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강해2020. 6. 7.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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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돼었는가? 』 

영국의 철학자였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1927년 사우스 런던(South London)의 시청에서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제목으로 대중연설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Why I am not a Christian” 버트런드 레셀이라는 사람은 당시 워낙 유명한 사상가였기에 그 파장은 온 유럽을 뒤덮었습니다. 이후 그의 연설은 책으로도 출판되었고, 그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서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에서 꾸준히 판매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러셀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의 연설과 책이 큰 반향을 일으켰기에 그에 대한 기독교 내의 반응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표적인 영국 복음주의 사상가였던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입니다. 

존 스토트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Why I Am A Christian)라는 책에서 자신의 회심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그는 기독교 배경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기독교 교육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루터교 교인으로서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매우 열심이 있었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존 스토트는 자신이 크리스천이 된 중요한 이유로 제일 먼저 그의 기독교적 배경을 꼽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덧붙여 이런 설명도 합니다. 자신의 기독교적 배경, 곧 자신이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기독교 배경의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하나의 이유는 될 수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존 스토트는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 되었을까요? 그는 자신이 크리스천이 된 두 번째 이유로 자신이 회심을 경험했던 어느 날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고, 기독교적 배경의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마음에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938년 2월 13일, 존 스토트는 성서유니온이라는 단체가 주관하는 집회에서 한 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때 설교를 하셨던 배쉬라는 분은 이렇게 선포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빌라도를 따라 나약하게 예수를 거부하든지, 그분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그 집회가 끝나고 존 스토트는 배쉬라는 바로 그 분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속 마음을 털어놓자, 배쉬는 다시 한번 존 스토트에게 요한계시록의 말씀으로 권면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을 들은 존 스토트는 그날 밤 자신의 숙소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에 모시는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각주:1] 존 스토트는 자신의 회심 과정에 있었던 바로 이 사건도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배쉬라는 분의 말씀을 듣고, 권면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했지만, 자신의 결단이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 되는 데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존 스토트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 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했을까요? 존 스토트의 글을 잠시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는, 궁극적으로 제 부모나 스승의 영향도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저 자신의 결단 때문인 것도 아니며, 바로 ‘천국의 사냥개’ 때문입니다. 즉, 제가 원하는 길로 가고자 도망할 때조차도 끈질기게 저를 쫓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사냥개이신 그분이 은혜롭게도 저를 추적하지 않으셨다면, 오늘날 저는 헛되고 버림받은 인생들의 쓰레기더미 위에 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왜 크리스천이 되셨습니까?” “당신은 왜 지금도 크리스천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중에 혹 이렇게 대답하실 분도 계십니까? ‘나는 모태신앙이요,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을 배웠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믿는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렸을 때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신앙을 가지고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혹 이렇게 대답하실 분도 계십니까? ‘저는 친구의 전도를 받아서, 혹은 가족 식구 가운데 누군가의 전도를 받아서 신앙생활을 했고, 지금은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을 교회로 인도하신 그 누군가의 매우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혹 이렇게 대답하실 분도 계십니까? ‘몇 년 전, 하나님께서 설교로, 혹은 성경 말씀으로, 혹은 전도자의 권면으로 내 심령에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졌고 바로 그때 저는 하나님의 위대한 초청에 응답하였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 그분을 여러분의 구세주로 영접하시는 바로 그 결단도, 사실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하만 장군 

여러분은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이었던 나아만 장군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 ‘큰 용사’였다고 묘사합니다. 또한 성경은 그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였다고 묘사합니다. 그는 큰 용사였습니다. 실력이 있어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시대 대부분의 가장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웠습니다. 당시의 직업이라는 것이 대부분 농업이나 축산업 밖에는 없었어요. 그런데 당시 남자들이 출세를 하려면, 농업 기술과 축산 기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출세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술이 필요할까요? 네, 당시로는 전쟁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나아만은 당시 출세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그리고 가장 중요했던 기술, 곧 전쟁기술이 탁월했던 실력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뭐지요? 그가 나병 환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나아만 장군이 나병에 걸린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나아만 장군이 몸에 질병, 그것도 나병이 걸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연히 일어난 일일까요? 아닙니다. 그가 재수가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깊은 섭리였습니까? 네, 바로 그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나라는 아람 나라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람 나라로 잡혀온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다. 아람 나라에 끌려온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남달랐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아람에 포로로 끌려오면서 신앙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나아만의 집에서 나아만의 아내가 심부름을 시키던 이스라엘 소녀의 믿음은 어떤 상태였어요? 비록 아람 나라에 끌려와 있지만 그 마음에는 아직 믿음이 있어요. 하나님은 나아만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요. 그래서 그의 주인에게 말하잖아요. 이스라엘 나라에 엘리사라는 분을 찾아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나아만의 아내가 심부름 시키던 종이 이스라엘 소녀였고, 또 그 소녀가 하나님과 엘리사에 대한 믿음이 마음에 확고했던 사람이었던 것이 우연입니까? 아닙니다. 나아만이 재수가 좋기 때문이었나요?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온 그 여종의 말을 듣고 나아만이 이스라엘로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집 문에 이르렀어요. 그러자 엘리사가 직접 나오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사가 종을 보내서 요단 강에 7번 몸을 씻으라고 말을 전합니다. 요단 강에 몸을 7번 씻으면 나병이 깨끗해진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나아만 장군이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요단 강에 뛰어들었지요? 아닙니다. 나아만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선지자가 직접 나온 것도 아니고, 선지자가 자신의 환부를 붙잡고 기도해준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무 화가 나서 나아만은 그만 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바로 그때 나아만의 부하들이 나아만을 말립니다. 그리고 한 번 해보자고 설득하죠. 
여러분, 이 장면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십시오. 나아만의 곁에, 그것도 엘리사를 찾아가는 바로 그 시점에 나아만을 수행했던 부하들이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바로 그때 나아만의 곁에는 지혜로운 부하들이 있었단 말이죠. 여러분, 이것이 우연입니까? 아닙니다. 나아만이 재수가 좋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뭐지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입니다. 

