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2020. 6. 18.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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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모세가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찾아왔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사명을 정리하기 위해 크게 두 가지 일을 하죠. 그 첫째는 다시 한번 율법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31장에는 모세가 율법의 말씀을 말로 전할 뿐 아니라, 이제는 글로 자신이 전했던 율법의 말씀을 기록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율법책을 후대에 남겨 오고 오는 세대가 그것을 읽고 들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사명을 정리하기 위해 행했던 두번째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가 신명기 32장에 매우 길게 기록되어 있지요. 그 노래는 인간의 죄악을 회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마음이 완악한 백성인지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합니다. 이렇게 모세는 이 세상을 떠나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 가지 유산을 남겼는데 하나는 율법책이요, 또 하나는 노래 곧 찬양입니다. 

우리에게도 신앙의 가장 귀한 유산이 있다면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이지요. 모세가 후대에 율법책을 남겼다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기록되어 있는 신구약 66권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오랜 세월 신앙인들이 함께 불렀던 찬송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찬송가를 함께 부르며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기도 하고,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노래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너희 마음에 두라

성경책, 그리고 찬송가. 이 두 가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값진 유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불리는 C. 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음악에 관한 책들 안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하고 기대한다면, 
우리는 실망하고 말 것이다. 
아름다움은 그 안에 있지 않다."[각주:1] 

음악에 관하여 멋진 문장으로 서술한 책이 있더라도 음악의 아름다움은 그 안에 담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최고의 풍미를 자랑하는 음식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책 안에서도 우리는 그 음식의 맛을 결코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책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성경책 안에 다 담겨있을 수가 없으며, 우리가 손에 들고 다니는 조그마한 찬송가 안에 온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낼 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책을 남기고, 함께 부를 노래를 남겼던 모세는 오늘 본문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46절입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 구절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말씀은 '너희의 마음에 두라'는 권면입니다. 46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그 다음이지요. '너희의 마음에 두어라.' 율법책에 기록되어있는 것,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찬송가에 기록되어 있는 것,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아름다운 음악이 기록된 악보만으로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없고, 악보에 기록된 음악이 음악가의 손에서 연주될 때 음악의 아름다움이 울려 퍼지는 것처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심겨 열매를 맺어야 하고, 찬송가의 가사는 여러분의 마음에서 울려 나와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말씀을 실천하고 기도와 찬양이 흘러나올 때, 성경책 그리고 찬송가라는 신앙의 값진 유산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헛되지 않은 생명의 길 

모세는 후대에 율법책과 하나님을 향한 노래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그저 기록된 채로 책에만 기록되어 있다면, 그것은 살아움직이지 못합니다. 반면, 율법책의 말씀과 모세의 노래가 그들의 마음에 심기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역사하고, 찬양은 인간의 영혼을 새롭게 하지요. 그래서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후 3:6b)

사도 바울의 이 문장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고 결국 사망으로 인도하지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복음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오해입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율법이라고 말하지 않고, 율법 조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의도한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책에 기록되어 있는 낱낱의 글자들만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사람을 죽음으로 이끕니다. 이것이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율법책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 인간의 심령에 새겨져 성령께서 자라게 하시면 율법의 말씀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여 생명의 길을 걷게 합니다. 이것이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율법은 율법책에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66권에 풍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그 기록된 말씀을 문자로만 남겨 놓는다면 그 결과는 죽음이요, 만일 그 기록된 말씀을 마음에 새겨 실천한다면 그 결과는 생명입니다. 모세도 오늘 본문에서 동일한 말씀을 합니다. 본문 47절입니다.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어떤 이들에게 성경말씀은 현실과 상관없는 헛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성경의 말씀을 그저 문자로, 낱낱의 글자로만 남겨놓는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의 심령에 새겨져 오늘도 우리가 그 말씀 안에서 빛을 따라 걸어간다면 그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의 길이 됩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과 기도와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성의 제자도>, (서울: 조이북스, 2019), 133. 재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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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신명기 강해2020. 6. 11.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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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기록한 율법책 

모세는 지금까지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혹은 "모세가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 전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귀로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동안 말로 전하였던 율법을 모세가 글로 기록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본문 9절입니다. 

"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어쩌면 이 구절은 역사상 처음으로 성경이 기록되는 장면을 묘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모세가 말로 전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글로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글로 기록하는 목적을 분명히 제시합니다. 본문 10-11절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10절에 등장하는 "그들"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을 맞이하면 제사장은 율법책을 낭독해야 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낭독하는 율법의 말씀을 귀로 들어야 합니다. 당시 백성들에게 율법책을 나누어주지 않고 제사장이 낭독해 주었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당시는 인쇄술이 발전하지 못하였기에 백성의 수요만큼 책을 출판하기 어려웠겠죠. 또한 책으로 출판하더라도 백성들 중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터이니, 제사장들은 정기적으로 백성에게 율법책을 낭독해주어야 했습니다. 한편으로 제사장들은 율법책을 부지런히 읽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 백성들은 제사장들이 낭독하는 율법책의 내용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세상을 떠나지만, 그가 전했던 율법의 말씀은 글로 기록되어 변하지 않는 신앙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은 구전으로 전해지기보다는 글로, 책으로 전해지게 됩니다. 

