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현장을 묘사해줍니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는 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도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세례 안에 담겨있는 복음을 전합니다(4절).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거듭남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예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갔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친히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 삶을 이끌어가시니 주님과 함께 걷는 걸음이 행복하고 기쁨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례에 담겨있는 복음의 핵심, 곧 거듭남의 은혜입니다.

 

성만찬에도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장).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다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셔서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 모두에게 영생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만찬에 담겨있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역사를 체험하기 원한다면 그 무엇보다도 세례와 성만찬에 닮긴 복음의 진리를 끝까지 믿으십시오. 그 믿음 위에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복음의 역사가 여러분의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고, 드디어 그들의 마음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십니다(6절). 여기에 등장하는 그 열두명의 제자만이 아닙니다. 3차 전도여행기간, 사도 바울은 두란노서원이라는 곳에서 소수의 제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두란노서원에서 사도 바울,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12명의 제자들, 그리고 두란노서원에 함께 모인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재하셨던 성령 하나님께서 두란노서원에도 동일하게 임재합니다. 이로써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입니다(10절).

 

여러분의 삶 속에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 무엇보다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십시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사모하십시오. 우리는 성령께서 언제, 어디에 임하실 지 알 수 없으나 성령께서 임재하기만 하시면 우리의 삶은 분명 달라질 것이요 이 땅은 다시금 복음의 역사로 출렁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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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에는 귀신들린 여종이 있었습니다. 그 여종은 점을 치며 주인에게 수입을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아주었습니다. 비로소 이 여인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주인들은 수입의 근원이 사라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고소하였고, 빌립보 도시의 관리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벗기고 심하게 매질을 하고는 깊은 지하 감옥에 가두어버립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 곳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을 쉬지 않았습니다(35절).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진을 일으키셔서 옥터 전체가 움직이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을 묶어 두었던 모든 기구들이 풀어집니다. 그런데 감옥의 모든 문이 열리고 모든 묶였던 것이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던 어느 누구도 감옥에서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을 보며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엽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였고, 간수와 그의 가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복음의 현장은 바로 깊은 지하 감옥이었던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우리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첫번째 선택지는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선택지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실 장소를 결정하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회퍼는 첫번째 선택지의 경우 그곳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나와 닮은 하나님, 내가 좋아하는 하나님, 곧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만들어낸 우상이라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과 경험을 뛰어넘는 위대하신 참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두번째 선택지를 고르셔야 합니다. 곧, 내가 하나님을 만날 장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실 장소를 선택하실 수 있도록 모든 결정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경로를 수정하였습니다. 결국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시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장소에 있었고 복음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장소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습니다. 고통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바로 그곳에 도착하여 복음의 역사를 경험하자 바울과 실라, 그리고 간수와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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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주제는 생각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온 유대와 사마리아의 경계를 넘어 더 넓은 지역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있었으니 곧 그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른바 고넬료의 환상을 베드로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9) 이 말씀이 소개하는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환상도 보여주시고 보고, 음성도 들려주셨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이방인 고넬료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재차 강권하여 등을 떠밀듯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게 하십니다(12). 이로써 베드로와 초대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주십니다. , 이전에는 유대인만을 위한 사도였다면, 이제는 이방인을 포함한 온 세상을 위한 사도로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주셨던 것입니다.

 

