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학2020. 7. 19.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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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의 설교학은 그의 저서 Between Two Worlds: the Challenge of Preaching Today(London: Eerdmans Publishing, 1982)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는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설교자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공유하기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존 스토트가 마지막으로 다루는 설교의 덕목은 용기와 겸손이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용기가 필요하고 동시에 겸손이 필요하다. 언듯 용기와 겸손은 상충되어 보이지만, 이 두 가지는 설교자가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는 핵심적 자질이다. 

 

설교자의 용기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환영하는 것이 아니기에 설교자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말씀 사역에 있어 용기라는 덕목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의 전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앞에 홀로 맞섰던 엘리야의 용기, 다윗 왕에게 그의 잘못을 분명히 지적하였던 나단의 용기,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을 대항하였던 예레미야의 용기 등 구약의 예언자들은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했다. 

설교자의 용기는 설교의 목적과 연관되어 있다. 복음은 먼저 사람들의 교만을 무너트린다.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이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았던 이유는 '헛된 희망'(vain hopes)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된 복음은 인간의 교만을 공격하는데 이를 성실하게 선포하는 설교자는 누구든 사람들의 저항을 피할 수 없다(Stott 1982, 241). 그러므로 설교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헛된 희망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흔들어 깨우는 데 있다. 아울러, 복음은 자신의 죄성으로 절망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를 선포한다. 이 역시 설교의 중요한 목적으로 설교자는 복음으로 위로해야 한다. 채드 월시(Chad Walsh)는 이 두 가지 목적을 이렇게 종합하였다. "설교자의 진정한 역할은 편안한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요, 불안한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Stott 1982, 246) 존 스토트는 성경 인물의 별명으로 이 두 가지를 묘사하는데, 하나는 '우뢰의 아들'을 뜻하는 보아너게이고 다른 하나는 '위로의 아들'을 뜻하는 바나바다. "모든 설교자는 (용기를 가지고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보아너게이면서 동시에 (관용의 마음으로 사람을 위로하는) 바나바가 되어야 한다."(Stott 1982, 246) 

설교자가 용기를 가지고 성경의 핵심 주제들을 설교하는 방법으로 존 스토트는 '순차적 설교'(존 스토트의 용어는 Systematic Exposition)을 제안한다. 곧, 성경의 한 책이나 일부를 순차적으로 설교하는 방법이다. 이는 존 크리소스톰을 비롯하여 많은 종교개혁가들이 선호하였던 방식이다. 존 스토트가 순차적 설교를 추천하는 이유는 설교자의 입장에서 본문이 다루는 주제를 용기 있게 선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며 회중의 입장에서 설교자가 개인적인 의도를 가지고 특정 본문과 주제를 선정했다고 의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는 마태복음 5장을 본문으로 이혼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던 경험을 언급한다. 스토트는 그때 순차적으로 산상보훈을 설교하였기에 회중들에게 매우 민감한 주제를 용기 있게 설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설교자의 겸손 

존 스토트는 설교단이 교만해지기 매우 쉬운 장소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설교자를 우러러보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교만은 의심의 여지 없이 설교자가 빠질 수 있는 최고의 위험 위소다."(Stott 1982, 251) "설교단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높이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Stott 1982, 252) 

존 스토트는 설교자의 겸손을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자는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구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지도 빼지도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더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면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요소를 삭제했다.(Stott 1982, 254)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든 삭제하든 자신의 편의대로 편집하는 행위는 설교자의 교만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역할은 말씀의 편집자가 아니라 말씀의 청지기다. "기독교 설교자는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어 성경이 담고 있는 진리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 신실하게 전달해야 한다. 이를 위해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다." (Stott 1982, 254)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존 스트토는 설교하는 이유를 질문한다. 왜 우리는 설교하는가? "너무도 자주 우리의 동기가 이기적이라는 사실이 나는 두렵다." (Stott 1982, 255) 설교는 하나의 매개체다. 회중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과 직접 대면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랑이 되시고 성도들이 신부가 된다고 비유하는데 이 비유에 따르면 설교의 역할은 중매다. 그러므로 성도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때 설교자는 그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또한 설교자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같다. 지휘자의 지휘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사람은 음악을 듣기 위해 콘서트홀에 가기 때문이다. 지휘자가 사람들을 음악의 아름다움으로 인도하듯, 설교자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목적을 이루면 그 자리에서 비켜주어야 한다. 설교의 영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성령의 능력이다. 설교자는 성령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왜 설교 현장에 성령의 역사가 그토록 희귀한가? 존 스토트는 스스로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 중요한 이유가 우리의 교만이라고 나는 강력히 의심한다."(Stott 1982, 259) 성령의 능력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약함이 드러나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기 때문이다(고후 12:10). 존 스토트는 설교자의 약함은 육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는 정신적으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위대한 설교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 강한 능력을 펼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비록 인간적인 약점이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말이다.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1 _ 설교의 영광: 역사적 개요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2 _ 현대 교회의 설교 위기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3 _ 설교의 신학적 근거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4 - 교량으로서의 설교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5 - 설교자의 연구(공부)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6 _ 설교 준비 과정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7 - 진심 그리고 열정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8 - 용기 그리고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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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학2020. 7. 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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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의 설교학은 그의 저서 Between Two Worlds: the Challenge of Preaching Today(London: Eerdmans Publishing, 1982)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는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설교자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공유하기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설교에 있어 '진심'과 '열정'은 주관적 측면이 강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중은 설교자의 진심과 열정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다. 계량할 수는 없지만 설교에 있어 진심과 열정은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존 스토트는 이 두 가지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진심(Sincerity) 

진심의 반대는 위선이다. 회중, 특별히 젊은 세대는 위선이라고 생각되는 설교에는 귀를 막는다. 그들이 설교자에게 요구하는 핵심은 진심이다. 존 스토트는 진심의 의미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강단에서 선포하는 것을 믿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강단에서 선포한 대로 행하는 것이다.(Stott 1982, 203) 설교자가 믿음이 없으면서도 강단에서 기독교 진리를 선포할 수 있을까? 얼마든지 가능하다. 진실된 설교를 위해 설교자는 먼저 회심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존 스토트가 강조하듯 회중이 요구하는 설교자의 진심은 과거의 회심을 넘어 지금도 성령께서 그의 삶에 역사하시는 체험이다.(Stott 11982, 204)  그러므로 설교자는 진리의 전달자이면서 동시에 회중이 본받을 수 있는 모델이 되어야 한다. 

