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 번역 자료2018. 11. 2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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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y G. Oden, God’s Welcome: Hospitality for a Gospel-Hungry World (Cleveland: The Pilgrim Press, 2008), 24-27를 저자의 허락을 받고 번역하여 게재함. 

 

세명의 남자를 발견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존경심을 가지고, 그들의 종이 되려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자신의 장막에 잠시 머물러 쉬었다 가라고 간청하였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 “고운 가루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그들에게 제공했다(6-7). 아브라함은 이들을 누구로 생각했던 것일까? 왜 이토록 충성스러운 환대를 했던 것일까?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그들을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것 외에는 정확한 내용을 이야기해주고 있지 않다. 물론 독자인 우리는 1절에서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는 말씀을 읽었기에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알았을까? 아브라함은 그들이 그저 지나가는 행인 이상의 어떤 존재라는 것을 어떻게 감지했을까? 이후 히브리서는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한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13:2)

아브라함은 이 사람들을 단지 낯선 사람들 이상이라고 알아보았다. 아브라함은 그 세 사람을 보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도 있었다: 이들은 시장으로 가는 상인들이거나, 구제를 바라는 유랑인이거나, 혹은 쉬운 대상을 찾아다니는 사기꾼이라고.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와 같이 생각하는 대신 그들을 명예로운 손님으로 받아준다.

인식(recognition)이란 바라보는 것(seeing) 이상의 무엇이다. 인식은 드러나는 현상보다 더 깊이, 더 멀리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회상이며, 기억이며, 다시 바라보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들의 이미 드러난 모습을 통해 그들 안에 있는 거룩한 존재를 바라볼 수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가치를 참으로 평가해주시거나 우리를 낯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보아주실 때, 하나님은 우리의 외형적인 모습을 넘어 우리를 바라보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참모습을 알아봐 주시는 것이다. 우리 역시 낯선 사람을 예수님으로 바라볼 때, 우리 역시 그의 외적인 모습을 넘어 바라보게 된다. 복음 환대는 이와 같은 인식으로 특징 지워진다.

예수님은 때때로 외적인 모습을 넘어 바라보셨던 분으로 묘사된다. 예수님이 우물가의 여인과 대화하실 때 예수님은 그녀의 겉모습 이상으로 바라보셨다. 이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하실 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외적인 모습을 넘어 참된 모습을 인식하기를 원하셨다( 16:16, 8:29, 9:20).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이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다른 누군가가 우리를 위대하게 생각해주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최선을 다할 때, 우리의 잠재력을 보아주셨던 선생님이 그러하고, 우리가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어주었던 직장 상사가 그러하며, 우리의 꿈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우리가 바라던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고 비전을 심어주었던 멘토들이 그러하다.

우리의 가장 깊은 곳, 가장 진실된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인식은 언제나 표면적인 외형 아래에 감추어져 있다. 조급한 마음으로 마트의 계산대에서 줄을 서고 있는 엄마가 자녀와 다투고 있을 때, 계산원은 그녀가 사랑 많으며 헌신적인 엄마라고 이야기해 준다면 그 엄마는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이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이 그를 능력 많고 고용할만 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면 그는 그만큼 평가를 받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참 모습이 드러나지 않고 낙인 찍히거나 그와 같이 치부당할 때의 고통을 잘 알고 있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토록 강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가장 진정한 인식이며 가장 깊이 있는 환영이다. 우리가 사람을 어떠한 기준 젊은 흑인, 문신한 십대, 사커맘(soccer mom), 나이든 백인 등 으로 구분한다면, 우리에게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다는 분명한 진리를 놓치게 된다.

이와 같은 인식이 우리로 환영 받는다고 느끼게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제자도로서 타자성’(otherliness)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섬기는 하나의 방식을 뜻한다. 물론, 환대와 관련하여 이와 같이 깊이 바라보는 것은 오랜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바라보는 것은 금방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 그들을 점점 알아가며 그들의 의복이나 고용 형태, 언어, 행동 양식, 필요 등을 넘어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의 간증이나,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바라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기에 앞서 함께 봉사하거나 함께 기도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수정해야 할 때도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을 환영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행위다. 그러한 인식은 하나님이 이미 현존하시며 각 사람은 사회적 구분으로 한계 지을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선포한다. 인식이란 드러난 현상을 넘어 참된 실재를 바라보는데 이것이 환영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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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영문 번역 자료2018. 11. 1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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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y G. Oden, God’s Welcome: Hospitality for a Gospel-Hungry World (Cleveland: The Pilgrim Press, 2008), 22-24를 저자의 허락을 받고 번역하여 게재함. 