셋째로, 이웃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주십니다. 고넬료를 비롯한 모든 집안 식구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전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며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웃에 대한 생각, 특별히 이방인에 대한 생각이 바뀝니다(18).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이라는 생각. 이방인들도 예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형제와 자매라는 생각. 이방인들도 그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있다는 생각. , 내 곁에 있는 이웃에 대한 초대교회의 생각이 180도 바뀌는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으로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십시오.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자라나야 하며,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세계관도 성경의 관점으로 조금씩 변화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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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의 기도가 금 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간다고 말씀합니다(5:8).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있을 그때, 성도들의 모습은 초라하였고 그들의 형편은 비참했으며 그들의 종교활동은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상이 있었으니, 카타콤이라 불리는 지하 무덤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는 금향로에 담겨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기도만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큰 무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도 보여줍니다(7:9-10). 어떤 성도들은 로마 제국의 극심한 박해로부터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지하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로마 제국의 감시를 피해 지하 무덤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동서남북으로 흩어지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비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들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 찬양 하나 하나는 하나님의 보좌까지 상달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찬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쉬지 않았던 성도들 위에 장막을 치시고 친히 그들을 보호하여 주십니다(7:15). 성도들은 그 장막 안에서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합니다.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합니다.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7:16-17). 그러고보니,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펼쳐 놓으신 이 장막은 성도들에게 이미 허락하신 하나님의 천국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나의 삶에 고난이 많고, 비록 우리 시대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으며,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세상의 찌꺼기처럼 보일지라도, 기도와 찬양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비록 이 세상에서 고난이 많고 슬픔이 많을 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간절한 기도와 진실한 찬양이 흘러나온다면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가정,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공동체가 하나님의 장막이요, 곧 하나님의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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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는 대부분 모방심리가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려는 마음이지요. 인간의 모방심리는 매우 어린시절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첫돌이 되지 않은 아이들도 엄마가 자신을 바라보며 혀를 내밀면 아이도 혀를 내밀고, 엄마가 자신을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면 아이도 머리를 흔드는 것이 모든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 모방심리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모방심리는 어린이나 어른이나 별로 차이가 없어서 드라마 속의 유명 연예인이 특정한 가방을 메고 나오면,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성인들 사이에서도 그와 비슷한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기 마련입니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선택할 때에도 누적관객의 숫자가 백만이다, 천만이다라고 하면 그 영화를 먼저 보게 되고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할 때에도 그 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메뉴가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모방심리입니다.

 

중국의 전자상거래 사이트 가운데 최근 몇 년간 급부상한 기업이 있습니다. ‘핀둬둬라는 기업입니다. 이미 중국의 전자상거래 시장을 선점한 기업이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핀둬둬라는 회사는 여러 가지 신화를 만들어내며 짧은 시간에 거대한 중국의 전자상거래 시장을 잠식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최근 핀둬둬가 이룩한 급성장의 배후에는 이른바 짝퉁이라는 모조품을 묵인하고 판매하였기 때문이라는 분석과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명품을 나도 소유하고 싶은 마음과 그것을 좀더 저렴하게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작용하여 모조품의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고 바로 그 점을 활용하여 핀둬둬와 같은 기업이 호황을 맞이했다는 분석이지요. 그러고 보면 명품을 따라하는 모조품의 생산과 판매, 나아가 모방 범죄나 베르테르 효과라고 불리는 모방 자살 등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모방 심리가 매우 부정적인 형태로 표출된 현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모방심리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한 가지만 더 언급하겠습니다. 최근 신경과학자들은 사람의 뇌에서 거울신경세포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거울신경세포는 다른 사람을 모방하게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뇌 안에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거울신경세포가 자리잡고 있다는 발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다른 사람을 모방하게 만드셨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모든 사람이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키는 상황에서 혼자만 짬뽕을 먹겠다고 주문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에 상충하는 행동입니다. 야구장이나 축구장에서 모든 사람이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하는 현장에서 혼자 일본 대표팀을 응원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을 듯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인 것이지요.

 

 

모방 금지

 

그런데 오른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방을 금지하십니다. 다른 사람, 특별히 다른 민족이 살아가는 방식과 그들의 문화를 따라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본문 3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의 문화와 풍속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3절이 언급하는 두 개의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매우 어려운 나라들입니다. 먼저는 애굽이 등장하지요. 3절은 애굽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이스라엘 백성은 430년이라는 오랜 세월 애굽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풍속이 너무도 익숙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의 문화와 애굽의 풍속을 모두 끊어버리고 벗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어린시절 형성된 습관이나 행동방식을 성인이 되어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온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레위기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은 애굽에서 태어났고, 애굽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자신만 애굽에서 태어나 생활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생활한 역사가 430년이니 그들의 아버지도 애굽에서 태어나 애굽에서 죽었고, 그들의 할아버지도 애굽에서 태어나 애굽에서 죽었습니다. 여러 세대가 내려오도록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태어나 애굽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온 지 일년도 채 되지 않은 백성을 향해 하나님은 분명히 요구하십니다. ‘너희가 거주하였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하나님은 지금까지 익숙하게 살아왔던 애굽의 모든 문화를 벗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앞으로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의 문화도 본받아서는 안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3절 뒷부분입니다.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데려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계획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익숙한 애굽의 문화와 풍속도 모두 벗어버리고, 앞으로 들어가 살게되는 가나안 땅의 문화와 풍속도 따르지 말라고 분명히 명령하십니다.