진심은 회중을 이끄는 설교의 힘이다. 존 스토트는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 18세기 영국의 무신론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한 친구가 어디를 급하게 가느냐고 물었다. 흄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설교를 들으러 가는 중이라고 답했다. 그 친구가 의아해하며 "자네는 휫필드가 설교하는 내용을 믿지 않잖아?"라고 질문하자, 데이비드 흄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믿지 않지. 그러나 그는 분명히 믿고 있네."(Stott 1982, 210) 

1954년 빌리 그래이엄이 처음으로 신문의 일면을 장식했다. 약 1만 2천 명의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3개월 동안 매일 밤 모여들었다. 존 스토트는 당시 그 모임에 참여하면서 그곳에 운집한 회중과 매주 텅 비어있는 자신의 교회를 비교했다고 한다. "왜 사람들은 빌리 그래이엄의 설교를 듣기 위해 이렇게 몰려들지?" 이러한 의문에 존 스토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대답은 바로 이것이다. "저 젊은 미국인 전도자에게는 반박의 여지가 전혀 없는 진심이 느껴진다." (Stott 1982, 210) 

진심(sincerity)은 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위선은 언제나 사람들을 몰아내지만, 진심과 진정성은 언제나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Stott 1982, 210) 

설교자의 진심, 혹은 설교의 진정성은 어떻게 표현될까? "진정성을 드러내는 최고의 증거는 믿는 바를 위하여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려는 자세다" (Stott 1982, 210) 여기에서 말하는 고난은 육체적, 혹은 외적인 아픔일 수도 있지만 설교자에게는 내면의 고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시대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의 설교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끄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진리를 위한 내면의 고통이 설교를 통해 표현될 때 회중은 그 안에서 진정성을 느낀다. 


열정(Earnestness)  

존 스토트는 열정이 진심을 넘어선 또 다른 단계라고 설명한다. 진심이 자신이 말하는 바를 믿고, 자신이 선포한 바를 행하는 것이라면, 열정은 진심 위에 깊은 감정의 요소가 더해진다.(Stott 1982, 213)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고, 사도 바울은 많은 이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고 눈물로 탄식하였다. 존 스토트는 "20세기 설교자들이 다시 탄식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 (Stott 1982, 215) 설교자의 마음은 언제나 열정이어야 하며, 설교자가 열정으로 설교할 때 회중은 비로소 반응한다. 그래서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선포할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열정적으로 선포하라. 그러면 회중은 당신의 발 앞에 모일 것이다."(Stott 1982, 218) 

영국의 유명 배우 머크리디(Macready)가 있다. 한 번은 설교자가 머크리디에게 질문했다. "나는 진리를 설교하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 어려운데, 당신은 허구로 어떻게 그 많은 군중을 끌어모을  수 있습니까?" 머크리디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 사이의 차이점을 말씀드리죠. 저는 허구를 진실인 것처럼 표현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진리를 허구인 것처럼 선포하더군요." (Stott 1982, 222) 

열정적인 설교가 지성적인 설교와 대척점에 있다는 생각은 오해다. 오늘의 설교자가 추구해야 할 설교는 지성적이면서 동시에 열정적인 설교다. 이성(mind)과 감성(heart)이 설교 안에서 어우러져야 한다. 존 스토트는 사도 바울의 설교가 열정과 이성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고 평가한다. 바울 서신은 중요한 기독교 교리를 논리적으로 서술하는데 그 깊이를 알아내기 위해 지금도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다. 동시에 바울의 편지는 열정을 다하여 눈물로 호소한다. "사도 바울이 성취하였듯 이성과 감정의 조화, 설명과 격려의 조화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한 요소다." (Stott 1982, 221) 

진심과 열정에 대해 논의한 존 스토트는 이 장의 마지막에 이런 글을 덧붙인다. "진심과 열정은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에 작식을 달 듯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붙일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진심과 열정은 분명 성령의 열매다." (Stott 1982, 231) 그렇다. 설교에 진심과 열정을 불어넣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진심과 열정의 설교를 위해 오직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요, 그 신뢰의 표현은 기도다. 

기도하는 설교자가 진심과 열정으로 설교할 수 있다.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1 _ 설교의 영광: 역사적 개요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2 _ 현대 교회의 설교 위기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3 _ 설교의 신학적 근거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4 - 교량으로서의 설교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5 - 설교자의 연구(공부)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6 _ 설교 준비 과정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7 - 진심 그리고 열정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8 - 용기 그리고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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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학2020. 6. 25.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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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의 설교학은 그의 저서 Between Two Worlds: the Challenge of Preaching Today(London: Eerdmans Publishing, 1982)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는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설교자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공유하기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설교 준비는 그 시작과 끝을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설교자는 대부분 설교하려는 본문을 이미 예전에 읽었고 그 내용을 알고 있다. 설교에 포함된 자료들도 설교자가 예전에 읽거나 경험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라는 질문에 존 스토트는 '한 평생'이 가장 정확한 대답이라고 확신한다.(Stott 1982, 202)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스토트는 편의상 본문의 선택부터 설교문의 작성을 설교 준비의 과정으로 서술한다. 