신약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자신의 귀로 듣고 자신의 눈으로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여전히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보거나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행동과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된 신약성경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세가 기록한 율법책이 신앙생활의 표준이라면, 신약 시대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신구약 성경이 신앙생활의 유일한 표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바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성경을 가까이 하십시오. 다른 사람의 신앙 경험을 참고할 수는 있겠지요. 기도하는 가운데 신비한 체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여러 모임과 활동도 때로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고는 결코 여러분의 신앙이 진보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율법의 목적 - 하나님 경외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글로 기록하였습니다. 모세는 세상을 떠나지만 그가 전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앙의 표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책을 부지런히 읽고 경청하면 그들의 마음에 한가지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변화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입니다.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입니다.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배우면, 결과적으로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게 됩니다. 13절도 보십시오. 율법책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됩니다. 곧, 율법책을 부지런히 읽고 배우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은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 사랑을 실천하기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롭고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조금씩 변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 수록 지금도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전적으로 우리 하나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지금도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요란한 소식이 제 아무리 들려와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는 목적이요, 유익입니다. 


이스라엘의 성공과 실패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모세가 기록한 율법책을 외면했습니다. 여호수아의 시대를 거쳐, 사사 시대, 사울 왕의 시대, 다윗으로부터 시작되는 남북 왕조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결국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남 유다를 요시야 왕이 다스리던 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세의 율법책을 찾아냅니다. 그러니 요시야 시대에 율법책을 발견하기까지 그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책을 외면하였고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율법책을 통해 하나님 경외하는 삶을 배우지 못하니, 우상 숭배의 죄악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구약성경을 계속 읽어보면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초막절에 율법책을 모든 백성에게 낭독하라는 말씀이 현실이 되는 장면도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결국 모두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지 70년의 세월이 흐른 뒤 하나님은 유대민족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죠. 그렇게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던 유대 백성에게 제사장 에스라가 등장합니다. 때는 유대인의 달력으로 일곱째 달, 곧 나팔절과 초막절이 있는 달입니다. 에스라는 수문 앞 광장에 모든 백성을 모읍니다. 그리고 나무로 만든 강단에 서서 그들의 귀에 모세의 율법을 낭독하기 시작합니다. 에스라의 율법책 낭독이 계속되었고 모든 백성들은 귀를 기울여 에스라가 낭독하는 율법책의 내용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마침내 모든 백성이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며 통독합니다. 이렇게 율법책을 읽고 들으며 일주일 동안의 모든 절기를 마친 뒤, 유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그들에게 남아 있었던 모든 우상 숭배의 습성을 말끔히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에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경을 가까이 하십시오. 
성경을 통해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에 함께 하셔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께서 예배하신 생명의 길을 걸아가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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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신명기 강해2020. 6. 7.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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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맺는 장면이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언약'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언약은 그 장소가 세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후 학자들은 '세겜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언약의 내용 _ 이스라엘의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세겜 언약의 내용이 13절에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세겜 언약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 가운데 하나인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 약속을 맺는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어 보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말씀하시니, 이러한 언약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주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언약은 신약 시대로 넘어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성도들과 맺으시는 언약이 됩니다(cf. 눅 22:20).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인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죄악의 형벌을 벗겨주신 것만으로도 놀라운 은혜인데 하나님은 이제 구속받은 성도들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은 친히 모든 성도들의 하늘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나님의 언약은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내산 언약과 세겜 언약 

세겜 언약의 핵심 내용을 묵상하다보면 구약성경에서 크게 부각되어 있는 또 하나의 언약이 생각납니다. 바로 시내산 언약이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으로 인도하셨지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모여있을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4-6) 

오늘 본문을 기준으로 약 40년 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오늘 본문이 기록하는 세겜 언약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시내산 언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또다시 세겜 언약을 채결하셨던 것일까요? 

