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강해2022. 2. 13.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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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는 많은 곡이 수록되어 있지요. 그 가운데 많은 찬양의 가사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한 소절을 언급하며 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찬송가 9장의 4절에는 이런 가사가 등장합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옵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이 짧은 하나의 문장, 이 짧은 하나의 기도문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찬송가 9장은 이렇게 기도하네요.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옵고여기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고난도 있고 슬픔도 가득하다는 것을 전제하지요? 우리는 땅을 디디며 죄악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우리의 삶에는 고난도 많고 슬픔도 가득하기 마련입니다. 그때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하여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가사의 정수는 바로 그 뒤에 이어지는 구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옵고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고난도 많고 슬픔도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모든 과정을 이기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정수는 고난과 슬픔을 기도하며 이겨낼 수 있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더욱 중요한 본질은 이 세상을 살아가며 고난도 경험하고 슬픔도 경험하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여기에 ‘잇대어 있다’라는 표현이 참 독특하지요. ‘잇대다’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맞닿아 있다,’ ‘기대어 있다’는 의미잖아요. 그러므로 영원에 잇대어 살아간다는 의미는 우리가 지금 저 영원한 천국에 완전히 들어가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유한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우리의 몸은 시간의 흐름 속에 철저히 묶여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인생은 어디까지나 유한한 인생이요, 고난과 슬픔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원에 잇대어 살아간다는 것은 저 영원한 천국 안에 들어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간다는 의미가 그저 영원한 저 천국을 멀리서 바라보는 정도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잇대어 있다는 것은 떨어져 있지 않고 맞닿아 있고 기대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영원한 천국에 잇대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자리는 고난도 많고 슬픔도 많은 이 유한한 세상이지만, 유한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저 영원한 천국을 경험하고 저 영원한 천국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영원한 천국에 잇대어 살아가는 것이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도 고난도 많고 슬픔도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셨지요?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모두가 유한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영원한 천국을 경험하고 체험하실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나갈 것

 

우리는 오늘까지 세주 째 고린도전서 13장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은사와 능력과 재능이 아무리 크고 화려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3장 1절부터 3절까지 말씀으로, 두주 전 우리가 함께 묵상했던 내용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진실한 사랑의 특징이 무엇인지 노래합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3장 4절부터 7절의 내용인데 우리는 지난주에 그 본문을 함께 묵상해 보았습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사랑의 가치를 노래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3장 8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모든 내용은 하나의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는데 그것은 ‘영원’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아직 영원한 시간, 곧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살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지금 우리의 눈앞에 있는 것들을 평가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 내용이 본문 8절부터 등장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여기까지는 사랑에 대한 노래입니다.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8절)

 

여기에 등장하는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지식의 은사는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서로 자랑하며 뽐내던 은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는 말씀이지요. 어디 예언이나 방언과 같은 은사뿐이게습니까? 우리가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래서 때로는 사람들에게 자랑도 하고 싶고 다른 누군가가 자랑하면 내심 부러운 마음이 드는 바로 그것을 영원의 관점으로 한번 바라보면 우리는 어떠한 평가를 내리게 될까요? 지금 여러분의 눈에 그토록 크고 중요하게 여기는 그것을 영원의 관점으로 바라보아도 여전히 중요할까요? 아니면 영원의 관점으로 바라보니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모두 사라져 버릴 덧없는 것들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지금 내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수많은 것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두 흘러가버리는 덧없는 것들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지식과 예언과 방언의 은사를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결론에 이르렀지요?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제 사도 바울은 영원이라는 동일한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리네요. 본문 9절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9절)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지식이 많은 사람도 있고 지식이 부족한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평가하면 신앙이 성숙한 사람도 있고 신앙이 미숙한 사람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니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많이 배운 사람이나 적게 배운 사람이나, 성령의 은사를 충만하게 받은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지금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부분적인 지식만 가지고 예언하고 부분적인 정보만 가지고 불완전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네요.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영원의 때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 때가 되면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어떻게 됩니까? 다 “폐하리라”

 

사도 바울은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말하면서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지요? 그럼요.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 재능, 은사, 재물, 권세 그 모든 것이 잠시 있다 사라질 덧없는 것인데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어요. 바울은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말하면서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네, 물론이죠.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모두가 불완전한 것뿐인데 어떻게 교만할 수 있겠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영원이라는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며 나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시기하지 않습니다. 자랑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결국 진실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것

 

사도 바울은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자랑거리를 바라보며 평가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자랑거리가 그렇게 자랑할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사도 바울은 영원이라는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평가해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교만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영원이라는 동일한 관점으로 계속 살펴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고 폐하여지는 것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아름다워지고 더욱 완전해지는 것도 있었습니다. 자, 본문 1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이아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1절)

 

본문 11절의 이 말씀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을 한다는 말씀의 반복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면 앞의 내용과는 강조점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앞에서 바울은 영원의 관점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평가하면서,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을 하는 불완전한 모습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11절로 넘어와서는 새로운 강조점을 첨가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1절의 뒷부분입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물론 지금 우리의 모습은 불완전한 미완성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모습이 결코 마지막 결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마치 어린 아이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장성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우리도 때가 되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우리의 영적인 모습도 완전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동일한 강조점이 본문 12절에도 등장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이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지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것이 우리가 도달하게 될 궁극적인 모습입니다. 본문 12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네, 이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이 맞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우리의 영적인 지식이 얼마나 완전해진다고요?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완전한 상태가 마침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시간이 지나도,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기는커녕 날로 새로워지며 마지막 날에는 온전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 영원한 천국을 향한 소망, 그리고 내 곁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나의 믿음이 연약하지요. 지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천국에 대한 나의 소망은 너무도 자주 흔들리지요. 지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내 곁의 이웃을 향한 나의 사랑은 미약하기 짝이 없지요. 그러나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사랑은 반드시 완전해질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이 확신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소유한 재능, 능력, 은사, 지식, 사회적 지위 이러한 것들로 자랑하지도 말고 교만하지도 말고 시기하지도 마십시오.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에 지금은 작은 믿음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마음에 지금은 많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마음에 지금은 식어질 때도 많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있으신가요? 그러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는 가장 귀한 세 가지를 모두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13절)

 

이제 지난 세 주에 걸친 고린도전서 13장에 대한 설교를 정리할 때가 되었네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는 마치 도장을 새겨 놓은 것처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이 깊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진 주님의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을 따라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그렇다고 여러분의 손과 발을 분주히 움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생각과 나의 마음이 추동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멈추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이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는 돌아보며 오래 참고 온유하여 상대에게 친절하게 행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진 주님의 사랑, 그리고 주님의 그 진실한 사랑을 따라 오늘도 여러분이 행하는 사랑의 실천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시간이 지날 수도록 더욱 아름답고 더욱 온전하게 빛날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X2)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실한 사랑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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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22. 2. 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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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기독교 영성가 가운데 한 명인 게리 토마스라는 분은 『체리쉬』(Cherish)라는 책에서 ‘소중히 여김’이라는 개념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사랑과 소중히 여김은 구분합니다. 게리 토마스는 사랑하다와 소중히 여기다는 단어가 함께 등장하는 대표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것은 결혼식의 서약입니다. 수많은 부부가 이렇게 서약하지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기로 서약합니다.” 게리 토마스는 이 짧은 구절에서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정작 그 사랑이 가정에서 표현되고 한 가정을 행복으로 이끌어가는 중요한 수단인 소중히 여긴다는 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너무도 무관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소중히 여긴다는 말은 사람에게도 사용하지만, 물건이나 사물에 많이 사용하지요. 귀한 보석이 박힌 반지나 귀걸이를 신발장에 놓아두는 분이 계신가요? 우리는 귀한 보물일수록 방의 가장 깊은 곳에 잘 보관해 둡니다. 이것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죠. 미술품을 수집하는 사람에게 렘브란트가 직접 그린 그림은 얼마나 소중할까요? 그는 그 그림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액자를 끼우고 최고의 조명이 비치는 장소에 그 그림을 걸어두겠지요. 이것이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리 토마스는 사랑하는 것과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애써 구분하면서 진실한 사랑은 언제나 소중히 여기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였지요. 사랑이 없으면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이 있어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비록 자신의 전 재산으로 구제하고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불사르게 내어 주어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오직 진실한 사랑, 곧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랑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가 노래하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 4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이 짧은 문장에서 주어는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 오래 참는다는 말씀하지요. 그리고 이러한 형식은 더 길게 연장되어 4절부터 7절까지의 주어는 어디까지나 사랑입니다. 사랑이 주어이고, 사랑이 주체입니다. 그리고 우리말 번역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4절부터 7절까지의 모든 문장은 동사로 되어 있어요. 사랑이 무엇을 행하는지, 사랑이 무엇을 행하지 않는지를 서술하고 있지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 발견하는 진실한 사랑의 중요한 하나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진실한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입니다. 