결국 나아만은 요단강에 자신의 몸을 7번 씻고 나병에서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왕하 5:15) 

아람 사람 나아만이 나병에서 깨끗하게 된 이 사건의 핵심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병이 나았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아니, 하나님이 병을 고쳐주실 거면 처음부터 병에 들지 않도록 해주시면 더 좋잖아요. 병이 낫는 것, 나병이 깨끗해지는 것만 중요하다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나아만이 어떻게 고백합니까? ‘아~,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구나’ 바로 이 고백이 나아만의 입술을 통해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믿음을 고백할 때까지 치밀하게 몰고 가셨던 거죠. 존 스토트의 표현대로라면 하나님께서 마치 ‘천국의 사냥개’가 되신 것처럼 양들이 다른 길로 가려고 할 때 양의 다리를 깨물어서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몰고 가셨다는 겁니다. 몰고 가셨어요. 

여러분, 나아만으로 하여금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도록 몰고 가셨던 그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 모두의 삶을 몰고 오시지는 않으셨습니까? 나아만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넣어주기 위하여 천국의 사냥개가 되셨던 그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한 천국의 사냥개가 되어 우리를 믿음의 길로 이끌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선물 특별히,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인 구원은 초라한 포장지에 쌓여있는 듯합니다. 포장도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그 위대한 선물을 지금 당장이라도 받을 텐데, 포장이 초라해요. 나아만의 경우가 그렇지요. 하나님에 대한 신앙,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하나님은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선물을 무엇으로 포장하셨어요? 나병, 한센병으로 포장하셨다고요. 
나아만의 때로부터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나오미와 룻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오미와 룻에게 위대한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위대한 선물이란 그들을 통하여 다윗 가문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그 위대한 선물의 포장지가 뭡니까? 그 위대한 선물을 싸고 있는 포장지는 바로 남편의 죽음입니다. 나오미도 룻도 남편의 죽음을 경험해야 했지요. 바로 그 초라한, 아니 너무도 거북한 포장지 안에 하나님은 위대한 선물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으로부터 다시 한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또다시 요셉이라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도 정말 위대한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 선물이란 요셉을 통하여 요셉 가족의 생명은 물론이요, 이집트 지역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위대한 사명, 이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은 어떠한 포장지에 싸여 있었을까요? 형제들로부터 받는 배신, 그리고 감옥, 누명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선물이 초라한 포장지, 아니 너무도 거북한 포장지에 쌓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사냥개 되시는 하나님께서 존 스토트 목사님을 몰아가 결국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하신 것처럼, 천국의 사냥개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아만 장군을 결국은 믿음의 자리에 서게 하셨던 것처럼, 비록 겉에 보이는 포장지가 초라하고 때로는 거북할 지라도 천국의 사냥개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의 여정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그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치 천국의 사냥개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아만 장군을 몰고 가셨던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였다고 하여 만족하시지 않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우리를 또다시 말아가십니다. 바로 믿음의 성숙을 위해서 말이죠. 그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지 25년, 하나님은 그 기나긴 훈련의 기간을 거쳐 드디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100세에 아들을 낳는 기적을 경험했으니,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과 신뢰가 얼마나 깊었겠습니까? 나아만 장군은 몸에 나병이 찾아오고,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 몸이 깨끗하게 고침을 받고, 그 모든 과정에서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였다면, 아브라함은 이미 25년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어요. 믿음의 여정을 시작했다고요. 그리고 25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겪었던 그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결국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 있는 아들 이삭을 얻게 됩니다. 그러니 그의 지금 믿음은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나아만과는 차원이 달라요.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제 아무리 25년 전에 믿음 생활을 시작했고, 아브라함이 제 아무리 신앙의 깊이가 있고, 아브라함이 제 아무리 믿음의 구체적인 열매인 그의 아들 이삭을 양육하고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그보다 더욱 깊은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깊고 더욱더 높은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도록, 천국의 사냥개 되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아브라함을 몰아가십니다. 어떻게요?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 놓으라고 명령하시잖아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하신 바로 그 장면에서, 하나님이 여호와 이레, 곧 준비하시고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준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한 계획 속에서 아브라함을 몰고 가십니다.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이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최고봉에 이르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 고민과 괴로움을 더하면서까지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원하셨던 것은 그의 아들 이삭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이었던 것이지요(창 22:12). 

어느 교회에 참으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셨던 40대 중반의 집사님 부부가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그렇게 모범적인 분이 계시잖아요. 누가 보아도 아름답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족이 있는데, 바로 이 집사님 부부가 그러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 교회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부부의 아내 되시는 집사님께서 대장암 판정을 받으셨다는 겁니다. 이제 40대 중반이니 얼마나 젊습니까? 그 부부에게는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두 딸이 있었어요. 아직 자녀들을 돌보아야 하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여 집사님은 투병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겠어요. 많은 성도들이 문병을 가서 위로하곤 했습니다. 