언뜻 보면 40년 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고, 그의 자녀들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일면 옳지만 충분한 대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실 때, 그 언약은 단지 시내산에 모여있었던 사람들만 유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cf. 신 5:2-3). 언약의 이러한 특징은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세겜 언약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14절과 15절입니다.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서 있는 자와 
오늘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이니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처음 아브라함과 맺으실 때부터 그의 모든 자손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그러니 시내산 언약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40년이 흘렀다는 이유로 굳이 새롭게 언약을 맺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세겜 언약을 맺으셔야 했을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시내산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이 어겼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아브라함과의 언약, 시내산에서의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시내산에서부터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지요. 시내산 언약이 실패하여, 그 자리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광야에서 죽었기에 하나님은 또다시 세겜 언약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성경이 이야기하는 언약의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 곧 약속을 채결하십니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은혜를 망각한 채 언약을 어기고 맙니다. 시내산 언약만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겜 언약도 구약의 전체 역사에서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의 배신으로 파기되고 맙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더욱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놓여 있으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우상을 섬겼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시기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언약에 담긴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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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신명기 강해2020. 6. 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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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복과 화를 선포합니다. 지금까지 모세가 가르친 율법의 말씀을 듣고 지키면 복을 받게 되고, 율법의 말씀을 무시하면 화를 당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선언하는 복은 받아도 그만, 받지 않아도 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복화 화는 이스라엘의 생사가 달린 문제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30장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모세는 복과 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는 생명과 죽음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재물이 조금 부족해도 마음에 만족을 누린다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면 우리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조건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복되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복은 조금 부족해도 문제없는 그러한 복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베풀어주시는 하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먼저 말씀합니다. 본문 1절과 2절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누가 복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성경은 언제나 동일한 말씀을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편의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산상보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그의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아서 인생의 비바람이 불어와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반석 위에 서게 됩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물론, 시냇가에 심은 나무도 겨울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모든 계절에 열매를 맺는다고 말하지 않고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도 인생의 비바람은 찾아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바는 비바람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초를 견고히 놓았기에 비바람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겨울이 찾아오고 인생의 비바람이 찾아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축복이 끊이지 않기에 그 모든 과정을 이겨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복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 

가나안의 백성은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바알 종교는 사람들에게 풍요를 약속하였고, 사람들은 바알이 비를 주관하여 농작물이 풍성하게 자라도록 한다고 믿었습니다. 가나안의 종교는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알 종교의 가르침은 거짓이었기에,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풍요의 길을 여러 가지로 제시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물론, 믿음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 경우도 많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포기해야 할 것들도 많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으니, 인간에게 복을 주고 화를 내리는 분은 온 세상의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에게 복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축복의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복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먼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됩니다. 본문 2절에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의 원문을 직역하면 '이 모든 복들이 너를 향해 와서 너를 따라잡을 것이다’가 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의역하면 ‘복들이 너를 쫓아다닐 것이다’ 정도가 됩니다. [각주:1] 복만을 쫓아다니면 복이 우리에게 피하여 도망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가면 우리의 뒤에 복이 뒤따라옵니다. 그래서인지 시편 2절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그 말씀 한 구절이라도 실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비록 이 세상을 살아가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힘겹게 여겨질 지라도 그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여러분의 삶을 졸졸 따라다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김희석, “진정한 복의 길(신명기 28장 1-14절)” <그말씀>, 2016년 11월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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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신명기 강해2020. 5. 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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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하나님 백성의 경제생활에 대한 내용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곧 경제적 인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인간을 경제적 인간, 혹은 호모 이코노미쿠스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자신의 경제적 유익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특성을 지적하는 것이지요. 인간이란 누구나 자신의 재산이나 소유가 늘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궁핍하고 가난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러한 경제적 인간의 모습과는 전혀 맞지 않는 명령입니다. 


면제년 규례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사람이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면, 한 사람은 채무자가 되고 또 다른 사람은 채권자가 됩니다. 이러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는 너무도 명백한 것이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회는 채권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채무자에게 자신의 의무를 다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7년에 한 번씩 면제년을 맞이하면서 모든 채무관계를 없었던 일로, 무효로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면제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규정이 본문 2절에 등장합니다.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7년에 한 번씩 하나님께서 친히 면제년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면 채무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금액을 빚졌는지 상관없이 모든 채무를 면제해주라는 하나님의 강령한 명령이지요. 

 

