 율법을 듣다 

남유다를 다스렸던 왕들 가운데 요시야 왕은 대대적인 종교개혁으로 유명합니다. 요시야 왕은 왕위에 오른 지 8년 만에 여러 우상 신상을 제거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등 남유다에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약 10년의 세월이 흘러 요시야가 왕위에 오른 지 18년 되던 해, 그의 종교개혁이 불같이 일어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던 중 제사장 힐기야가 하나의 책을 발견하였고, 그는 이 책이 모세의 율법책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힐기야 제사장은 그 책을 궁궐의 높은 관료였던 서기관 사반에게 전달하였는데 서기관 사반은 또 다시 그 책을 요시야 왕에게 가져가 그 책에 기록된 모세의 율법을 낭독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율법책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 왕의 반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 (왕하 22:11) 

여기에서 옷을 찢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찢었다는 의미요, 곧 회개의 표현입니다. 요시야 왕은 그의 마음을 찢듯 그의 옷을 찢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가서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왕하 22:13) 

이때로부터 요시야 왕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종교개혁을 더욱 힘있게 단행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야김, 예언을 듣다 

요시야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김이 남유다를 통치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번에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받은 예언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직접 붓을 들고 기록한 것은 아니고, 선지자가 불러주는 예언의 말씀을 바룩이라는 분이 두루마리에 기록하였습니다. 

바룩은 그 예언의 말씀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 모여든 유대 백성에게 낭독하였습니다. 그 소식이 유대 나라의 고관들에게 들리자, 여러 고관들은 바룩을 불러 다시 한번 그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게 합니다. 마침내 그들은 이 모든 과정을 여호야김 왕에게 보고하였고, 여호야김 왕 앞에서 바룩이 기록한 예레미야의 말씀이 낭독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언의 말씀을 전해들인 여호야김의 반응은 그의 아버지 요시야 왕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 때는 아홉째 달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렘 36:22-23) 

성경은 계속해서 예언의 말씀을 들은 여호야김 왕과 그 신하들의 반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왕과 그의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렘 36:24) 

여호야김 왕은 하나님께서 전하신 예언의 말씀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옷을 찢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예레미야 선지자가 선포하였던 예언의 말씀, 곧 심판의 말씀은 모두 남유다의 현실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 두 장면을 통해 너무도 분명한 하나의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우리는 그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요시야 왕이 그의 옷을 찢었다면 우리도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요시야 왕이 율법의 말씀을 따라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겼듯이 우리도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악을 내어버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말씀을 들었다고 우리의 삶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요,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그 말씀을 지켜 행 할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요시야 왕이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의 아들 여호야김 왕도 하나님의 말씀, 곧 예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장면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요시야 왕에게는 모세의 율법책이 있었고, 여호야김 왕에게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받아 적은 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장면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공통점은 낭독자입니다. 요시야 왕에게는 서기관 사반이 율법의 말씀을 읽어 주었고, 여호야김 왕에게는 여후디라는 사람이 예언의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 왕이나 여호야김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방법은 꿈이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문자로 기록된 말씀을 보았고, 그 말씀을 낭독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도 이와 동일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기록된 신구약성경이 있으며, 그 말씀을 낭독하고 풀어주는 설교가 있습니다. 비록 꿈이나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성경과 성경을 낭독하고 풀어주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의 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호야김과 같이 나의 귀에 들려오는 말씀을 거부하는 어리석음을 행하지 마십시오. 단 한 구절의 말씀이라도 나의 귀에 들려온다면 요시야와 같이 마음으로 받으시고 순종으로 반응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날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살아 역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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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9. 10. 13:44

 

 

본문 히브리서 12장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경주는 주로 육상 경기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죄와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고 귀한 체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경주를 시작한 것이요 아직 완성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쉬지 않고 달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경주자이기 때문이지요. 