 

애굽이 당시 거대한 문명을 창조하였던 제국이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시죠? 그렇다면 가나안 땅은 어떨까요? 가나안도 나름대로 풍요로운 문화를 발전시키고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이 애굽만큼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것은 아니지만, 그 문화에 있어서는 당시의 유행을 주도하는 문화였어요. 실제로 광야에서 40년 동안 나그네 생활을 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그들은 가나안의 문화에 넉을 잃고 맙니다. 그만큼 가나안의 문화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력적이 것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번에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결코 우리가 따라갈 삶의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제 아무리 이 세상의 행복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제 아무리 힘과 재물과 명성을 따라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제 아무리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모방심리가 작용하고, 우리의 머리 안에는 거울신경세포가 있어서 우리 마음의 모방심리를 자극하겠지만 그렇다고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의 삶을 따라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외길 인생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의 문화도, 가나안의 풍속도 따르지 말라고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그 대신 그들이 따라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오늘 본문 4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이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문화를 배척하고 모두 벗어버리라고 명령하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은 나름대로의 문화와 풍속을 창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만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레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이 가지고 있던 문화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가나안의 문화는 당시 유행을 주도하는 화려한 문화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나 눈에 보이는 웅장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문화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라고 명령하신다면,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우리는 세상 풍조를 따르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2:2).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2:3). 그때에 우리는 이방인이었고,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언약에 대해서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던 사람이었습니다(2:11-12). 그러나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셨습니다(2:4-5).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 곧 하나님의 아들과 딸 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상관 없이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갈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만큼은 세상의 모든 문화와 풍속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2:1)

 

로마서 12장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2)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가야 하는 외길인생입니다.

 

 

생명의 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의 문화를 따르지 말고, 가나안의 풍속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켜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하나님은 이와 같은 명령에 한 가지 약속을 첨가하십니다. 오늘 본문 5절입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어떻게 됩니까?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세상의 문화와 세상의 풍속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외길 인생만이 우리에게 생명의 길이요 행복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였던 애굽의 문화가 대단해 보이지만, 가나안의 풍속이 대단히 화려보이지만 그것이 우리 인생을 행복으로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문화와 풍속을 뒤로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외길인생을 살아갈 때 비로서 참된 생명의 길과 행복의 길은 우리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약속, 곧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규례를 행하면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살게되라는 약속을 가만히 묵상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광야 40년의 세월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가능하더라고요.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온 후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그 사이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광야에서 생활해야 했던 이유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그들이 행한 범죄, 그들이 저지른 반역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특별히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생활한 것은 그들이 떠나온 애굽의 문화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아가는 삶을 훈련하는 시간이었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애굽의 문화가 너무도 익숙합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살 수 있는 길, 곧 생명과 행복의 외길을 걸어가려면 먼저 430년 동안 익숙해진 애굽에서의 삶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광야만큼 좋은 장소가 또 있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내며 지금까지 익숙하게 살아왔던 애굽의 문화를 비로소 벗어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는 경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지금까지 익숙했던 애굽과의 단절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언약을 채결한 후 이스라엘 백성이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규례를 따르는 삶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가나안의 문화에 익숙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을 하였기에 가나안의 화려한 문화에 물들기 전에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가는 삶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낸 것은 그들로 하여금 애굽의 모든 문화를 벗어버리고 가나안의 풍속에도 물들지 않고, 그 대신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규례를 실천하여 결국 행복과 생명의 길에 들어서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고 계신분이 계십니까? 내 곁의 누군가는 크고 웅장하여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애굽의 길을 걸어가는데, 왜 나는 초라한 광야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가슴 답답해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내 곁의 누군가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가나안의 길을 걸어가는데, 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외로운 광야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마음 아파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걷는 그 외길 인생이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롭더라도, 광야길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풍속과 문화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십시오. 비록 지금 내가 걷는 광야 길이 척박하고 메마를지라도, 그로 말미암아 세상의 풍속과 문화를 벗어버리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외길인생을 걸어갈 수만 있다면 여러분이 지금 걷는 바로 그 길이 행복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Rev. Hanjin 웃음과눈물

삼손이라는 영웅이 활동하던 시대의 한 에피소드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대단한 힘을 사용해서 블레셋 군대를 무찔렀습니다. 나귀의 턱뼈를 무기로 해서 삼손 혼자서 블레셋 군인 천명을 쓰러트렸으니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수시로 침공하여 괴롭혔던 블레셋 군대를 삼손은 혼자 힘으로 천명을 무찌리는 대단한 전공을 세웁니다. 그런데 삼손은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그와 같이 큰 일을 행했지만 그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큰 일을 한 뒤 그는 몸에 피로가 몰려왔고 삼손의 목은 타들어갔습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18절)

