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인문학2022. 4. 2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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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교구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배 목사님이 찾아와 고민을 토로했다. 그 목사님은 권사님 한 분을 심방하였는데 연로하신 권사님은 허리가 아파 많이 괴로워하셨다. 목사님은 권사님의 허리 디스크가 치유될 수 있도록 기도해드렸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정도 연세에 과연 허리 디스크가 나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는 질문이었다. 후배 목사의 이 경험은 성도들을 심방하는 대부분의 목회자가 겪는 일인데, 과연 목회자의 기도는 어떠해야 할까?

 

 

교회 안의 승리주의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한국 교회 안에는 이른바 ‘승리주의’의 분위기가 팽배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여기에서 승리주의란 고통, 빈곤, 무능 등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로 여기며 신앙의 힘으로 이러한 과제를 성취하여 승리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위의 경우에 적용한다면, 목사가 성도들을 심방했다면 마땅히 성도들의 건강과 재물과 형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동시에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신앙의 힘으로 축복을 받기 위해 자신의 기도는 물론이요 힘이 부족할 때에는 목회자의 기도를 덧입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교회에서는 이른바 ‘기도제목’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성도들마다 다양한 기도의 제목이 있지만 그 대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건강, 재물, 형통, 인간관계 등이 대다수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기도제목을 묻고 이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성도들 사이의 만남 속에는 승리주의의 분위기가 짙게 드리우곤 한다.

 

신약성경을 통해 그 시대에도 교회 안에 승리주의가 폭넓게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교회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스스로를 ‘영적인 사람들’(프뉴마티코스)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방언과 예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가 많이 일어났는데, 소위 ‘영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며 스스로가 대단히 높은 영적 수준에 올랐다고 자부하였다. 한 마디로, 영적 엘리트주의에 빠져든 것이다. 이들의 모습이 분명하게 묘사된 구절이 고린도전서 4장 8절이다.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고전 4:8a)

 

이 구절에서 “이미”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날에 얻을 최후의 승리를 믿는다. 그런데 이들은 그 최후의 승리를 “이미” 성취한듯 행동했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소위 ‘영적인 사람들’의 오류는 과도한(overrealized) 종말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하나님의 나라에 완전히 들어간 것은 아닌데,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성취한 듯 지속적인 성화와 거룩의 삶에 힘을 쏟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영적인 사람들의 태도와 사도들의 헌신을 비교하는데, 앤서니 티슬턴은 그 차이를 오늘날의 용어로 이렇게 서술하였다. “사도들은 검투장에서 검투사가 되어서 여전히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반면에 고린도교회에 속한 많은 그리스도인은 방청석에서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처절하게 싸우는 사도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십자가의 복음

 

소위 ‘영적인 사람들’을 향한 바울의 대답은 십자가의 복음이다. 그들은 하늘의 지식을 이야기하였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참된 지혜가 신비한 영적 통찰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지혜라고 강조한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로 영적 수준을 자랑하려고 했지만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의 증거가 삶의 변화라고 주장한다. 칼 바르트는 사랑을 노래하는 고린도전서 13장과 부활을 선포하는 고린도전서 15장이 성령의 은사를 논하는 12장과 14장을 철저하게 상대화시킨다고 지적하였는데, 참된 신앙의 길은 성령의 은사를 자랑하며 능력과 성취를 추구하는 승리주의가 아니라 자신을 헌신하며 끝까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십자가의 길이다.

 