미술품 수집가가 렘브란트의 진품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품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값진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나 목걸이가 더욱 빛나도록 소중히 관리하는 것처럼 진실한 사랑은 그 대상을 소중히 여기는 구체적인 실천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진실한 사랑이 새겨졌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진실한 사랑의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마치 도장을 찍듯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면, 이제 우리는 그 사랑의 마음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의 짧은 본문에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 곧 진실한 사랑이 행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것이 매우 많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의 말씀 묵상을 통해 본문이 가르치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 곧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의 덕목을 단 하나만이라도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질까요? 사랑은 소중히 여기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우리의 삶과 가정과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킨다는데, 본문이 소개하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단 하나만이라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우리 모두의 삶에 진실한 사랑의 마법이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진실한 사랑의 특징 – 멈춤


오늘 본문에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이 길게 나열되어 있지요. 이러한 서술은 크게 두 가지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지 않는다’이고, 다른 하나는 ‘행한다’입니다. 이렇게 구분을 해놓고 보면,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서술하는 본문의 말씀에는 진실한 사랑이 행하는 것보다 진실한 사랑이 행하지 않는 것이 더 많이 나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이것은 진실한 사랑이 행하는 것에 대한 서술이지요. 그러나 그 뒤에는 진실한 사랑이라면 결코 행하지 않는 것들이 길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4절 뒷부분부터 보십시오.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절도 보십시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모든 것을 멈추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나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진실한 사랑을 실천한다고 말할 때,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무엇을 행하는 것, 분주하고 바쁘게 무엇을 행하는 것이 사랑이나 소중히 여김이 아닐 때가 굉장히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신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말하고 싶은 것, 지금 내 마음이 나에게 충동한 그것을 멈추는 것이 때로는 더 귀한 사랑이요 상대를 최고로 소중히 여기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 백성이 따라야 할 율법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요? 그러면 율법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율법의 핵심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요 또한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정신을 담고 있는 율법을 구약성경에서 압축적으로 기록해둔 말씀이 십계명이지요. 그러면 십계명의 구절을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구분해 보십시오. 제1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무엇을 ‘행하라’는 명령이 많습니까? 아니면 ‘하지 말라’는 명령이 많습니까? ‘하지 말라’는 명령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무엇을 행하라는 명령은 열 가지 계명 중에서 딱 두 개입니다.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그런데 여러분, 안식일이라는 것이 무엇이지요? ‘멈춤’이거든요. 하던 일을 멈추고, 열심히 달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쉼을 누리는 것이 안식일이잖아요. 그러니 제4계명 역시 문자적으로는 ‘행하라’고 되어 있지만, 그 의미는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결과적으로 십계명 가운데 ‘무엇을 행하라’는 명령은 딱 하나가 남네요. 제5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그렇습니다. 십계명에서 적극적으로 행하라고 명령하는 말씀은 이것 하나입니다. 저는 한때 십계명의 말씀이 지나치게 부정 명령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대헌장을 말씀하시는 십계명에서 ‘너희는 정의를 행하여라,’ 혹은 ‘너희는 인애를 실천하여라’와 같은 멋진 명령을 주시지 않고, 고작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말씀하시는 데 의문을 품었을 때도 있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생각을 해보니 우리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적극적으로 행할 때 일어나지, 소극적인 자세로 행동을 멈추었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별로 큰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오히려 행동을 멈추는 것이 가장 멋진 행위가 되고,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강력한 웅변이 되고, 나의 주장을 멈추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지혜가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분주하게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듯 시기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에도 그 마음을 멈추어 세우는 것, 자랑하고 싶지만 상대방의 감정을 생각해서 절제하는 것, 상대에게 좀더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지만 무례히 행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 나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 않는 것, 내 마음이 상했다고 상대방의 마음까지도 상하게 만드는 화를 내지 않는 것, 한 마디로 내 마음은 하고 싶지만 상대를 위해 그것을 멈추는 것, 바로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요 상대를 소중히 여기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새겨진 주님의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기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행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 대신 여러분의 지금 행동을 멈추십시오. 그리고 나의 행동이 혹시라도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상대방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것, 상대방의 언어습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 상대방의 행동을 그 사람의 당연한 권리로 인정해주는 것, 그것이 진실한 사랑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는 최고의 행동입니다. 



진실한 사랑의 특징 – 오래 참음과 온유


사도 바울은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서술하면서 사랑은 ‘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확인한 것처럼, 진실한 사랑이 무엇을 행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에는 그것이 두 가지로 나타나지요?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온유합니다.” 우리말 ‘온유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를 조금 더 풀어서 번역하면 ‘친절하게 행하다’가 됩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인용하였던 게리 토마스의 책 제목인 영어 단어 ‘cherish’와 거의 같은 의미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의 또 다른 특징이 무엇입니까? 오랜 세월 변하지 않고 동일한 자세로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며 친절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오래 참음’과 ‘온유’라는 덕목은 구약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본문이 출애굽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하였던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언약을 시내산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시내산 언약을 통해,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언약이 채결되었습니다. 곧,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도 감격적인 사건이었어요. 마치, 신약 시대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언약이지요. 그러니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리고 그 옛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나님과 우리가 언약을 맺었다는 사실은 너무도 큰 감격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뒤, 그 시내산을 채 떠나기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금 송아지를 만들어서 숭배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등지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다니…. 이 정도면 조금 전에 맺은 시내산의 언약은 파기될만하지 않나요? 이 정도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벌을 내리셔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향해 불평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요? 바로 그때 하나님의 성품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등장하는 두 가지 덕목입니다. ‘오래 참음’과 ‘온유’이지요. 금송아지 사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바로 그 장면에서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출 34:6) 


구약성경에 매우 익숙하였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기록하며 출애굽기의 이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서술하면서 가장 먼저 이 두 가지 덕목을 서술하고 있네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이것은 진실한 사랑의 원형이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로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라고 요구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진실한 사랑은 온유하여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며 친절하게 대한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오래 참음이나 온유함도 상대방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지 않나요?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무엇을 분주하게 행하기보다는 나의 말을 멈추거나 나의 행동을 멈출 때 우리는 오래 참을 수 있으며 온유, 곧 상대방을 친절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지난 한 주간 오래 참음과 온유에 대해 여러 가지고 묵상하면서, 과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오래 참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게 만드는지, 오래 참음과 온유의 자세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가장 무서운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에 가장 크게 떠올랐던 답이 하나 있었어요. 그것은 ‘조급한 마음’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복잡한 거리를 지나고 있는데 약속 시간에 늦어 마음이 조급해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빨라지겠지요. 그러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돌아볼 여유가 있을까요? 약속 시간이 촉박하여 발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지나가던 사람을 툭 치고 지나가는 일도 생기죠. 혹은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을 다그칠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의 마음은 지금 조급하기에 곁에 있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무례해집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조급한 마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상대방을 향해서 오래 참고 온유하며 상대방을 향해 친절해질 수 있을까요? 먼저 나의 마음에 조급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나의 마음이 좀 넉넉해져야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의 풍경도 볼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지금 행하고 계신 손길도 바라볼 수 있는 것이요, 결국 내 곁에 있는 이웃을 귀하게 여기며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진실한 사랑의 첫 번째와 두 번째 특징으로 “사랑은 오래 참는다.” “사랑은 온유하다”라고 선언한 뒤, 계속해서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던 것이지요. 


진정한 사랑의 특징을 서술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시작하여 7절에서 마칩니다. 그리고 마지막 7절에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7절의 중요한 특징은 동일한 단어가 네 번이나 반복된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네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지 찾아보면서 7절의 말씀을 잃어보지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7절) 


무엇이 반복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능력이 있고 재능이 있고 은사가 있어도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진실한 사랑만 있다면 모든 것을 성취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진정한 사랑의 특징으로 멈춤을 강조하였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고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는 나의 말을 멈추고 나의 행동을 멈추고 상대방의 생각과 행동을 오래 참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멈춤이라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이 마침내 모든 것을 성취하게 된다는 사실이예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대방을 사랑하고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기 위해 나의 말과 행동을 멈추십시오. 그리하여 진실한 사랑의 특징인 오래 참음과 온유의 자세를 유지하십시오. 바로 그때, 여러분의 삶에 사랑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사랑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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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22. 1. 3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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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이 묘사하는 사사시대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도 이웃을 향한 진실한 사랑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 사사기는 그 시대에 일어났던 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입다라는 사람을 통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비극적 사건입니다. 입다는 하나님께 성급하게 서원하여 자신의 무남독녀를 제물로 바쳤고 이 사건은 이스라엘 여성들의 큰 통곡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비극은 에브라임 지파를 대상으로 한 이스라엘의 내전이었습니다. 그는 이 전쟁을 치르며 에브라임 사람 4만 2천 명을 하루아침에 죽이고 말지요. 그러면 여러분, 입다라는 인물이 이처럼 역사적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던 그 출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입다는 싸움과 전쟁에 매우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입다를 ‘큰 용사’라고 묘사합니다. 그에게는 전쟁의 능력과 기술이 있었고, 고대사회에서 이것은 그의 큰 장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마음에 다른 사람을 향한 미움과 열등감이 가득했다는 점입니다. 입다는 첩의 자녀였거든요. 그래서 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들이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말하면서 그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때부터 입다의 마음에는 형제를 향한 미움,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의 감정이 가득했지요. 