삼손은 자신의 손으로 블레셋 군대를 물리치는 큰 일을 행했지만 뒤돌아서디 정작 자신의 몸이 말랐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인 블레셋 군대를 나귀의 턱뼈를 이용한 혼자서 물리친 삼손을 향해 박수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삼손 자신은 피로가 몰려오고 목이마르고 내면의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무기력으로 말미암아 죽을 지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던 한 분이 둔탁한 소리를 듣고 그곳을 가보았더니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던 한 남성이 피를 흘르며 쓰러져 있었습니다. 자신의 집 옥상에서 뛰어 내린 것입니다. 급한 마음에 경비원은 남자의 집에 뛰어 올라갔고 다급하게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채 문을 열고 나온 여자에게 경비원이 물었습니다. "남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조금전에 안방에 들어갔어요." 심지어 가까운 가족에게도 남편은 그저 평안한 마음으로 안방에서 쉬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남자의 마음 깊은 곳에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타는듯한 목마름이 있었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이죠. (정혜신, <당신이 옳다> 가운데 한 대목)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갈증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고, 그에 따른 좋은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돌아보니 내가 행한 성과와는 상관 없이 나의 목이 마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했다고 박수를 보내지만 정작 나의 목은 타들어갑니다. 나의 영혼은 그 어디에서도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나의 내면을 알 수 없기에 부러워하는 눈길로 칭찬하지만 나의 영혼은 그만 탈진하고 말았습니다. 

Burn Out. 영적인 탈진입니다. 

삼손이 역사에 기록되고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기억될만한 큰 일을 행했지만, 정작 그의 깊은 곳에서는 타들어가는 갈증으로 괴로워할 때 하나님은 그의 필요를 아시고 그에게 은혜의 생수를 공급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레히에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19절)

모든 사람이 삼손이 이룬 위대한 역사에 관심을 두고 칭찬을 하지만, 정작 삼손의 깊은 내면의 갈증은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그때 하나님은 삼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에게 시원한 샘물이 터져나오게 하십니다. 사사기 15장 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아무로 알지 못했던 삼손의 깊은 갈증을 하나님께서 해갈하여 주셨습니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수를 마시고 비로서 정신이 회복되고, 마음이 회복되고, 영혼이 회복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셨던 그 샘을 이름하기를 "엔학고레"라고 불렀습니다. 곧, 부르짖는 자의 샘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도 교회에서 여러 가지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지만 실상 여러분의 내면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이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갈증으로 괴로워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직장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맡겨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는 책임감이 있다고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실상 나의 깊은 내면에는 사람들의 그 어떠한 칭찬으로도 체워지지 않는 텅빈 공간이 존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내면의 깊은 갈증을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옛날 삼손의 타들어가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엔학고레, 곧 부르짖는 자의 샘을 허락해주셨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생수의 강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이렇게 선포하셨지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 7:37b-38) 

오늘 하루도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 모두에게 예수님께서 생수의 강을 흘러넘치게 하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의 강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내면의 깊은 갈증이 온전히 해갈되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Posted by Rev. Hanjin 웃음과눈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십자가 형을 언도 받은 장면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을 받는 오늘의 장면에서 매우 중요한 동사가 하나있습니다. 바로 넘겨주다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는데요. 먼저 1절을 보십시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죠?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5절도 보십시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 주니라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군인들에게 넘겨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넘겨주다는 단어를 묵상해보니, 중요한 질문 하나가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물론, 손과 발에 못을 직접 박은 사람은 로마 군인이었어요. 그러나 로마 군인에게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일의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적절하지가 않지요. 왜냐하면, 명령을 받아 수행한 것이고 로마 군인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사람이 있었잖아요. 곧 빌라도 총독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빌라도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어요.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 고백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지요. 그러나 여러분,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 1절이지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산헤드린 공의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당시 최고의 유대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모든 책임을 로마 군인과 빌라도 총독에게만 묻는 것도 적절한 평가는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사람도 있지 않았나요? 대제사장들에게 은을 받고 예수님을 넘겼던 사람, 곧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 입을 맞추어 예수님을 붙잡게했던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넘겨주었으니 그 역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로마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준 사람들은 여럿이 있었어요. 먼저는 가룟 유다요, 또한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이요, 나아가 본디오 필라도 총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준 사람들 가운데 아직도 언급하지 않은 부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누가 등장합니까? 빌라도를 향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 질렀던 수많은 불특정 다수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14절도 보십시오. 빌라도가 다시 말합니다.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그러나 그 무리들은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았고, 이성적으로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소리지릅니다. “더욱 소리 지르되무엇이라고 소리지르지요?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러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로마의 군인이었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른다고 했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가룟 유다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준 사람들은 유대교의 최고 지도자라고 불렸던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들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준 사람들은 당시의 최고 권력을 가지고 유대지역을 다스리던 빌라도 총독이요, 나아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하지 못한 채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소리지르던 무리들입니다. 곧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원자를 십자가로 내몰았던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여기서도 내어준다‘는 동일한 단어가 등장해요.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은 왜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까?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했습니까? 우리는 먼저, 로마 군인을 언급했고, 그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었던 총독 빌리도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 그리고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었던 가룟유다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소리쳤던 수많은 무리들, 그 가운데 우리도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넣은 주체 가운데 아직도 언급하지 않은 대상이 있어요. ‘내어준다‘는 동사를 한번더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주는 장면을 마음에 그려보면, 복음서를 통해 우리가 익숙하게 알아왔던 예수님의 지난 공생애 모습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자신의 계획과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모든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인들에게 붙잡힌 이후부터는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의지가 없으신 것처럼 보여요. 그저 붙잡으면 붙잡히시고, 그저 끌고 가면 끌려 가시고,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면 넘어가셔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로마 군인의 손에 넘겨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죠.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 과연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는지에 대한 중요한 해답이 있습니다.