나를 찾아와 연로하신 성도님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질문했던 후배 목사님에게 한국 교회 안에도 승리주의가 팽배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누었다. 그러나 교회의 분위기와 상관 없이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신앙의 힘은 나이를 역행하는 건강도, 다른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의 재물도, 자신의 노력을 훨씬 뛰어넘는 성공이나 형통도 아니다. 반대로 신앙의 힘은 연약한 가운데서도 발휘되는 지혜요, 아픔 속에서도 누리는 기쁨이다. 웃음만이 아니라 눈물까지도 성도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 교구 목사의 기도는 마땅히 이러한 신앙의 지혜를 구하는 기도이어야 하며, 성도들이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신앙의 길을 바르게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공감의 간구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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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21. 10. 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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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헌신의 마음으로 신학교에 입학한 전도사님이 계셨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며 그 마음의 열정이 조금씩 수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불처럼 타올라야 주님의 일에 충성을 할 수 있다고 여겼던 전도사님은 큰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학교의 교수님과 학생들이 공원에서 바비큐 파티에 참여하게 되었다. 바비큐를 위해 불을 피우며 교수님은 이런 교훈을 주었다. “마른 장작에 힘 있게 타오르는 불꽃으로는 고기를 맛있게 구울 수 없습니다. 타오르는 불은 고기를 태워버리죠. 그러나 불길이 잦아들고 장작이 숯불로 변하면 그제야 고기를 먹음직스럽게 구울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여러분들은 지금 숯불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로써 전도사님의 고민은 말끔하게 해소되었다. 이후, 공원에서 바비큐를 구울 때마다 전도사님은 그날의 교훈을 떠올리며 자신이 타오르는 불꽃인지, 아니면 은은한 열기를 발하는 숯불인지를 점검하게 되었다. 

일상의 사물이 과거의 기억과 교훈을 떠오르게 할 때가 있다. 그 사물이 가까이 있다면 더 자주 그날의 교훈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 마련이다. 


예수님의 실물 교육: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교구(敎具)를 폭넓게 사용하셨다. 산에 올라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랐으니 제자들의 머리 위에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공중의 새를 바라보자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6) 

예수님은 계속해서 “들의 백합화를 보라” 말씀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이 시선을 돌려 주변에 피어있는 백합화를 바라보자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8-29) 

시간은 어느덧 흘러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고 더 이상 제자들의 곁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도가 되었다. 사도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무엇하나 풍족하지 않았던 그들은 시시각각 하늘을 나는 공중의 새를 바라보며 주님의 교훈을 기억하지 않았을까? 바쁘게 길을 걷으면서도 자신의 발길에 스치는 백합화의 향내는 주님과 함께 했던 추억을 끄집어내지 않았을까? 비록 주님은 그들 곁에 안 계시지만 공중의 새를 먹이시며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여전히 자신과 함께 하심을 그들은 느낄 수가 있었다. 


예수님의 실물 교육: 어린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사용하셨던 또 하나의 중요한 교구(敎具)가 어린이였다. 하루는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라는 질문을 놓고 논쟁이 이어졌다. 이제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것인데,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인지에 관심이 몰렸다. 그 열두명은 자타가 인정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대를 단번에 무너트리는 말씀을 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막 9:35)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중요한 가르침을 제자들의 마음에 각인시키기 위해 중요한 교구를 하나 사용하셨다. 이때 사용하신 도구가 ‘어린이’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막 9:36) 

예수님 시대에 어린이는 사회적 등급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속하였다. 그 부모에게는 귀한 자녀이지만, 다른 사람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 결정할 권리나 특권이 전혀 없음을 의미했다. ‘누가 큰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는 가장 작은 존재요,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들의 모임 한 중앙에 예수님은 어린이를 세워주셨고, 주님께서 친히 안아 주셨다.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도, 안드레도, 요한도 주님께서 한 중앙에 세워주신 일이 없었는데 아무런 권한이나 주도권도 없었던 어린이를 주님께서 이렇게 대우해주셨다. 제자들의 눈에 잊을 수 없는 이 장면이 펼쳐지고 있을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막 9:37)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그 모임의 중심에 세워 주시고 친히 안아 주셨던 것처럼, 세상의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자를 영접하여 섬겨야 함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제자들의 평소 생각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들의 눈앞에 어린이들이 보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주님의 가르침을 떠올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막 10:13) 

한글 성경에 “사람들이”라고 번역된 주체는 당연히 어린이들의 부모다. 그런데 헬라어 성경에는 이 문장의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의 어린 자녀였다. 제자들은 얼마 전 주님의 가르침을 잊어버린 채, 그들에게 익숙한 방식대로 어린이들과 그들을 데려온 부모를 대하였다. 그것은 정중한 거절이 아닌 “꾸짖음”이었다. 제자라는 자신들의 위치가 사회적으로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그들을 꾸짖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모습을 보시는 주님께서 어찌 가만히 계실 수 있었겠는가?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막 10:14) 