그러한 입다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암몬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왔는데, 이스라엘에는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암몬을 물리칠 장수가 없는 거예요. 입다의 마음은 미움과 분노로 가득하지만, 전쟁을 치르는 능력만큼은 탁월했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입다를 찾아와서 군대를 지휘하여 저 암몬을 물리쳐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입다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붙이죠. 군대를 이끌고 나가 전쟁에 승리하면 이제부터 입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사사가 되겠다는 조건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입다가 군대를 이끌고 암몬이라는 나라에 맞서 싸운 그 마음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민족에 대한 사명감인가요? 아닙니다. 전쟁으로 피해를 볼 사람들에 대한 연민인가요? 입다에게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입다가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한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내 마음에 있는 미움, 내 마음에 있는 분노를 실제로 터트릴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는 마음뿐이었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은혜를 주셔서 입다로 하여금 암몬 자손을 물리치게 하십니다. 이 일만 놓고 보면 입다는 이스라엘을 지켜낸 구국의 영웅이지요. 그러나 그의 이 모든 일은 사랑의 마음으로 행한 것이 아니요, 미움과 분노 나아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이기적인 욕망의 발로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입다의 능력이 빛을 발하여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지만, 결국에는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이스라엘에 통곡하는 소리가 가득한 역사적 비극이 펼쳐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고 무엇이 우리의 공동체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까요? 능력입니까? 재능입니까? 탁월한 은사입니까? 아니면 진실한 사랑의 마음입니까?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다양한 은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실제로 고린도교회 안에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다양한 은사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사의 언어를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병을 고치는 역사를 일으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예언하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지요. 그런데 여러분, 고린도교회 안에 많은 성도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그 가운데 많은 능력과 은사가 발휘되었지만 정작 교회의 내부에는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죠? 음행의 죄, 우상숭배의 죄, 여러 가지 불의로 세상 법정에서 판결을 받는 모습 등 아름다운 열매보다는 인간의 추한 모습만 드러나고 있었어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교회 안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지 않는 이유는 교회에 성도들이 많이 모이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교회의 재정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고, 심지어 교회 안에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은사가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라고 말이지요. 그러면 그들에게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들에게 무엇이 부족하여 교회 안에 성령의 열매는 사라지고 인간의 추한 모습만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진실한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외국어 능력이 탁월한 사람도 많았고 천상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무엇이 없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네, 그들에게는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니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절도 보십시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예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영적인 지식이 충만하네요. 어디 그뿐인가요?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받은 능력이 얼마나 큰 지 산도 옮길 수 있데요. 그런데 영적인 지식으로 가득하고 산도 옮길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그들에게 무엇이 없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이번에도 사랑이 없네요. 그러니 그 결과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지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3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 놓았네요. 그뿐이 아닙니다.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나의 물질만 드린 것이 아닙니다. 나의 소중한 시간과 나의 몸까지도 온전히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사랑이 없으면” 제 아무리 자신의 모든 재산과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내어 놓아도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베푸신 은사의 종류가 수도 없이 많고 우리 각자에게 주신 능력과 재능이 제 아무리 뛰어나도 그 모든 것이 아름다운 열매로 이어지기 위한 마지막 퍼즐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이 땅의 교회가 우리 사회에 점점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현실을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면에서 우리의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개신교희의 역사는 이제 130여 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독교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가장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례로, 선거철이 다가오면 정치인들은 기독교의 눈치를 봅니다. 많은 기업이 교회의 구매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이처럼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후 지금까지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재력을 가지고 있고, 그 어느 때보다 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실망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교회가 이 사회에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일까요? 교회의 재정이 부족하기 때문인가요?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의 입술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에는 진실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마지막 구절이 무엇입니까? 

그런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의 모조품

사랑은 우리의 삶과 신앙에 있어 너무도 중요한 덕목입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지요. 그러면 이렇게 중요하고 귀한 사랑의 덕목에는 이른바 모조품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지금 제가 사용한 ‘사랑의 모조품’이라는 표현은 미국의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다고 평가받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사용한 용어입니다. 기독교의 매우 중요한 덕목인 사랑에는 모조품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있다” 그것도 “매우 많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하나의 비유로 이것을 설명했습니다. 철이나 동을 흉내 낸 모조품과 금이나 은을 흉내 낸 모조품 가운데 어떤 모조품이 더 많지요? 당연히 금이나 은같이 더 귀한 물건을 흉내 낸 모조품이 더 많습니다. 사람들은 흔하게 길가에 놓여있는 돌멩이의 모조품은 만들지 않습니다. 그 대신 다이아몬드나 루비와 같은 값진 물건의 모조품은 많이 만들지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라는 덕목은 우리의 삶과 신앙에 너무도 중요한 덕목이기에, 아니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선언할 정도로 가장 귀한 덕목이기에 그만큼 가짜도 많고 모조품도 많습니다. 

자, 그러면 진실한 사랑이 아닌 사랑의 모조품, 곧 거짓된 사랑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과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의 신앙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만드는 진실한 사랑과 그저 흉내만 내는 사랑의 모조품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에서 한구절, 그리고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마지막 종말의 때를 설명하시며 하신 말씀의 한 구절입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 24:12) 

이번에는 사도 바울의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의 이름으로 성도들을 축복하는 대목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엡 6:24) 

읽어드린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우리는 진실한 사랑과 거짓된 사랑 사이에 존재하는 너무도 분명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진실한 사랑은 변함이 없지만, 거짓된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식어진다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묘사하며 가장 먼저 무엇이라고 말씀하지요? “사랑은 오래 참고”(4a절)라고 말씀하잖아요.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 그것이 진실한 사랑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이렇게 진실한 사랑과 거짓된 사랑의 차이를 구별하고 나면, 오늘 본문 3절의 말씀을 우리는 조금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 줄지라도” 나의 재물을 모두 내어 놓았습니다. 심지어 나의 몸까지도 헌신하고 바쳤습니다. 그런데 본문 3절은 계속해서 무엇을 말씀하지요?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아니, 내가 가진 모든 소유를 나누어 주고 심지어 나의 몸까지도 불사르게 내어 주었는데 사랑이 없다고요? 나에게 사랑의 마음이 없는데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 주고 심지어 나의 몸까지도 불사르게 내어주었다고요? 이것이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거짓된 사랑, 곧 사랑의 모조품도 사랑이라는 겉모습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재물을 내어 줄 때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을 거예요. 나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때는 사랑의 마음이 불타오르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거짓된 사랑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그 사랑이 식어버린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한 때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심지어 나의 몸까지도 내어 주었지만,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었기에 – 그것은 잠시 타오르다 식어지는 사랑의 모조품이었기에 –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끼치지 못한다는 말씀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그것은 바로 진실한 사랑입니다. 곧, 오래 참는 사랑이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랑이지요. 


그리스도의 사랑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진실한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이 점을 마음에 생각하면 여러분의 마음에는 기대감이 일어나십니까? 아니면 절망감이 일어나십니까? 그래 좋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가진 것도 별로 없고 능력도 변변치 않지만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변함 없는 사랑으로 나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다는 결단의 마음이 생기세요? 아니면 차라리 더 노력해서 나에게 부족한 능력을 얻으라고 하면 그래도 가능성이 있을 텐데 변하지 않는 진실한 사랑만이 나의 삶을 아름답게 열매 맺게 한다면 내가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을까라며 그 사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드시지는 않으세요? 우리의 마음을 정직하게 들여다본다면 오늘 본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큰 절망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진실한 사랑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삶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진실한 사랑을 생각할 때, 기어이 우리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셨던 주님의 사랑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사용했던 비유를 한 가지 더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는 우리 마음에 진실한 사랑이 자리잡는 것을 도장과 인주의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 자, 도장에 인주를 충분히 묻혀서 종이에 찍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종이에서 도장을 떼어내고 나면 그 종이에는 도장과 동일한 모양이나 글씨가 분명하게 남게 되지요. 에드워즈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이 꼭 이와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진실한 사랑,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했던 그 진실한 사랑의 원형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인간에게는 없어요.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의 형상, 곧 예수님의 진실한 사랑을 도장을 찍듯이 우리의 마음에 각인시켜 주셨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진실한 사랑의 성품이 남아 있게 된 거예요. 물론, 우리의 마음은 연약하여 진실한 사랑보다는 쉽게 사그라드는 거짓된 사랑이 더 많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도장을 찍듯 분명히 새겨주신 주님의 진실한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기에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 새겨진 주님의 진실한 사랑을 따라 행하십시오.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 분명히 새겨진 주님의 진실한 사랑을 따라 행하십시오. 우리 주님의 진실한 사랑은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한 없이 부어지고 있으니, 그 주님의 사랑을 따라 행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넉넉히 진실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소개하는 사사시대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도 없었고 이웃을 향한 진실한 사랑도 없었습니다. 사랑보다는 미움과 분노와 이기심을 따라 행동하고 있으니 거대한 적군을 물리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들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도 비극적인 사건과 사고는 그칠 줄을 몰랐지요. 그러던 중 마침내 그 어두운 사사시대의 역사를 끝냈던 인물, 곧 마지막 사사로 평가받는 인물이 등장했으니 그는 사무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무엘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사무엘에게는 입다와 같은 탁월한 전쟁의 능력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무엘은 모세나 엘리야와 같이 놀라운 기적을 행한 일도 없습니다. 그러면 사무엘에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느냐?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의 의견에 반대하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하거든요. 이렇게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도 아니요,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것도 아닌 사무엘은 어떻게 그 비극적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던 사사시대를 종결하고 미스바에서 민족의 영적 대각성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3장을 가만히 묵상하면서 그 하나의 대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에게 발견할 수 있는 그의 최대 장점은 어린 시절 성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한평생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민족의 지도자가 된 사무엘에게는 탁월한 은사도, 대단한 능력도 보이지 않았지만 한평생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은 유창한 외국어나 아름다운 천상의 언어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겠지요. 지금 당장은 큰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면 사람들이 그의 권위를 인정해 주겠지요. 지금 당장은 나의 모든 재물을 내어주고 심지어 나의 몸까지도 불사르게 내어주는 행위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지금 당장은 빛을 발하지 않을 지라도, 묵묵히 내 마음에 새겨진 주님의 진실한 사랑을 따라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사랑하시고 내 곁에 있는 이웃을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말씀하셨으니, 
능력이 조금 부족해도, 실력이 조금은 부족해도, 별로 화려하지 않아도, 
변함없이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는 여러분들의 인생은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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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21. 7. 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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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명의 군인이 기록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기도문이라기보다는 기도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 뉴욕에 있는 장애인협회의 한쪽 벽에 약 30년 동안 걸려 있었는데, 그 글귀가 사람들에게 소개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 들어보셨을 만한 기도입니다. 이 글의 저자는 말씀드린 것처럼 알려져 있지 않고, 어느 무명의 군인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의 제목은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I asked God)입니다. 