 

바로 이점을 주목하면서 어느 신학자는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셨는가?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였는가? 라는 질문에 이러한 답을 내어 놓았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주었는가?

돈을 위하여 유다가 넘겨 준 것이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빌라도가 넘겨준 것이 아니다.

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넘겨준 것도 아니다.

바로 사랑 때문에 성부 하나님께서 넘겨주신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Posted by Rev. Hanjin 웃음과눈물


구약성경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큰 고난과 역경을 당하는 장면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방 민족 애굽에 살면서, 그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은 극에 달하였고 급기야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괴로운 모습을 불쌍히 여겨주셨던 것이지요. 우리는 이 대목에게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곧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바라보시며 우리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혹 여러분의 사정과 여러분의 형편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끼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모두 헤아리고 계시며 지금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다만, 모세라는 한 사람이 준비될 때까지 참고 기다리셨던 것이지요. 드디어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을 전해들은 모세의 첫번째 반응은 거부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들었을 때 두 가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계획이 너무도 거대한 것이어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계획과 목표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모세 자신이 그와 같이 큰 일을 행하기에는 부족한 인물이라는 점이었겠지요.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저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3장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1)

 

모세는 출애굽이라는 거대한 사명 앞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설득하기 시작하시죠. 그런데 여러분, 모세를 설득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첫번째 대답은 너의 지팡이로 큰 이적과 기적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첫번째 대답은 모세에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대단한 리더십을 주시겠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첫번째 대답은 모세에게 아론이라는 좋은 대변인을 붙여주겠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적이나 표적을 행하는 능력도, 말을 잘하게 되는 지혜와 지식의 은사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탁월한 리더십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처음 주셨던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사명 앞에 주저하는 모세를 향해 하나님께서 주신 첫번째 대답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3:12)

 

출애굽은 모세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사명입니다. 아니 출애굽은 그 어떤 인간의 능력으로도 불가능한 사명입니다. 나일강의 물을 피로 바꾸는 능력이나 지팡이를 뱀으로 바꾸는 능력을 모세에게 주신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몇 가지 재능만 가지고는 출애굽의 위대한 사명은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탁월한 능력이나 대단한 언변과 같은 기능은 부족하더라도 하나님 자신이 모세를 부르시고, 하나님 자신이 모세를 보내시며,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와 함께 계신다면 모세는 출애굽의 사명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을 바라보시면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요.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했던 것이 나에게 능력이나 재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나요? 반대로 질문을 바꾸어 볼까요? 그래도 지금까지 이만큼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 여러분이 소유한 재능이나 능력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셔서 지금까지도 여러분의 인생길을 지도해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한번만 더 질문을 드려볼까요? 여러분의 가정이 그래도 지금까지 서로 화목하며 이정도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비결이 정말로 여러분이 소요한 능력이나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의 가정을 불쌍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시마다 때마다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보다 또 다시 새로운 기술, 새로운 재능, 새로운 능력, 새로운 은사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한 평생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비결도, 우리가 한 평생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비결도 특별한 재능이나 탁월한 은사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하나의 사실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의 주제는 은사입니다. 일반인들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 용어이지만, 교회에서는 어렵지 않게 듣게 되는 단어이지요.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은사라고 합니다. 특별히 은사는 재능이나 능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누군가에게 은사가 있다,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면 그 의미는 바로 그 사람에게 그와 같은 능력이나 그와 같은 재능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아홉 가지의 다양한 은사가 등장하는데 모두 능력이나 재능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식의 은사, 병을 고치는 은사, 능력을 행하는 은사,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 그리고 방언을 말하고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 등입니다.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은사의 종류만 들어도 은사가 특별한 능력이나 재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특별한 능력이나 재능, 곧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가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 곧 하나님의 사명을 성공으로 이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와 사명을 주시지만, 우리가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은사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사도 바울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역이 다양하다고 말씀합니다. 모세에게는 출애굽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여호수아에게는 가나안 정복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사무엘에게는 민족의 영적 갱신을 이루는 사명이 주어졌고, 다윗에게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정의와 공의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역이 주어졌습니다.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다르고 감당해야 하는 사역이 다릅니다.