본문 선택과 묵상

설교 본문을 선택할 때 고려할 사항은 크게 네 가지다. 절기, 외부적 상황, 목회적 요소, 그리고 설교자 개인적 요인. 존 스토트는 이 중에서 절기가 본문 선정의 큰 골격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감사절과 성탄절을 중심으로 성부 하나님의 역사를 설교하고, 사순절과 부활절을 중심으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며, 성령강림절 이후부터 성령을 따라가는 성도의 삶을 설교할 수 있다.(Stott 1982, 165-166) 그러나 절기는 어디까지나 큰 골격이며, 그 위에 외부적 상황, 목회적 요소, 설교자 개인의 특성을 고려하여 본문을 선택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본문을 선택했다면 본문을 묵상(연구)해야 한다. 이때 두 가지 질문이 중요하다. '본문이 처음 의도하였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Stott 1982, 170-171) 존 스토트가 설교를 교량 놓는 작업이라고 정의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첫 번째 질문이 성경의 세계에 대한 질문이요 두 번째 질문이 회중의 세계에 대한 질문임을 알게 된다. 존 스토트는 본문을 묵상하며 이 두 가지 질문에 답하는 것이 설교자 개인의 외로운 과업이라고 말한다. 본문 연구를 위해 여러 자료를 참고할 수도 있고, 여럿이 공동으로 연구할 수도 있지만 마지막 단계에서는 설교자 개인만의 답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본문을 묵상하고 연구해야 하는가? 본문에 대한 다양한 묵상이 하나의 명쾌한 주제로 수렴할 때까지다. 존 스토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모든 본문은 분명한 주제와 목적이 있다고 확신한다. 나아가, 본문마다 그 주제와 목적을 드러내는 독특한 구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믿는다. "설교 개요의 황금률은 각각의 본문에 따라 설교 개요를 나름대로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Stott 1982, 178) 그러므로 설교자는 본문의 주제와 구성이 명백히 드러나기까지 묵상과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 


설교 작성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언어로 전달한다. 그러므로 적절한 언어와 표현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존 스토트가 강조하는 설교 언어란 단순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언어다. "성경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언어'(simple words), 청중이 설교를 들으며 마음에 그려볼 수 있는 '생동감 넘치는 언어'(vivid words), 그리고 과장 없이 명백한 진리를 전달하는 '정직한 언어'(honest words)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Stott 1982, 183) 

존 스토트는 설교 작성에 있어 서론과 결론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서론과 결론의 필요성을 자연 현상으로 설명하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강렬한 태양 빛도 새벽 여명으로 시작하여 저녁 석양으로 마친다는 흥미로운 비유다.(Stott 1982, 190) 서론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두 가지로 흥미로우면서도 주제를 암시해야 한다. 이 두 가지 특징을 겸비한 서론은 작성하기가 결코 쉽지 않지만 포기할 수 없는 목표다. 또한 결론은 설교의 목적이 담겨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말을 인용하며 설교의 목적을 교육, 격려, 의지의 변화라고 지적하였고, 설교의 승리는 최종 목적인 청중의 의지를 변화시키는 데 달려있다고 했다.(Stott 1982, 192) 존 스토트는 이러한 설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론에는 강렬한 호소가 담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 스토트는 설교문을 작성할 것인가의 문제도 다룬다. 이는 즉흥 설교와 원고 설교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 설교자들에 따라 선호도가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스토트는 양극단을 피하라고 조언한다. "한편으로는 완전한 즉흥 설교와 다른 한편으로는 원고의 노예가 되는 양극단을 피해야 한다." (Stott 1982, 199) 존 스토트가 권하는 바는 준비 과정에서 설교 원고를 충실하게 작성하되 설교단에서는 원고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강단에서 원고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 모두 암기하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보다는 요약본을 만들어 사용하라고 권면한다. 

존 스토트의 설교 준비 과정은 오늘날의 설교자에게 독특한 노하우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책이 출판된 지 이미 수십년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설교 준비에 대한 존 스토트의 글은 오늘날에도 기본적인 원칙을 보여준다. 설교자가 성실히 따라야 할 설교 준비의 표본을 찾는다면 존 스토트가 제시한 설교 준비의 과정은 바른 길을 가리키는 표지판 역할을 한다.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1 _ 설교의 영광: 역사적 개요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2 _ 현대 교회의 설교 위기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3 _ 설교의 신학적 근거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4 - 교량으로서의 설교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5 - 설교자의 연구(공부)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6 _ 설교 준비 과정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7 - 진심 그리고 열정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8 - 용기 그리고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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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학2020. 6. 20.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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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의 설교학은 그의 저서 Between Two Worlds: the Challenge of Preaching Today(London: Eerdmans Publishing, 1982)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는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설교자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공유하기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존 스토트는 설교가 두 세계 사이을 잇는 교량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두 세계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춰야 한다. 한편에서는 성경은 연구해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회중의 세계를 연구해야 한다. 빌리 그래이엄은 목회자 콘퍼런스에서 자신의 사역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두 가지를 고치겠다고 했다. "현재보다 3배 더 연구하고, 그 대신 사역을 줄이겠다. 나는 너무 많이 설교하면서 연구는 너무 적게 했다." (Stott 1982, 137 재인용) 


성경 연구와 회중 연구 

성경 연구는 설교자의 평생 과업이다. 존 스토트는 포괄적인 연구(compherensive study)를 강조한다. 그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글을 인용하며 설교자가 일 년에 성경 전체를 최소한 한 번은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Stott 1982, 139) 평신도만이 아니라 목회자도 자신이 좋아하는 성경 본문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할수록 더욱 넓은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여기에서 '열린 마음'(open-minded)이 중요한데,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뜻한다.(Stott 1982, 141)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해야 자신의 관점을 내어 놓고 성경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오늘날의 회중에게 선포해야 하는 설교자는 회중이 처한 사회적 환경을 반드시 연구해야 한다. 그런데 회중 연구는 책보다는 회중을 직접 만나는 것이 효과적이다. 존 스토트는 회중을 연구하기 위해 자신의 교구 식구들을 직접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라고 조언한다. 설교자는 무엇인가를 교훈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낄 수 있는데, 이 자리에서 설교자가 해야 할 것은 '교훈'이 아니라 '질문'이다.(Stott 1982, 146) 존 스토트의 방법론을 한국 교회의 용어로 표현하면 '심방'이 된다. 심방을 가르치는 자리가 아닌 경청하는 기회로 삼으라. 이를 위해서는 좋은 질문을 준비해야 한다. 경청은 회중을 이해하게 하고, 목회자가 설교단에서 성도들의 마음에 와 닿는 설교를 할 수 있게 만든다. "겸손한 경청은 의미 있고 유익한 설교를 위한 필수 항목이다."(Stott 1982, 147) 

존 스토트는 회중을 이해하기 위해 1974년부터 '독서 모임'을 진행하였다.(Stott 1982, 148-150) 교회 성도 가운데 전문직 종사자 십여명이 함께 모였다. 한 달에 한 번씩 저녁 시간을 이용하였는데, 모임의 마지막에 다음 모임을 위한 도서를 선정하였다. 모임 초기에는 기독교 서적을 읽기도 하였지만, 점차 종교 서적보다는 대중적인 책을 읽었다. 존 스토트는 독서 모임을 통해 교회 성도들이 처해있는 세상을 이해할 뿐 아니라 상실과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며 기독교의 대사회적 사명을 고취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존 스토트는 자신의 경험을 서술하며, 설교자들이 교회의 성도들과 유사한 모임을 진행하기를 권고하는데 이는 한국 교회에서도 활용할만한 방법이다. 