나는 성취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약하게 만드셔서, 겸손히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허약하게 만드셔서,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재물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가난하게 만드셔서, 지혜롭게 하셨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연약하게 만드셔서, 하나님이 필요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무명의 군인은 자신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한 그 무엇도 받지 못했지만, 
내가 소망했던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나의 무언의 기도는 응답 받았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의 응답 받지 못한 기도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던 하나의 기도 제목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8절) 

여기에서 “이것”은 위의 7절에 등장하는 “육체의 가시”입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안질이었다고 말하는 분도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일시적인 발작을 일으키는 간질이었다고 주장하는 분도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큰 고통 속에서 선교를 감당해야 했던 바울이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가능성이 제기되듯, 바울을 괴롭혔던 육체의 가시가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바울의 몸에 선교 사역은 물론이요 일상생활을 하기에도 매우 치명적인 육체의 질병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겪었던 질병이 아니라 바울의 삶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만성적인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그 질병이 자신에게서 떠나가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본문 8절에서 바울은 이 질병이 떠나가도록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바울의 질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어요. 

이 사실을 담담히 기록하고 있는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신약성경의 또 다른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성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성경은 그날 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도의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그리고 신약성경은 그날 밤 예수님도 세 번에 걸쳐 성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알려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도의 결과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이 잔,’ 곧 십자가의 고통이 자신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지만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한 그대로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만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규정한다면, 어느 무명의 군인이 드렸던 기도만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던 바울의 기도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기도도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느 무명의 군인이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나는 하나님께 기도한 그 무엇도 받지 못했지만, 내가 소망했던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고백하잖아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을 괴롭히는 질병이 사라지기를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질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과정에서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발견하였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뜻을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도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세번에 걸친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는 성부 하나님의 결정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 – 심지어 그것이 인간의 모든 죄악을 대신지고 십자가의 무서운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수용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인 기도가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도구로 전락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정작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아무런 능력도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신앙이 아니지요. 예수님의 기도와 사도 바울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그대로 들어주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아니, 그러한 때가 매우 많습니다. 하나님은 무명의 군인에게도 그렇게 하셨고, 사도 바울에게도 그렇게 하셨고, 심지어 예수님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응답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가 있으니, 우리는 기도를 통해 더 깊고 더 풍성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여 더욱 성숙한 신앙인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과대평가와 자만이라는 질병

바울의 기도는 그의 질병을 치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깨달았던 바울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고린도후서 12장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은 사도 바울 자신이 경험한 영적인 체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1절) 

고린도후서 12장은 바울이 체험한 주님의 환상과 계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주님의 환상과 계시에 대해 이야기하죠. 그리고 본문 6절에 이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6a절) 

바울이 1절부터 지금까지 말한 환상과 계시는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참된 것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영적인 체험, 곧 환상과 계시를 말하면서 그와 관련하여 매우 강조하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6b절) 

바울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환상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놀라운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고, ‘그만 두겠다’고 말하네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바울 자신을 바라보거나 바울의 이야기를 들을 때 바울 자신에 대해서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 곧 그를 과대평가하는 것이 너무도 두려워서 자신의 경험을 다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입니다. 바울이 환상과 계시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바울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하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에도 과대평가, 곧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7절) 

사도 바울은 환상과 계시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참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환상과 계시를 보았다고 하여 바울의 삶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환상과 계시를 보기 이전에도 바울은 바울의 삶을 살았고요, 환상과 계시를 본 이후에도 바울은 바울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어요. 만일 바울이 보았던 환상과 계시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라면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 환상과 계시의 내용을 전해주었겠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물론이고 바울의 서신 그 어디에도 그가 체험한 환상과 계시에 대한 내용은 단 한 번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참 이상하지요. 바울이 신비한 환상과 계시를 보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주변에서 바울이 어떤 특별한 영적인 능력을 소유한 사람인 것처럼 과대평가하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신앙 인품이나 자신의 성품은 그 이전과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비한 환상과 계시를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자신이 특별하고 대단해 보이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자만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 때문이든, 바울이 이룬 선교의 위대한 열매 때문이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에 대해 과대평가하게 된다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바울을 의지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믿음은 파선하게 되어 있어요.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 때문이든, 바울이 이룩한 선교의 위대한 열매 때문이든, 바울의 가문이나 학벌 때문이든 바울 자신이 스스로 자만하게 된다면 바울은 교만이라는 무서운 덫에 걸리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주님의 일꾼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위선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을 망쳐버릴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질병은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자만이라는 질병, 곧 교만이라는 뿌리 깊은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이에요. 하나님은 바울에 대한 사람들의 과대평가, 바울 자신에 대한 바울의 자만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육체에 가시를 넣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바울을 겸손하게 만드시려는 의도입니다. 

이쯤 되어 성경이 가르치는 겸손과 교만의 의미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겸손이란 지금 내가 처해있는 위치보다 나 자신을 더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 정도의 위치에 있다면 스스로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겸손이 아닙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지독한 교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나 자신을 원래의 위치보다 낮추는 것이 아니라, 나의 원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위치, 우리 인간의 형편이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입니다. 그러니 나 스스로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려고 해도 내려갈 곳이 없는 거예요. 이러한 나의 형편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을 나 자신의 위치에서 스스로 더 낮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전히 교만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인생인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여러분은 성경이 가르치는 겸손의 덕목을 갖추셨나요? 아니면 겉모습은 겸손하지만, 교만이라는 질병이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지는 않으세요? 우리는 우리의 몸에 질병이 찾아오면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심지어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질병을 미리 걱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질병의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질병이 있다면, 그리하여 그 질병의 치유를 위해 우리가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할 마음의 질병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를 과대평가하여 하나님이 아닌 그 사람을 의지하는 마음이요, 나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여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만하여 교만해지는 태도입니다.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자신의 몸에 있던 질병을 치유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뜻이 있어 그의 육체에 가시를 박아두셨으니 바울의 이 기도만큼은 들어주시지 않으시네요. 그 대신 바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9a절)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가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만이라는, 교만이라는 더욱 치명적이고 무서운 질병으로부터 바울을 지켜주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하나님은 매우 중요한 신앙의 원리 하나를 들려주십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9b절) 

하나님은 ‘나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여진다고 말씀하시네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은 처음부터 완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온 세상만물을 창조하셨던 그 태초의 시간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온전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온전해진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온전히 나타나게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약함은 하나님의 약함이 아니라 당연히 인간의 약함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 보다 정확히 묘사하면 우리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인간에게 온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바울의 육체에 박혀 있던 가시는 너무도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가시로 말미암아 과대평가되지도 않고 자만하지도 않게 된다면, 그래서 바울이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인식하는 겸손의 사람이 된다면 그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선언하셨던 것이요,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이 선포하는 ‘약함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곧 약함의 은혜를 깨달은 바울의 반응이 이제 본문의 마지막인 10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10절) 

바울은 약함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자신을 약하게 하는 요소들, 곧 자신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들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어요. 바울은 질병으로 약해졌습니다. 그는 능욕을 받으며 약해졌고, 궁핍하여 약해졌습니다. 박해와 곤고는 바울을 약하게 만들었고 그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약함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깨닫게 되니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게 되었고 약함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큰 질병을 비롯한 온갖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마지막 결론인 10절 말씀에서 눈에 띄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10절을 다시 보시겠어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주님을 위한 삶을 살기 원했어요. 그는 사도요, 선교사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온전히 헌신했고 자신의 사명에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10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표현에는 한 평생 하나님의 사명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였던 바울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10절은 그가 진정한 사도, 신실한 선교사,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음 전도자, 곧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숨겨진 비결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는 구절입니다. 