집사님께서 투병을 시작한 지 약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주일 오후에 찬양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구역별로, 그리고 각 기관별로 준비한 찬양을 발표하였습니다. 모든 순서가 마치고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합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회를 보시던 분이 앞에 나오셔서 특별 순서가 준비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지난 1년여 간 투병하셨던 여 집사님의 찬양 시간이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그 여 집사님께서 앞에 나오셨는데, 피골이 상접하다는 표현 그대로였습니다. 투병을 시작하시기 전에 비해서 몸이 1/3로 마르셨던 거 같아요. 바람만 불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이었습니다. 온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여 집사님께서 앞에 나오셔서 찬양을 하기에 앞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너무도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서 그 동안 제가 얼마나 교회 성도님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셨는지를 새삼 경험하고 있습니다.” 집사님은 이렇게 간증하시고는 찬양을 부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찬양은 바로 “날 구원하신 주 감사”였습니다.  

몸은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엄마로서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은 두 딸을 돌보지 못하는 아픔도 있었겠죠. 그 모든 짐을 자신의 남편에게 남겨두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답답한 마음이 있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그분 마음에는 감사와 기쁨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누리며 기쁨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약 6개월 정도가 흐른 뒤, 그 교회 성도들은 여 집사님의 장례식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슬퍼하며 유족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장례식에 참여했던 성도들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위로가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약 6개월 전 고인의 간증과 찬양이 교인들의 마음에 여전히 감동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천국의 사냥개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도록 우리를 몰아가십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아요. 우리를 끝까지 몰아가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마치는 그 순간까지 믿음의 성숙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포장지가 초라할 수도 있지요. 때로는 거북합니다.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뒤돌아본다면 우리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나를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셨다고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그 첫째는 부활의 주님이 바울 자신에게 보이셨다는 것입니다(고전 15:8). 부활의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두 번째는 은혜는 바울 자신이 사도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망한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바울은 사도가 되었기 때문에 고생 문이 활짝 열린 사람이에요. 그가 만일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래서 여전히 유대교에 몸을 담고 있었다면, 그는 평안한 일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가 만일 사도가 되어 않았다면, 그렇게 모진 고난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고요.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에 자신이 과거에 누리던 모든 영광과 풍요로움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바울은 사도가 되었기에 고난과 핍박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그 모든 것이 크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었고, 그분의 사도가 되어 사명을 감당하는 그 길은 비록 고난이 따라오는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재물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정된 삶을 허락해주신 것도 큰 은혜지요. 그러나 비록 풍요롭지 못하고, 비록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 찾아오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하시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믿음의 성숙을 경험하게 하시는 은혜는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입니까? 바로 이러한 은혜를 충만히 받아 누리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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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21 “존 스토트”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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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저 스티어, 『존 스토트의 생애』(서울: IVP, 2010), pp. 47-4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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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20. 6. 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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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외향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계획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즉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감성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성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보면, 교회를 출석하는 성도님들 사이에도 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지금처럼 새벽 시간에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는 분들이 계신가 하면 어떤 분들은 새벽시간에는 도저히 일어나기 힘든 반면, 밤늦은 시간에 철야 기도를 좋아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기도를 해도 어떤 분들은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 뭔가 기도한 것 같은데, 어떤 분들은 조용히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더 경건하게 여기는 분들도 계십니다. 교회 안에, 특별히 성도들 안에 존재하는 이 다양성, 이 다양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 안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성도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 – 곧 통일성 – 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의 몸 안에, 다시 말해 하나의 교회 안에 다양한 지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몸의 지체가 많으나” 몸은 몇 개입니까? ‘한 개의 몸’입니다. 


13절도 보십시오. “우리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사람은 유대인이고, 어떤 사람은 헬라인입니다. 인종이 달라요. 또 어떤 사람은 종이고, 어떤 사람은 자유인입니다. 신분이 완전히 달라요.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출신이 다 다르지만, 누구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까? “한 성령”으로, 한 분이신 성령님, 동일하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세례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13절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한 분이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한 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옆에 앉아 계신 분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여러분과 다릅니다. 똑같이 생긴 분은 한 분도 안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이곳에 나와 있지만, 우리에게는 흔들릴 수 없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지요, 우리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한 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세례를 받았고, 한 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충만을 누리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구역에 나와 달라도 너무 달라서 함께 신앙생활하기가 힘들다고 생각되는 분들이 계세요? 우리 교회 안에 여러분과 모든 점이 달라서 도저히 함께 신앙생활하기 힘들다고 생각되는 분들이 계신가요? 바로 그분도 여러분과 동일하게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임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도 임하셨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성도들이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 우리가 하나될 수 있는 근거를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성도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14절과 1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몇 개입니까? “여럿이니”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다양한 지체에 무엇들이 있는지 나열하지요. 그것이 15절부터의 말씀입니다. 한 몸에 발이 있고, 손이 있고, 귀가 있고, 코가 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그 안에는 다양한 지체가 붙어 있다는 비유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본문 20절까지의 말씀이지요. 다시 말해, 교회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한 분 성령님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누립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 시간에 한 분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각 사람은 생김새가 다릅니다. 신앙생활의 방식이 다릅니다. 각자가 처해 있는 형편과 기도제목이 다 다릅니다.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교회 성도들 사이에 다름,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오늘 본문 14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한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18절입니다. 우리 18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자, 한 몸인 교회 안에 다양한 지체, 곧 다양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교회 안에 다양한 성도들을 배치해 놓으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18절을 말씀을 보면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다음 구절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무엇에 따라서? “그 원하시는 대로” 각각 지체를 두셨습니다. 

