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강해2020. 5. 23.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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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0편은 1절부터 기쁨과 감사가 가득합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절입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기 2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표현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분은 언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예배 시간이지요. 시편 100편은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4절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2절이 ‘나아간다’는 동사를 썼다면, 4절은 ‘들어간다’는 동사를 사용하지요. 하나님의 문,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갈 때 어떠한 마음 자세로 들어간다는 것입니까?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문에 들어가고, “찬송함으로”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매 주일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예배당을 찾는 여러분의 마음이 날마다 기쁨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하여 예배당을 찾는 여러분은 감사함으로 교회의 문을 여시고, 찬송함으로 하나님의 문을 열고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때 시편 100편이 이야기하는 이 기쁨의 찬송이 바로 우리의 찬양이고 우리의 감사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시편 100편을 단지 예배에 참여하는 장면으로 국한시켜서 적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참으로 많은 곳을 방문하지요. 예배를 마치면 가정으로 돌아가시고, 직장을 방문하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서 참 많은 곳을 방문합니다. 그때마다 감사함으로 들어가고, 찬송함으로 나올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풍요로워질까요? 오늘 하루 여러분이 어디를 방문하시든지, 어느 문을 여시든지 감사함으로 들어가고 찬송함으로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0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문을 열고, 찬송함으로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하는 이유, 우리가 언제나 감사와 찬양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가 바로 3절에 등장합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3절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지요. 기독교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많은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설명과 이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면 성경의 하나님,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3절은 계속해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양입니다. 시편 100편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하면서 남성인지 여성인지, 성인인지 어린아이인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지 낮은 지, 교회에서의 직분은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을 이야기하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양이라는 사실만 언급합니다. 곧,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만 분명하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앞길이 형통하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기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언제나 아프지 않고 건강하기에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시편 100편은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차있지만, 시편 100편이 제시하는 찬양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양이라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참으로 이 하나의 사실을 분명히 믿는다면, 우리는 시편 100편을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또한 시편 23편도 동일한 마음으로 노래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물론,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주시더라도 우리는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요,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는 안위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를 살아가시면서 여러분을 위협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그 대신 여러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향하여 물 위로 첫걸음을 떼었던 베드로였지만, 그가 풍랑과 파도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몸은 물결 안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지팡이와 막대기가 인도하여주셨던 예수님은 직접 그의 손을 내밀어 끌어올려주시잖아요. 시편 100편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풍랑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시편 100편은 우리가 건너고 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시편 100편의 마지막 5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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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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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강해2020. 5. 23.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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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2편은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상상하지 않는 하나의 장면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신들의 모임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모임의 좌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모임에서 하나님은 신들을 심판하시는 분, 곧 재판장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시편 82편을 묵상할 때 가정 먼저 드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1절에 등장하는 “신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성경은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말씀하는데, 과연 다른 신들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대표적인 것 네 가지만 먼저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가능성은 이방의 신들(the gods of heathendom)입니다. 세상에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들, 이방 민족이 섬기는 신들이라는 설명이지요. 
두번째 가능성은 영적 권세들입니다. 신약 성경으로 넘어오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시에서 세상의 권세와 주관자들을 언급하지요. 바로 그들의 존재라는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세번째 가능성은 인간의 통치자들입니다. 각 지역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인간 지도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장면으로 시편 82편을 이해하는 견해입니다. 
마지막 네번째 가능성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중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들의 불의를 심판하시는 것이라고 주장입니다. 

만일 누군가 저에게 그 네 가지 가능성 중에서 어떤 해석이 정확합니까? 라고 질문하신다면, 저는 아직 그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 어떠한 해석이 정확하다는 확신이 저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 82편과 관련하여 분명히,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릴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등장하는 ‘신들’이 영적인 존재이든, 특정한 인간들이든 상관 없이 이들의 중요한 특징은 정의를 행하지 않고, 불의를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의를 책망하시는 장면이 2절에 등장하지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이 세상의 신들이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든, 인간 통치자이든, 이스라엘 백성이든 상관 없이 이 세상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공의와 정의를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사람들,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단체들이 많습니까? 아니면 불의를 행하고 자신들의 욕심만을 챙기는 사람들이나 단체들이 많습니까? 이 세상의 불의가 시작된 근원을 세상의 신들이라고 지칭하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지칭을 하든, 인간 지도자들이라고 지칭을 하든, 아니면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이라고 지적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정의보다 불의가 더욱 창궐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이 세상이 흑암 중에 왕래하니, 그 결과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립니다. 불의가 가득한 이 세상은 모든 터전이 흔들리고 있어요. 불의가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니 우리의 삶도 늘 요동치며 평화, 샬롬이 없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힘이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시편 82편 1절부터 7절은 불의한 신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고 재판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이 마치자 마지막 8절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르짖는 탄식의 기도 소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이 세상은 불의합니다. 이 세상은 정의가 사라졌습니다.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경쟁사회가 되어, 힘이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괴로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불의한 세상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나타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편 82편을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교훈 몇 가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한 두가 가지만 나누어보도록 하죠. 먼저, “세상은 불의하지만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시편 82편에 등장하는 신들은 그것이 이방의 신이든, 세상의 권세와 주관자들이든, 인간 통치자들이든 평범한 백성들이든 상관 없이 불의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불법을 행하기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불의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바로 그때 우리는 나 자신도 모르게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지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고 배웠는데, 왜 나에게 억울한 일이 많이 찾아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불의하다고 하나님께 불의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82편을 보면 하나님은 불의한 신들을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불의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까지 의심할 필요는 없어요. 

