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성경공부2023. 4. 4.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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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3장과 14장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있었던 사건을 묘사해 준다. 가데스 바네아는 가나안의 남쪽 경계에 위치한 지역이었다(민 34:4; 수 15:3).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 땅의 경계에 이르렀으니, 앞으로 일어날 사건은 가나안 점령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이스라엘 역사에 큰 분수령으로 기록될 사건이 발생한다. 


열두 명의 정탐꾼 (1-16절)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열두 명의 정탐꾼을 파송한다. 이들은 각 지파의 지휘관으로 각 지파마다 한 사람의 정탐꾼을 선발했다(2절). 정탐꾼의 명단은 민수기의 초반에 등장하는 지휘관 이름(민 1-2장)과 전혀 다르다. 인구조사를 주도했던 민수기 1장과 2장의 지휘관들은 각 지파의 모든 사람을 통솔할 수 있는 연륜 있는 지도자였을 것이다. 반면, 본문이 소개하는 지휘관은 정탐꾼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신체적 능력이 필요했기에 보다 젊은 지도자로 볼 수 있다. 

가나안을 정탐했던 지휘관 가운데 여호수아의 이름에 대해 본문은 특별한 설명을 덧붙인다. 

이는 모세가 땅을 정탐하러 보낸 자들의 이름이라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 불렀더라 (16절)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구원이시다" 혹은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모세는 호세아를 여호수아라고 부르며, 가나안 정복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임을 천명하였다. 참고로, 히브리어 이름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신약성경의 '예수'라는 이름이 나왔다. 


정탐꾼의 사명 (17-20절) 

모세는 열두 명의 정탐꾼들에게 탐지할 땅의 범위를 알려준다. 그들은 남쪽의 네겝을 시작으로 북쪽의 산지까지 둘러보아야 했다(17절). 이후 민수기 34장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업으로 주시는 가나안의 경계가 보다 정확히 드러난다. 고대 애굽의 외교문서인 엘-아마르나 서한(El-Amarna Letters)에는 당시 가나안의 경계가 묘사되어 있는데, 민수기의 기록과 거의 유사하다. 엘-아마르나 서한은 당시의 가나안 역시 애굽의 통치 아래 있었다고 기록한다. 

모세는 정탐꾼들이 확인해야 할 구체적인 사항들을 알려준다. 

  •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18절)
  • 그 땅 거민이 많은지 적은지 (18절)
  •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 (19절)
  • 그들이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 (19절)
  •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20절)
  •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 (20절) 

 

그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는데, 모세는 그들에게 그 땅의 실과도 가져오라고 명령한다(20절). 가나안 땅에 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은 7월 하순으로,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를 출발하고 약 두 달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다(cf. 민 10:11). 

모세는 이처럼 열두 명의 지휘관들에게 구체적인 역할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비록 본문에서 모세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여 백성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야 했다. 최소한 백성들의 믿음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정탐꾼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다. 


 

 

"민수기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민수기의 구조 및 저술 연대, 그리고 율법의 중요성 히브리어 성경에서 민수기의 제목은 이 책의 첫 번째 단어인 "베미드바르"(bemidbar)로, 그 뜻은 "광야에서"이다. "베미드바르"는 각 책의 첫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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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3. 3. 29.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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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력으로 사순절을 보내고 있지요.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부활절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사순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여러분은 십자가에 대한 어떠한 교훈을 얻고 계십니까?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순절을 보내며 깊이 묵상해야 하는 십자가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영국의 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던 중, 십자가의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묘사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곳이다.” 십자가는 어떠한 장소입니까?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의 죄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인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십자가에서 처형한 인류 최악의 범죄가 펼쳐진 현장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야말로 우리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갔던 우리의 죄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십자가를 묵상하는 기간이요, 동시에 나의 죄악을 회개하는 기간입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십자가의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묘사해습니다. 그 첫 번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자, 레슬리 뉴비긴은 계속해서 십자가의 두 번째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그분의 은혜로운 용서의 대상임이 밝혀진 곳이다.” 십자가의 두 번째 의미는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께 용서와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레슬리 뉴비긴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는데, “이 기도에서 제외된 자는 하나도 없다”고 말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우리의 마음은 가장 먼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나의 죄악을 떠올리게 됩니다.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죄악에 얼룩져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로 내모는 나의 죄악을 깨달아 회개하게 되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침내 우리에게 또 다른 확신으로 인도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두 용서하셨다는 확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분명한 확신입니다. 