 

우리 모두는 자양교회라는 한 교회를 섬기고 있지만, 어떤 이들은 목회자가 되어 말씀을 전하고 성도를 돌보는 사역을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성도님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교회의 구석구석에서 봉사하고, 또 가정과 직장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여러 가지 사역을 감당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각자가 담당해야 하는 사역이 다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사역은 여러 가지나사역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핵심입니다.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분은 동일한데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는 모세와 같이 홍해를 가르거나 바위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할 수 있는 은사를 소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 왕에게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한없이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솔로몬이 소유한 탁월한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에게 능력을 행하는 은사를 풍성히 부어주셨지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엘리야와 같은 능력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우리에게 모세와 같이 기적을 행하는 은사는 없고, 솔로몬과 같은 지혜와 지식은 은사는 없고, 엘리야와 같이 능력을 행하는 은사는 없을 지라도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에게 은사가 조금 부족하여도, 우리에게 재능이 조금 부족하여도 우리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향하여 오늘도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양성의 인정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은사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성도들 각각에게 주어진 조그마한 은사들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를 계속 읽어보면 고린도교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은사는 주로 방언과 예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방언과 예언이라는 몇 가지 은사에 집중하여 서로 비교하며 다투고 분쟁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로잡기 위해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기록하면서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성령께서 임하셔서 방언을 말하게 하고, 또 어떤 이에게는 성령께서 임하셔서 예언을 하게 하시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성령께서 임하셔서 능력을 행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신다고요. 은사의 내용, 은사의 종류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면 서로 비교하면서 시기와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은사를 이해할 수 있어요. 비로서 포용하고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고요.

 

그래서 개별적인 은사보다는, 모든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우리 함께 1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11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그의 뜻대로누구의 뜻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것”, 그것이 바로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사람마다 다양한 은사가 주어진 현상을 받아들일 수 있고 포용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의 특성과 다른 사람의 다양성을 인정하게 된다고요.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은사가 주어지고 직분과 사역이 주어지는 것이 그 뒤에는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은사를 주로 다루고 있지만 은사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4절을 보시면, “은사는 여러 가지나라고 말씀하면서 은사를 이야기하죠. 그러나 5절을 보시면 직분은 여러 가지나라고 하면서 직분을 언급합니다. 뿐만 아니라 6절을 보시면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라고 하며서 사역이 등장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같은 교회에서 예배하며 같은 교회를 섬기지만 우리는 서로 은사가 다릅니다. 우리는 서로 직분이 다릅니다. 우리는 서로 사역이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성도들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의 종류, 직분의 종류, 사역의 종류가 뭐 그리 중요합니까? 저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은사가 있어서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하지만 나는 뒤에서 섬기는 일에 은사가 있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요.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참으로 믿는다면, 많은 사람에게 리더십을 발휘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 모임을 주도하고 나는 그 모임에 열심히 동참해서 따라가주는 것이 문제될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삶에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여러분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의 은사를 비교하고, 무엇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의 직분을 비교하고, 왜 나와 다른 사람의 사역을 자꾸 비교합니까?