또 한가지, 세상은 불의하지만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이 불의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께만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호소하십시오. 세상의 모든 신들은 하나같이 불의합니다. 시편 82편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상의 신들은 단 한명도 없어요. 그러므로 내가 이 사람에게 불의를 당했다고 저 사람에게 가면, 그 사람에게 또 다시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억울함을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호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의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 본문 8절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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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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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강해2020. 5. 2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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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시편 81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제를 벌이면서 함께 불렀던 찬양입니다. 본문 3절이 그 정황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지요. 

초하루와 보름과 우리의 명절에 나팔을 불지어다 (3절) 

3절에는 보름이 등장하고, 명절이 등장합니다. 시편 81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본다면, 9월의 보름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한해의 곡식을 추수하는 절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시편 81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추수의 절기를 맞이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시편 81편은 그들이 함께 불렀던 찬양인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81편의 독특한 점은 6절부터 마지막 16절까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인데, 그 내용의 대부분이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81편을 묵상할 때, 6절부터 16절까지 이르는 긴 구절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를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그 가운데 6절부터 10절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묵상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6절부터 10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을 묘사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어떠한 일을 행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곧 우리 시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어떠한 일을 행하고 계신 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자, 과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6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그 첫째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사건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분명한 구원의 사건이 있었지요. 죄와 어둠과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던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어요. 

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 그 두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신 일입니다.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7b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신 것이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이었을까요?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이었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시험이 없는 것이 좋고, 아무런 역경도 만나지 않는 것이 복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주신 것만으로는 그들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은 조금씩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은총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라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 그 세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신에게 절하지 말지니라 (9절) 

시편 81편 9절은 십계명의 제 일 계명입니다. 시편 81편은 십계명 전부를 기록하지는 않고 있지만, 제 일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주신 사건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주신 사건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율법은 은혜입니다. 율법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에게 참으로 행복한 길을 알려주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율법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주신 것만이 아니라, 때에 맞춰 시험을 주시고, 율법의 명령을 주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이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더욱 깊은 마음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깊은 마음이 오늘 본문 10절에 묘사되어 있지요.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네 입을 크게 열라” 여기서 입을 크게 연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넓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금 당장의 기도응답, 하나님께서 주시는 눈에 보이는 축복만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의 눈 앞에 커다란 장애물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시험과 때로는 버겁게만 느껴지는 율법의 명령까지도 입을 크게 열고 마음을 크게 넓혀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자세. 바로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입과 마음과 영혼 가운데 풍성한 하늘의 은총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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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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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강해2020. 5. 23.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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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 왕이 남 유다를 다스리던 때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북쪽에서 내려온 앗수르 제국의 군대는 이미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더 남쪽으로 내려와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하였지요. 남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었으니 이미 유다의 다른 성들은 모두 앗수르 군대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당시 앗수르 제국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랍사게 장군은 18만 5천 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있었기에 예루살렘 성을 포위만 하여도 예루살렘 성은 머지않아 그들의 손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랍사게 장군이 그와 같은 전략을 세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높은 산 위에 세워진 도시로 천연 요새입니다. 아무리 거대한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하더라도 쉽게 무너트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오죽하면 여호수아 시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지만, 가나안 땅 한 중심에 위치하였던 예루살렘은 이후 다윗이라는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점령하지 못했겠습니까? 그토록 예루살렘 성은 군대의 힘만을 가지고는 점령하기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루살렘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식수를 얻을 수 있는 강이나 하천이 예루살렘에는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특히 예루살렘은 건기에 해당하는 4월부터 10월까지는 비가 한 방울도 안 내린다고 해요. 그러므로 예루살렘 사람들은 식수를 비롯한 생활용수를 얻기 위해 예루살렘 성을 나와서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 샘까지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니 앗수르의 랍사게 장군은 예루살렘 성벽을 18만 5천 명의 군인들로 물 샐 틈 없이 포위만 하고 있으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생명에 꼭 필요한 식수를 얻기 위해 기혼 샘까지 나올 수 없으니 남 유다는 곧 앗수르 제국에 항복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랍사게 장군의 이 전략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물론, 예루살렘에는 식수를 공급할 수 있는 강이나 하천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 성벽 바깥 곧 기혼샘으로부터 지하를 통해 예루살렘 안으로 물길이 들어올 수 있도록 터널을 만들었고, 그 끝에는 조그마한 연못을 만들어서 물이 고이게 하였습니다. 그 연못의 이름이 바로 실로암입니다. 사람들은 그 터널을 히스기야 왕이 만들었기에 ‘히스기야 터널’이라고 불렀고 유사시에 히스기야 터널이 시작되는 기혼 샘의 그 입구를 적군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잘 막아놓기만 하면 예루살렘 성벽을 제 아무리 18만 5천 명의 대군이 층층이 에워싼다 하더라도 예루살렘 안에는 생수가 흘러 들어와 실로암에 모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수많은 적군의 위협 속에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지켜주었던 것은 튼튼한 성벽이나 강력한 군대라기보다는 기혼샘으로부터 히스기야 터널을 따라 실로암 연못에 모이는 한 줄기의 생명수였습니다.