신앙생활을 달리기 시합에 비유하는 것은 오늘 본문 외에도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이 구절에서 강조점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는 대목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제 막 믿음의 경주를 시작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믿음의 경주를 시작한 지 10년, 20년, 혹은 그 이상 오랜 세월 믿음의 경주에 참여하며 힘써 달려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 막 믿음의 경주를 시작하였든지 아니면 오랜 세월 믿음의 경주를 해오셨든지 상관없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신앙의 마지막 목표점에 도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는 바울의 고백은 바로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의 그 다음 구절,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는 다짐은 오늘 우리의 다짐이 되어야 합니다. 


허다한 증인

그렇다면, 우리가 여전히 믿음의 경주에 힘을 써야 하는 이유, 우리가 여전히 믿음의 경주에 힘쓸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허다한 증인’입니다. 우리에게는 허다한 증인이 있습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여기에 등장하는 허다한 증인은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구약의 인물들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참으로 많은 구약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몇 구절만 인용해볼까요? 

먼저 노아에 대한 서술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히 11:7) 

이제 아브라함에 대한 구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을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히 11:8) 

이번에는 모세에 대한 구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 

노아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웃을 지라도 믿음의 경주를 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경주를 계속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명을 위하여 헌신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죽음의 위협, 전쟁의 위협, 재난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였습니다. 이들은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았고, 역경이 찾아와도 무릎 꿇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여 성경은 이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시선을 믿음의 경주를 쉬게 만들거나 포기하게 만드는 주변 환경에 두지 마시고, 여러분의 시선을 성경에 두어 성경이 기록한 성도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손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선물로 주셨으니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새로운 힘을 얻으시고 새로운 용기를 얻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십시오. 성경의 말씀과 그곳에 기록된 믿음의 행적이 여러분의 삶도 믿음의 경주를 아름답게 완주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믿음의 주님

우리가 믿음의 경주에 힘을 써야 하는 이유와 근거, 그 두 번째는 ‘믿음의 주님’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주님이 계십니다. 본문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말씀드린 것처럼 히브리서 11장에는 구름과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등장합니다. 모두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약 성경과 함께 신약 성경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구약성경이 소개하는 신앙의 영웅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값진 보물이 담겨있으니 곧 우리 믿음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 2절은 우리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수치, 십자가의 고통, 십자가의 아픔을 친히 받으셨지만 그 모든 것을 또한 친히 참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무엇때문에 그 모든 아픔을 참으셨다고 말씀합니까?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을 수 있다는 기쁨,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을 뒤덮고 있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는 기쁨, 십자가로 말미암아 온 세상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 기쁨을 위하여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참으셨고 마침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처럼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우리 믿음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삶에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우리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신 십자가의 고통을 기억한다면 어떠한 어려움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지속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은혜

우리가 믿음의 경주에 힘을 써야 하는 이유와 근거, 그 가장 중요한 세번째는 ‘복음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은혜가 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본문 3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셨다.’ 영국의 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는 곳이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그분의 은혜로운 용서의 대상임이 밝혀진 곳이다.” 그러면서 레슬리 뉴비긴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는데, “이 기도에서 제외된 자는 하나도 없다”라고 말입니다.  

레슬리 뉴비긴이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현장이요, 십자가는 인간이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감추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십자가에서 처형한 현장이니, 바로 그 십자가야말로 우리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예수님은 죄인들이 자신을 거역한 일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심으로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난 우리에게 용서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시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며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용서가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담긴 복음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시작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어려움과 시련이 찾아와도 믿음의 경주를 쉬지 않고 달려가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와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진 복음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다시금 우리 주님께서 참고 인내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 십자가에 담겨 있는 복음의 은혜를 다시금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에 복음의 은혜가 가득히 흘러넘치기를 원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어떠한 인생의 장애물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복음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의 경주를 힘차게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의의 면류관