연구 습관 만들기 

존 스토트는 영국 목회자들이 개인 연구에 집중하기 어려운 현실을 지적하며 한편으로 공감을 표한다. 목회자가 감당해야 할 업무가 과중하다는 이야기인데, 이 대목을 읽으며 이것이 한국 교회만의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물론, 한국교회처럼 새벽기도나 심야기도회는 없겠지만). 과중한 업무에 대한 존 스토트의 대답은 분명하다. "우리의 선배들은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방해가 되는 업무를 조절하였다."(Stott 1982, 154) 존 스토트도 목회 초년병 때는 밀려드는 업무로 설교 준비를 완성하지 못한 채 강단에 오르곤 했다고 고백한다. 그때 윌킨슨(L. F. E. Wilkinson)의 '조용한 하루'(a quiet day) 개념을 접하고 곧장 실행한다. 한 달에 하루만큼은 모든 업무로부터 벗어나 기도와 연구에 집중하는 것이다. 존 스토트는 조용한 하루가 굉장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한 달에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에 하루를 시행했다.(Stott 1982, 155) 

'조용한 하루'라고 부르든 그렇지 않든, 정기적으로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장소를 확보해야 한다. 문제는 목회자의 과중한 업무인데,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연구가 불가능하다. 존 스토트는 이 문제를 교회론에 대한 관점과 연결시킨다. 목회자가 바쁜 이유는 교회의 제반 사항을 자신이 직접 틀어쥐려는 "성직자 중심주의"(clericalism)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로하는 목회자 그리고 좌절한 평신도, 이들이 위험한 결합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몸이 성숙으로 자라지 못하게 한다."(Stott 1982, 158) 목회자가 평신도와 협력하지 않으니 목회자는 연구에 쏟을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해진다. 
존 스토트는 과중한 업무 외에 설교자의 연구를 방해하는 중요한 요소를 한 가지 더 지적한다. 바로 '게으름'이다. 교회에서는 설교자의 연구를 지도하거나 감시할 사람이 없기에 연구의 부족으로 설교의 질이 추락할 때까지 설교자는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 설교자가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하는 이유다. 

존 스토트는 설교자의 연구를 방해하는 요소로 과중한 업무와 게으름을 지적하였는데 이는 한국 교회 설교자들도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 틀림없다. 다만, 한국 교회는 영국 교회의 상황과 다른 차이점도 존재한다. 곧, 지나친 설교의 횟수다. 설교가 아닌 교회의 행정 업무라면 평신도에게 역할과 권한을 위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 설교는 목회자의 고유 영역이다. 문제는 설교의 횟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설교의 횟수를 조절하는 방안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1 _ 설교의 영광: 역사적 개요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2 _ 현대 교회의 설교 위기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3 _ 설교의 신학적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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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7 - 진심 그리고 열정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8 - 용기 그리고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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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학2020. 6. 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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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의 설교학은 그의 저서 Between Two Worlds: the Challenge of Preaching Today(London: Eerdmans Publishing, 1982)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는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설교자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공유하기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존 스토트는 자신의 설교학 제목을 <두 세계 사이에서>(Between Two Worlds)라고 붙였다. 설교는 두 세계 사이에서 양자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제4장 "교량으로서의 설교"(Preaching as Bridge Building)은 이 책의 핵심 주제를 다룬다고 하겠다. 


설교 _ 두 세계를 잇는 교량 

존 스토트는 먼저 설교자가 주목해야 하는 두 세계를 언급한다. 곧, 성경의 세계(biblical worlds)와 현대 사회(modern worlds)이다. 성경의 세계와 현대 사회는 지리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큰 간격이 벌어져있다. 그래서 성경의 세계와 현대 사회는 자칫 상호 연관성을 잃어버린 채 서로 무관심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설교단에서 이루어진다면, 회중의 신앙생활은 왜곡된다. 성경의 메시지는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현대 사회에 적용하지 못하거나,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성경의 가치관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강요하는 방식을 따라갈 수도 있다. 성경의 세계와 현대 사회의 괴리는 일차적으로 설교자의 책임이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가 성경으로부터 흘러나와 현대인들의 삶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것이 설교자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Stott 1982, 102) 

성경의 핵심 메시지를 현실에 적용하는 것을 신학에서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 혹은 '해석'(interpretation)이라는 용어로 주로 표현한다. 그러나 존 스토트는 상황화나 해석보다는 '성육신'(incarnation)이 자신의 의도를 잘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성육신이 기독교적 소통의 모델이다." (Stott 1982, 112) 그런데 교량을 놓는 과정으로 설교를 정의한 존 스토트는 흥미로운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곧 '접지'(earthing)다. 스토트는 접지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데, 하늘의 말씀이 이 땅에 뿌리내리는 이미지를 그리는 듯하다. 

두 개의 세계를 언급하면서도, 존 스토트는 복음주의자답게 설교가 일차적으로 집중해야 하는 영역은 성경의 세계라고 분명히 말한다. (Stott 1982, 103) 그에게는 설교라는 교량이 성경에서 출발하여 현대 사회로 이어지는 듯하다. 이는 마치 현대 사회는 문제가 드러나는 장소이고, 성경의 세계는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장소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성경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현대 사회로 이어지는 한 방향만으로는 두 세계에 다리를 놓는 설교의 역할을 정확히 묘사하기 어렵다. 설교단은 성경의 세계와 현대 사회가 함께 만나 지평의 융합(confusion of horizons)이 일어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복음과 함께 기독교 윤리를 설교하라 