 

필립 얀시의 책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등장합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천사 두 명을 부르셔서 심부름을 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첫번째 천사에게는 세상에 내려가서 큰 도시 하나를 다스리는 명령을 주십니다. 그리고 두번째 천사에게는 세상에 내려가서 조그마한 마을의 골목길을 청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필립 얀시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과연 이 두 천사 가운데 누가 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을 감당했을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과연 이 두 천사 가운데 누가 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였을까요? 필립 얀시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두 천사 모두 똑같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의 종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자신들이 쓰임받을 수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교회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은사를 가지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직분에 따라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실 때 여러분의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하십니까? 혹여 다른 사람과 은사를 비교하고, 직분을 비교하고, 사명의 종류를 비교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두신 기쁨을 모두 날려버리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모든 일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와 직분과 사역의 내용과 상관 없이 지금도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

 

모세는 결국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힘입어 바로를 향해 전진하였습니다. 당시 전 세계를 다스리고 있었던 애굽의 황제 바로에게 그저 미디안의 목동이었던 모세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모세와 바로의 싸움은 바로의 항복으로, 모세의 완벽한 승리로 결론나지요. 그것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모세에게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고, 모세에게 탁월한 지도력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며, 모세에게 언변이 좋은 대변인 아론이 있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모세에게는 오직 한 분,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출애굽이라는 세계 역사에 전무후무한 위대한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모세도 이제 40년의 사역, 120년의 생애를 마감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여호수아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은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권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사명을 이제는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이어받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자신의 생애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모세의 마음에 결코 빼앗길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 그의 능력도 예전 같지 않고, 그의 사명도 이제는 모두 끝나버린 그 순간에도 모세의 마음에 깊이 자리잡아 결코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는 한가지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며 남겨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 사력을 다하여 말씀을 전하며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진주, 그의 마음 속에 있는 보화를 끄집어 냅니다. 그리고 선언하지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4-5)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는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내리는 기적을 행해보았지만 그것이 바로 한 사람의 마음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세는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행해보았지만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모세는 하늘에서 맛나와 매추라기를 내리는 기적을 행하였고,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나오게 하는 능력을 행해보았지만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모세가 40년의 사역, 120년의 생애를 통해 깨달은 것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며, 그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변화시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생을 다하였을 때 모세는 남겨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뛰어난 재능이나, 탁월한 은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가득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능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보다 매일의 삶에 풍성히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한데 어우러질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하고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Posted by Rev. Hanjin 웃음과눈물

역대하 30장 1~12절

Sermons 2018.12.25 19:30
역대하 30장은 히스기야 왕의 업적을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빛나는 일은 율법에 따라 유월절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드디어 왕이 명령을 내려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예루살렘으로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

이는 기록한 규례대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였음이더라 (5절)

 

여기에 기록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였다는 말에서 오랫동안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역대기를 계속 읽어보면 요시야 왕의 시절 유월절을 지키는 사건이 등장하는데, 그 대목에서 선지자 사무엘의 시대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35:18). 그러므로 사무엘 선지자 이후, 사울이 다스리던 시대에도, 다윗이 다스리던 시대에도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시대에도,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에 수많은 왕들이 등장했던 그 시대에도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유월절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었지만 자신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유월절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출애굽의 사건, 곧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그들은 잊어버리고 망각하며 살았던 것이지요.

히스기야의 개혁은 유월절을 부활시켜 다시금 시행하는 것으로 그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유월절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히스기야가 유월절을 준비하면서 유월절의 참석자로 초청한 사람은 남 유다 백성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사람을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라 (1절)

 

, 이제 왕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남 유다만이 아니라 북 이스라엘에도 히스기야의 편지를 전달합니다.

 

보발꾼들이 왕과 방백들의 편지를 받아 가지고

왕의 명령을 따라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두루 다니며 전하니

일렀으되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6a절)

 

자신의 권력 아래에 놓여있는 남 유다만이 아니라,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히스기야는 진심으로 호소합니다. ‘너희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 아니냐? 우리 조상들이 섬기던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러고보니, 히스기야 왕과 그의 편지를 전달하는 보발꾼들이 꼭 우리 시대 전도자들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애굽에서 구원하여주셨던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라, ‘당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전도자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보발꾼들이 전해주었던 히스기야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 보십시오.