여러분, 왜 나와 이렇게 다른, 나와 이렇게 잘 안 맞는 사람이 내 옆에 있을까? 왜 하필 내 구역일까? 왜 하필 나와 같은 부서에서 봉사하나? 라는 생각이 드세요?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잘 맞지 않는다고 여기는 혹은 남편, 혹은 아내, 혹은 교회 내의 어떤 성도들과 여러분이 함께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배치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21절에서 사도 바울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21절의 말슴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눈이 손에게 너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향해서 ‘너는 우리 교회에 필요 없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그러한 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오늘 우리 교회에, 내 곁에 두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 사람을 오늘 내 곁에 두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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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20. 6. 7.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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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가장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위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 인생의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말씀과 기도로 나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며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조금씩 나아갑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성화의 과정’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여러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성화의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성화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최종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의 뜻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지요.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여러분,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행동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여러분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 나아가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가지 질문이 나오지 않으세요?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 곧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은 사도 바울이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 시장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고기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다가 시장으로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 성경의 표현으로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시장에서 사 먹는 것이 양심에 걸리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음식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믿음으로 우상에게 드려졌던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여전히 믿음이 연약한 사람의 양심에 걸림돌이 될 상황이라면 그 사람을 위해서 고기를 먹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삶, 다른 사람의 양심까지도 고려하는 배려의 삶을 강조하면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은 모호한 개념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매우 구체적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곧 어떤 사람에게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나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아름다운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까요? 단순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양심, 다른 사람의 마음을 힘들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때,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와 섬김의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통해 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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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19. 1. 21.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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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큰 고난과 역경을 당하는 장면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방 민족 애굽에 살면서, 그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은 극에 달하였고 급기야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괴로운 모습을 불쌍히 여겨주셨던 것이지요. 우리는 이 대목에게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곧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바라보시며 우리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혹 여러분의 사정과 여러분의 형편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끼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모두 헤아리고 계시며 지금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다만, 모세라는 한 사람이 준비될 때까지 참고 기다리셨던 것이지요. 드디어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을 전해들은 모세의 첫번째 반응은 거부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들었을 때 두 가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계획이 너무도 거대한 것이어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계획과 목표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모세 자신이 그와 같이 큰 일을 행하기에는 부족한 인물이라는 점이었겠지요.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저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3장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1)

 

모세는 출애굽이라는 거대한 사명 앞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설득하기 시작하시죠. 그런데 여러분, 모세를 설득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첫번째 대답은 너의 지팡이로 큰 이적과 기적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첫번째 대답은 모세에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대단한 리더십을 주시겠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첫번째 대답은 모세에게 아론이라는 좋은 대변인을 붙여주겠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적이나 표적을 행하는 능력도, 말을 잘하게 되는 지혜와 지식의 은사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탁월한 리더십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처음 주셨던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사명 앞에 주저하는 모세를 향해 하나님께서 주신 첫번째 대답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3:12)

 

출애굽은 모세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사명입니다. 아니 출애굽은 그 어떤 인간의 능력으로도 불가능한 사명입니다. 나일강의 물을 피로 바꾸는 능력이나 지팡이를 뱀으로 바꾸는 능력을 모세에게 주신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몇 가지 재능만 가지고는 출애굽의 위대한 사명은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탁월한 능력이나 대단한 언변과 같은 기능은 부족하더라도 하나님 자신이 모세를 부르시고, 하나님 자신이 모세를 보내시며,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와 함께 계신다면 모세는 출애굽의 사명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을 바라보시면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요.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했던 것이 나에게 능력이나 재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나요? 반대로 질문을 바꾸어 볼까요? 그래도 지금까지 이만큼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 여러분이 소유한 재능이나 능력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셔서 지금까지도 여러분의 인생길을 지도해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한번만 더 질문을 드려볼까요? 여러분의 가정이 그래도 지금까지 서로 화목하며 이정도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비결이 정말로 여러분이 소요한 능력이나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의 가정을 불쌍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시마다 때마다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보다 또 다시 새로운 기술, 새로운 재능, 새로운 능력, 새로운 은사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한 평생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비결도, 우리가 한 평생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비결도 특별한 재능이나 탁월한 은사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하나의 사실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의 주제는 은사입니다. 일반인들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 용어이지만, 교회에서는 어렵지 않게 듣게 되는 단어이지요.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은사라고 합니다. 특별히 은사는 재능이나 능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누군가에게 은사가 있다,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면 그 의미는 바로 그 사람에게 그와 같은 능력이나 그와 같은 재능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아홉 가지의 다양한 은사가 등장하는데 모두 능력이나 재능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식의 은사, 병을 고치는 은사, 능력을 행하는 은사,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 그리고 방언을 말하고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 등입니다.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은사의 종류만 들어도 은사가 특별한 능력이나 재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특별한 능력이나 재능, 곧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가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 곧 하나님의 사명을 성공으로 이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와 사명을 주시지만, 우리가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은사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사도 바울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역이 다양하다고 말씀합니다. 모세에게는 출애굽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여호수아에게는 가나안 정복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사무엘에게는 민족의 영적 갱신을 이루는 사명이 주어졌고, 다윗에게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정의와 공의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역이 주어졌습니다.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다르고 감당해야 하는 사역이 다릅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교회를 섬기고 있지만, 어떤 이들은 목회자가 되어 말씀을 전하고 성도를 돌보는 사역을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성도님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교회의 구석구석에서 봉사하고, 또 가정과 직장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여러 가지 사역을 감당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각자가 담당해야 하는 사역이 다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사역은 여러 가지나사역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핵심입니다.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분은 동일한데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는 모세와 같이 홍해를 가르거나 바위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할 수 있는 은사를 소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 왕에게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한없이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솔로몬이 소유한 탁월한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에게 능력을 행하는 은사를 풍성히 부어주셨지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엘리야와 같은 능력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우리에게 모세와 같이 기적을 행하는 은사는 없고, 솔로몬과 같은 지혜와 지식은 은사는 없고, 엘리야와 같이 능력을 행하는 은사는 없을 지라도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에게 은사가 조금 부족하여도, 우리에게 재능이 조금 부족하여도 우리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향하여 오늘도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양성의 인정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은사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성도들 각각에게 주어진 조그마한 은사들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를 계속 읽어보면 고린도교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은사는 주로 방언과 예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방언과 예언이라는 몇 가지 은사에 집중하여 서로 비교하며 다투고 분쟁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로잡기 위해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기록하면서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성령께서 임하셔서 방언을 말하게 하고, 또 어떤 이에게는 성령께서 임하셔서 예언을 하게 하시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성령께서 임하셔서 능력을 행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신다고요. 은사의 내용, 은사의 종류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면 서로 비교하면서 시기와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은사를 이해할 수 있어요. 비로서 포용하고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고요.