만일 이와 같은 법이 강력하게 시행된다면, 경제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있는 여윳돈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싶을까요? 아니면 빌려주기 싫을까요? 당연히 이러한 법이 정해져 있는 나라나 도시에서는 돈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지 않으려고 하겠지요. 은행에서 이자를 높이 쳐주어야 예금이라도 하고 싶은 것인데, 이자는커녕 원금도 다 탕감해주어야 한다면 누가 돈을 빌려주겠습니까?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계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또 하나의 규정을 말씀하십니다. 본문 7절과 8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한편에서는 7년마다 면제년을 실행하라 말씀하시고, 다른 한편에서는 넉넉하게 빌려주라고 명령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 두 가지가 함께 실행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여윳돈이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넉넉히 빌려주도록 하려면, 그들에게 높은 이자라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반대로, 돈을 빌려주더라도 면제년이 되면 모든 채무 관계를 청산하도록 명령하면 당연히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일이 줄어들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으로는, 특별히 오늘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항목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여 분명히 명령하십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 인간의 본성에도 맞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어떠한 의도인지는 너무도 분명하게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 주변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 우리의 손을 벌려 도움을 주라는 말씀이지요. 나에게 손해가 미칠 것을 뻔히 다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향해 움켜쥔 나의 손을 펼치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권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정당한 시대를 살아가더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의 뿌리깊은 이기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필요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경제적 인간의 모습을 넘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나누며 베푸는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경고와 약속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궁핍한 이웃의 필요를 외면하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우리의 마음 깊이 자리잡고 있는 이기적인 욕망은 이와 같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크게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시대를 역행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대답을 찾는다면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본문 9절을 보십시오.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참 무서운 말씀이지요. 우리 주변에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아 그들이 괴로운 가운데 하나님께 호소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주시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의 호소를 들으신 하나님은 바로 우리에게 죄를 정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자비를 베풀기를 거부했던 사람들이 오늘 밤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면 그것이 고스란히 우리의 죄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 경고의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이기적인 본성을 물리치고 나의 손을 펼쳐 궁핍한 이웃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곁의 이웃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할 수 있는 비결, 그 두 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죠. 본문 10절입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약속도 주십니다. 아끼는 마음, 인색한 마음에서 벗어나 이웃을 위해 우리의 손을 펼쳐 나누고 베푼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친히 복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경고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종합해 보면 우리가 궁핍한 이웃에게 나의 소유를 나누는 것은 단지 나와 그 이웃과의 관계, 곧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궁핍한 이웃에게 나의 손을 펴 나누는 일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을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마 25:4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여러분은 지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경외의 마음,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의 마음을 
여러분 곁에 있는 이웃을 통해 표현하십시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요,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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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신명기 강해2020. 5. 3.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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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사람들 - 이적과 기사

오늘 본문에는 우상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먼저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선지자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이적과 기사, 곧 기적을 일으킵니다. 꿈 꾸는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2절을 주목해보십시오.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참으로 신비한 능력이지요. 선지자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이적을 행하는데 실제로 신비한 일이 일어납니다. 꿈을 꾸는 사람이 나타나서 꿈 이야기를 하는데 시간이 흘러 그의 이야기가 현실이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지요. 그들의 능력은 신기합니다. 그들의 능력은 놀랍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그들의 숨은 의도에 있습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여러분,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사람도 이적이나 기사, 곧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도 꿈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행한다고, 기도하여 병자를 치유한다고, 기도하여 주었더니 사업이 성공하게 되었다고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신실한 믿음의 일꾼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꿈을 꾸면서 미래의 일을 이야기하더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신실한 믿음의 일꾼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어떠한 기적도, 그 어떠한 체험도 하나님을 내 인생 최고의 주인으로 모시며 섬기라는 명령보다 앞 설수는 없습니다.

유혹하는 사람들 - 가족과 친구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믿음의 길에서 유혹하려는 사람들, 그 두 부류는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애정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우상숭배로 이끄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십시오.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먼저 네 어머니의 아들, 곧 형제가 등장합니다. 어린시절 함께 자랐던 형제와 자매의 그 끈끈한 애정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런데 본문 6절에는 그 보다 더욱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대상이 계속 등장합니다.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그 다음은 누구입니까?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이 정도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깊은 애정을 나누는 사람들이 모두 나왔죠. 그런데 본문 6절은 여기에 한 사람을 덧붙입니다. 곧 친구입니다. 그런데 그냥 친구가 아니고,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입니다. 그러니 본문 6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 사람들, 심지어 나의 생명까지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의 믿음을 유혹합니다. 본문 7절입니다.

곧 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끝에서 저 끝까지에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나와 가장 가까운 형제와 자매가 우리의 신앙을 유혹한다면, 자녀나 배우자가 우리의 믿음을 뒤 흔든다면 우리의 신앙은 매우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생명까지도 함께 나누는 친구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자고 제안한다면, 우리 인간은 크게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본문 8절입니다.

너는 그를 따르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여기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때로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며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으로부터 떠나도록 충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비록 우리의 가족, 우리의 형제, 우리의 친구가 반대할지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장 귀한 가치입니다.