여러분은 긴박한 위기의 순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위기의 순간 우리에게 생명의 끈이 되어주는 것은 거대한 성벽이 아닙니다. 크고 화려한 집을 장만하고,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성공을 이룬다고, 그것이 긴박한 위기의 순간 우리와 우리 가정을 지켜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절박한 위기의 순간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을 지켜주는 것은 우리의 심령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조그마한 물줄기, 하나님의 은혜의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개인의 심령과 우리 가정에 머물러 고이게 되는 ‘실로암 연못.’ 바로 그 은혜의 샘물이 긴박한 위기의 순간 우리를 지켜 주는 생명의 끈이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하니하리로다

앗수르의 군대는 예루살렘 성을 겹겹이 에워싸기만 하면 유대인들이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기혼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히스기야 터널을 지나 실로암에 머무르는 은혜의 샘물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앗수르 군대의 침공을 받으면서도 예루살렘 성 안에서 생존하였던 유대인들은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그들의 믿음의 고백을 노래로 만들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1절)

오늘 본문 시편 46편 1절의 말씀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46편의 역사적인 배경이 히스기야 시대의 바로 그 사건이라는 데 많은 성서학자들이 의견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자,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고 그들의 심장 깊은 곳에 새영의 샘이 솟아나게 하시니 온 땅을 뒤덮을 듯한 앗수르의 군대 18만 5천 명이 예루살렘 성을 겹겹이 에워싸더라도 그들의 생명은 안전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더욱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2절부터 보십시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절입니다.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땅이 움직입니다. 지진이지요. 산이 흔들려 바닷물에 빠집니다. 거대한 홍수입니다. 바닷물이 솟아나 뛰놀며 산을 덮칩니다. 쓰나미 현상이지요. 그러므로 2절과 3절이 묘사하는 위기의 장면은 문자 그대로 자연재해를 의미할 수도 있고,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거대한 재난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18만 5천 명이라는 쓰나미와 같은 적군이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돌진해오는 경우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그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은혜의 샘을 마셨던 유대인들은 3절 뒷부분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교회 역사상 시편 46편을 무척 사랑했던 사람으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를 꼽습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앞장서면서 지진과 같은, 홍수와 같은, 쓰나미와 같은 위험과 시험이 찾아와 그 마음에 두려움이 생길 때면 어김없이 그의 동역자였던 필립 멜란히톤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필립, 우리가 시편 46편을 노래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거의 습관적으로 시편 46편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토록 시편 46편을 사랑하며 노래하였던 마틴 루터는 이 시편에 근거하여 지금까지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을 작곡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찬송가 585장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온 땅을 뒤덮는 쓰나미와 같은 앗수르의 군대를 바라보았던 히스기야의 마음에 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지만 여전히 강력한 공권력과 무력을 휘두르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위협 속에서 마틴 루터의 마음에도 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이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신앙을 지키며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며 지진과 홍수와 쓰나미와 같은 위험을 당할 때 그들의 마음에 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에 엄습해 올 때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입술을 열어 지금도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난 큰 도움이시라”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은 큰 환난 가운데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적군의 쓰나미, 두려움의 쓰나미, 재앙의 쓰나미가 우리를 찾아와도 하나님의 은혜의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생명의 물줄기가 흘러 우리의 심령에 고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어떠한 위기의 순간도 헤쳐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였을 때 피난처 되시는 주님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우리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행해야 할까요? 과연 위기의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시편 46편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명령, 특별히 위기의 순간에 봉착한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 딱 하나가 등장합니다. 시편 46편은 첫 구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하나님을 향한 인간들의 찬양이지만, 유일하게 딱 한 구절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거든요. 그리고 바로 그 구절 안에 위기를 맞이한 우리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들어 있습니다. 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찾아보며 오늘 본문 10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0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르시기를” 네, 하나님께서 이르시는 말씀입니다. 10절을 계속 보십시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네, 이것입니다. 