 

복음 환대는 일상의 삶이 아니라 새로운 삶 곧 변화와 변경 으로 특징 지워진다. 낯선 사람을 환영하는 일은 불가피하게 우리의 삶에 새로운 도전이 된다. 성경은 이러한 새로운 삶을 회개’(repentance)라는 용어로 묘사하는데, 여기서 회개란 오늘날 후회하는 감정의 상태를 표현하는 안좋은 감정이나 유감의 뜻이 아니다.

회개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보다 활동적이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 혹은 선회, 곧 문자적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와 같은 방향 전환을 경험하였다. 그들은 아직도 찾아오지 않은 약속의 자녀를 기다리며 수십년 간 절망 중에 있었다. 사실, 소망했던 아이를 포기하면서 사라는 여종 하갈이 자신을 대신하여 아이를 가지도록 허락했다( 16:1 ff). 창세기 18장에서 낯선 이들이 가져온 소식은 사라와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길, 곧 희망의 길로 들어설 것을 요구한다. 물론, 사라가 웃었던 것을 보면 그들은 처음에 그와 같은 길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에서 기대로 방향을 바꾸며 전환, 곧 위대한 열매를 맺는 회개를 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은 이방인을 만난 후 그 자신이 방향을 바꾸고 변화되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만나 그저 사교적인 언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표면적 환영은 잊어라. 그러한 표면적 환영으로는 그 누구도 변화되지 않으며, 사실 다른 사람의 응답조차 기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그와 같은 환영을 생각해보라. 다른 사람을 환영하였던 당신의 경험을 돌아보라. 다른 사람을 만나 당신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회개가 의미하는 바이다. 우리는 한걸음씩 낯선 세상의 경계선에 접근하기도 하고 가로지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예비하신 삶으로 받아주시며 나아가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납할 때, 우리는 주인의 자리에 있든 손님의 자리에 있든 상관 없이 새로운 무언가와 마주치게 된다. 이와 같은 방향전환을 경험할 때 우리는 복음 환대의 도상 위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라는 이름의 대학 교수는 외국인 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그는 파키스탄 출신의 아흐메드의 미국인 친구가 되어주었고 그를 여러 가족 모임에 아흐메드를 초대하여 미국문화에 친숙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다양한 의상을 입은 어린이들이 돈의 집을 찾아와 과자 안주면 장난칠 거에요라고 이야기할 때 아흐메드에게 할로윈 문화를 설명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1년 동안 돈은 자신이 기독교 환대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방인을 환영하는 주인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911 사건이 있은 다음해, 아흐메드는 유학을 계속하기 위해 허가된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야 했다. 젊은 파키스탄 남성으로서 아흐메드는 어디를 가든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이름이 허가된 명단에 올라가기 전에는 가족을 방문하거나 여행을 할 수 없었다. 이 과정은 수개월의 시간이 필요했고 아흐메드는 돈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곤 했다. 돈은 아흐메드와 동행하며 정부 기관으로부터 응답을 받기 위해 이곳 저곳을 반복해서 돌아다녔다. 아흐메드와 함께 했던 돈의 경험은 미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었다. 돈은 이제 동일한 뉴스도 예전과 다르게 시청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아흐메드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서 세계관이 확장되었다. 이처럼 복음 환대는 우리의 관점을 확대하며 우리의 삶에 방향전환을 경험하게 한다. 만일 우리의 삶이 변화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마도 복음 환대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다.

타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바라보았던 방식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방식으로 변화될 것을 촉구한다. 만일 타인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예전의 관점으로 쉽게 돌아올 수 없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그 동안 자신의 관점만을 고수하였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 결국 회개로 나아간다. 그동안 익숙했던 생각들이 새로운 관점으로 뒤흔들리며, 더 이상 예전의 방식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은 과거의 시선보다 훨씬 큰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환영할 때 우리에게는 무엇인가 사건이 일어난다. 우리가 제공하는 환영으로 우리 자신은 변화된다. 바로 이와 같은 확대와 재구성이 신약성경이 메타노이아’ – 전환, 일반적으로 회개로 번역되는 단어 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전환과 회개는 개인의 내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외면에서도 나타난다. 공동체의 환영하는 마음이 더해질수록 그들 역시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회개라는 특징은 우리가 복음 환대의 과정에 있음을 확신케 한다.