경외하고 사랑하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언제나 유혹이 따라옵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만이 아니라,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해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들의 믿음을 유혹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능력을 행하는 선지자나 꿈을 꾸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때로는 형제와 가족과 친구가 믿음을 뒤흔들지요. 그렇기에 신앙인의 삶은 멈추지 않는 유혹과 싸워 이기는 영적 전쟁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이러한 유혹과 시험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 크게 두 가지로 등장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비결, 그 첫번째는 경외입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4절)

우리 앞에는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고 유혹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나의 눈 앞에 이적을 행하거나, 나의 눈 앞에서 꿈을 꾸거나, 나의 눈 앞에서 깊은 애정을 이용하여 믿음을 뒤흔드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앞에는 눈에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삼위일체 하나님도 계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의 눈을 열어 지금도 여러분 앞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는다면 인간이 행하는 조그마한 기적과 능력이 제 아무리 우리의 마음을 유혹할지라도 여러분의 믿음은 든든한 바석 위에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뒤흔드는 유혹을 이겨내는 비결, 그 두번째는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로, 나와 생명을 나누는 친구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그런데 본문 3절은 그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우리의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입니다. 곧,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7-38절)

우리는 부모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그 누구보다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이 생명 다하기까지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다하고
여러분의 뜻을 다하고
여러분의 힘을 다하여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나아가,
여러분의 이웃 사랑하기를
여러분 자신과 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이 허다한 허물을 덮는 것이요,
사랑이 우리의 믿음을 수많은 시련과 유혹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이요
사랑만이 우리의 신앙을 온전하게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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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신명기 강해2020. 4. 19.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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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느 목사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더 많은 유혹을 받았고, 더 많은 시험에 넘어졌다는 의미라고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경험한 후 약 4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스라엘은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였지만, 출애굽 이후부터 지금까지 지난 40년의 역사는 실패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실패의 역사 

출애굽 이후 40년이 지난 지금, 모세는 신명기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합니다. 그런데 신명기의 처음, 곧 1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난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며 고생을 해야 했던 이유를 알려줍니다. 곧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사건입니다. 출애굽 이후 약 1년여의 시간이 흘렀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가데스 바네아라는 지역에 도착했지요. 모세는 각 지파에서 한 명씩을 뽑아,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보냈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자 정탐꾼들이 돌아왔고 그들 대부분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탐꾼들의 보고는 백성들의 마음에 절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불과 1년 전,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40년 동안 보류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신명기의 말씀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큰 범죄를 저질렀던 또 하나의 사건을 회고합니다. 시내산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셨던 사건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신 이유가 있으셨지요.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그들을 위해 두 가지 선물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첫 번째 선물은 하나님과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약속, 곧 언약을 채결하려는 계획이셨지요. 그리고 두 번째 선물은 성막이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더욱 깊이 만나며 교제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내산 정상에서 모세에게 성막의 설계도를 전해주시는 바로 그때, 시내산 아래에서 백성들은 금으로 송아지의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며 거기에 제사하였습니다. 

광야에서의 40년 세월이 이제 마쳐갑니다. 바로 그때, 모세는 신명기의 말씀을 전하며 지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악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여, 결국 하나님을 배반했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성막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준비하고 계시는 바로 그때, 금으로 송아지의 우상을 만들어 그것에 제사하는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요. 구약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미 출애굽을 경험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분명 출애굽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언제나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다고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있을까요? 출애굽을 경험하였지만,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한 채, 유혹과 시험에 걸려 넘어졌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오늘 우리의 이야기는 아닐까요? 


다시 작성하는 두 돌판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 첫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과의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내가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1-5절) 

여러분, 똑 같은 문서를 두 번 작성하는 것이 얼마나 번거로운 지 아십니까?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동일한 글씨를 두 번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미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이 적힌 돌 판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금으로 송아지 모양의 우상을 만들어 그것에 제사하자, 모세가 돌 판을 깨트렸습니다. 돌판이 깨어진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 파기되었다는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언약을 어기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언약을 어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시내산의 언약을 파기하셔도,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이라 항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돌판을 만들어서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 돌판에 십계명을 ‘다시’ 적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돌 판을 다시 가져오라고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지난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지 못하셨나요? 괜찮아요. 우리의 마음 판을 그대로 하나님께 가져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판에 언약의 말씀을 다시 적어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저는 우리가 이렇게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깨어진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시옵소서. 
이미 깨어진 마음이지만,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오니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새겨 주시옵소서. 