위기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사항은 단 한 가지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말고 말하지도 말고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에 ‘가만히 있다’는 히브리어 표현은 군대식 명령입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긴다면 ‘차렷!’ 정도가 됩니다. 위기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사항이 무엇이라고요? 그저 가만히 있어서, 그저 차려 자세로, 그저 열중쉬어 자세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이 되시는 바로 그 장면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마지막 11절에 등장하는 성경의 인물이 참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여기에 야곱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성숙도를 생각한다면 ‘야곱의 하나님’보다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혹은 ‘요셉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혹은 역사적 배경을 따라 ‘히스기야의 하나님’ 혹은 ‘여호사밧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더 좋을 것 같지 않으세요? 그런데 시편 46편은 굳이 ‘야곱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 선언하며 시편을 마무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기록된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어요. 

자, 야곱은 젊은 시절 자신의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던 사람입니다. 창세기의 표현을 그대로 옮긴다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 도 없이”(창 31:40) 일했던 사람이 야곱입니다. 그렇게 악착같이 열두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렇게 악착같이 큰 재물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 자신의 손으로 최선을 다하여 아들을 낳고 재물을 모아보았지만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은 들에서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자신의 모든 재물은 애굽에 임한 7년 흉년 가운데 채 1~2년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젊은 시절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인생의 반전은 여기서부터입니다. 그렇게 지칠 줄 몰랐던 야곱이,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고, 노년이 되어 이제는 자신의 두 팔에 다 빠져버리자, 그는 모든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그저 차려, 열중쉬어 자세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기대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렇게 두 팔에 힘이 모두 빠져버린 야곱, 그리하여 이제는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던 야곱에게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 요셉이 살아 있다고, 그것도 애굽의 국무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두 손에 힘이 모두 빠져 그저 열중 쉬어 자세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보자 야곱의 자손이 애굽에서 번성하는 그 풍성한 은혜가 그의 삶 속에 펼쳐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모든 장면을 기억하는 유대인들은 시편 46편을 마무리하며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히스기야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야곱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그러므로 여러분, 위기의 순간을 맞이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성벽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위기의 순간을 맞이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손으로 무기를 들고 적군을 향해 달려가는 것도 아닙니다. 위기의 순간을 맞이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나에게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의 절정, 곧 신앙의 하이라이트는 달려가는 것도 아니요, 힘껏 소리치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그 결정적인 순간, 그저 가만히 있어, 그저 차려 자세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잠잠히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특별히 여러분에게 위기가 찾아오셨습니까? 여러분의 능력을 뛰어넘는 쓰나미와 같은 문제를 만나셨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여러분의 손을 멈추어야 할 때입니다. 그저 가만히 있어, 그저 차려 자세로 하나님을 주목하시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지켜보십시오. 

만군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목마른 자들은 내게로 와서 마시라

히스기야 시대 지하로 연결되어 있는 조그마한 생명의 물줄기를 통해 예루살렘 백성들은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앗수르 제국의 군대 18만 5천 명을 하룻밤에 멸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펼쳐 주셨고, 유대인들은 앗수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잊을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장막절의 마지막 날 특별한 행사를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막절의 마지막 날이 되면 기혼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히스기야 터널을 지나 실로암 연못에 모인 물을 금항아리에 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을 선두로 하여 물이 가득 찬 금항아리를 들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갑니다. 대제사장을 선두로 한 그 대열이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면 악기 소기가 들려오면서 시편을 노래합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렇게 시작된 시편의 찬양이 모두 마치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남성들은 일제히 소리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X3) 이렇게 세 번 큰 소리로 외칠 때 대제사장은 실로암 연못에서 가져온 물 항아리를 성전 제단에 쏟아부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 시대 장막절의 마지막 날 있었던 의식입니다.  