여러분, 마음 속으로 한번 대답해 보시겠어요? 과연 무엇이 바울을 우리가 알고 있는 그토록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자로 만들었을까요? 그가 로마 시민권자라는 사실입니까? 가말리엘 문하생이었다는 그의 빛나는 학력입니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던 그의 출신 성분이었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그의 유창한 헬라어 능력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의 장점은 그가 위대한 사도가 되는데 결코 핵심적인 원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의 여러 가지 장점은 스스로 자만하게 할 수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몸에 무서운 질병을 넣어두어야 했던 걸림돌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러면 과연 무엇이 바울을 그토록 위대한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였던 것일까요? 그의 육체적 가시, 그가 떨쳐버리고 싶어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던 그 몹쓸 질병이요, 본문 10절에서 바울이 자랑하는 약함, 능욕, 궁핍, 박해와 곤고입니다. 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께 작은 역할이라도 쓰임받기 원하십니까? 여러분도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만이 아니라, 이제는 주님을 위해 봉사하며 살기를 원하시나요? 여러분의 장점, 여러분의 달란트,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만한 그러한 것들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여러분의 아픔, 여러분의 슬픔,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내보이고 싶지 않은 여러분의 그 약점이야말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 받는데 꼭 필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을 위해 봉사하기 원하는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약함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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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21. 6. 2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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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바울의 편지, 특별히 고린도후서에는 바울 자신의 사역에 대한 내용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약성경의 다른 어떤 책들보다 고린도후서를 읽으며 바울이 어떻게 사역했는지,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보다 깊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온전히 바쳤지요. 그의 선교사역은 1차, 2차, 3차 전도여행으로 이어졌고 그의 노년에는 로마까지 건너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 바울의 삶은 전도와 선교의 인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린도후서를 비롯하여 바울 서신을 연구하다 보면 그의 선교 사역에서 바울이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하나의 사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구제 사업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큰 기근으로 말미암아 재정적으로 매우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상대적으로 조금은 여유가 있었던 안디옥 교회가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거든요. 그런데 사도행전은 안디옥 교회가 모금한 구제헌금을 예루살렘으로 전달해주었던 사람이 이제 막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였던 바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11:27-30). 

이후 사도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고 전도여행을 떠나지요. 사도 바울이 1차전도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에서는 각지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모여 매우 중요한 회의를 합니다. 이후 학자들은 그 모임을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불러요.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를 보면 그날의 회의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그 회의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에게 공식적으로 부탁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사업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루살렘 회의 이전부터 자신이 그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도 갈라디아서에 덧붙이지요(갈 2:10). 그러므로 바울은 선교여행을 시작한 1차 전도여행 때부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운동에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바울의 모금활동은 언제까지 지속되었을까요? 마지막 3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바울은 꿈에도 그리던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바울은 곧바로 로마로 직행할 수가 없었고, 예루살렘을 반드시 방문해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그 동안 자신이 모금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 1차 전도여행부터 시작된 바울의 구제활동은 3차 전도여행이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모금운동을 펼쳤던 시기가 1차 전도여행부터 3차 전도여행까지, 곧 그의 선교사역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이어졌다면 그가 모금운동을 펼쳤던 지역은 어떠했을까요? 바울이 1차전도 여행 때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던 지역은 갈라디아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를 보면,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거두었다는 말이 나옵니다(고전 16:1) 바울이 2차전도 여행 때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였던 지역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 8장 1절부터 4절에는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 곧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 빌립보 교회가 기쁨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동참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아가야 지방의 대표적인 도시가 고린도인데 오늘 본문이 포함된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에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바울의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종합하면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 아가야 지역의 교회 등 자신이 선교하고 개척한 거의 모든 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에 동참하도록 매우 강력하게 권면했습니다. 


구제헌금을 강조한 이유

바울은 사도였습니다. 바울은 선교사였습니다. 그러니 그의 사역을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복음을 전하는 일과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바울의 편지를 천천히 조사해보면 그는 자신이 선교하고 개척하여 세운 거의 모든 교회에서, 자신이 복음을 전한 거의 모든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에 동참할 것을 매우 강력하게 독려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모금활동은 그에 대한 오해를 일으켜 교회 안에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몇 주간 살펴본 것처럼 고린도교회 안에는 바울을 적대하는 대적자들이 있었어요. 그들에게 바울의 모금활동은 딱 좋은 비난 거리를 제공했지요. 바울이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할 때는 자비량으로 선교한다고 말은 하지만, 뒤에서는 헌금을 강요하고 자기의 잇속을 챙기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신기하지요. 이러한 오해와 이러한 갈등을 초래하면서까지 바울은 자신의 선교기간 내내 자신의 모든 선교지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강행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연스럽게 질문이 하나 떠오르지 않으세요? 바울의 최대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알고 살았어요. 그런데 왜 바울은 교회 안에 오해와 갈등을 일으키면서까지 구제헌금을 위한 모금운동에 그토록 열심을 내었던 것일까요? 과연 무엇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선교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자신이 전도한 거의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펼쳤던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오늘 본문 10절에 나와있는 것 같습니다.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고후 8:10a) 

이 말씀에서 ‘이 일’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말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제헌금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바울은 ‘이 구제헌금에 관하여 자신의 뜻, 곧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고 말씀하네요. 그러면 바울이 피력하는 그의 생각이 무엇입니까?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헌금을 모으는 그 일이 고린도교회 성도들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구제헌금을 전달받으면 기근에 시달리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도움이 되겠지요. 일차적으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유익하겠지요. 그러나 바울의 중요한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곧, 헌금을 모으고 그 헌금을 전달하는 고린도교회, 사도 바울이 직접 개척하여 교회를 세우고, 사도 바울이 직접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 아가야 지역의 교회와 그 성도들에게 큰 유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헌금을 많이 하시면 교회를 운영하는데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겠지요. 성도님들이 헌금을 많이 하여 교회가 더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다면 교회의 섬김을 받는 분들에게 더 많은 유익이 돌아가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그 정도의 의미에 머물러 있지 않아요.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헌금생활, 우리 그리스도인의 구제활동은 다른 누구보다 우리 자신에게 큰 유익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본문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네요.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고후 8:7a)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은사가 가득했습니다. 믿음이 있었고 지식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풍성한 신앙의 모습에서 여전히 부족한 점이 있어요. 그들의 신앙이 더욱더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앙이 모든 면에서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7절의 뒷부분이죠. 

이 은혜에도 (여기서 이 은혜는 당연히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입니다) 
풍성하게 할지니라 (고후 8:7b) 

기도생활이 풍성해지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풍성해지죠. 말씀 생활이 풍성해지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풍성해집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여러 모습으로 봉사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면 우리의 믿음 생활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드리는 헌금생활이 풍성해지면 우리의 믿음과 신앙생활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헌금 안에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영적인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 안에 우리의 신앙이 풍성해지는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복음의 원리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이 예루살렘 교회를 유익하게 할 뿐만 아니라, 헌금을 드리는 고린도교회에도 더 큰 유익이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본문에는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본문 9절의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8:9)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묘사하는 바울의 표현이 참 멋있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이미 우리는 다 알고 믿고 있어요.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를 이미 알고 믿고 감사하고 있잖아요. 계속해서 바울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의 은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무런 소유도 없이, 아무런 권한도 없이 자신이 가진 그 모든 것을 모두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셨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가지신 가장 부요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하게 되신 거예요. 그런데 가장 부요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난해지신 이유가 바로 우리를 위한 일이라는 거예요. 

바울은 계속해서 그 결과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어요. 우리는 물질적으로 가난했고, 정서적으로 빈곤했으며, 영적으로 극빈했어요. 그런데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cf 고후 6:10). 이처럼 예수님께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셨다면, 우리도 나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를 가지고 여전히 궁핍한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이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이 선언한 이 복음의 은혜에는 헌금에 대한 더욱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우리가 여전히 궁핍한 가운데 살아가는 이웃을 위해 그 은혜를 나누게 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더욱 깊이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이제 바울은 그 유익에 대해 설명합니다)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고후 8:10-11) 

여기에서 바울은 성취 그리고 완성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 구절에서 성취와 완성의 일차적인 의미는 처음에 계획하고 작정했던 금액의 헌금을 모두 완료하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8장을 기록했던 지금 시점으로부터 약 일년 전부터 고린도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시작했는데, 그것을 이제 완성하라는 촉구입니다. 그러나 본문 11절은 우리 신앙의 시작과 우리 신앙의 완성을 이야기하는 구절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소유하신 부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어요.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이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은 신앙의 시작점이에요. 신앙생활에서 시작점은 반드시 필요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셔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그 은혜를 받아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신앙의 시작점이지 완성은 아닙니다. 그러면 완성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 받은 풍성한 은혜를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하고, 때로는 스스로 가난하게 되면서 다른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베풀 때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에 더 깊이 참여하게 되고 우리의 신앙은 완성을 향해 더욱 전진하게 됩니다. 

자, 이쯤되니 설교를 시작하며 품게 되었던 하나의 의문이 풀리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사도였습니다. 바울은 선교사였습니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서, 자신이 선교한 지역과 자신이 개척한 교회와 자신이 직접 전도한 성도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어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에 자신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선교의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자신이 선교한 거의 모든 지역과 교회에서 왜 그토록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을 강조했던 것일까요? 바울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과 이웃을 위한 구제야 말로 성도들의 신앙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첩경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과 여러분의 신앙도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사도 바울의 글을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균등의 은혜

자, 이제 바울은 헌금과 구제가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바로 ‘균등’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 8:13-14) 

예수님은 스스로 가난하게 되시면서까지 우리를 부요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는 예수님의 은혜로 평안하고 나는 예수님의 은혜로 넉넉하지만 다른 사람은 곤고하고 다른 사람은 궁핍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참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균등의 은혜가 아니겠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승자 독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은 –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 그곳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어요.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으로 강조하는 균등의 원리는 구약성경에서 차용해온 개념입니다. 