차별이 없느니라

사도행전 15장은 이른바 예루살렘 공의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진지하게 의논하였다는 이야기인데, 초대 교회에 무엇인가 큰 이슈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 문제가 얼마나 컸는지 사도들과 장로들이 함께 모여서 이 일을 의논할 만큼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이른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다루었던 핵심 의제는 단 한 가지였는데, 그 내용이 사도행전 15장 1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행 15:1) 

유대로부터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율법의 내용을 가르치는 것을 보면, 그들을 율법교사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형제들, 곧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이지요. 여기에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주제가 등장하네요.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태어난 지 팔 일이 지나면 할례를 받았거든요. 그러므로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 교사들이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던 대상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대인에게는 굳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 교사들은 이방인들에게, 태어나서 지금까지 할례를 받지 않았던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이 명령하는 할례를 꼭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 교사들도 예수님을 믿는 초대교회 성도였습니다. 그들이 할례에 대해 가르쳤던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는 초대교회 성도였지요. 그러므로 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복음을 믿는 초대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고 복음의 진리를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담긴 복음의 의미가 무엇이라 말씀드렸지요? 첫째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 곧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만 있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초대교회 성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누구에게 그렇게 가르칩니까?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율법과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치고 있어요. 자신과 같은 유대인에게는 십자가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다른 이방인에게는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지요.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 교사들의 주장에 대해 베드로가 이렇게 반박합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9절)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우리’로 호칭하는 대상이 있고 ‘그들’이라고 지칭하는 대상이 있지요. 베드로가 ‘우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한평생을 살아가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그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 곧 율법에 대해 모르고 그 율법을 준행하지도 않던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믿어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자, 그러면 본문 9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방인의 마음을 믿음으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담대히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이나 우리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지난 수천 년 동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려온 유대인이나 그 오랜 세월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왔던 이방인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그러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어떤 점에서 차이나 차별이 없을까요? 십자가의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말씀드렸잖아요. 

첫째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들이 죄인이지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 없이 살았지요. 그러니 그들이 죄인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어떻습니까? 유대인은 율법을 알고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실천했기에 의인일까요? 과연 구약성경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순종하는 의인들이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주범이었다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죄인이요, 십자가 앞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두 가지로 말씀드렸지요. 그 두번째는 무엇입니까?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지요. 그렇습니다.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다는 점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하나님께 제사와 예배를 드리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이방인들 역시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왔지만 십자가의 은혜로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로,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다는 점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 마지막절인 11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믿노라 (11절) 

여기에서도 우리와 그들이라는 대명사가 등장하네요.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우리는 유대인을 그들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본문 11절은 어떤 뜻이 되지요? ‘그들과 같은 이방인도, 우리와 같은 유대인도 아무런 차이 없이 동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의 믿음이었고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믿음이지요. 