존 스토트는 설교가 성경의 세계와 현실 세계에 모두 뿌리를 내리기 위한 방법으로 복음에 충실한 설교를 주장한다. 복음은 성경의 핵심적인 내용이지만(성경의 세계), 동시에 현대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기 때문이다(현대 사회).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현실 속에서 초월을 경험하게 한다." (Stott 1982, 115) 복음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를 넘어 '성경이 그려주는 하나님의 선한 행위'라고 확대할 수 있다. 넓은 의미의 복음을 받아들이더라도, 복음에 충실한 설교가 성경의 세계와 현대 사회에 둘 다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성경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에 머물 수 없다. 하나님은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는 현실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복음 설교와 함께 기독교 윤리도 강조한다. 선한 행동은 복음의 당연한 결과지만, 가르치고 배우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선한 행위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Stott 1982, 118) 그러므로 복음에 충실한 설교만으로도 현실적 적용이 가능하지만, 기독교 윤리도 강단에서 반드시 설교해야 한다. 존 스토트는 설교단에서 선포해야 할 기독교 윤리를 개인적, 교회적, 가정적, 그리고 사회적 측면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존 스토트가 교회적 측면에서 설명하는 기독교 윤리 가운데 오늘날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여전히 귀 담아 들을 내용이 있다. 교회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기독교 윤리는 성도 서로에 대한 사랑과 책임이다. (Stott 1982, 118) 교회는 복음에 근거하여 대사회적 역할을 반드시 감당해야 하지만, 교회적 측면에서 일차적인 과제는 성도들 사이의 관계다.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교우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가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이것은 설교의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하며, 설교자는 회중에게 정확한 가이드를 제시해야 한다. 


사회적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성숙 

존 스토트는 교량으로서의 설교를 서술하면서 설교단과 사회적 문제의 관계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영국의 노예 무역을 금지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윌리엄 웰버포스(William Wilberforce) 등의 예를 거론하며 존 스토트는 설교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영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때 존 스토트는 매우 중요한 개념 하나를 소환하는데 '기독교 정신'(christian mind)이다. 여기서 기독교 정신이란 해리 블레마이어스(Harry Blamires)가 제시한 개념으로 성경적 진리와 기독교적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현대의 다양한 이슈를 바라보며 그에 대한 기독교적 결론을 도출하는 정신을 말한다. 존 스토트는 블레마이어스와 함께 당시의 기독교 정신이 너무도 약해져 성도와 교회가 세속적 조류에 표류하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Stott 1982, 128) 

성도들에게 기독교 정신을 함양하는 것은 전적으로 설교자의 책임이다. 물론, 기독교 정신이 모든 사안에 대한 분명한 기독교적 해답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또한 설교자가 성도들이 직면한 모든 사회적 이슈에 대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대답을 내어 놓을 수도 없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분별력이다. 어린아이들은 아직 분별력이 자라지 못하였기에 부모가 대신 판단을 내려준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이라면 나름대로의 분변력을 가지고 자신에게 찾아온 과제를 분석하여 책임감 있게 행동한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기독교 정신을 함양하고 성도들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나름대로 분별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존 스토트가 제시하는 성숙한 설교자와 성도의 모습이요, 기독교 정신에 따라 분별력을 갖춘 성도를 양성하는 것이 '교량 건설자'인 설교자의 역할이다.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1 _ 설교의 영광: 역사적 개요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2 _ 현대 교회의 설교 위기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3 _ 설교의 신학적 근거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4 - 교량으로서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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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학2020. 5. 30.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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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의 설교학은 그의 저서 Between Two Worlds: the Challenge of Preaching Today (London: Eerdmans Publishing, 1982)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는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설교자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공유하기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설교 위기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존 스토트는 설교에 대한 나름의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는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 시대에 설교가 들리기 위해서는 설교 기술이 아니라 설교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곧, 방법론이 아니라 신학이 설교를 위기로부터 구해낼 수 있는 주장이다. 


설교의 신학적 근거 

존 스토트가 제시하는 설교에 대한 첫 번째 신학적 근거는 '하나님에 대한 신념'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빛이라고 말씀하는데, 그 뜻은 하나님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섭리와 역사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또한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분의 말씀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인간의 문자로 기록되었는데, 그것이 성경이다. 

존 스토트가 제시하는 설교에 대한 두번째 신학적 근거는 '성경에 대한 신념'이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그분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오늘도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표현한다. "[성경은] 살아있는 사람들(living people)을 향한 살아계신 하나님(the living God)의 살아있는 말씀(a living word)이다."(Stott 1982, 70) 그러므로 성경은 과거의 문서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성경을 설교할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존 스토트가 제시하는 설교에 대한 세번째 신학적 근거는 '교회에 대한 신념'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고 성숙해진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교회를 양육하고, 격려하고, 교훈한다. 그런 점에서 존 스토트는 담대하게 선언한다. "회중석은 설교단의 반영이다."(The pew is a reflection of the pulpit. Stott 1982, 83) 

존 스토트가 제시하는 설교에 대한 네번째 신학적 근거는 목회직에 대한 신념이다. 존 스토트는 신약 성경을 근거로 가르치고 선포하는 교사로서의 목회직을 강조한다. 이 대목에서 눈에 띄는 내용이 몇 가지 있다. 존 스토트는 교회의 크기가 어떠하든 목회직이 개인이 아닌 팀 사역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팀 안에는 평신도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했다. (Stott 1982, 88) 한편, 존 스토트는 목회직의 역할을 세 가지로 나열하는데 (1) 회중을 대상으로 한 설교, (2) 개인을 대상으로 한 상담, 그리고 (3) 그룹을 대상으로 한 훈련이다. (Stott 1982, 88) 이는 설교라는 주제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목회의 대상을 개인과 그룹과 회중으로 적절히 구분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존 스토트가 제시하는 설교에 대한 다섯번째 신학적 근거는 설교에 대한 확신이다. 존 스토트는 주로 '강해설교'(exegetical sermon 혹은 expository sermon)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강해 설교'를 성경을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설교라는 의미보다는 성경의 메시지를 여과 없이 회중에서 전달하는 이른바 '성경적 설교'(biblical preaching)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존 스토트가 이야기하는 설교에 대한 신념이란 설교자는 개인의 생각이 아닌 성경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는 신념이요, 설교자가 성경본문에 확고하게 붙들려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설교를 통해 일하시리라는 신념이다. 