설교를 시작하며 사도 바울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믿음의 경주로 묘사하는 장면을 소개하여 드렸습니다. 빌립보서의 한 구절이었지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이처럼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의 경주를 힘써 달렸던 사도 바울은 그의 삶을 마무리하면서 유언과도 같은 서신을 기록하는데 그것은 디모데후서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에서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경주에 비유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제 사도 바울에게는 자신이 달려왔던 경주의 마지막 골인지점이 눈에 들어왔다는 점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7-8) 

우리도 이 땅의 삶을 마칠 때, 사도 바울과 같이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인생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시작한 믿음의 경주를 결코 멈추지 마십시오. 비록 처지와 환경이 어려울 지라도, 아니 우리에게 주어진 처지와 환경이 어려울수록 더욱 힘을 내어 믿음의 경주에 매진하십시오. 우리에게는 허다한 증인이 있고, 우리에게는 믿음의 주님이 계시며, 우리의 마음에는 복음의 은혜가 흘러넘치니 우리 앞에 펼쳐진 모든 장애물들을 넉넉히 이겨내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이 행하는 믿음의 경주를 응원하고 계시며, 여러분이 모든 경주를 완주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에게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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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9. 2. 20:17

본문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시드기야 왕에게 전하는 장면입니다. 시드기야 왕은 남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당시 남 유다는 바벨론 제국의 공격을 받아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남 유다를 여러 차례 침략하였고, 여호야김 왕과 여호야긴 왕을 모두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 두 명의 왕을 끌고 갈 때 그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귀한 보물도 빼앗아갔지요. 그런데 민족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성전과 유다의 왕의 궁전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그 기구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21절)

벌써 두 명의 왕이 바벨론에 끌려갔고, 그때 예루살렘 성전의 귀한 기구들도 빼앗겼지만 여전히 성전에 남아있는 기구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남아 있는 기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것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22a절)

두 명의 왕이 끌려갔고 성전의 기구들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아픔과 재앙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견뎌 내야할 재난이 남아 있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예레미야 27장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2020년 9월을 맞이한 우리의 모습을 참 많이도 닮아 있습니다.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코로나19의 위협은 너무도 강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올해 여름은 유독 장마와 홍수와 태풍의 소식들로 가득했지요. 그러나 그 누구도 그 모든 재앙이 이제는 지나갔다고 말할 수 없으니 본문 예레미야 27장의 모습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만은 않습니다. 


멍에를 메라

민족의 재앙, 민족의 고통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와 행동을 권면합니다. 본문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시드기야 왕을 비롯한 백성들에게 주는 권면은 두 가지입니다. 그 첫 번째는 '멍에를 메라'입니다. 

내가 이 모든 말씀대로 유다의 왕 시드기야에게 전하여 이르되
왕과 백성은 바벨론 왕의 멍에를 목에 메고 그와 그의 백성을 섬기소서 그리하면 사시리라 (12절)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이방인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긴다는 것은 매우 무거운 멍에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두 명의 왕을 끌고 간 느부갓네살, 남 유다의 지배자가 되어 백성과 그 땅을 유린하는 느부갓네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예루살렘 성전의 귀한 기구들을 모두 빼앗아간 바로 그 느부갓네살을 섬기라고 요구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세상의 권세를 주셨고 그를 세상의 통치자로 세우셨으니 하나님의 백성도 그를 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에게는 무거운 멍에이지만 하나님께서 지우신 것이라면 불평하지 말고 달게 받으라는 권면이었습니다. 

신약 시대로 넘어가면 예수님께서도 멍에를 메라고 명령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예수님은 우리에게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멍에를 벗으라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멍에를 벗어버려야 너희가 참된 쉼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멍에를 메라고, 특별히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십니다. 