십자가의 가르침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복음의 은혜를 나 자신에게는 너무도 쉽게 적용하지만 그 동일한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데는 너무도 인색한 것은 아닐까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학장이었던 필립 클레이턴이라는 신학자는 미국의 백인 중산층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가 놀랍다고 찬양하면서 자신의 크고 더러운 죄악은 눈과 같이 희어졌다고 믿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 – 예컨대 흑인이나 멕시칸이나 아시아인들 – 도 그들의 모든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눈과 같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은 믿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율법을 가르쳤던 유대 출신의 교사들이 범했던 오류, 미국의 백인 중산층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범하고 있는 이러한 오류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신앙생활하는 우리에게는 없다고 여러분은 자신하실 수 있으신가요?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십자가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가 아무 것도 아님을 보여줍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십자가는 한평생 교회를 출석하며 충성으로 봉사하는 여러분들과 이제 막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한 새신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주변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았던 것과 동일하게 여러분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은 풍성한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고전 8:11b) 

사도 바울이 그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너희만이 아니라 그들도)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형제라 (고전 8:11b)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더욱 깊이, 그리고 더욱 넓게 깨닫는 은혜가 임하기를바랍니다. 지금까지 나를 구원하시고 나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였다면, 이번 사순절에는 내 곁에 있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십자가의 은총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내 곁에 있는 형제와 이웃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존귀하게 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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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3. 26.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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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예언하며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에게도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14-21절)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다른 제자들은 문제에 봉착했다. 어떤 사람이 귀신 들린 아들을 데려왔는데, 제자들은 그 아들을 고칠 수 없었다. 이 장면을 대면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7절) 

예수님의 말씀에서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라는 질문은 시기와 때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과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아직은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도 괜찮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예수님은 승천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떠날 때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20절) 

예수님께서 승천하여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더라도 제자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여전히 부족하니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신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제자들의 근심 (22-23절) 

예수님은 두 번째로 자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22-23절)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처음으로 가르치셨을 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이제 조금 시간이 흘러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들의 마음에 깊은 근심이 찾아왔다. 예수님의 수난은 곧 그들의 수난이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그들도 져야 하는 자신들의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성전세 (24-27절) 

로마제국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반 세겔의 성전세를 요구하였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성전세를 납부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의 성전세는 예루살렘 성전의 유지와 관리를 위해 사용한 것이 아라, 로마 제국이 제우스 신전을 짓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주로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유대인들은 성전세를 거부하였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4절) 

성전세를 거두는 사람은 예수님도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유대인처럼 성전세를 거부하는지 질문한다. 이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아니라고, 성전세를 납부하신다고 대답한다(25절). 베드로의 답변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성전세 납부를 명령하신다(27절). 성전세를 납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몇몇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정치적 구원자에 대한 거부를 표명한다. 어떤 이들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해방하는 것이 메시아의 사역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정치적 독립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영혼의 구원을 완성하셨다. 

 

 

"마태복음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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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3. 26.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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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지만 예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시다. 산 위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변화산 사건 (1-8절)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겪어야 하는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가르치셨다(마 16:21). 고난 받는 메시아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광의 메시아와 크게 달라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 받는 메시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간직하고 계신 메시아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2절)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셨다(3절). 여기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대표한다. 구약 성경이 가리키는 영광의 메시아가 곧 예수님이라는 의미다. 이 정도의 장면만으로도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그분의 정체성이 충분히 드러난다. 그런데 본문은 여기에 한 가지 사건을 덧붙인다.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신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5절) 

예수님은 성부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성부께서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변화산 사건 이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 

변화산에서 내려오던 중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한다. 서기관은 구원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가르쳤다(10절).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고난 예언과 변화산 사건은 하나님의 때가 임박했음을 나타내었다. 그러면 엘리야는 누구며 그는 이미 왔느냐는 질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2절)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성경 해석이 옳다고 말씀하신다(11절). 다만, 그들은 세례 요한을 구약성경이 예언한 엘리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말씀하시며, 그가 세례 요한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신다(13절).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엘리야를 임의로 대우하였다는 점이다. 세례 요한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던 것처럼,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 역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게 된다. 예수님은 영광의 주님이시지만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셔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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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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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3. 2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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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영광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겪어야 하는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가르치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21-23절)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비로소 말씀하기 시작하신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1절)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었지만, 그분이 말씀하시는 고난과 죽음의 길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는 승리하는 분이지 무력하게 죽음을 당하는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2절)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항변하였다. '항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티메인'은 매우 강한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로 '책망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을 책망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떤 경우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확고한 자세다. 