신념 위에 서 있는 설교자 

존 스토트는 설교에 대한 신학적 근거가 신념(믿음)이라고 한다. 설교 위기의 시대, 목회자가 설교의 사명을 향해 매진할 수 있는 것은 경험적 세계라기보다는 신념의 세계다. 그런데 존 스토트가 제시한 다섯 가지 신념에는 설교자 자신에 대한 믿음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말씀하시는 하나님, 성경을 통해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설교를 통해 지금도 교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념을 언급한다. 현실이 아니라 신념이기에 근거가 약하다고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목회자요, 그 믿음으로 선포하기에 설교자다.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1 _ 설교의 영광: 역사적 개요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2 _ 현대 교회의 설교 위기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3 _ 설교의 신학적 근거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4 - 교량으로서의 설교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5 - 설교자의 연구(공부)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6 _ 설교 준비 과정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7 - 진심 그리고 열정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8 - 용기 그리고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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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학2020. 4. 24.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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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의 설교학은 그의 저서 Between Two Worlds: the Challenge of Preaching Today(London: Eerdmans Publishing, 1982)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는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설교자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공유하기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존 스토트는 현대 사회에서 설교가 처한 위기를 설명한다. 그는 현대 설교의 위기를 묘사하기 위해 교회에서 '술집 순례'(pub-crawling)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묘사하는데, 우리에게 친숙한 용어로 바꾼다면 '설교 쇼핑' 정도가 되겠다. 약 30년 전에 출판된 존 스토트의 책에서 이와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것이 흥미롭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와 같은 설교의 위기를 초래하였는가? 스토트는 세 가지 원인을 지적한다. 곧, 탈권위주의(the anti-authority mood), 정보통신 혁명(the cybernetics revolution), 복음에 대한 확신 부족(the loss of confidence in the gospel)이다. 


탈권위주의 

탈권위주의는 현대 사회의 중요한 특징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절대적인 진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상이나 믿음은 개인의 것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런데 현대인들에게 설교단은 설교자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장소로, 설교는 기독교 교리를 강요하는 현장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설교가 '권위주의의 상징'이 되었다.(Stott 1982, 31) 

탈권위주의의 공격에 교회와 설교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스토트의 제안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권위의 위치'(the locus of authority)라는 개념이다. 설교자의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설교자의 권위는 누구에게서 나오는가? 설교의 권위는 설교자의 권위가 아니라,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다. 만일 설교가 권위주의적 특성을 가진다면 그것은 설교자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때문이다. 설교자 역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말씀에만 설교의 권위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권위는 "겸손한 인성 안에 놓인 복음의 권위"다.(Stott 1982, 36) 

존 스토트는 탈권위주의 시대에 효과적인 설교 방법론으로 '대화체 설교'를 제안한다. 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설교의 대화적 특징'을 살리라는 조언이다. 그가 제안하는 대화체 설교란 설교자가 청중의 마음에 일어날만한 질문과 의구심을 미리 예상하고 그 대답을 설교 안에서 제시하는 설교다. 그러면 설교를 듣는 동안, 청중은 설교자의 논리와 자신의 생각이 서로 교차하며 대화하는 경험을 한다. 설교의 형식은 설교자가 말하고 청중이 듣는 일방적 소통이지만, 실제로는 설교자와 청중이 '조용히' 대화하는 쌍방식 소통이 된다. 여기에 기억할 사항이 있다. 스토트가 제안하는 '대화체 설교'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설교 주제나 내용에 대한 청중의 마음을 읽어내는 설교자의 역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보통신혁명

존 스토트가 이 책을 출판한 지 벌써 약 3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므로 당시의 정보통신 기술은 오늘날의 기술혁신과는 큰 차이점이 존재한다. 존 스토트의 시대 가장 대표적인 미디어는 텔레비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던진 질문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휴게실의 TV 박스가 교회의 설교단을 대체할 것인가?"(Stott 1982, 43) 텔레비전의 등장 이후,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이 큰 혁신을 거둘 때마다 교회는 지금도 존 스토트와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온라인 예배는 오프라인 예배를 대체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존 스토트의 대답은 분명하다. 기술의 발달이 정보를 풍성하게 제공하지만, 성도들 상호간의 친밀한 교제와 사랑은 담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설교단은 결코 텔레비전이나, 그 어떠한 기술적 장치로도 대체할 수 없다. (Stott 1982, 45) 

존 스토트는 텔레비전 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보통신혁명에 대한 그의 글에는 21세기 설교자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그리고 매우 중요한 통찰력이 담겨 있다. 스토트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시각적 유익을 도모하기 위해 두가지 특별한 방법을 설계하셨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이 설계는 인간이 이룩한 어떠한 기술적 발견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그 첫번째는 회중 앞에 서 있는 '설교자'다. 설교자는 설교 내용만 전달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과 인격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딛 2:7, 딤전 4:12). 두번째는 세상 앞에 서있는 '회중'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드러내는 방법은 단순한 언어적 전달에 그칠 수 없다. 변화된 회중, 복음을 체험한 회중,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회중을 통해 복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된다.(Stott 1982, 53) 그러므로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이 인류의 삶과 문화를 크게 바꾸어버린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핵심적 도구는 인간의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설교자와 말씀으로 변화된 회중이다. 


복음에 대한 확신 부족

현대교회는 설교를 위협하는 여러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 그 결과, 설교의 가장 치명적인 위협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교회가 복음에 대한 확신을 상실한 것이다. 존 스토트는 분명히 선언한다. "먼저 복음에 대한 확신을 회복하지 못하면 설교의 회복은 불가능하다."(Stott 1982, 58) 그렇다면 어떻게 설교자들의 사기와 의욕을 다시 고취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존 스토트의 시대, 그리고 오늘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이 거대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먼저 기억할 것이 있다. 설교자는 두 가지 마음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먼저는 설교자 개인의 아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세속 사회의 주장과 문제 제기에 귀를 기울이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현대 사회는 설교자가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세상의 소리와 청중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요구한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나 열린 마음과 더불어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자세가 있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헌신의 마음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굳건한 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살전 1:5; 히 10:22) 잊어서는 안된다.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1 _ 설교의 영광: 역사적 개요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2 _ 현대 교회의 설교 위기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3 _ 설교의 신학적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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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7 - 진심 그리고 열정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8 - 용기 그리고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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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학2020. 4. 1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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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의 설교학은 그의 저서 Between Two Worlds: the Challenge of Preaching Today(London: Eerdmans Publishing, 1982)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는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설교자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공유하기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존 스토트는 설교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시도한다. 그러나 모든 역사 서술이 그렇듯, 그의 역사적 접근 역시 하나의 관점(사관)을 따른다. 곧, 설교의 영광이다. 