 

그래서 개별적인 은사보다는, 모든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우리 함께 1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11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그의 뜻대로누구의 뜻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것”, 그것이 바로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사람마다 다양한 은사가 주어진 현상을 받아들일 수 있고 포용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의 특성과 다른 사람의 다양성을 인정하게 된다고요.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은사가 주어지고 직분과 사역이 주어지는 것이 그 뒤에는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은사를 주로 다루고 있지만 은사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4절을 보시면, “은사는 여러 가지나라고 말씀하면서 은사를 이야기하죠. 그러나 5절을 보시면 직분은 여러 가지나라고 하면서 직분을 언급합니다. 뿐만 아니라 6절을 보시면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라고 하며서 사역이 등장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같은 교회에서 예배하며 같은 교회를 섬기지만 우리는 서로 은사가 다릅니다. 우리는 서로 직분이 다릅니다. 우리는 서로 사역이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성도들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의 종류, 직분의 종류, 사역의 종류가 뭐 그리 중요합니까? 저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은사가 있어서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하지만 나는 뒤에서 섬기는 일에 은사가 있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요.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참으로 믿는다면, 많은 사람에게 리더십을 발휘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 모임을 주도하고 나는 그 모임에 열심히 동참해서 따라가주는 것이 문제될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삶에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여러분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의 은사를 비교하고, 무엇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의 직분을 비교하고, 왜 나와 다른 사람의 사역을 자꾸 비교합니까?

 

필립 얀시의 책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등장합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천사 두 명을 부르셔서 심부름을 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첫번째 천사에게는 세상에 내려가서 큰 도시 하나를 다스리는 명령을 주십니다. 그리고 두번째 천사에게는 세상에 내려가서 조그마한 마을의 골목길을 청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필립 얀시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과연 이 두 천사 가운데 누가 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을 감당했을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과연 이 두 천사 가운데 누가 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였을까요? 필립 얀시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두 천사 모두 똑같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의 종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자신들이 쓰임받을 수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교회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은사를 가지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직분에 따라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실 때 여러분의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하십니까? 혹여 다른 사람과 은사를 비교하고, 직분을 비교하고, 사명의 종류를 비교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두신 기쁨을 모두 날려버리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모든 일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와 직분과 사역의 내용과 상관 없이 지금도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

 