저는 동일한 기도의 제목으로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가정이 깨어지고, 
우리 교회의 성도들 마음이 깨어졌다면, 
그 깨어진 마음을 주님의 손에 올려 드리오니, 
주님께서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회복의 일꾼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는 두 번째 메시지는 깨어진 언약이 회복되기 위해 쓰임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8절)

레위 지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의 설계를 말씀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 아래에서 금 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에 제사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이 파기될 위기에 놓였지요. 바로 그때, 모세가 온 백성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그러자 레위 지파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 사람들은 모세의 말에 따라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에 제사한 자기 민족 약 3,000명을 죽입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트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레위 지파 사람들이 앞장을 선 뒤에, 이제는 모세가 나섭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 10장 10절과 11절 말씀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서 백성보다 먼저 길을 떠나라 내가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에 그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하셨느니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으로 송아지 모양의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이 위기의 상황에서 다시 시내산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40일 동안 밤낮으로 자기 민족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은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겼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의 언약을 파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레위 지파가 하나님께 헌신했다는 것이요, 둘째는, 모세가 간절히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시간 우리가 레위 지파가 되기를 바라고, 우리가 모세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게 하시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을 돌아볼 때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의 가장이 되십니다. 우리 가정을 주님의 가정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을 돌아볼 때 우리 가정 가운데 하나님을 가장으로 모시지 않은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간 동안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한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이 시간 함께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삶이든, 우리의 가정이든, 혹은 우리의 교회이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은 언약의 관계를 다시금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 밤낮 쉬지 않고 기도하는 모세를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모세의 자리, 레위 지파의 자리에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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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신명기 강해2020. 4. 18.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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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하나의 선포로 시작합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6절)

성민이란 문자 그대로 거룩한 백성, 곧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거룩한 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자기 기업의 백성”이라는 말을 성경의 다른 번역에는 “하나님께서 보배로 삼으신 백성”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살려서 제가 다시 한번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지상만민 중에서 선택하신 보배로운 민족입니다.” 

신명기 7장 6절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보배로운 민족이라고 선언했다면, 저는 감히 신명기 7장 6절의 말씀에 힘입어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보배로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신명기 7장 6절의 말씀을 통해서 서로를 축복할까요?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당신은 보배로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수효가 적은 민족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나님의 보배로운 민족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보배로운 민족으로 선택을 받은 이유를 설명합니다. 신명기 7장 7절의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자, 모세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보배로운 민족으로 선택하여 주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숫자가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민족의 숫자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인구의 숫자는 국가의 힘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의 강대국들 – 미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중국 – 모두 인구 강국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모세가 신명기의 말씀을 선포하였을 당시 인구 숫자는 지금 우리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민족의 국력과 직결되었습니다. 

당시의 국가간 전쟁은 숫자에 좌우되었습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이 전쟁무기가 발전하기 이전입니다. 그러므로 싸움에 나갈 수 있는 많은 군인들을 확보하고 그 군인들을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느냐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당시의 산업은 주로 농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이 농업 기술이 발달했던 것도, 혹은 농사 기계들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모든 농사일을 사람의 손으로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동원할 수 있는 노동력, 곧 사람의 숫자는 곧 국력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이 민족과 민족 사이에 힘을 겨루는 당시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지금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인구가 다른 민족보다 결코 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큰 민족을 이루면서 세계를 지배하던 민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큰 민족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 숫자가 적은 민족, 그리하여 민족이기는 하지만 다른 큰 민족에 비해 아무래도 힘이 적을 수밖에 없는 민족을 선택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수효가 많은 민족, 그리하여 큰 힘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 무엇인가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수효가 많은 민족, 인구가 많아서 큰 힘을 소유한 민족이 아니라 수효가 적은 민족, 그리하여 다른 민족으로부터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보배로운 민족을 삼아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보배로운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서로를 축복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탁월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실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우리를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나님의 보배로운 자녀라고 선언하여 주십니다. 


거룩하지 못한 민족

하나님은 수효가 적은 민족,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주목할 것이 전혀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백성, 보배로운 나라로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살펴보니,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보배로운 민족이라고 선언하는 이 장면에 대해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수효가 적은 민족, 다시 말해 당시 주변의 민족들이 두려워할 만한, 혹은 부러워할 만한 조건은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민족이 되기 위한 조건이 꼭 인구가 많고, 군사력이 강하고, 경제력이 풍부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을 만큼, 그래서 보배로운 민족이라고 인정받을 만큼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거룩한 백성이었을까요? 

모세가 신명기의 말씀을 전해는 바로 이 시점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하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입니다. 그런데 지난 40년을 돌아볼 때 그들의 모습은 그다지 거룩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거룩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 가운데 두 가지 장면만 언급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지금 신명기 7장의 시점으로부터 약 40년 전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놀라운 은혜로, 다시 말해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심으로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애굽을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백성’이라 선언하시며 그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갈 수는 중요한 제도를 하나 알려주십니다. 바로 성막입니다. 성막은 하나의 장막, 곧 텐트를 연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 성막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장소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막의 구체적인 설계도를 모세에게 알려주시는 그 순간,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금덩어리로 송아지의 모습을 만든 뒤, 그것이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던 자신들을 구해준 하나님이라 선언하며 금송아지 형상의 우상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거룩한 백성의 모습인가요?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셔서 그들을 노예생활에서 해방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물을 가르셔서 뒤쫓아오는 애굽의 군대로부터 피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은 나 몰라라 하며 금덩어리로 송아지를 만들어 그 앞에 제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거룩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막의 제도를 알려주고 계신 바로 그 순간 금 덩어리로 송아지의 모습을 만들고는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과연 거룩입니까? 