제자들의 십자가 (24-28절)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로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셨다(21절). 이것은 베드로로 대표되는 제자들이 반대하더라도 변경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었다(23절). 예수님은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이신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듯, 그분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 역시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4절)

예수님을 그리스라고 믿는 신앙의 참되 의미는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이요, 둘째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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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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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2023. 3. 19.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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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샌프란시스코는 관광 도시답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Boudin이라는 이름의 빵집이지요. 언듯 보면, 특별할 것 없는 빵집이 그토록 유명한 데에는 그 빵이 맛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곳이 미국의 독특한 역사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848년은 미국 역사에서 서부개척이 본격화된 연도입니다. 바로 그해에 미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켈리포니아 주에서 황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지요. 캘리포니아에서 황금이 발견되었던 1848년 직전까지만 해도 샌프란시스코의 인구는 대략 1,000명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서부에 황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매년 수만 명의 개척자들이 그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해인 1849년 조금 전 말씀드린 Boudin이라는 이름의 빵집이 샌프란시스코 시내 한 중앙에 세워지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금을 찾기 위해 일확천금을 노리고 그 머나먼 서부개척의 길에 합류하였습니다. 그러나 매년 수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서부로 넘어왔지만, 그들 가운데 금광을 발견하고 큰 부자가 된 사람은 정말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토록 원하던 금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지요. 사람들이 금을 찾아 헤매고, 저 멀리 서부 어딘가 있을 법한 보석을 찾아 헤매고 있을 그때, 바로 그들의 옆에서 열심히 맛있는 빵을 구웠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딘가에 있을 금광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그 손에 아무것도 얻지 못했지만, 하루 세 번씩 매일 먹어야 하는 빵을 열심히 구웠던 사람들은 15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하면 한 번쯤 꼭 찾아가는 유명한 명소가 되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황금을 찾아 나섭니다. 아직 내 손에 없어요. 그래서 저 멀리 찾아갑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것은 바로 지금 우리 곁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너무 가까이 있기에 언제부터인지 그 소중함을 잊어버린 우리의 가족이 그러하고, 처음 함께 모여 예배하였을 때는 그토록 기쁘고 즐거웠는데 그것이 일년 이년을 넘어 십 년 혹은 그 이상이 되니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우리의 교회와 함께 신앙생활하는 교우들이 그러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 그 복음 안에 담겨있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이 우리 삶에 가장 귀한 보물이건만, 우리는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가장 귀한 보물은 뒤로한 채 저 어딘가에 있을 신기루와 같은 금광을 찾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날마다 공급하는 따뜻한 빵이 내 곁에서 구워지고 있건만,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황금과 보석을 찾기에 헤매었던 19세기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참된 보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가장 귀한 보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임이요, 또한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복음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들으셨다고요? 이제는 복음 이외에 어떤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원하신다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을 새롭게 만들고 우리의 인생을 풍성한 은혜로 가득하게 만드는 교회와 성도의 참된 보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교훈, 새로운 가르침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잊지 않기 위해,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복음의 말씀을 반복해서 듣고 복음의 말씀을 반복해서 선포해야 합니다. 찬송가 205장은 이렇게 노래하지요.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나의 마음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복하여 귀를 기울일 때,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풍성한 선물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쁜 소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문자 그대로 복된 소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복음은 매우 나쁜 소식으로 시작한다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복음은 먼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이 살인을 저지른다든지 강도짓을 한다든지 그렇게 사람들에게 지탄받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X2)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많은 잘못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죄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세상의 지혜자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세상의 지혜자가 크리스천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지금 커다란 죄의 짐을 지고 있는데, 그 커다란 죄의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그때 크리스천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손에 있는 이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책이 무엇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르는 수많은 죄를 인식조차 못하고 지나가죠.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나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죄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내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조그만 소망이나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기준이나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기준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고백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평가할 때 우리는 나의 양 어깨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죄의 무거운 짐이 지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께 진심 어린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지금까지 그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진심어린 회개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면,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내가 이 정도면 신앙생활도 잘해왔고 사람들에게 특별히 손가락질당할 일도 하지 않았으니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면,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복음의 첫 번째 메시지도 바르게 깨닫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마가복음 2장 17a절)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가복음 2장 17b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건강한 자는 정말로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몸은 아파요. 몸은 큰 질병에 걸렸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의사가 아무리 많아도 쓸데없지요. 아무리 의술이 뛰어난 의사도 그러한 사람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 서면 커다란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나는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대속의 십자가가 그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나 자신의 죄를 깨닫는 은혜가 먼저 임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 지적하는 것 말고,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고 싶은 것들 말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내가 죄인이며,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간절히 필요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곧 하나님의 기준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내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절망하게 되지요.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16a절) 