모세는 결국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힘입어 바로를 향해 전진하였습니다. 당시 전 세계를 다스리고 있었던 애굽의 황제 바로에게 그저 미디안의 목동이었던 모세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모세와 바로의 싸움은 바로의 항복으로, 모세의 완벽한 승리로 결론나지요. 그것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모세에게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고, 모세에게 탁월한 지도력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며, 모세에게 언변이 좋은 대변인 아론이 있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모세에게는 오직 한 분,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출애굽이라는 세계 역사에 전무후무한 위대한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모세도 이제 40년의 사역, 120년의 생애를 마감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여호수아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은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권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사명을 이제는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이어받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자신의 생애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모세의 마음에 결코 빼앗길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 그의 능력도 예전 같지 않고, 그의 사명도 이제는 모두 끝나버린 그 순간에도 모세의 마음에 깊이 자리잡아 결코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는 한가지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며 남겨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 사력을 다하여 말씀을 전하며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진주, 그의 마음 속에 있는 보화를 끄집어 냅니다. 그리고 선언하지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4-5)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는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내리는 기적을 행해보았지만 그것이 바로 한 사람의 마음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세는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행해보았지만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모세는 하늘에서 맛나와 매추라기를 내리는 기적을 행하였고,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나오게 하는 능력을 행해보았지만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모세가 40년의 사역, 120년의 생애를 통해 깨달은 것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며, 그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변화시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생을 다하였을 때 모세는 남겨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뛰어난 재능이나, 탁월한 은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가득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능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보다 매일의 삶에 풍성히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한데 어우러질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하고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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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18. 1. 2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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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8장으로 넘어오면서 바울은 새로운 주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음식에 대한 문제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8장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이라고 시작합니다. 지금 바울의 편지를 받아보고 있는 성도들이 살았던 지역, 곧 고린도에서는 시장에 나온 거의 모든 고기가 이방 신전에서 제물로 바쳐졌던 제물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틀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가축을 잡으면 먼저 자신들이 섬기는 이방 신들의 제단에 그 고기를 올렸고, 그 뒤에 고기를 먹기도 하고 시장에 내다 팔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린도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시장에서 고기를 사 먹는 것은 그나마 큰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더 큰 문제는 10절에 등장합니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당시 고린도에 있었던 이방 신전들은 정기적으로 마을 잔치를 열었습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이 고기를 쉽게 먹을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지요. 대부분의 사회생활이 신전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당시 고린도에서는 신전에서 가축을 잡아 신전에서 이방의 우상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그 고기로 동네 잔치를 열었던 것이지요. 실제로 아스클레피온이라는 신전을 조사해보면 신전 안에 식당이 있었고, 그 식당은 공동으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지역 주민에게 고기를 제공하였던 것이지요.[1] 쉽게 말해 오늘날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마치고 식당에서 무료 식사를 나눠주는 형태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정기적으로 고기를 섭취하고 싶으신 분들이 우상의 신전에서 베푸는 식사 초대에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들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그들의 구호가 등장합니다. 여러분 혹시 기억하시나요? 고린도전서 6장에서 음행을 행하는 사람들의 표어가 등장했지요? “모든 것이 가하다고린도전서 7장에서는 부부관계를 멀리하는 사람들의 표어가 등장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이제 고린도전서 8장에는 우상의 신전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식사를 하였던 사람들의 표어가 등장합니다.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1b)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지식이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지식의 내용이 4절에 등장하는데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4)

 

여러분이 산에 가셨다가 점심 식사 때가 되었어요. 그런데 우연히 여러분의 눈에 산 속에 있는 사찰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갔더니 점심을 주는 거에요. 여러분이 사찰에서 한 끼 식사를 든다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릴까요? 여러분이 절에서 점심 한끼 드셨다고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건가요? 아니죠.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지식이 바로 그런 겁니다. 세상에 많은 신들이 있지만 많은 우상들이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분명한 지식이 있습니다. 온 땅에 참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온 땅에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구세주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없어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주장, 곧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교회에 지식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1b)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 지식이 한 사람을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풍성하게 하고 열매 맺게 합니다. 신앙생활에 유익을 주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정기적으로 우상의 제단에서 제공하는 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변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교우들을 향한 사랑이지요. 그들의 행동은 지식의 차원에서는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의 행동을 사랑이라는 측면에서는 비판합니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9-11)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힘은 지식이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 하나님에 대한 지식, 신학적인 지식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하는 비결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11절의 표현과 같이 지금 내 곁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을 볼 수 있는 마음, 곧 십자가를 통하여 교우들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랑의 마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의 귀한 지체요 일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새벽 우리가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에 지식을 넣어주시기 보다는 우리의 마음에 사랑을 더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셔서 우리가 사랑의 마음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성도들을 바라보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연수가 늘어날수록 지식이 증가하여 교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연수가 늘어날수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마음이 풍성하여져서 우리가 속한 가정과 교회를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우상 신전의 식사 초대에 대해서는 최승락, “고전 8~9: 그리스도인 권리의 올바른 사용”, <고린도전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9), 145-146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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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18. 1. 2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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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결혼에 대한 여러가지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결혼을 할 것인가, 아니면 독신으로 지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 경우가 등장하는데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남녀가 결혼을 할 것인가의 문제가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사별하신 분들이 재혼을 할 것인가의 문제가 다른 하나입니다. 본문을 묵상하기에 앞서 한 두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독신은 전적으로 신앙적인 이유로 결혼을 하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성경이 쓰였던 고대사회에서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하는 것이 좋다’(고전 7:1)는 생각에 결혼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독신을 생각하는 이유와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독신의 이유는 그 출발점부터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또 한가지, 성경은 결혼에 대해 반드시 해야 한다거나 반드시 하면 안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25a)

 

그러므로 결혼을 해야 한다, 혹은 결혼을 하면 안된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성경적인 대답이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서 하나님은 결혼으로 인도하기도 하시고, 독신으로 인도하기도 하십니다.

 

이러한 전제 위에 이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어놓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6)

 

여기서 말하는 임박한 환난이란 고린도교회에 임하는 고난 혹은 기근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곧 오실 것이기에 굳이 결혼을 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준비할 필요 없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는 의견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결혼과 독신 가운데 독신 쪽에 손을 조금 더 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사별한 남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27)

 

여기서 놓인다는 것은 이혼보다는 사별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1]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면 굳이 다른 아내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권면이지요. 물론 바울은 결혼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나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28a)

 

그러나 바울이 처음부터 밝히고 있는 것처럼 결혼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명령하신 계명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자신과 같이 독신으로 있는 것이 유익하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을 필요는 없다고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다만, 사별한 여성의 경우에는 재혼을 할 때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39)

 

사별한 여성은 자신의 뜻대로 재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만하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은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와 결혼할 것을 권면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사별한 여성의 경우에도 바울은 굳이 재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겠다고 말합니다(40a).