 


설교에 대한 역사적 고찰 

예수님은 설교를 공생애 사역의 중심에 두셨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선포)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 1:38)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선포, 곧 설교로 인식하셨고 자신이 보냄을 받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고 난 뒤 예수님의 뒤를 이은 사도들도 설교를 사역의 중심에 두었다. 교회의 여러 행정적인 문제가 그들의 설교 사역을 방해할 때, 사도들은 분명하게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한다(행 6장).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고대 교회에서도 말씀을 선포하는 일과 선포된 말씀을 듣는 일은 신앙생활의 핵심으로 여겨졌다. 최초의 교회사가로 알려진 유세비우스는 기독교의 첫 두 세기 동안 실행되었던 전도자와 교사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들은 여행을 다니며 전도의 사역을 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아직 믿음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설교하고(to preach), 그들에게 영적인 책을 전해주는 일이었다."(Stott 1982, 5) 유세비우스의 증언 외에도 존 스토트는 <디다케>(Didache), 순교자 저스틴과 라틴 교부 터툴리안의 저서, 그리고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존 크리스소톰의 예를 통해 초대교회가 설교의 전통을 강력하게 붙잡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존 스토토의 역사 서술 가운데 개신교인들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중세시대에 대한 언급이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위세를 떨치던 중세 시대에도 교회 안에는 설교의 영광을 설파하며 이를 실천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행동과 가르침은 언제나 함께 가야 한다. ..... 가난한 자들에게 헌신하듯 설교 사역에도 헌신해야 한다." (Stott 1982, 6-7) 한편, 도미니코는 프란치스코보다 한층 더 설교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에게 설교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였다. 이후 존 위클리프, 마틴 루터 그리고 존 칼뱅으로 이어지는 종교개혁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두었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존 칼뱅은 참된 교회의 첫 번째 표지로 말씀에 대한 신실한 설교를 지적했으니 말이다. 

존 스토트는 계속해서 청교도 운동의 대표 주자인 리처드 백서터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존 웨슬리를 지적한다. "나는 오직 한 가지만 알기 원합니다. 곧 하늘에 올라가는 길입니다. ....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낮춰 그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책에 기록하셨습니다. 오, 저에게 그 책을 주십시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좋으니, 하나님의 책을 저에게 주십시오. 저는 그 책을 얻었습니다. 여기에는 저를 위한 충분한 지식이 담겨 있습니다. 저로 하여금 한 책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Let me be homo unius libri)."(Stott 1982, 15) 존 웨슬리의 고백이다. 

19세기로 들어서면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과 찰스 다윈의 진화론 등 설교는 커다란 위기에 직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스토트는 그러한 위기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왔다고 기록한다.(Stott 1982, 17-18) 이 시기에 위대한 설교자들이 등장하였으니, 설교의 황태자라 불리는 찰스 스펄전도 이때 사람이다(1834-1892). 한때 프린스턴신학교의 교수였지만 목회자이며 설교자로 살기를 더욱 간절히 사모하였던 제임스 알렉산더(James W. Alexander)는 설교 위기의 시대에도 설교자가 누리는 행복이 있다고 강조했다. "설교에는 행복이 숨겨져 있다." 알렉산더 위트(Alexander Whyte)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설교를 포기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 하나님의 보좌 곁에 있는 천사들이 당신의 사역을 부러워하고 있다."(Stott 1982, 20) 


설교의 위기와 희망 

존 스토트는 예수님의 시대로부터 설교의 역사를 개관한 후, 자신이 살고 있던 20세기의 교회 현실을 진단한다. "최소한 서구 사회에서는 설교의 쇠퇴가 교회의 쇠퇴를 나타내는 하나의 징조다. 우리 시대의 회의주의는 확신에 찬 설교의 회복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설교의 중요성과 회복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조차 최근에는 들리지 않는다."(Stott 1982, 25) 존 스토토는 칼 라너의 말을 인용하며, 설교가 하루 속히 회복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대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언어가 사람들에게 의미가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Stott 1982, 26). 

21세기 한국 교회 역시 설교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에 넘쳐나는 것이 설교요, 그만큼 외면받는 것도 설교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펼쳐진 온라인 세상에서는 손에 꼽히는 유명 설교자의 설교만이 사람들의 선택(클릭)을 받는다. 이 세계에서는 더 이상 지억교회와 지역교회 설교자는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그러니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 더 이상 설교는 영광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설교의 위기 시대, 존 스토트의 설교학은 무엇이라 대답할까? 

설교 위기의 시대, 존 스토트가 가장 먼저 설교 역사를 개괄한 데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면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나온 이천년의 교회 역사는 설교가 기독교 역사 속에 오랜시간, 그리고 매우 넓게 매우 중요한 전통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의 설교 위기를 철저히 분석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지난 이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라. 어느 시대도 설교의 위기가 없었떤 때는 없었다. 그리고 설교의 위기는 언제나 교회의 위기가 되었다. 그리고 역사가 알려주는 또 한 가지 사실, 설교만이 교회의 위기를 이겨내는 하나님의 수단이었다. 바로 이것이 지난 이천년을 이어온 설교의 영광이다.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1 _ 설교의 영광: 역사적 개요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2 _ 현대 교회의 설교 위기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3 _ 설교의 신학적 근거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4 - 교량으로서의 설교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5 - 설교자의 연구(공부)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6 _ 설교 준비 과정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7 - 진심 그리고 열정

존 스토트의 설교학 강의 08 - 용기 그리고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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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학2017. 1. 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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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설교에 있어서 3가지 주체를 고려해볼 수 있다. 첫째는 설교자이고, 둘째는 회중이며, 마지막으로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전통적으로 설교의 세가지 요소 가운데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신다는 사실이 다른 요소들에 비해 중요하게 부각되었고, 이는 신정통주의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현대 복음주의교회의 전반적인 경향이기도 하다. 성령 하나님이 여러 저자들의 손을 빌어 성경을 기록하였듯,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설교자의 입술을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다. 이러한 논거의 뒤에는 설교자의 위치에 대한 전제가 내포되어 있는데, 곧 설교자는 말씀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도구(mere instruments)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을 연구하여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더하거나 빼지 말고 고스란히 회중에게 전달해야 한다.