 

Q. 새가족 사역자로서, 기존 신자의 관점이 아닌 새가족의 관점으로 나 자신이나 교회 혹은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던 경험이 있습니까? 그러한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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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영문 번역 자료2018. 11. 1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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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y G. Oden, God’s Welcome: Hospitality for a Gospel-Hungry World (Cleveland: The Pilgrim Press, 2008), 19-22를 저자의 허락을 받고 번역하여 게재함. 

 

환대라는 개념이 최근에는 감성주의로 치우치면서 편안함, 따뜻함, 뽀송뽀송함과 같은 느낌과 연관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환대의 실재에 대해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데 성경이나 초대교회의 전통에서는 분명히 인식되었던 사실, 곧 환대는 우리의 삶에 지장을 주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견디어야 했던 첫번째 위험은 어쩌면 우리 시대에 가장 뼈아픈 것일 수도 있는 거절이다. 만일 그 나그네들이 거절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브라함이 그들을 초대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이 마므레 상수리나무 아래에 머무르게 되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잠시 머물며 아브라함의 환대를 받도록 초대 실제로는 애걸 하였다는 것뿐이다.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모든 식구들에게 예상되는 두번째 위험은 구체적으로 신체에 가해질 수 있는 위험이다. 세 명의 장정이라면 얼마든지 노쇠한 아브라함과 사라를 힘으로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영하는 일에는 또한 강도와 질병의 위험도 도사린다. 그들은 낯선 여행자를 영접할 때의 결과를 알 수 없었다. 이처럼 위험이 실재했다면 아브라함은 왜 환대에 따르는 위험을 감수했는가? 무엇이 이와 같은 행동을 이끌었는지 성경은 서술하지 않지만, 마므레 상수리나무에서의 사건을 묘사하는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께서 나타나시니라”( 18:1) 하나님의 현존으로부터 환대에 뒤따르는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생겨난다.

외부인을 영접하는 행위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공동체를 위험에 노출시킨다. 최선의 경우, 이방인은 새로운 생각과 행동 양식을 그것이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다 전달하며 우리의 삶에 지장을 준다. 최악의 경우, 이방인은 질병, 불명애, 폭력 등을 발생시키는 위험요소가 된다. 아브라함의 사건이 입증하듯 이방인을 영접하는 것은 위험하며 주인이든 손님이든 동일하게 모든 사람에게 변화를 일으킨다. 그 무엇도 이전과 동일할 수 없으며 우리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

이방인은 새로운 생각의 방식을 전달하기에 우리는 현상태에 머무를 수 없으며 우리 주변을 예전의 모습으로 간직할 수도 없다. 이 모든 것은 개인과 공동체에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유발한다. 환대는 하나님께서 주인과 손님 모두에게 여전히 일하고 계시다는 깊은 확신을 요구한다. 궁극적으로, 환영을 실천하는 분은 하나님이다. 위험은 두렵지만 그것이 환영을 동반한다면 우리는 복음 환대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 오히려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환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시대에 존재하는 환대의 위험은 실제적이며 빠른 속도로 교회 안의 열정을 전복시킬 수 있을 정도이다. 방과후 과정으로 어린이들을 교회에 초대하는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법적 책임에 대한 보험 가입, 건물의 마모와 훼손까지 보장하는 확대된 양육 서비스, 그리고 매주 교회 건물에 아이들이 거주하며 발생하는 혼란스러움 등을 먼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회중을 경제적으로, 때로는 선교적으로 위험에 처하게 한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교회 주변의 이웃들에게 주일 아침 예배에 함께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유인물을 통해 이웃들에게 설문을 조사하고 교회 마당에서 거대한 개시 행사를 진행한다. 교회 주변의 3~4 가정이 관심을 보였지만, 정작 약 20명에 가까운 아이들(4세부터 20세까지)이 부모와 함께 하지 않은 채 주일 예배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우리의 마음은 순수했지만 환대에 따르는 위험은 심각했다.

많은 공동체가 환대에 따르는 위험 요소 때문에 의문을 제기한다. 실효성이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실패의 위험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환영을 실천할 때,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과연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아브라함의 유일한 목표는 낯선 사람들에게 환대를 제공하는 것뿐이었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나그네들이 아브라함의 가족이 되거나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따르거나 그들이 받은 지극한 환대를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성공으로 여기지 않았다. 사실, 아브라함이 그들을 초대한 이유는 마음을 상쾌하게 한 후에 지나가는 것이었다( 18:5). 우리는 환대를 다른 사람의 반응이나 우리가 기대했던 결과를 기준으로 평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창세기 18장은 환대, 위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에 상관 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고 순종하기 위하여 위험을 감수한다. 위험이란 환대의 영적 표시다.