 

결혼하지 않은 남녀의 결혼이든 사별하신 분들의 결혼이든 바울은 동일한 원리를 권면합니다. 결혼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가장 잘 표현한 구절을 오늘 본문에서 찾으라면 38절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

 

반복하여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거나, 반드시 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결혼을 안하는 것이 왜 결혼하는 것보다 더 잘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지, 곧 그 이유입니다.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명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32-34)

 

이 말씀에 세상 일주의 일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면 가정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고민거리들로 세상 일을 근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신으로 살면 오히려 마음을 집중하여 주의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권면이 추구하는 목적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35)

 

그러고보니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결혼에 대한 다양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답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지금 고린도교인들 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일에 집중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마음의 흐트러짐, 마음의 흔들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부부사이에 별거하는 문제, 이혼하는 문제,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결혼하는 문제, 사별하신 분들이 재혼하는 문제 등으로 그들의 마음이 온통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그것이 안타까워서 그들에게 별거의 문제는 어떻고, 불신자인 배우자를 대하는 문제는 어떻고, 이혼의 문제는 어떻고, 결혼의 문제는 어떻고 다 설명해줍니다. 그러한 문제들은 이치에 합당하게 처리하고, 더 이상 그러한 문제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다양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도 우리에게는 크게 다가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무엇인가 평안하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데 방해가 되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름답게 해결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변의 다양한 문제들이 이치에 맞게 잘 해결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것은 그 모든 문제들로부터 자유 하여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1] 김지철, <고린도전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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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18. 1. 2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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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주제는 매우 명확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가 되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7)

 

20절에도 가장 단순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지요.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마지막 세번째로 반복되는 구절은 24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짧은 여덟 절 가운데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으니 오늘 본문의 주제는 너무도 명확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나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아가,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교훈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어주고 있습니다. 먼저 할례입니다.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8)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유대인 출신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이 있었고, 이방인 출신으로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할례를 받은 것과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을 가지고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에요. 아무래도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겠지요. ‘나는 조상적부터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이라고, ‘당신이 이제 막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아니냐. 그래서 이방인으로서 할례를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고린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들도 뒤늦게나마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 대해 사도 바울은 명쾌하게 답을 주지요. 각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이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19)

 

우리 중에는 부모님부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던 분들, 그래서 태어난 지 두 돌도 되지 않아 유아세례를 받은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한 분들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을 따라 예배당에 나오며 믿음을 자라났던 분들입니다. 반면,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부모님이나 식구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이후에야 하나님께 나오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이러한 차이가 큰 것처럼 보이지만, 오늘 성경은 그러한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를 받은 분들은 자신의 삶에 극적인 경험이 부족하다고 아쉬워할 것도 없고, 늦은 나이에 세례를 받으신 분들은 유아세례를 받은 분들을 부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유아세례를 받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그 하나의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대로 생활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하나의 예를 우리에게 제시하는데, 곧 고대 로마 사회에서 노예의 신분, 종의 신분에 있는 사람들의 예입니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1)

 

나의 사회적인 신분이 종입니다. 나의 사회적인 신분이 노예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돈으로 사고 팝니다. 나는 종이기 때문에 주인이 무엇을 명령하든 거역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적으로 엄연히 존재하였던 노예제도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고린도교회를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사회적 신분은 종이고 노예입니다.

 

사회적 신분이 종이고 노예였던 분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분들은 스스로를 바라보며 절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나 같은 노예도 사랑하실까? 나는 오늘이라도 주인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팔릴 수 있고 주인이 무엇을 명령하든 그것을 행해야 하는 사람인데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물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것을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종이기에 노예이기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은 버리라는 뜻입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2)

 

여러분의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는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동시에 여러분이 제 아무리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다하더라도 바로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책임이 주어져 있는 것이지요.[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그대로 살아가십시오. ,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불평하거나 탓하지 말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에게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십시오. 아울러, 여러분이 놓여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을 기억하며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1]우리의 안락과 행복은 세상에서의 우리의 처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에 달려 있다. 우리의 외적 조건이 아무리 좋을지라도 그것이 기독교 의무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지 못하고, 또 아무리 나쁠지라도 그것이 기독교 특권을 누리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Mathew Henry, Commentary, 1 Corinthian 7: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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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18. 1. 2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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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가정들에게

 

어제 우리가 살펴본 고린도전서 6장에서는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음행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6 12절부터 20절까지는 성을 매매하는 행위, 곧 매춘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성을 매매하는 음행의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강조하면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가하다, 모든 것을 우리는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는 남녀간의 성관계에 대해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그들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소개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1)

 

고린도교회 성도들 사이에는 신앙생활을 위해서, 특별히 영적으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기 위하여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 남자와 여자 사이에 부부관계를 최소로 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과 영적생활에 유익하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남편이나 아내를 멀리하는 성도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3)

 

여기에서 의무를 다 하라는 것은 문맥으로 보면 부부관계에 충실하라는 의미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기도한다고, 말씀을 묵상한다고 부부관계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은 권면합니다. 심지어 바울은 남편과 아내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이 일이 기도에 집중하는 일로 인해 결코 소홀히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 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5)