기록된 것 같이 (이제부터 출애굽기 말씀을 인용합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고후 8:15) 

바울이 인용하는 출애굽기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만나를 내려 주신 사건의 일부입니다. 광야 어디에서도 먹을 양식을 구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침이 되면 광야로 나가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거두어들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몸도 건강하고 부지런하여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거둔 사람도 있었겠지요. 또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몸이 약하거나 멀리 걸어갈 수가 없어서 조금 거둔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인용하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만나는 많이 거두었다고 하여 남지 않았습니다.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그러니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한쪽에 자신만을 위해 쌓아 둘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재산을 쌓아 놓고 싶은 마음이 있지요. 쌓아 놓으면 나의 마음이 안심이 될 것 같아요. 어쩌면 이 쌓아 놓고 싶은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선뜻 이웃과 나누지 못하도록 만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나누다 보면 한쪽에 쌓아 놓을 수가 없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의 경험이 충분히 증명하지 않았나요? 한쪽에 쌓아 두려고 아무리 열심히 거두어도 참 신기하게 그것은 남지도 않고 쌓이지도 않아요. 본문 15절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만나를 먹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나가서 많이 거두었어요. 그런데 어떤 이들은 조금 늦게 나갔더니 진영 가까이에 있던 만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 거두어 갔어요. 만나를 찾아 멀리 나가보았지만 그날은 조금밖에 거둘 수가 없었네요. 그런데 여러분,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본문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매일 많이 거둘 수는 없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많이 거두던 사람도 어느 날은 적게 거두게 되어 있다고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만나의 은혜, 하나님께 베풀어 주시는 균등의 은혜는 너무도 놀랍습니다. 광야에서 살았던 40년 동안, 어느 날은 많이 거두기도 하고 어느 날은 적게 거두기도 했는데 단 한 번도, 단 하루도 양식이 부족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바로 이것이 신앙의 시작점을 넘어 신앙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동참하여 나에게 베풀어 주신 그 풍성한 은혜를 내 곁에 있는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성숙한 성도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만나의 은혜요, 균등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이 거두어도, 많이 모아도 그 무엇도 남지 않고 그래서 쌓아 둘 수 없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여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나에게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것을 이웃에게 나누며 베푸십시오. 

여러분의 섬김과 나눔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균등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요, 
여러분이 적게 거두는 그날에도 
부족함이 없도록 공급하시는 균등의 은혜를 여러분에게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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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21. 6. 20.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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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느 성도님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성도님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 그룹이 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늘 가깝게 지내다 보니 서로에 대해 잘 알고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들이지요. 그 친구들 중에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는 친구도 있고, 교회를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는 친구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친구들,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친구들은 삶이 그렇게 고달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성적이 잘 안 나오거나, 학교를 졸업하고 열심히 준비를 하지만 직장을 얻기가 어렵다거나, 심지어 결혼하여 아이들을 양육하는 과정까지 뭐하나 쉽게 되는 것이 없답니다. 그런데 친구들 가운데 교회를 한 번도 나가지 않은 친구들은 그렇게 일이 잘 풀릴 수가 없더랍니다. 늘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삶이 형통하데요. 예수님을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친구들은 삶에 고난이 많고, 오히려 예수님을 모르는 친구들은 삶이 형통한 현실을 말하면서 그 성도님이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을 모르는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너무 좋다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예수님을 믿으면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은데 예수님을 실제로 믿는 가까운 친구들의 처지와 형편을 너무도 잘 아는 사이에 예수님을 믿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자고 차마 말할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신 적이 없으신가요?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우리 마음의 소원을 간구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믿음으로 기도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약속합니다. 심지어 지금은 비록 하나님의 뜻이 다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로마서의 말씀을 우리는 분명히 믿습니다(롬 8:28).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몸에 원치 않는 질병이 찾아오고, 목표하였던 모든 계획이 무너지고, 그동안 공을 들여 쌓아 올린 것들이 한순간 무너지는 때가 있지 않나요? 그러면 나도 모르게 믿음의 대해, 신앙에 대해 회의감이 찾아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현실을 마주하였을 때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축복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우리의 믿음과 고난을 당하고 아픔을 당하며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우리의 분명한 현실이 상충할 때, 그것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고백] 지금이 은혜의 때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도 그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교회 안에 사도 바울을 비판하고 공격하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비판했던 논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겠지요?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신실한 일꾼이라면 저렇게 가는 곳마다 고난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가 하나님의 진실한 일꾼이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사역자라면 어디를 가든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고 명성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도 바울은 툭하면 감옥에 갇히고, 툭하면 매를 맞고, 툭하면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쫓기고 있으니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바울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자신이 직면한 그 문제에 대해 대답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대답은 그가 경험하는 상황과 현실이 어떠하든 결코 흔들릴 수 없는 믿음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믿음의 고백일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 우리에게 임하고 있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여기에서 “이르시되”로 시작하는 구절은 구약성경 이사야서의 인용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인용하는 구절인 이사야 49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바로 이 대목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인용한 말씀이지요. 그리고 이 구절에서 핵심 개념은 ‘은혜의 때,’ ‘구원의 날’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인용한 말씀은 이사야 49장 8절의 앞부분입니다. 그러면,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했던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이 언제를 말씀하시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그 뒷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내가 장차)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사 49:8) 

그러므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인용하는 이사야서의 말씀은 ‘장차’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원의 때, ‘장차’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그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언약 백성으로 만들어주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 49장 8절이 구약시대의 예언이었다는 사실, 곧 이사야 선지자가 이 말씀을 선포하였을 때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말씀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사야 말씀의 앞부분만 인용하고는 그 뒤에 이렇게 설명을 붙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장차’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지금’이라고 바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구약성경의 ‘장차’라는 단어를 ‘지금’이라는 단어로 바꾸었던 이유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의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이미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셨잖아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은 더 이상 장차가 아닙니다. 구원의 날은 오늘이요, 은혜의 때는 지금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소유한 기독교 신앙은 지금은 고통스럽고 괴롭지만 믿음으로 참고 인내하다 보면 장차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하게 되리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바로 오늘이 구원의 날이요 바로 지금이 은혜의 날이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에게 이 믿음을 흔들고 싶었어요. 너의 현실을 보아라, 지금 너에게 찾아온 아픔과 고난을 보아라. 그러고서도 너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공격했어요. 그리고 성도 여러분, 동일한 공격이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 몰려옵니다. 아니 당신의 현실을 정확히 보라고, 당신의 삶에 질병이 찾아오고, 고통이 찾아오고, 궁핍이 찾아오고, 염려와 걱정거리가 하루도 떠나지 않는 현실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공격합니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느냐, 당신에게 지금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사도 바울은 자신의 믿음이 공격을 받고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려 할 때 더욱 큰 확신을 가지고 선언합니다. 
“보라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바로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모습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이 믿음에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형편이 어떠하든 이 믿음에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로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역설의 진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극심한 고난을 빌미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음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현실의 고통에 눈을 감았다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충성을 다하는 바울 자신의 삶에 극심한 고난이 지속되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거든요.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고린도후서 6장 4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충성을 다하여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신이 겪는 일이 무엇인지 서술합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한 가운데서도 (고후 6:4-5)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지금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길은 영광의 길입니다. 복된 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은 또 하나의 진리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많아요. 그래서 많이 견디어야 합니다. 환난을 견디어야 합니다. 궁핍을 견뎌야 합니다.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을 겪어야 합니다. 자지 못할 때도 있고 먹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고린도후서 6장 8절) 

여기에서 그러하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영광과 아름다운 이름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영광과 욕됨이 함께 있어요.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이 함께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는 고난의 길도 있어요. 우리는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만 취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가지가 모순처럼 들리시나요?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반문하고 싶은 분은 안 계세요? ‘아니,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형통하게 된다는 겁니까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겁니까?’ 오늘 본문의 대답은 둘 다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꾼으로 충성하면 은혜의 삶을 살게 됩니까? 괴로운 삶을 살게 됩니까?’ 오늘 본문의 대답은 그 두 가지가 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자, 사도 바울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모순과 역설의 차이를 집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모순과 역설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모순이란 무엇입니까?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거짓입니다. 그래서 모순의 관계에 있는 두 가지 사안은 결코 함께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역설은 무엇입니까? 논리적으로만 보면 서로 상충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온전한 진리를 전할 수 없어요, 그래서 엇듯 보기에는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명제를 늘 함께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역설이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고운 정 미운 정’ 곱다라는 말과 밉다는 말은 서로 상충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만 선택하여 ‘고운 정’이라고만 하거나 ‘미운 정’이라고만 하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충분히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언듯 보기에는 상충되는 개념이지만, 그 두 가지 개념이 모두 담겨 있어야 그 의미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역설이에요. 

우리의 신앙에는 역설의 진리가 참으로 많습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입니다.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입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말도 안 되는 모순이지요.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수가 없어요. 이 두가지 명제가 함께 있어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균형 있게 묘사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역설입니다. 자, 모순과 역설의 차이에 대해 말씀을 드렸으니 이제 다시 본문이 말씀하는 두 가지 진리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바로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며 많은 고난을 당한다는 것 역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이 두 가지 진리는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진리는 모순이 아니라 역설이거든요. 이제 사도 바울은 그 역설의 진리를 멋진 필치로 서술하기 시작합니다. 8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속이는 자 같습니다. 우리가 믿고 선포하는 신앙의 진리는 언듯 보면 모순처럼 보이거든요. 그러니 말장난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모순된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고 역설의 진리를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도 참되고, 우리의 신앙도 참되면,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진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명한 자와 같아요. 누가 우리에게 주목합니까? 이 세상에 누가 우리에게 관심을 둡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하나님께서 늘 관심을 갖고 살펴보시는 하나님의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는 무명한 자인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천국에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보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자 같습니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죽음과도 같은 절망에 결코 빠지지 않습니다. 