복음 환대의 특징인 위험을 부주의한 자포자기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위험 감수는 감성적이거나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밝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환대에 따르는 위험은 선물과 동시에 요구사항도 함께 전달한다. 환대에 따르는 위험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환영을 의지해야 함을 상기시키며, 우리를 관대하게 하고, 결과가 어떠하든 그것을 수용할 준비가 되게 한다.

 

Q. 새가족 사역자로서 위험 소극적으로는 나의 일상에 방해를 받은 것부터 적극적으로는 나의 삶에 위험이 발생한 것까지 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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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영문 번역 자료2018. 11. 1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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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y G. Oden, God’s Welcome: Hospitality for a Gospel-Hungry World (Cleveland: The Pilgrim Press, 2008), 17-19를 저자의 허락을 받고 번역하여 게재함. 

 

창세기 18장의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 서 있었다. ,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브라함은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누가, 언제 올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는 손님이 찾아왔을 때 그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주목하라. 아브라함은 길에서 왔다갔다한 것이 아니다. 그는 낯선 사람을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길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전한 장막 안에 숨어있지도 않았다. 그는 준비를 마치고 장막 문 밖으로 나가 주변을 살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므레 상수리나무에서의 이 사건을 읽으면서 손님이든 주인이든 우리가 준비 영접을 위한 준비, 다른 사람의 세계에 들어갈 준비,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준비 - 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러한 준비는 기대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윤리적 대담성과도 유사하다. 그것은 확신 환영할 수 있는 기회가 가까이 왔다는 확신, 다른 사람을 환영하는 것이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이끌 것이라는 확신, 그리고 환대에 참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확신 - 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브라함의 준비는 단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다. 준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연습과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마므레에서 낯선 사람을 영접하는 사건 이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마음을 활짝 열어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미지의 장소로 이동한다. 준비하는 자세가 그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 환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준비된 마음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놓는 삶의 시간들로부터 오기 마련이다. 준비된 마음은 하나님 안에 있는 인생 길의 하나이기에, 낯선 사람이 등장했을 때 준비는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복음 환대를 실천하는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행해야 하는 기초작업이 있다.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환영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 더 주의를 기울일 수록, 우리는 복음 환대에 참여할 수 있는 더 많은 준비를 갖추게 된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환영에 더욱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 공동체는 환대를 위한 더욱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며, 새로운 사람이 등장했을 때 우리는 열린 자세를 취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준비가 없다면, 우리의 환대는 모래 위에 쌓은 집과 같아서 실망과 거절의 첫번째 파도에도 휩쓸려 나간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환대는 오히려 악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는데 그것은 선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단지 몇번의 방문 때만 환영하고 더 이상의 환대를 멈추기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다. 나아가 준비되지 않은 환영으로 말미암아 복음 역시 상처를 입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제안하는 준비된 마음이란 우리가 구체적인 결과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시리라는 사실에 대한 신념이다. 그러한 준비는 용기, 감사, 그리고 활짝 열린 마음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환영할 준비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준비된 마음은 예배를 인도하고 싶어하는 청년에게 보이는 예배팀의 열린 자세, 혹은 젊은 아빠가 자신이 코치하는 축구팀에서 활동하는 편부모가정의 아빠와 아들을 교회에 초대하는 모습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전제 하에, 준비된 마음이란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여 새로운 사람을 보지 못하거나 간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준비된 마음은 의도적이면서도 동시에 겸손한 자세를 취한다. 준비된 마음은 교회 문 앞에 서 있는 안내자가 마음으로부터 진실하게 환영하는 모습 속에서 표현된다. 아브라함은 낯선 사람을 거리에서 장막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안내자들은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 주차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준비된 마음은 낯선 사람에게 우리의 필요를 승인하거나 받아들이도록 부담을 지우지 않는다. 준비된 마음은 하나님의 환영이 주인이나 손님 모두에게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준비된 마음은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환영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다.

 

Q. 당신이 환영을 받았던 경험, 혹은 새가족 사역자로 누군가를 환영하였던 경험을 나누어주세요. 특별히,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셨다고 고백하게 되는 경험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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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