설교자의 역할에 대한 이와 같은 전통적인 견해와 더불어, 설교자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편에서는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설교자의 역할을 ‘중재자’(mediator)로 소개한다. 곧, 기독교의 진리가 회중들이 처해 있는 현실 속에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주어 기독교의 진리와 현실 사이의 연관성(relevance)을 맺어주는 역할이다.[1] 그런데 설교자가 기독교 진리와 현실 사이에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먼저 하나님의 심정을 그의 마음에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2] 그러므로 나인홀드 니버에게 있어 설교자란 단지 말씀을 전달하는 스피커가 되어서 입력된 신호를 보다 큰 음량으로 출력하는 것을 넘어서, 설교자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 마음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청중들이 처한 현실과의 연관성을 맺어주는 중재자다.


설교자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주장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찰스 피니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설교자를 단순한 “말씀의 도구”로 묘사하는 것을 분명하게 반대한다. “우리는 목회자를 죄인의 회개를 위한 도구라고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분명히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다. 사람은 도구 이상이다.”[3] 찰스 피니는 계속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설교자의 역할을 설명한다. 나이아가랴 폭포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우연히 그를 목격했다면, 그를 향해 ‘멈춰’라고 소리지를 것이다. 찰스 피니는 ‘멈춰’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설교자의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이 비유에서 피니가 강조하는 바는 설교자가 단지 ‘멈춰’라는 말을 불특정 다수에게 이야기한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폭포를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는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알려주고 그 발걸음을 멈출 수 있도록 촉구하지 않는다면 ‘멈춰’라는 말이 실제로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참된 역할은 성경을 연구하여 그 메시지를 잘 짜여진 한편의 설교로 전달하는 ‘말씀의 도구’를 넘어 청중들의 영적인 상태를 분명하게 지적하여 그들로 하여금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촉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의 역할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 – 곧 설교자는 말씀의 도구가 되어서 성경의 메시지를 여과없이 전달해야 한다 – 를 넘어 설교자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받아들인다면, 설교의 준비와 전달에 있어 한가지 중요한 논의점에 다다르게 된다. 곧, 원고 설교와 즉흥설교에 대한 논의다. 파머(H. H. Farmer)는 원고 설교와 즉흥 설교의 장단점을 구분하면서 원고로 작성된 설교는 언제든 다시 꺼내어 볼 수 있는 반면, 즉흥 설교는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관계(I-Thou Encounter)에서 발생하는 능력이 발휘될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4] 그러나 원고 설교와 즉흥 설교에 대한 논의는 설교자의 역할에 대한 이해와 맞물리는 접촉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설교는 말씀의 도구이기에 성경의 메시지를 연구하여 그것을 청중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해야 한다는 견해에서는 당연히 원고 설교가 즉흥설교보다 권장되어 마땅하다. 설교자가 철저히 준비하여 완결된 설교 – 곧 성경의 메시지를 충성스럽게 담아낸 원고 – 를 청중들에게 들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설교자의 역할이 단지 ‘멈춰’라는 단어를 전달하는 데 있지 않고 실제로 폭포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의 발걸음을 멈춰세우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던 찰스 피니는 원고 설교보다 즉흥설교를 선호하였다. “의심의 여지 없이 원고 설교는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원고 설교는 복음에 거대한 능력(great power)를 제공하지는 못한다.”[5] 찰스 피니에 의하면, 설교자의 역할은 회중들의 영혼을 일깨워 회개로 인도하는 것인데, 설교자가 자신이 기록한 원고에 얽매이면 청중의 반응에 민감하게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자신이 설교하는 회중을 바라보고 있다면 설교를 하면서 회중들이 따라오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만일 회중이 어떠한 요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목회자가 확인한다면, 그는 잠시 설교의 진행을 멈추고 그 내용을 다시 설명해줄 수 있다. 회중이 그 설명 역시 이해하지 못한다면 목회자는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며 설교를 더욱 진행하기에 앞서 회중들의 마음에 그 내용을 분명하게 심어줄 수 있다. 그러나 설교 원고를 작성하여 마치 에세이나 책을 읽는 것처럼 자신이 작성한 원고의 순서대로 설교하는 목회자라면 특정 부분을 반복할 수 없고 청중들고 하여금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시키는 데 실패하고 말 것이다.[6]


설교자는 말씀이라는 내용을 어느 시대, 어느 장소나 변함 없이 보존하는 용기가 아니며, 설교자의 역할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여과 없이 전달하는 도구에 머무르지 않는다. 설교자는 라인홀드 니버가 주장하듯 기독교의 진리[전통]를 오늘을 살아가는 청중들의 삶에 연관시키는 중재자이며, 존 스토트가 묘사하듯 성서의 세계와 청중의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하는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목회자로서 설교자는 청중들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를 통해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던 자신의 발걸음을 돌이키는 회개를 촉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설교자는 매주 한 편의 잘짜여진 설교를 작성하여 사람들 앞에 자신의 원고를 실수 없이 읽어내려가는 역할에 머무를 수 없다. 원고 설교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즉흥 설교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존 스토트는 이와 같은 설교자의 역할을 “다리를 놓는 것”(bridge building)이라고 묘사하였다. Cf. John Stott, I Believe in Preaching (London: Hodder & Stoughton, 1982); 계지영, 이 시대를 향한 설교학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4), 42-44.

[2] Ursula M. Niebuhr, introduction to Justice and Mercy, by Reinhold Niebuhr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7).

[3] Charles G. Finney, “How To Preach The Gospel”, 12th Lecture on Revival. http://www.whatsaiththescripture.com/Text.Only/pdfs/Revival_Lectures_Text.pdf (accessed January 19, 2017). 

[4] H. H. Farmer, “The I-Thou Encounter,” Major themes in the Reformed tradi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2),126.

[5] Charles G. Finney, “How To Preach The Gospel”.

[6] Ibid. 피니가 원고 설교보다 즉흥 설교를 옹호한다고하여 준비 없는 설교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즉흥 설교를 위한 설교자의 훈련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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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