 

보발꾼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방 각 성읍으로 두루 다녀서

스불론까지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비웃었더라 (10절)

 

사람들은 오랜 세월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히스기야와 보발꾼들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열심히 전도하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어버립니다. 마치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대하는 인간들의 모습과 비슷하지요. 요한복음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니 (요 1:9-11)

 

히스기야의 편지가 보발꾼의 손에 들려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되었지만, 그들은 히스기야의 초대를 비웃어버립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세상의 빛 되시는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백성을 찾아다니셨지만, 그들 역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모든 사람이 히스기야의 편지를 비웃고 넘겨버린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중에서 몇 사람이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하나님의 손이 또한 유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사

그들에게 왕과 방백들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한 명령을

한 마음으로 준행하게 하셨더라 (11-12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히스기야의 초대를 비웃고 거부하였지만, 11절에 등장하는 몇 사람’ –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지파는 북 이스라엘에 속한 지파인데 그 지역에서 몇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기 위하여 예루살렘까지 걸어서 온 것입니다. 12절은 남 유다에 속한 사람들이 등장하지요. 그렇게 남 유다 백성만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유월절을 지키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서술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우리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땅에 오셨고, 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히스기야가 보낸 편지를 보고 비웃으며,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을지라도 이 자리에 있는 우리만큼은 마음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Posted by Rev. Hanjin 웃음과눈물
역대하 28장의 주인공은 아하스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우상을 섬겼던 악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요. 아하스 왕의 시대에 국가는 큰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에돔이라는 나라와 블레셋이라는 나라가 침략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변 국가가 군대를 일으켜 침략하고 공격하니 나라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때 어떻게 할 것인가? 아하스는 어떻게 나라의 어려움을 이겨내려 했는지 역대하 28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와 주기를 구하였으니

 

주변의 크고 작은 나라에게 괴로움을 당하던 아하스의 눈에는 저 멀리 동편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는 앗수르라는 나라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의 눈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마련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보다 더 힘이 센 사람에게 줄을 대려고 하는 것이죠. 누군가 나의 괴로움을 도와줄 수 있는 힘 있는 사람, 우리는 그 한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아하스는 앗수르의 왕이 보였어요. 그런데 앗수르 군대와 유대 나라와 와서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 보십시오. 20절입니다.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그에게 이르렀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공격하였더라

 

아하스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을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디글랏빌레셀은 남 유다를 괴롭히는 에돔과 블레셋만을 혼내준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들보다 더 힘이 강력한 앗수르 군대가 남 유다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하스는 앗수르 왕의 마음을 돌이켜보려고, 그래서 앗수르가 자신의 편이 되어 대적을 무찔러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최선을 다합니다.

 

아하스가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가져다가

앗수르 왕에게 주었으나

그에게 유익이 없었더라 (21절)

 

그 옛날 유다의 왕 아하스와 앗수르의 왕 디글랏빌레셀의 이야기를 읽는데, 오늘날 바로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듣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으세요? 조그마한 어려움을 당해서 주변에 도움을 받기 위해 힘 있는 사람을 찾아가보았더니, 그 사람이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거에요. 마음을 돌이켜보려고 나는 최선을 다하는데 소용이 없어요. 이것이 사람들의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내 마음 알아주는 사람 없고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내 마음 같은 사람 없어요. 그러니 누가 누구를 의지하고, 누가 누구를 원망합니까?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 (시 146:3)

 

그러면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때로는 내 삶을 내버려두시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께서 때로는 나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귀를 막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다시 한번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해답이 되어 주십니다.

 

남 유다를 다스리던 아하스 왕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마음이 곤고해졌습니다. 그때의 장면을 오늘 본문 22절이 묘사합니다.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아하스 왕이 마음이 곤고해지자 하나님께 더욱 범죄하였습니다. 마음이 곤고해지면 많은 신앙인들이 더욱 하나님을 구하고 찾을까요? 꼭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아하스 왕이 마음이 곤고해질 때 하나님께 더욱 악을 행했던 모습이 구체적으로 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아하스 시대, 아람이라는 나라가 남 유다를 공격하여 작은 승리를 거둔 역사가 있거든요. 이 장면을 생각하면서 아하스에게 부러운 마음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늘 작은 나라들에게 치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 그래서 힘있는 강대국 앗수르를 불러왔더니 오히려 그들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아하스의 마음에는 비록 작은 승리라도 거두는 아람 나라가 부러웠던 것이죠. 그래서 232절을 다시 보시면, 아하스는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는 생각으로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 있는 신들을 섬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람 나라가 작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 그들이 섬기는 다메섹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기 때문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때로는 이방 우상을 섬기는 아람 나라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알려져있는 남 유다에게 작은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아하스는 전쟁에서 승리한 아람 나라를 너무도 부러워한 나머지, 그들의 성공비결과 전혀 상관없는 것들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 장면을 무엇이라고 평가하십니까?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그러므로 여러분, 비록 고난을 당하고 여기 저기에서 치이더라도 결코 믿지 않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귀인을 의지하지도 말고, 도울 힘이 없는 인생들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힘이시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의지할 분이시며,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Posted by Rev. Hanjin 웃음과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