고통의 시간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오랜 기간 지속되는 이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멍에를 달게 메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멍에를 회피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거부하지도 말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멍에이니 낮은 자세로 그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내 어깨를 짓누르는 멍에를 벗어버리고 싶지만 참고 인내하며 그 멍에를 나의 양 어깨에 얹고 견디어야 합니다. 그렇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픔과 고통의 시간을 참고 견디다 보면 어느 순간 지금 나의 어깨에 있는 멍에를 예수님께서 함께 메고 계시고, 지금 나의 어깨에 있는 멍에는 예수님의 멍에이며, 마침내 그 멍에를 메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참된 쉼과 안식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구하라 

시드기야 시대, 남 유다는 고통과 재난이 시작된 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더 많은 재난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시드기야 왕과 그 백성들에게 전하는 두번째 권면은 '여호와께 구하라'입니다. 

만일 그들이 선지자이고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와 유다의 왕의 궁전에와 예레살렘에 남아 있는 기구를 
바벨론으로 옮겨 가지 못하도록 
만군의 여호와께 구하여야 할 것이니라 (18절)

거짓 선지자들은 여호야김 왕도 잡혀갔고, 여호야긴 왕도 끌려갔으니 지금까지의 고난으로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이제부터 회복의 시간만 남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바램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지는 가운데 지금까지의 재앙이 모두 끝나고 새로운 회복의 날이 찾아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겠습니까? 그러나 선지자라면 마땅히 인간의 소망이 현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소망과 기대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희망과 계획만으로 재앙이 끝나고 회복이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멈추지 않는 재앙이 오랜 시간 지속되는 상황에서 선지자를 비롯한 하나님 백성이 마땅히 만군의 여호와께 기도해야 한다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선포하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재앙이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새로운 회복의 시간이 도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큰 재앙이 멈추지 않을 때, 자신의 인간적인 기대와 소망을 선포하는 대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간구해야 합니다. 

2020년은 우리 모두에게 우울한 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재난이 언제 멈출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 본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멍에이니 피하거나 도망치지 말고 그저 잠잠히 참고 인내하며 그 멍에를 메십시오. 나아가 인간적인 기대와 소망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우리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실 것이요,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쉼과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본문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그 후에 내가 그것을 올려 와 이곳에 그것들을 되돌려 두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2b절)

우리의 멍에를 달게 메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그 날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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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7. 21. 17:34

사도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면서 먼저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율법의 역할

오늘 본문은 그 가운데 일부분으로 율법을 삶의 표준으로 살아가는 유대인이나 율법을 알지 못했던 이방인이나 구별 없이 하나님 앞에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12절) 

율법을 들었든 듣지 못하였든 상관없이, 마음과 행위로 죄를 범하면 멸망하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곧이어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해 매우 의미 있는 한 문장을 서술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3절)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믿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고,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며, 율법을 통해 하나님 백성다운 삶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약의 율법을 포함하여 신구약 성경이 꼭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3절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율법을 듣는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느니라" 이를 신구약 성경에 적용하면 이렇게 됩니다. '성경의 말씀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성경의 말씀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우리에게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이유는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순종하는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실천할 때 그 말씀이 우리에게 살아 역사합니다. 


양심의 역할 

사도 바울은 율법이 있어도 범죄한 유대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고, 율법이 없지만 역시 범죄 하는 이방인은 율법 없이 망하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지요? '유대인에게는 율법을 통해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셨지만, 이방인에는 율법을 주신적이 없는데 동일하게 심판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은가?'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은 인간의 '양심'입니다. 15절입니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율법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드러냅니다. 율법만큼은 아니더라도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 있으니 인간의 양심입니다. 양심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나의 것이죠. 사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양심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 두신 양심은 매 순간 우리를 때로 책망하고 때로 격려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주로 이방인들, 곧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양심의 역할을 적용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묵상하면서 양심의 역할을 굳이 이방인과 불신자를 위한 것으로 제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평생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지요. 그때 바울을 대적했던 유대인들의 고소로 예루살렘 공의회 앞에서 심문을 받습니다. 마침내 바울에게 자신을 변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바울의 첫 일성은 이러했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행 23:1) 