제자들은 예수님께 혼쭐이 났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완악한 마음을 보시며 크게 노하셨던 예수님이지만, 이번만큼은 예수님의 제자라 불리는 자신들을 향해 크게 노하셨으니 이 장면을 어떻게 잊을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는 크게 화를 내셨다. 그러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어린 자녀는 또다시 받아들이고 축복하여 주셨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막 10:16) 

이제 제자들의 마음에 분명히 각인되었다. 제자라는 이름, 사도라는 위치, 교회 지도자라는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은 주님께서 화를 내며 혼을 내시지만 아무런 권리도, 특권도, 결정권도 없는 어린이는 주님께서 안아 주시며 축복하셨던 그날의 장면이 말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지위가 높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자리에 있을수록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한 성도를 품고 섬기며 축복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모범이라는 사실도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어린이를 마주칠 때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안아 주셨던 어린이는 대략 몇 살 정도 되었을까? ‘어린 아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파이디온’만으로는 그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안아 주셨다는 성경의 기록은 하나의 힌트를 준다. 주님께서 그 아이들을 안으신 채 안수하여 주셨으니, 한 팔로 안을 만한 정도의 어린이였을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기준으로 이야기하면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미취학 어린이 정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시간이 흘러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제자들은 사도가 되어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교회를 돌아보며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목양하는 동안, 제자들의 눈 앞에는 언제나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젉은 엄마들이 보이지 않았을까? 아직은 부모의 품을 떠날 수 없어, 하루 24시간 엄마의 손을 놓을 수 없는 어린아이들, 꼭 그 또래의 아이들을 예수님께서 친히 안아 축복해주시지 않았던가. 제자라는 지위에 있었기에, 그리고 지금은 사도라는 권위 있는 직분을 가지고 있기에 교회 안에서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던 그들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무명의 여인들을 대할 때마다 주님의 호된 꾸지람을 결코 잊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막 10:15)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사도들은 또다시 작은 자를 품어 안으셨던 주님을 떠올리며 스스로의 마음도 점검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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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21. 5. 26.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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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가 오랜 시간 확산되면서 우리 사회의 음식 문화도 큰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할 수 없으니, 각자의 가정에서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이른바 배달음식이 활황을 누리고 있지요. 코로나 이전에는 배달음식이라고 하면 중국요리, 피자나 통닭 등 메뉴가 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이제는 거의 모든 음식이 배달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밀 키트’(meal kit)라는 이름의 가정 간편식입니다. 이는 집 앞까지 택배로 배달되고 포장을 벗겨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입니다. 일상적인 음식을 넘어 최근에는 전문 식당이나 고급 레스토랑에서만 먹을 수 있던 음식도 가정 간편식으로 판매되고 있으니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의 식생활까지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은 분명합니다.

 

배달음식, 가정 간편식 등이 일상화되면서 음식에 대한 현대 사회의 한 가지 이미지가 우리 안에 더욱 각인되었습니다. 그것은 음식 혹은 식재료가 상품이라는 인식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현대 사회에서 음식은 상품입니다. 그러나 음식을 상품으로 생각하다보니 성경이 가르치는 음식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 하나를 놓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성경은 생존에 꼭 필요한 음식이 돈으로 사고파는 상품이기에 앞서, 다른 생명의 희생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께서 채소와 나무, 곧 식물을 인간의 음식으로 주시는 장면입니다. 계속해서 창세기 9장으로 넘어가면 인간에게 육식을 허락하시는 장면도 등장합니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창세기 9장 3절)

 