또 하나의 장면은 광야 40년의 시간이 거의 지났을 때, 다시 말해 모세가 신명기 7장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기 얼마 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이곳저곳 헤매던 중 싯딤이라는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있었던 사건을 성경 민수기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 시작하니라”(민 25: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자, 그들은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시작했습니다. 나아가 모압 여인들이 우상을 섬길 때 이스라엘 백성도 그 우상 숭배에 동참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큰 진노가 임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루에 이만 사천 명이 염병으로 죽고 맙니다. 여러분, 이것이 거룩입니까?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보배로운 민족이라고 불릴 수 있는 민족의 모습입니까? 실제로 싯딤에서의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세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바로 그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대답해 보십시오. 과연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하기에, 그들의 생활이 정결하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룩한 백성이라고, 보배로운 민족이라고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는 오늘 서로를 향해 신명기 7장 6절의 말씀을 힘입어 서로에게 축복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보배로운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지금 우리의 모습은 거룩합니까? 거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는 욕심과 더러움과 탐욕이 가득하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 하나님을 거역하였던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리고 거룩한 행동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우리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너는 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너는 나의 보배로운 아들이라고, 너는 나의 보배로운 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 때문에

모세는 신명기 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보배로운 민족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이유가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나라 민족보다 인구가 많은 강한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더 거룩한 삶을 살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보배로운 민족이라고 선언하십니까? 

신명기 7장을 다시 보십시오. 신명기 7장 6절부터 제가 다시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한 민족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 
곧 하나님의 보배로운 민족으로 선택하셨으니,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숫자가,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8절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보배로운 민족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한마디로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그들이 어떤 조건을 갖추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주변 민족들이 보기에도 하찮은 존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거룩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의 어떠한 조건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을 사랑하게 하였던 것입니까? 아무런 조건도,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여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랑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보배로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보배로운 딸입니다. 비록 여러분의 지금 모습이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고 매 순간을 살아가지 못할 지라도, 비록 여러분의 지금 모습이 거룩하지 못할지라도, 비록 여러분의 행동이 사랑과 정의보다는 탐심과 불의에 가깝다 하더라도, 그러한 모든 조건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다만 여러분을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사랑받는 보배로운 자녀로 여겨 주십니다. 


그런즉 이제는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보배로운 민족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크신 사랑, 하나님의 그 이유 없는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모세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11절)

11절 말씀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께 그 이유 없는 사랑을 받았으니, 그 크신 사랑으로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를 보배로운 민족으로 여겨주셨으니 이제부터는 마땅히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11b절) 

하나님은 지금도 아무런 조건 없이, 아무런 이유 없이 여러분을 지극히 사랑하여 주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깨달으셨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조금이라도 깨달으셨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 구절이라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체험하셨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우리 가족, 함께 신앙생활하는 교우들, 그리고 우리 곁에서 여러분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나누고 베푸십시오. 이것이 이유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삶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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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신명기 강해2020. 4. 14.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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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지금 약 40년 전의 이야기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음성을 들려주시고,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을 전해 주셨습니다(22절). 온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음성을 들려주시자, 그들은 큰 충격과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본문 24절은 그들이 겪은 인상과 충격을 표현해 주고 있지요.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에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보았나이다

하나님은 친히 음성으로 율법의 핵심이 되는 십계명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듣자, 말씀의 내용을 깊이 묵상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저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것입니다. 본문 25절은 이 사실을 잘 표현해 줍니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죄악으로 가득한 인간이 하나님의 현존을 여과 없이 마주 대한다면, 우리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찾아오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직접 보고 체험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아직,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매 순간 직접 체험한다면 그 앞에서 태연하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체험하고,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별로 신비롭지 못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대면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찾아와 한 가지를 부탁합니다. 본문 27절입니다.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에게 대신 전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듣고 행하겠다"는 다짐도 빼놓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그들의 이야기는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을 사모해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조금 멀리 모시고 그 사이에 모세라는 중재자를 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이러한 그들의 제안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말씀하시죠.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은 옳은 것이요, 하나님의 뜻과 맞았습니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의 제안이 왜, 어떠한 의미에서 옳은 생각이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였을까요? 물론, 모세라는 중재자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드러다 보면 그들의 마음에 일어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29절이 본문의 사건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경외, 곧 성경이 말하는 경외란 하나님을 향한 존경과 두려움의 마음입니다. 최고의 존경을 넘어 두려워하는 마음까지 겸비해야 비로소 경외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사랑 많으신 분이시지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자세는 언제나 "경외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는 비로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cf. 빌 2:1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 영원히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29절). 