마지막 10절도 보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근심하는 자 같아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충성을 다하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걱정과 근심이 멈추지를 않아요. 그러니 근심하는 자의 모습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서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지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거든요. 걱정과 근심의 거리가 가득하지만 우리의 마음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 흘러넘치잖아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 같아요. 통장 계좌를 보면 잔액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서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에게 이렇게 말했잖아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 같아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 선언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한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듯 수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나누어주는 사람이에요.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마지막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실상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 그룹 가운데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하는 친구는 많은 고난을 받고, 오히려 예수님을 모르는 친구는 삶이 형통하여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였던 성도님이 계셨지요? 저는 그분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집사님. 우리는 예수님 믿고 형통하였다는 것으로 전도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복을 받았다고 그것으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불신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나의 삶에 아픔이 찾아올 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아픔을 넉넉히 이겨내는 모습이요, 나의 삶에 고난이 찾아올 때조차 우리 마음에 기쁨이 멈추지 않는 모습이며, 세상의 온갖 불의로 말미암아 억울한 일을 당하는 동안에도 우리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진실한 신앙의 모습이요,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에게 보여주기 원하는 모습이고, 바로 이러한 모습을 통해 그들을 예수님의 은혜로 초대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전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도 큰 아픔과 고통이 늘 찾아오고 있지요? 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맞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과 아픔이 있어요. 그저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많지요.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또 하나의 분명한 진리가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도 여러분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여러분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여러분은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며 
여러분은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실상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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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21. 6. 1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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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교회에서 자주 불렀던 찬양 가운데, 이러한 가사로 시작하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 

모든 사람은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원하지요. 우리나라는 남과 북이 분단되어 있기에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평화를 더욱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이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를 위해 더욱 기도하고, 민족을 위해 더욱 기도하면서 이 땅에 참된 평화가 임하기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굳이 민족적/국가적 차원의 거대담론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겪기도 하지요. 그때마다 우리 모두는 가정에서, 그리고 또 직장을 비롯한 사회생활에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평화롭기를 원하고 그 안에서 화목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한국 여행객들이 꼭 한 번은 찾는 장소가 있습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입니다. 저 멀리 한국에서 일어난 625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군인들의 희생을 기리는 장소입니다. 제가 미국 유학을 떠나 처음으로 머물렀던 곳은 워싱턴 D.C. 로부터 차로 약 4시간 정도 떨어진 린치버그라는 조그마한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에 처음 도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한 장소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도 조그마한 전쟁 기념탑이 있었는데, 한쪽 벽에 그곳 린치버그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앙에 헨리 포드의 명언이 기록되어 있었지요. 

I Now Know That 
Wars Do Not End Wars – Henry Ford 
(이제 나는 깨달았습니다. 전쟁으로는 결코 전쟁을 종식시킬 수 없습니다.) 

그때 저는 이 땅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전쟁의 분명한 교훈을 이역만리 타지에서 새롭게 확인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전쟁은 결코 전쟁을 종식시킬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 그리하여 서로에 대한 미움과 그로 인한 적대적인 태도는 결코 평화와 화목을 도모할 수 없다 매우 단순한 교훈이었지요. 


겉모습에 따른 판단

성경에 등장하는 고린도교회는 성도들 간의 갈등과 분열이 극심했습니다. 이른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고 그리스도파의 존재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갈등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사도 바울을 적대시하여 바울을 공격하고 비난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의 내용만으로는 정확히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그들의 몇 가지 특징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2절은 그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고린도후서 5장 12절) 

바울을 비방하고 대적했던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아니라 외모나 겉모습으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의 다른 구절을 참고하면, 그들은 추천서를 들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이적을 행하거나 눈에 보이는 어떤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사도 바울을 공격하면서 바울은 추천서도 없지 않으냐고, 바울은 눈에 보이는 능력이나 재능이 없지 않으냐고 비난했던 것이죠. 그들이 내세우는 평가 기준은 족보나 혈통, 출신지나 학력, 혹은 눈에 보이는 업적과 같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흔히 자랑하는 그러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러한 태도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데 ‘육신을 따른 평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고린도후서 5장 16a절) 

여기에서 ‘육신을 따라 안다’는 표현은 육신을 따라 평가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여러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평가의 기준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우리도 육신을 따라 사람들을 평가했지요. 그가 부자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그가 많이 배운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그가 크게 출세한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나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 나에게 도움만 받을 사람인지. 이 모든 것이 육신을 따라 사람들을 평가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본문 16절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육신, 곧 겉모습을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예배하고 있지요? 지금 내 곁에 앉아 있는 분의 성별이나 나이나 출신 배경이 여러분에게 중요합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할까요? 지금 내 곁에서 함께 예배하는 그분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 중요해요. 그래서 동일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우리 모두가 믿음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만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 중요하게 여깁니다. 한마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육신을 따라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복음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사도 바울을 대적했던 사람들처럼 육신을 따라 누군가를 평가하면, 그 안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복음의 관점에서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믿음의 공동체에 화해가 일어나고 화평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주변 사람들과 갈등하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우리의 눈을 덮고 있는 육신의 관점이 벗어지기를 바랍니다. 전쟁은 결코 전쟁을 종결시킬 수 없습니다. 폭력이 폭력을 근절시킬 수 없어요. 마찬가지로 육신의 관점으로 나의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한, 우리에게 일어나는 갈등과 다툼은 결코 종결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화평하고, 우리의 가정이 화목하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샬롬으로 가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육신의 기준을 버려야 합니다. 나아가 복음이라는 새로운 평가 기준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가 되어야 합니다. 


화평의 복음

바울의 대적자들은 육신의 관점으로 사람들을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의 관점에서 성도들을 바라보았지요. 그러자 바울은 모든 성도들 안에 일어난 위대한 사건 하나를 감지하게 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이야기를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복된 소식, 곧 복음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큰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유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거듭남이지요.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세력에 억눌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죄악 된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해 버리지요. 나아가 인간의 죄성은 다른 사람을 향해 육신을 따라 판단하고 비판하게 만듭니다. 마침내 내 곁에 있는 이웃과의 관계를 갈등과 다툼으로 이어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옛 모습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전 모습은 모두 지나가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용서를 받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의 딸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주셨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모습은 과거와 별로 다르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신을 따라 평가하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일 뿐, 복음의 관점에서 우리의 참모습을 바라보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복된 소식, 곧 복음이 되는 이유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또 다른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곧 ‘화목’입니다. 본문 18절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고린도후서 5장 18a절) 

모든 선한 것,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것 가운데 최고의 선물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곧, 복음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화목입니다. 동일한 내용이 바로 다음 절에도 등장해요.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고린도후서 5장 19a절) 

위의 18절과 동일한 내용이지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18절과 19절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어요. 발견하셨나요?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을 비롯한 고린도교회 성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19절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상은 신자와 불신자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19절의 세상이라는 단어에 집중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고 세상은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았다고 말씀합니다(요한복음 1장 9-11절).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들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 당신과 화목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는 말로 소개하였던 것입니다(행 10:36).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 사건을 나 자신에게만 적용하는 것 같아요. 사도 바울이 경탄하며 찬양하는 내용, 곧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위대한 선언을 나 자신에게만 적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시듯, 내 곁에 있는 우리의 가족, 우리 교회의 교우, 나아가 나의 직장동료까지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신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필립 클레이턴이라는 신학자는 미국의 백인 중산층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랍다’고 찬양을 부르며 자신의 크고 더러운 죄악이 눈과 같이 희어졌다고 믿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 – 예컨대 흑인이나 멕시칸이나 아시아인들 – 도 그들의 모든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눈과 같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은 믿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나요? 여러분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면서도 그 사실을 정말 믿으실 수 있으세요? 실수도 많이 하시잖아요. 하나님의 뜻을 몰라 이곳 저곳을 헤매기도 하시잖아요. 믿음이 흔들려 세상의 풍조에 휩쓸릴 때도 있지 않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께서 재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정말로 믿으세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고 확신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바라볼 때도 육신을 따라 판단하지 않고, 복음의 기준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도 육신의 기준이 아닌 복음의 렌즈로 바라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여전히 흠도 많고 실수도 많은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신다면, 내 곁에 있는 식구들과 친구들과 이웃들도 여러 가지 단점이 존재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아름답게 재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로 우리가 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고 선포하는 복음은 “화평의 복음”입니다. 