여러분, 우리에게 복음, 곧 복된 소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었습니까?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신 것으로 나타났어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안에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이 담겨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에서 “주셨다”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매우 특별한 단어입니다. 자,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누가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았을까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직접 못 박은 사람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로마의 어느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모든 책임이 직접 그 행위를 한 로마의 군인들에게만 있을까요? 그 모든 책임과 잘못을 예수님의 손과 발에 직접 못을 박은 군인들에게만 돌리는 것은 적절한 평가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당시 유대지방의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넘겨주었지요. 성경은 이 장면을 묘사할 때 “넘겨주다”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헬라어로 ‘파라디도미’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모든 책임을 빌라도와 그의 명령을 따른 로마의 군인들에게만 묻는 것은 올바른 평가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준 사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미움의 감정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잖아요. 어디 그뿐인가요? 대제사장들을 비롯하여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고 있을 때,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한 사람도 있었지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가룟 유다였습니다. 

이처럼 신약성경이 강조하는 ‘넘겨주다’는 단어를 추적하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유대인들의 강요를 이기지 못하고 로마의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빌라도, 예수님을 향한 시기와 미움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대제사장들과 유대교 지도자들, 예수님을 수년간 따라다녔지만 주님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은 삼십에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었던 가룟 유다가 그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우리가 묵상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예수님을 넘겨준 또 한 분이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장면을 깊이 묵상하였던 어느 신학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누가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주었는가? 
돈을 위하여 유다가 넘겨준 것,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빌라도가 넘겨준 것도 아니다. 
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넘겨준 것도 아니다. 
바로 사랑 때문에 성부께서 넘겨주신 것이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믿음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이 마주할 최종 목적지는 영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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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10 “존 번연”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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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사무엘상 성경공부2023. 3. 14.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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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자신을 향한 사울의 살해 의도를 분명히 확인하였다(삼상 20장). 사울 앞에서는 자신의 생명이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한 다윗은 도망자의 길을 떠난다. 본문은 도망자 다윗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으셨지만(삼상 1611-13), 현실은 정바대로 흘러가는 듯 보인다. 


제사장 아히멜렉의 도움 (1-9절) 

다윗은 제사장의 성읍인 놉을 찾아갔다. 놉은 실로가 파괴된 이후 성소의 기능을 감당하고 있었다. 다윗은 그곳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떡과 칼을 얻는다. 일용할 양식과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무기는 도망자에게 필수품이었다.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 (6절) 

제사장은 매일 성소에 떡을 진설하여 바쳐야 했다. 이 떡은 거룩한 것으로 제사장만 먹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정이 다급한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이 떡을 요구한다. 그만큼 다윗의 처지가 절박했다. 이후 예수님은 본문을 인용하며(마 12:3-4),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강조하신다(마 12:8). 