'그들'과 '그 자손' 

본문 29절에서 주목해야 할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과 그 자손"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그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 그리하여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이 일어났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자손"은 출애굽을 비롯하여 홍해를 건너는 일과 시내산에서의 모든 일을 직접 겪었던 이들의 자녀들, 혹은 그 자손들을 말하겠지요. 그렇다면 이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신명기 5장의 말씀을 모세로부터 직접 듣고 있는 사람들은 29절에 등장하는 "그들"일까요? 아니면 "그 자손"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니라 "그 자손"입니다. 지금 모세는 약 40년 전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 40년 동안 29절에 등장하는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니 신명기 5장의 말씀을 직접 듣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아니라 "그 자손"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손'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마치, 우리 시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바로 그 장면을 상기시키며 '그 자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본문의 32절이 이것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너희"는 29절에 등장하는 '그들'이 아니라 '그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경외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요, 비록 지금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읽으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세대가 부모님들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기록된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제 아무리 세월이 흐를 지라도 우리에게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는 우리의 체험이나 경험에 좌우되어서는 안 되며, 다만 성경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 세대는 물론이요 다음 세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축복이 유산으로 전해지게 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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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신명기 강해2020. 4. 2.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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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계속해서 우상숭배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결코, 절대로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누누히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오늘 본문에서는 지금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의 자녀들, 그들의 자손들까지도 결코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보십시오.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서 아들도 낳았습니다. 아들이 또 아들을 낳아 손자도 얻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그 땅에  정착하며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모든 것이 낮선 이방인의 땅이라고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덧 그곳에서의 삶이 길어지고 자녀에 이어, 자손이 태어나게 되자 누가 무어라 해도 가나안 땅의 주인은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오랜 시간 그 땅에 거주하고, 아무리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만들어 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일이크는 행동이 됩니다. 그래서 26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속히 망할 것이라" 비록 아들을 낳고, 손자를 낳고 자자손손 그 땅을 살아왔을 지라도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는 순간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경고하십니다. 


경고가 현실이 되다 

그런데 여러분,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경고했어요. 우상숭배는 절대로 안 된다. 너희도 우상을 섬기면 안 되지만, 너희의 자녀들과 너희의 자손들도 결단코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경고에 담겨져 있는 모세의 간절한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모세를 통해 우상숭배에 대해 이토록 무섭게 경고하신 하나님의 심정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모든 우상을 멀리하면서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더라도 하나님만을 섬기는 민족이 되는 것이 모세의 간절한 바램이요, 여호와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는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떠했습니까? 모세의 경고는 오히려 하나의 예언이 되어 이스라엘 역사의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보니 우리 인간의 비극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경고를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아 우리 삶의 현실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딤전 6:10). 이것은 분명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돈을 사랑하여 죄악에 빠져드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가 결국 이 경고의 말씀이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비극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다투거나 투기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갈 5:26). 그러면서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갈 5:15).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투기와 다툼으로 말미암아 함께 멸망하는 길을 걷지 않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고 세상의 헛된 영광을 위하여 서로 다투고 투기하다가 공멸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길을 피하라고 "경고"의 말씀을 주셨건만, 우리는 그 경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아 그 경고의 말씀이 현실이 되어버렸으니 우둔한 우리 인간들의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약속이 현실이 되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경고의 말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경고는 안타깝게도 이후 이스라엘 역사의 현실이 되었으니 바로 북 이스라엘의 10지파는 앗수르 군대에 의해, 남 유다는 바벨론 군대에 의해 모두 흩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천천히 묵상해보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의 말씀과 더불어 그들을 위한 약속의 말씀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고가 이스라엘 역사에 현실이 되었듯, 이제는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도 이스라엘 역사의 현실이 되지요. 오늘 본문 29절입니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이 구절에서 주목할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거기서"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찾게 되는 장소, 그곳은 예루살렘도 아니요, 사마리아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하셨던 것처럼,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만들어 섬겼기에 이스라엘은 멸명하였고 이방민족에 끌려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서, 이방민족 바벨론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기만 한다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찾기만 한다면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었지요. 
하나님의 이 약속은 또 하나의 예언이 되어 이스라엘 역사의 현실이 되었으니, 다니엘이 그러했고,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그러했으며,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그러했고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이방 땅 바사 제국에서 하나님을 찾았 만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예배당에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그 옛날 하나님께서 주셨던 약속의 말씀은 지금도 예언이 되어 우리 모두의 삶 가운데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만나리라 

오늘 본문 마지막 31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이 약속의 말씀이 또 하나의 예언이 되어 오늘 여러분의 삶 가운데 현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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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