이와 같은 장막절 행사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오래전 히스기야 시대에 임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기억하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매년 동일하게 진행하는 장막절 행사에 참여하는 유대인의 마음에는 또 하나의 생각이 교차하지 않았을까요? 앗수르의 군대는 오래전 물러갔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은 로마라는 새로운 이방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매년 장막절을 보내며 실로암의 물을 성전 제단에 쏟아붓는 행사에 참여하는 유대인의 마음에는 어제의 은혜가 아닌 오늘의 은혜를 향한 갈망. 어제의 구원이 아닌 오늘의 구원을 향한 갈망. 어제의 역사가 아닌 지금도 자신의 눈 앞에 생생하게 펼치지는 오늘의 역사에 대한 갈망. 그것이 유대인의 마음에 가득했겠지요. 

그렇게 또 한 번의 장막절 행사가 그저 습관적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비로소 예루살렘 성전 한 중앙에 일어서십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 7:37-38)

절박한 위기의 순간에 한 줄기 생명의 강줄기를 흘려보내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과거에 체험하였지만 어느덧 그 모든 경험은 아득한 오래 전의 기억이 되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제의 은혜가 아니라 오늘의 은혜이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역사가 잘 보이지 않아 가슴 답답해하는 것이 오늘날 이 땅의 교회가 처한 현실은 아닙니까? 우리는 어제의 구원이 아니라 오늘의 구원을 갈망하며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우리의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지만 오늘 우리에게 흘려보내시는 생명의 강줄기는 쉽게 찾아볼 수가 없기에 다시금 두려움이 엄습하고, 다시금 낙심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믿는다면, 우리가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믿는다면, 우리가 참으로 야곱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신다고 믿는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여러분의 분주한 손을 멈추고 가만히 있어 우리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약속하신 생수의 강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모두에게 반드시 흘러넘칠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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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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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강해2020. 5. 23.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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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의 문을 여는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인생을 비교하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시편 36편 역시 복이 있는 인생과 악인의 인생을 뚜렷이 구별하여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은 인생의 길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악인의 길이요, 또 다른 하나는 의인의 길 – 곧 복 있는 사람의 길입니다. 

먼저 악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1-2절)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악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절 뒷부분을 보십시오. 악인의 특징은 ‘그의 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악인의 길을 걸어가는 그 첫걸음은 구체적인 악의 행동이나 구체적인 악한 언어가 아니라 그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 바로 그것이 악인의 길을 걷는 첫걸음인 것이지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니 자신이 아무리 악한 행동을 할지라도 그것을 드러내어 심판을 할 주체가 사라지는 것이지요. 2절입니다.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행동, 자신의 악한 행위가 마지막까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 그 오만한 마음이 악인의 특징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 누구도 처음부터 커다란 죄악과 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작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인식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마음이 사라질 때,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의 행동과 나의 말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마음이 사라질 때 우리는 악인의 길로 한 발짝 내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시편 36편은 악인의 특징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의인의 모습을 그려주어야 할 차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복있는 사람의 길과 그렇지 못한 악인의 길을 비교하고 있지만, 악인의 특징을 설명한 뒤에 의인의 특징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의인의 모습을 그려주는 대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이야기하지요.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5절) 

말씀드런 것처럼, 오늘 본문은 악인과 비교되는 의인에 대해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묘사하고 있지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앞에서 악인의 특징으로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지 않는 것,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언급했지요. 이제 의인들 – 곧 복이 있는 사람들 – 의 특징은 그 자신의 선한 행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의로운 사람들, 곧 복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에 모신 사람들인 것입니다. 본문 5절이 묘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가득 넘친다는 사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쳐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나의 마음에 모실 때 우리는 비로소 의인의 발걸음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의인의 참된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7절) 

의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얼마나 보배로운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는 사람들입니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9절)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께 있어요. 의인은, 복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의 원천을 찾지 않습니다. 생명의 원천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도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묘사하는 의인, 성경이 인정하는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위가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자신의 삶 속에는 선한 것이 전혀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선행이나 자기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보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생명의 원천을 구하는 사람.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참된 안식을 찾으며, 주님의 빛 가운데서 인생의 참된 길을 찾는 사람. 바로 그들이 성경이 인정하는 복이 있는 의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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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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