제사장이 이르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것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그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하더라 (9절)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트릴 때 사용한 무기는 칼이 아니라 물맷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사용한다. 이 칼은 사울을 피해 도망하는 동안 다윗이 그 자신을 보호하는 중요한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 다윗은 이제 한 치 앞을 알지 못하여 언제나 칼을 곁에 두어야 하는 도망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블레셋 망명의 실패 (10-15절)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을 떠나 블레셋의 가드로 망명을 시도한다. 다윗이 블레셋 망명을 시도한 근거는 아마도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외교적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브레셋과 이스라엘은 전쟁이 그치지 않는 적대국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의 미움을 받아 도망자가 된 다윗을 블레셋이 받아주리라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윗의 계산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윗이 거둔 전공을 상기시키며 다윗을 위험한 인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11절). 위험을 감지한 다윗은 기지를 발휘하여 미친 척 연기를 하였고, 불행 중 다행으로 블레셋의 가드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시편 34편의 표제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되어 있다. 다윗은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블레셋에서 참기 어려운 수치를 당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고, 하나님에게 피하는 자의 복을 노래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4:8) 

다윗은 억울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 제사장에게 음식과 무기를 구걸하고, 나아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이방인 앞에서 미친 체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으로 다윗은 억울하게 당하는 거대한 고난도 참고 인내할 수 있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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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3. 3. 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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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인간의 삶을 정직하게 바라본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고해’(苦海)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지요. 문자 그대로, 모든 인생은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탁월한 통찰입니다. 

우리가 마주치는 고통에 대해 사유해보면, 인생의 고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나에게 왜 이러한 아픔이 찾아왔는지 그 이유도 모르겠고, 또 내가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결책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만일 원인도 정확히 알 수 있고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해법도 분명히 알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에게 고통이나 고난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나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이요, 바로 그것이 우리를 괴롭게 만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고통과 고난의 또 다른 특징은 내 안에 깊이 숨겨진 부정적인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평안하고 안락할 때는 나의 부정적인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숨길 수 있습니다. 내 성격이 모가 나고 마음 깊은 곳에 상처가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숨길 수가 있지요. 내가 평안하다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고통이 찾아오고 아픔이 찾아오면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모습을 숨길 수 있는 여유가 없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나에게 찾아온 아픔도 나를 괴롭히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모든 부정적인 모습이 드러나니 그 또한 나를 괴롭히는 이유가 되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레 위에 지은 집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모레 위에 지은 집이나 평안할 때는 차이가 나지 않지요. 그런데 우리의 인생은 반드시 고통의 시기가 찾아오거든요. 비바람이 몰아치고 홍수가 일어날 때, 곧 고통과 고난의 시간이 찾아왔을 때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든든합니다. 그러나 모레 위에 지은 집은 허물어집니다. 이처럼 홍수가 몰려올 때, 곧 고난의 시간이 찾아올 때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이 다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는 고난의 일반적인 특징을 한두 가지 말씀드렸는데요.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한 가지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그것은 고통이나 고난은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고통이나 아픔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찾아왔을 때만 그것이 나의 아픔과 나의 고통이 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아픔과 괴로움을 바라보며 공감해줄 수는 있지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내가 직접 겪는 아픔을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아픔으로 느끼게 됩니다. 성경도 이점을 분명히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인 장면이 욥기입니다. 욥이 큰 고통을 당하였지요.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고 욥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욥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욥 자신의 고통은 어디까지나 욥 자신의 아픔일 뿐 친구들의 아픔은 아니라는 무섭도록 냉정한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영성가로 우리에게도 알려진 헨리 나우웬은 “가장 치유하기 힘든 아픔은 나 자신의 상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는 언제나 치유책을 제시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정작 나에게 아픔이 찾아올 때만 우리는 진정으로 아파하고 괴로워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연합

우리의 경험도, 우리의 사유도, 그리고 동서고금을 박론한 인생의 지혜도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동일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은 지독하리만치 개인적이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이 모든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위대한 선언이 등장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25a절) 