하나님은 채소와 나무, 곧 식물을 인간에게 음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동물들도 인간에게 음식으로 주셨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존을 위하여 허락하신 양식은 생명이 없는 무생물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식물이든 동물이든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대하는 음식은 단지 상품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 음식을 먹을 수 있고, 그 음식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생물의 죽음과 희생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즈바(Morman Wirzba)라는 신학자는 <음식과 신앙>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이는 장소에서든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든 다른 생명이 죽어야 한다. 생명은 죽음에 달려있고, 죽음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그는 음식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내어 놓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음식은 상품이 아니다. 음식은 하나님의 창조세계, 곧 희생적 사랑에 의해 유지되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다.” [각주:1]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먹거리가 풍족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비용만 지불하면 식재료와 음식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곧 음식이 상품으로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매일 우리의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생명을 가지고 있었던 어느 생물의 희생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음식은 상품이기에 앞서, 나를 위한 다른 이들의 희생이요 보다 궁극적으로 여전히 나의 생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 Morman Wirzba, Food and Faith A Theology of Eating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13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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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20. 12. 11.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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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유튜브의 시대입니다. 1900년대 TV의 등장이 문자와 활자의 시대를 영상의 시대로 대치하였지요. 이후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의 보급으로 다양한 플랫폼이 등장하여 인터넷과 모바일 환경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인스타그램과 유튜브가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모바일 환경에서도 문자와 글보다는 영상이 대세를 이루는 형국입니다. 한 마디로, 예전에는 파워 블로거가 인터넷 환경을 주도했다면, 지금은 파워 유튜버가 모바일 콘텐츠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유튜브의 시대에 발 맞추어 다양한 영상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른바 ‘비대면 예배’ 혹은 ‘온라인 예배’를 강요하며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방송시설이 매우 열악한 교회를 제외하고는 설교 및 예배 영상을 인터넷 공간에 전혀 공유하지 않는 교회를 찾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몇몇 교회에서는 이 시기를 겪으며 영상 제작과 편집을 위한 별도의 스튜디오를 설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잘 알지만, 

여전히 목회 아카이브를 유튜브보다는 블로그로 운영하고 싶습니다. 

 

유튜브의 시대, 제가 블로그를 고집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기독교와 글의 관계입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콘텐츠는 기본적으로 영상이 아닌 글입니다.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콘텐츠가 무엇입니까? 단연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글로만 기록되어 있는 성경입니다. 그리고 2000년의 기독교 역사가 우리에게 물려준 귀한 유산도 대부분 글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 목사로서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기 원하고, 기독교의 고전을 읽으며 교회의 유산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기를 바랍니다.  

 

목회는 주로 언어를 통한 활동입니다. 교회의 예배와 모임이 영상으로 제작될 수 있는 공간을 형성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안에서도 언어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목회 언어를 글로 기록하면 목회의 핵심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글로 기록한 목회 언어는 신학적 재평가가 가능하고, 보다 나은 목회 언어를 개발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이것이 제가 목회 아카이브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개인적인 이유와 목적입니다. 

 

제가 유튜브 시대에 블로그를 고집하는 두번째 이유는 경계를 넘어선 소통의 장으로 기능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역하는 교회 역시 유튜브를 활용하여 다양한 영상을 공유합니다. 저의 설교와 강의도 적지 않게 인터넷 공간에 떠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저희 교회 성도님들을 위한 콘텐츠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경계선이 존재합니다. ‘저희 교회’와 ‘성도들’입니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중심으로 영상이 모바일 플랫폼을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영상 콘텐츠는 경계선이 높습니다. 여러분이 주로 시청하는 유튜브 영상을 떠올려보면, 그 콘텐츠의 범주가 의외로 협소하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유튜브의 AI가 관련 영상을 끝없이 추천하는 것도 이러한 현상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이지요. 

 

반면, 블로그는 유튜브보다 경계선이 낮습니다.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얻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이용하면 평소에 접속하지 않던 사이트나 블로그도 쉽게 방문하게 됩니다. 저는 목회 아카이브가 저희 교회라는 경계, 성도라는 경계를 넘어 더욱 다양한 분들과 필요한 정보와 유용한 관점을 나누며 소통하는 장(場)이 되기를 바랍니다. 목회 아카이브에 기록해둔 저의 목회 언어가 목회 자료가 되어 다른 누군가에게 참고할만한 콘텐츠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진정 보람된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 아카이브를 운영하며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나 자신의 목회 언어를 되돌아보는 신학적 성찰이며, 이 과정에서 여러 목회자와 성도들을 초대하여 우리의 신앙과 교회 현장에 대한 진솔한 대화와 기도를 나누는 것입니다. 