화목의 직분

성도들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가득했던 고린도교회에 사도 바울은 화평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화평의 복음 안에는 우리에게 주신 사명도 있는데, 곧 화목의 직분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고린도후서 5장 18a절)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화평의 복음이지요. 이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고린도후서 5장 18b절)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입니까? 화목의 직분입니다. 여기에 직분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디아코니아’입니다. 주로 봉사와 섬김이라는 의미로 알고 계시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화목의 직분은 화목하게 하는 봉사, 화평을 실천하는 섬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복음은 화평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화목의 직분, 곧 화목하게 하는 봉사와 화평을 실천하는 섬김의 사명이 화평의 복음을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즐겨 암송하는 성 프란시스의 기도문이 있지요? <평화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데 이 기도문을 천천히 묵상하다 보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화목의 직분을 감당하게 해 달라는 기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기도하지요.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는,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는, 신뢰를 
절망이 있는 곳에는,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는,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는,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나의 주님,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기를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기를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가 받는 것은 주는 일에 있고, 
우리가 용서받는 것은 용서하는 일에 있으며,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죽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쟁은 결코 전쟁을 종결시킬 수 없습니다. 육신을 따른 판단은 미움과 다툼을 결코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갈등과 다툼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오직 화평의 복음만이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자리잡은 미움을 제거할 수 있고, 
예수님을 본받아 희생과 섬김을 실천하는 화목의 직분만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샬롬을 이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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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03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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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20. 9. 2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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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구제 헌금에 동참하도록 권면합니다. 그러나 구제헌금을 모아 전달하는 구체적인 사역은 믿음직한 동역자들에게 맡깁니다. 본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헌금한 거액을 그들에게 맡겨도 좋다는 이른바 '신임장'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구제헌금을 맡아 관리할 사람들로 모두 세 명을 언급합니다. 먼저 디도입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구제 사역을 맡아 달라고 권면하였고, 바울의 부탁을 받은 디도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16-17절). 두 번째로 등장하는 사람은 '[디도]와 함께 한 그 형제'라고 표현되어 있을 뿐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는 여러 교회에서 칭찬을 받은 사람으로 구제 사역을 위해 교인들이 추천한 사람입니다(18-19절). 마지막으로 고린도교회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이 즐겁게 구제 사역에 동참할 것을 확신하며 이 사역에 참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22절). 여기에 등장하는 디도 외의 두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누가, 바나바, 아볼로 등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지만 본문에 명기되어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이 구제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 성도들이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여러 동역자들을 세워 그들로 하여금 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투명성과 자발성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이 행하였던 구제 사역의 몇가지 원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투명성입니다. 바울은 최소한 세 명이 구제 사업을 협력하게 하여 재정의 모금과 운영의 투명성을 보장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에서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라고 말하면서(고전 16:3) 헌금을 내는 교인들이 믿고 추천한 사람이 구제헌금을 관리하도록 하겠다는 원칙을 천명한 바 있습니다. 디도는 바울이 추천한 사람이었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두 번째 사람이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19절). 이렇게 교회의 여러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팀을 이루어 재정 운영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투명성과 함께 자발성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분명합니다. 디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라고 말하며(17절), 본문에 등장하는 세번째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사역에 간절한 마음을 품었을 뿐만 아니라, 구제 사역도 더욱 간절하게 바란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22절). 바울이 구제 사역을 집행하는 일꾼들의 자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자신의 소유로 헌금을 하고 그것을 그들에게 맡겨야 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또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겠습니까? 이처럼 바울은 구제헌금을 투명하게 운영하여 성도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였고, 성도들이 자원하여 헌금한 연보이기에 더욱 투명하게 집행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빌미를 제공하지 말라 

사도 바울은 구제 사역이라는 선한 일을 행하면서 투명성과 자발성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본문에는 바울이 그러한 노력을 기울인 이유를 명시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20-21절) 

바울은 구제헌금을 모금하여 궁핍한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선한 사업을 진행할 때 스스로 조심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액의 연보'를 빌미로 사람들의 비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업이며 그 과정에 조금의 부정도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으면 그것은 교회에 덕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업을 하였다고 자부하며, 그러한 일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잘못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잘못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모범은 선한 사역을 감당하는 이들도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종교 개혁자 존 칼뱅은 본문을 해설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사업을 행할 때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자신의 이웃에게 덕을 끼치는 생활로 이끌어 가도록 관심을 가져야 하며, 사단의 하수인들이 자신을 중상모략할 구실을 전혀 찾을 수 없도록 하고, 하나님에게 욕이 돌아가는 일이 없게 하고 선한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각주:1]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손을 펼쳐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행위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방의 받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지 않도록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1. John Calvin, Commentary, 2 Corinthians 8:2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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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20. 6. 18.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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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실이 대조적으로 등장합니다. 먼저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초대교회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한결같이 선포하였던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의 성도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죽은 사람은 부활할 수 없다고, 곧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교회가 부활을 선포하는데 왜 믿지 않느냐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와 같은 분들을 믿음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에도 부활을 믿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고, 우리 시대에도 교회 안에 부활을 믿지 못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 가운데 죽은 사람의 부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이 시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여러분들을 믿음의 길로 인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부활에 대한 불신, 그 파괴적인 결과 

오늘 본문은 부활을 믿지 못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얼마나 치명적인 오류인지 말씀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독교의 가르침을 모두 받아들이고, 교회와 교우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할지라도 부활을 믿지 못하면 그 모든 신앙생활이 헛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단지 기독교 진리의 일부분을 거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든 신앙생활을 무효로 만드는 치명적인 실수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 신앙의 중요성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논의하는데, 오늘은 그 가운데 두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부활 신앙이 없으면 기독교의 모든 믿음이 헛됩니다. 오늘 본문 17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성경은 인간이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은 그 심령이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자신의 죄를 없이할 수도,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죄의 사슬에서 빠져나와 구원을 받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뿐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예수님은 인류의 죄악으로 처형 당하셨지만, 새로운 생명의 능력은 발휘하지 못하신 분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따르더라도, 성경을 읽으며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지라도 우리는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부활 신앙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본문 18절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이 세상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 물론 중요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강력한 실재는 모든 인간을 절망으로 밀어넣기에 충분합니다. 만일 죽음 이후 부활이 없다면, 그리하여 이 세상의 삶이 전부라고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보람 있게 살아가는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으며 특별히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는 죽음 이후의 세상은 모르겠고 지금 이곳에서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만일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모든 사람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관문을 진지하게 응시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그 죽음의 존재가 두렵지 않으십니까? 기독교 신앙은 부활을 믿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 - 곧 영생 - 을 확신합니다. 이 위대한 능력이 기독교 신앙 안에 담겨있는데 교회를 출석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러분만 이 위대한 능력을 포기해버린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이겠습니까? 


죽음 이후의 삶을 바라보라 

사도 바울은 부활 신앙의 중요성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본문 19절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의 삶, 너무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성경이 가르치는 삶의 길을 걸어가면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기독교 신앙이 여러분에게 선물하고자 하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버립니다. 아니, 기독교 신앙의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본문 19절에서 그러한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인간이 통과할 수밖에 없는 죽음이라는 관문을 진지하게 성찰해 보십시오. 그리고 죽음 이후 부활의 삶을 갈망하십시오. 이미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 문을 열고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주님을 믿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 위대한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실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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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20. 6. 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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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위로의 하나님” 오늘 본문 앞에 있는 고린도후서 1장 3절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그리고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풍성한 위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라기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는 우리 모두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으로 소개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통과 환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8절과 9절을 한번 더 읽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8-9a절) 

바울은 자신이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과 환난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힘에 겨운 고난입니다.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고난은 누구나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힘으로는 참아내고 견뎌내기 어려운 ‘힘에 겨운 고난’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신앙이 없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믿음의 영웅이었던 사도 바울,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던 사도 바울까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도무지 자신의 힘과 인내력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힘에 겨운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8절 마지막을 모시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당한 고난이 얼마나 컸는지 살 소망까지 사라진 상태, 하루빨리 이 세상을 떠나고 하나님 곁으로 가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9절을 보시면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믿음이 좋은 사람들, 신앙의 사람들,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믿음의 영웅들은 어떠한 시련이 찾아와도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그 시련을 넉넉히 이길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제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요, 신앙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극심한 고난을 만나 힘에 겨운 환난을 당하면 절망하면서 마침내는 생명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든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민수기 11장 11절부터 보면,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11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적에서 은혜를 입게 하니 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15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가 마음에 얼마나 큰 고통이 있었는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죽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한 사람만 더 예를 들어보죠. 열왕기상 19장 4절을 보시면 엘리야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여러분, 신앙의 사람이라고, 믿음의 사람이라고 고난과 환난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사람이라고, 믿음의 사람이라고 내게 크고 작은 환난이나 고난이 찾아올 때 그것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영웅들도 자신에게 힘에 겨운 환난이나 고난이 찾아올 때 낙담하고 생명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까지 품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의 사람과 불신앙의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차이점은 우리에게 환난이나 고난이 찾아왔을 때 믿음의 사람들은 놀라운 교훈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9절에 등장합니다. 9절의 말씀을 한번 더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사형 선교가 내려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바로 그 환난과 고난 속에서 바울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지요?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9절을 자세히 보시면,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데,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세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그 하나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고 더 이상 삶에 대한 소망을 다 잃어버린 우리를 건지시고 살리시는 바로 그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 바로 그 믿음만이 힘에 겨운 고난과 생명을 포기하고만 싶은 절망스러운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혹시 그 옛날 사도 바울이 겪었던 아픔과 고난을 당하고 계신 분이 계신가요? 만일 그렇다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소망을 불어 넣어주시는 위로의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그 믿음으로 여러분이 지금 당하고 있는 그 아픔과 괴로움을 넉넉히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인 11절 말씀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자신의 극심한 고난과 환난을 이야기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난당하고 환난 당하는 사도 바울을 위해 함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교회와 우리의 신앙 공동체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고난을 당하고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합심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합심해서 고난과 환난 가운데 계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 마지막 결론이 11절의 마지막에 등장하지요.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곧 하나님을 향한 감사입니다. 
지금은 고난을 당하고 지금은 환난을 당하지만,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고 환난 가운데 있는 지체들을 위해 합심으로 기도할 때 그 마지막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제목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고난과 환란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해 합심으로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고, 나아가 우리의 기도의 제목들이 – 환난과 고통 가운데 있으며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기도의 제목들이 – 하나같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제목으로 바뀌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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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