지금까지 누누히 말씀드린 것처럼, 고통이나 고난은 언제나 나의 것이지 다른 사람의 것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고통이 된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픔은 예수님께서 친히 당하신 아픔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아픔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예수님께서 담당하신 고난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범죄 때문에 당하신 대속의 고난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이지요. 분명히 나는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도 내가 아닌데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나를 위한 고난이 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언어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고 인간의 이성이 정확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신비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신비를 설명할 수 없어 단지 이 신비를 표현하는 하나의 단어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전가’입니다. 나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습니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그 죄가 예수님께 옮겨갔습니다. 전가되었지요.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지만 내가 지은 수많은 죄악이 예수님께 전가되었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 고난에 내어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친히 달려 그 모든 죄의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우리의 죽음입니다. 

자,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전가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뒤에 다시 살아나셨지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그 모든 공로와 은혜가 이제는 우리에게로 전가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25절)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와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대한 죄악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죄는 예수님께 전가되었고, 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는 우리에게 전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지만, 우리가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었고 천국의 시민이 되어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요,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범죄 때문에 내어줌이 되었다는 성경의 선언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말씀을 계속 읽다보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이 위대한 신비가 어떻게 가능한지 조금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3) 

여기에 예수님과 우리가 합한다는 말씀이 나오지요. 예수님과 우리는 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 예수님께서 포도나무가 되시고 우리는 그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분명히 다르지만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와 가지는 생사고락을 같이합니다. 바로 이것이 로마서 6장에서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여졌다고 말씀하는 이유입니다. 로마서 6장 3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과 합해진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에도 합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결코 예수님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죽음이요, 곧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죽음이 되는 것이지요.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여졌기 때문입니다. 자, 로마서 6장 3절은 우리와 예수님이 합하였기에 예수님의 고난이 곧 우리의 고난이 된다고 말씀하지요. 바로 이어지는 로마서 6장 4절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4) 

우리는 예수님과 합하였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나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지요.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로 합하였습니다. 마치 포도나무와 그 나무의 가지가 하나로 묶여 있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도 곧 우리의 부활이 되어 우리는 지금도 새로운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고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바라보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묵상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나에게 참으로 의미있는 사건이 될 수 있을까요?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나에게 참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신비를 체험할 때, 마치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우리가 예수님께 온전히 붙들려 있음을 확신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사건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참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에 깊이 들어가기를 원하신다면 예수님과 하나되기를 추구하십시오.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가 되지 말고 예수님께 단단히 붙어있는 가지가 되십시오. 우리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그 주님과 친밀함을 누리는 사순절이 되십시오. 바로 그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나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가 되고, 바로 그때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사건이 됩니다. 


세례와 성만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우리의 죽음이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 되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은혜의 복음이 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듯이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여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가르치는 로마서 6장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과 합하여 하나가 되는 중요한 현장이 어디인지 말씀합니다. 로마서 6장 3절과 4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3)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로 합하는 현장이 어디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세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과 합하여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나를 위한 죽음이요, 나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 됩니다. 그리고 로마서 6장 4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4)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 되어서 지금도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세례는 우리가 예수님과 합하였다는 증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한평생 세례를 한번 받지요.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되는 사건은 한번 일어나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이미 접붙여진 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였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그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현장은 어디일까요? 오늘도 우리가 행하게 되는 성만찬 예식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주님의 살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언약의 피를 받아, 그것을 먹고 마시며 우리는 다시금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성만찬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예수님과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었다는 연합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뱅은 성만찬 예식에 참여할 때마다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되는 이 신비를 체험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연합하는 그 신비를 간절히 원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이 있는 그 놀라운 신비를 체험하게 하여 주실 것이요, 바로 그때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를 얻고 예수님의 부활로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어지는 그 놀라운 은혜가 우리 가운데 가득 넘치게 될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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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3. 2.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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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공생애가 진행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자세도 엇갈리기 시작한다. 첫째로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이다. 둘째로 일반대중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약의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긴다(14절). 마지막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조금씩 깨닫는다. 