우리도 언젠가 "오늘까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바울과 같이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러한 기대로 오늘 하루 각자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심을 주셔서 오늘도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심판하시는 그 날

사도 바울은 율법의 역할 그리고 양심의 역할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율법과 양심이 기준이 되어 하나님 앞에 심판받게 되는 바로 그 날을 선언합니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16절) 

사도는 분명히 "나의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한 평생 전했던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모든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그 날 하나님은 모든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어 하나님께만 눈물로 아뢰었던 우리의 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렸던 수고의 땀방울. 이 모든 것이 마침내 하나님 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과 양심을 따라 오늘도 충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말씀과 양심을 따라 오늘도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십시오. 말씀과 양심을 따라 오늘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이 올려드리는 눈물의 기도와 수고의 땀방울을 모두 헤아려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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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7. 18. 19:55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아뢰던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로마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있고, 그들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마음에 하나의 소원이 생겼죠. 곧, 로마를 방문하여 성도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10절에서 눈에 띄는 표현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 모든 만남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목회자와 성도의 만남, 그리고 성도와 성도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우연도 아니고, 한두 사람의 계획이나 생각도 아닙니다. 우리가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 개인의 선택도 아니고, 몇몇 사람들의 계획이나 노력도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들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내가 오늘 만나는 사람, 특별히 교회 안에서 만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만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내 앞에 있는 이웃을 귀히 여기며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바울은 로마교회를 생각하며 그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가 11절에 등장합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했던 '신령한 은사'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영적인 선물을 말하는데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성령의 은사일 수도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전하는 말씀, 특별히 그가 로마서에서 정성을 다하여 기록하는 복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사도는 하나님께 파송을 받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직분입니다. 바울은 사도라는 직분에 따라 로마로 파송을 받아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절을 보면 바울이 꿈꾸는 바울과 성도들의 만남은 한 사람이 전하고 다른 사람은 전해받는 일방통행의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여기 '너희와 나의 믿음'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로마에는 사도 바울이 방문하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있었고, 그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에게도 믿음이 있지만 동시에 성도들에게도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한 사람의 믿음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이 성도들에게 일방통행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믿음과 바울의 믿음이 서로를 안위하는 것, 그리하여 서로의 믿음이 더욱 굳건해 지기를 바울은 소원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도의 교제는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비록 사도와 성도의 만남이라 할지라도, 비록 목회자와 성도의 만남이라 할지라도 성도의 교제는 피차 안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누군가에게는 약해보이고 미숙해 보이더라도 그의 믿음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피차 안위할 수 있습니다. 


길이 막혔도다 

성도와 성도의 만남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서로의 믿음을 안위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 특별히 복음으로 말미암은 성도들의 만남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유익을 주지요. 16절과 17절에서 선언하는 것처럼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나아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중심으로 믿음의 식구들이 함께 모여 교제하고 서로를 안위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길을 하나님께서 막으신다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본문 13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사도 바울은 로마를 방문하여 성도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였지요. 그러나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나 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는 지금까지 하나님은 바울에게 로마로 가는 길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는 로마로 가는 길이 바울에게 막혀있었지만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 그의 마지막 걸음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사도 바울은 마침내 로마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로마교회 성도들과 사도 바울은 서로의 믿음을 안위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두 구절은 로마에 도착한 바울의 행적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코로나 바이러스로 올해는 성도의 교제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습니다. 비대면을 통한 온라인 기술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그 한계는 너무도 명백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의 표현과 같이 '지금까지 그 길이 막혔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간절히 기도하면 어떻겠습니까? 길이 막혀 있지만 로마로 가는 그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였던 사도 바울과 같이,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함께 모여 복음으로 교제하는 그 길이 막혀있는 지금 하루속히 모든 바이러스가 물러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믿음을 안위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 어떻겠습니까? 마침내 바울의 기도를 들어주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기도에도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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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