 

유튜브 시대, 

저의 블로그 ‘목회 아카이브’를 방문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영상이 아닌 글의 장점과 매력을 알고 계신 여러분들의 피드백을 언제라도 환영합니다. ‘목회 아카이브’의 콘텐츠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을 이메일, 방명록, 댓글로 남겨 주시면 저 역시 성심껏 답을 드리겠습니다. 

 

 

이한진 목사

hanjin020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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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20. 12. 2.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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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인간의 삶을 여러 비유로 묘사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문’(doors)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들어오라고 초청하시는 ‘문’이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열린 문’(계 3장)과 ‘좁은 문’(마 7장)이다. 


열린 문 (요한계시록 3장 7-13절) 

요한계시록 3장에는 소아시아에 위치하였던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가 등장한다. 그 편지에는 하나님을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 묘사한다(7b절). 다윗의 열쇠란 통치권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믿음이다. 요한계시록 3장은 계속해서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7c절)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 언제나 문이 활짝 열리기를 원한다. 진학의 문, 취업의 문, 결혼의 문, 성공의 문 등. 그래서 성도들은 인생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며, 계속 이어지는 구절이 자신에게 주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8a절)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열린 문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여기까지 읽으면 본문의 뜻을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바로 뒤에 성경이 말하는 열린 문의 특징을 주목해야 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8b절) 

열린 문의 특징은 작은 능력으로 말씀을 지키는 삶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허락하시는 열린 문은 큰 능력으로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다. 능력이 작고 부족하기에 자신의 한계에 다다르기도 하며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능력이 부족하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성실히 순종한다. 자신의 능력으로 앞길을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능력이나 실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을 철저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의지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길을 열어주시는 것이 성경이 약속하는 ‘열린 문’이다. 

열린 문의 중요한 특징을 이렇게 정의하고 나면,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먼저,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신다는 약속이다(10절). 당연한 이야기다. 요한계시록 3장이 약속하는 열린 문은 나의 큰 능력으로 세상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기에 시험의 때를 맞이하기 마련이고, 그 과정은 참으로 힘겹다. 이때 하나님께서 도움의 손이 되셔서 그 시기를 견디게 해 주신다는 의미다. 

또 하나의 약속은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전의 기둥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설할 때 그 앞에 세워둔 두 개의 기둥(야긴과 보아스, cf. 대하 3:17)을 가리킨다. 이것은 성전의 하중을 지탱하는 기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상징하는 기념비다. 자신의 능력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열린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드러내는 예증(기념비)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니 적은 능력을 가진 인간들에게 가장 합당하고 영광스러운 약속이 아니겠는가? 


좁은 문 (마태복음 7장 13-14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들어오라고 초대하시는 ‘문’은 열린 문이며 동시에 좁은 문이다. 이 두 가지 ‘문’의 의미는 언듯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열린 문의 구체적인 의미가 작은 능력으로 말씀을 지키는 삶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이제 열린 문의 의미가 서로 상응한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말씀하시며, 좁은 문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비교하신다. 그러나 그 두 개의 차이를 살펴보기에 앞서, 좁은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의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자. 그것은 두 개의 문 모두 열려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적은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들어가는 ‘열린 문’의 정의를 미리 살펴보지 않았다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 모두를 주님께서 들어오라고 초대하신 약속의 문으로 착각할 뻔하였다. 그러면 좁은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먼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그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13절). 문도 크고 길도 넓으니 사람들은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이다. 그래서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자세를 낮추어야 그리로 들어갈 수 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14절) 한 번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 그래서 좁은 문이요, 그곳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적다. 문이 닫혀있기 때문이 아니라, 열린 문이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만사형통의 문이 아닌 것이다. 