시대의 표적 (1-4절) 

예전에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구한 적이 있다(마 12:38). 예수님은 그들에게 충분한 대답을 주셨지만, 그들의 자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1절) 

위의 구절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청한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병자를 치유하고 수많은 사람을 먹이신 일들이 마치 땅에서 일어난 무가치한 표적이라도 되는 듯 비아냥거리는 말투다. 예수님은 하늘이라는 그들의 단어를 그대로 받아 하늘의 징조로 답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2-3절)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 시대의 표적을 알아보는 눈이 없다고 책망하신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적은 너무도 신비하여 하늘에서 일어날 것 같은 기적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시대의 표적이다. 곧, 요나가 물고기 배에 사흘 동안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역사적 사건이다(4절, cf. 마 12:39-40).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5-12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떠난 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6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예수님을 반대하는 그들의 말과 행동을 따르지 말라는 교훈이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7절) 

제자들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나눠주신 떡과 물고기에 있었다. 이처럼 떡의 문제는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그러네 예수님은 다시 한번 정성껏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오병이어)과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칠병이어)을 언급하며, 예수님의 말씀은 떡이 아니라 교훈에 대한 것임을 알려주신다(8-11절). 하나님께서 제자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니 제자들은 거짓 교훈을 버리고 참된 가르침을 따르는데 온 마음을 쏟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12절) 

비록 더디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조금씩 예수님의 교훈을 깨닫게 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3-20절)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 이제 때가 되어,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다 확실한 신앙고백을 요구하신다(15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절)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칭찬하시며 믿음의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18절) 그리고 음부의 권세가 주님의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 약속하신다. 교회의 기초(foundation)는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리스도 되심을 고백하는 믿음이요, 그 믿음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마태복음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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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2. 2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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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두로와 시돈으로 가셨다(21절). 그곳은 이스라엘의 최북단으로 이방인의 땅이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을 만나는데, 이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만남이었다. 예수님이 이방인의 땅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가나안 여자 (21-28절)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소리친다. 그런데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예사롭지 않다.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21절). 그 여자는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의 전통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여자가 큰 소리로 부르짖었지만,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으신다(23절). 일찍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며 이방인이나 사마리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고 말씀하셨다(마 10:5-6). 지금 가나안 여자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자세가 꼭 그와 같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4절) 

예수님의 거절에도 포기하지 않는 여인을 향해 예수님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발언을 하신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6절) 

예수님의 대답에서 자녀는 유대인을, 개는 이방인을 뜻한다.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대교의 문화에 익숙했던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떠한 의미인지, 이방인을 얼마나 크게 모욕하고 있는지 확실히 이해했다. 여기에 가나안 여자의 두 번째 슬픔이 놓여있다. 자신의 딸이 귀신이 들린 첫 번째 슬픔 위에 예수님께 간청했지만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철저히 거절당하는 두 번째 슬픔이 더해진다. 처절한 모욕과 슬픔 속에서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 한 번 더 간구한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7절) 

가나안 여자는 자신에게 자격이 없음을 철저히 인정한다. 다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시기를 요청한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큰 믿음을 소유했다고 칭찬하시는데(28절), 그녀의 믿음은 예수님의 결정을 바꾼다. 이방인이라고, 멸시받는 여성이라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두로와 시돈으로 들어가셨는지도 모른다. 


산 위에서 치유하심 (29-31절)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29절). 동일한 내용이 마태복음 5장 1절에도 등장한다. 그때는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을 전해 주셨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산에 올라가 많은 병자를 고쳐주신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31절)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고쳐주시자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전통에 얽매여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을 때(15:1-20),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갈릴리의 어느 산 위에서 사람들에게 참되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셨다. 

 

 

"마태복음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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