 

부부는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서 때로는 분방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니까지나 예외적인 사항이기에 서로 합의 하에 그렇게 해야 하고, 합의된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함께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기도에 집중한다고, 교회에서 여러 가지 봉사를 한다고 가정생활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성도들이 부부의 역할을 다하고, 부모와 자녀의 역할을 하다며 우리 각자의 가정을 아름답게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새벽 하나님께 나아와 열심히 기도하였다면,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우리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불신 결혼을 한 이들에게

 

지금까지의 권면은 신자들의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뒷부분에는 불신자와 함께 사는 가정에 대한 권면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부가 신자 남편과 불신자 아내로 구성되어 있을 때, 반대로 신자 아내와 불신자 남편으로 구성되어 있을 때 성도들에게 주는 권면이 오늘 본문 12절부터 등장합니다.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2b-13)

 

불신자와 결혼하여 생활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오늘 본문의 권면은 무엇입니까? 비록 불신자라도 아내와 남편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 사항은 있습니다. 만일, 불신자 남편이나 불신자 아내가 헤어지기를 원한다면, 이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간다면 이때는 이혼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15a)

 

그러나 오늘 본문을 천천히 살펴보면 이혼을 허락하는 예외적인 경우가 분명히 있지만, 사도 바울은 불신자 남편이나 불신자 아내를 둔 성도들에게 이혼의 길을 택하기보다 자신의 배우자를 사랑으로 인도하여 구원의 길에 함께 들어가기를 권면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4)

 

본문 14절 말씀에 의하면, 불신자 남편과 신자 아내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 가정은 거룩한 가정이 될 가능성이 클까요? 거룩하지 않은 가정이 될 가능성이 클까요? 거룩한 가정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불신자 아내와 신자 남편이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거룩한 자녀들로 성장할 가능성이 클까요? 거룩하지 않은 자녀로 성장할 가능성이 클까요? 거룩한 자녀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여러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남편, 여러분의 아내, 여러분의 자녀, 여러분의 부모님까지. 모든 가족 식구들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제 남편을 모르셔서 그래요. 아니, 바울 사도님! 저희 자녀들을 못 만나보셔서 그래요. 아니, 하나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 왜 저희 가족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모르세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믿어도 제 남편은 절대로 예수님을 믿을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 나온다하더라도 제 아내 만큼은 절대로 하나님을 믿을 사람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16)

 

여러분, 구원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 가운데 지금도 배우자의 믿음을 위하여, 자녀들의 믿음을 위하여, 가족 식구들을 믿음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믿는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됩니다.”

믿지 안니하는 아내가 믿는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도 여러분들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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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18. 1. 2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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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음행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분문이 지적하는 음행이란 돈을 주고 성을 사는 행위, 곧 매춘입니다. 그래서 16절을 보시면창녀와 합하는 자는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돈을 주고 성매매를 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음행에 대한 사도 바울의 교훈은 분명합니다.

 

음행을 피하라 (18a)

 

성도라면 마땅히 음행을 멀리하고, 음행을 피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오늘 본문은 음행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그 외에도 한 두 가지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교훈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2)

 

12절 처음에 등장하는 구호,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는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음행을 행하는 사람들의 주장이었습니다.[1]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가 있기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무엇이든지 허락된다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성을 매매하는 자신들의 행위까지도 정당화시키고 있었던 것이지요.[2]

 

사도 바울도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인정합니다. ,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는 그들의 구호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모든 것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의 영혼과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12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지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그들의 의견을 다시 한번 수용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사용함에 있어서 오히려 죄에 얽매이고 욕망의 종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주제는 바울의 또 다른 서신인 갈라디아서의 핵심 주제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힘있게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5:1)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몇몇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자유가 있다는 점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고 있었던 것, 그들이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 그리스도인은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자유를 나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덕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선포한 뒤 다음과 같이 권면하는 이유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5:13)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자유를 누리십시오. 다시는 죄의 종, 율법의 종, 사망과 어두운 권세의 종이 되지 마십시오. 아울러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자유를 사용하실 때 나의 영혼과 나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지, 나의 자유가 교회의 덕을 세우는지 계속해서 분별하여,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몸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은 그리스도인들의 몸에 대한 교훈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19)

 

성도들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19절 마지막에 바울은 이렇게 선언하지요.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을 관리하고 다듬어 나가듯 우리 자신의 몸을 보살펴야 할 책임이 있어요.

그런 점에서 할 수 있는 대로 여러분의 몸이 건강할 수 있도록 건강 관리에 유념하십시오. 평소에 섭취하는 음식과 일생생활이 여러분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아울러, 여러분의 마음이 평안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분노와 미움과 다툼의 마음을 최대한 차단하십시오. 그 무엇보다 여러분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늘 경건 생활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에 말씀과 기도를 날마다 채워 여러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날마다 강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사도 바울은 음행을 피하라고 권면하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주제를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하는 최고의 목표점을 이야기합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20)

 

여러분,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음행을 비롯한 여러 가지 죄악을 멀리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진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사랑하는 가족을 위하여, 교우들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들을 위하여 종노릇하십시오. 나아가 여러분의 몸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여러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건강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계시면 안됩니다. 우리의 몸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그들의 또 다른 구호는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다”(13a)는 것이다.

[2] 이들을열광주의적인 고린도 교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지철, <고린도전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257-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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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