입시철이 다가오면 교회는 물론이고 성당과 법당에서도 자녀들의 인생에 크고 넓은 문이 열리기를 기도한다. 자녀들을 위한 부모의 간절한 기도는 아름답고 때로 숭고하기까지 하다. 아울러 그리스도인 부모라면 그의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기 바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열린 문을 두시고, 좁은 길로 들어오라고 초청하신다. 그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좁은 문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며, 열린 문이 우리로 하여금 성전의 기둥과 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장 복된 인생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28장 13절 & 마태복음 11장 29-30절 / 인생의 멍에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직장인들은 직장이 지우는 짐을, 학생들은 학교에서 지우는 짐을 지고 살아가지요. 가정에서 살림하시는 분들도 그 나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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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20. 11. 2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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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의 위기와 돌파구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은 최고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분노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다. 금송아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자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참다못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선언하신다.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1절)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시내산, 하나님의 임재가 온 백성에게 충만하게 드러났던 언약의 장소를 떠나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그 이후의 말씀은 더욱 절망적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3절) 더 이상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동행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으신다.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야 하는 순간, 하나님의 임재가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선언, 이스라엘은 문자 그대로 최고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모세에게 가나안 입성은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약속의 땅에 백성을 이끌고 들어가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그곳은 더 이상 약속의 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임재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회 현장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지 않는 일은 너무도 비극적이지만 자주 현실로 나타난다. 건물도 있고,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거룩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음악이 울리고 종교적인 장식품이 배치되어 있고, 예전은 빈틈없이 진행되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진 곳은 가장 비극적인 목회 현장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모세를 따라 기도해야 한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목회 현장으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15절)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내가 친히 가리라"(14절) 


성막(Tabernacle)과 회막(Meeting Tent)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후(출 19-24장),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셨다(출 25장 이후). 성막은 회중의 가장 중앙에 위치하며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장소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막에서 봉사하며 제사를 집례하도록 되어 있다. 출애굽의 후반부는 주로 성막을 만드는 내용으로 모세의 관심사 역시 성막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기 33장에 등장하는 회막은 성막과 구별된다. 회막은 성막에 있는 종교적 상징물도 전혀 없으며, 제물이나 제사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문자 그대로 '만남을 위한 장막'(Tent for Meeting) 일뿐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던 장소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제사를 집례하고 섬기는 성막이 아니라 진영을 멀리 떠나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회막이었다. 회막의 위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닫지 않는 곳이니(7절) 모세는 더욱 깊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고,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11절). 그리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백성의 큰 죄로 인하여 신앙 공동체에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질 위험 속에서도, 모세는 회막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모세의 간절한 중보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친히 가리라"(14절)는 응답을 받을 수 있었다. 

목회의 공적 공간은 성막에 해당한다. 그러나 성막과 구별되는 개인 경건의 장소인 회막이 반드시 필요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성막에서의 사역이지만 성막에서의 사역을 결정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회막에서의 만남에 달려있다. 회막 목회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기에 시내산에서 내려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결국 시내산에서 내려와야 한다. 예수님과 세명의 제자들도 변화산에서 결국 내려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구원의 체험, 사명의 체험 곧 시내산에서의 언약이 귀한 것이지만 언제까지나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시내산에서 내려온 후에도 모세가 회막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던 것처럼, 목회자는 성막이 아닌 자신만의 회막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한다는 점이다. 


회막 목회를 꿈꾸며..... 

회막은 모세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모세 자신이 회막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뿐 아니라, 그의 모범을 따라 하나님을 앙모하는 백성들도 회막을 찾았다(7절). 이 점에서 회막은 목회자 개인의 영성훈련을 넘어, 하나의 목회적 특성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회막 목회는 목회자 자신이 회막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나아가 성도들도 각자의 회막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안내한다. 

회막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약속 장소다. 그러나 '만남을 위한 장막'(Tent for Meeting)이라는 이름의 뜻을 성도들을 만나는 장소로도 해석하고 싶은 것은 나뿐일까? 목회자로서 성막이라는 공적 영역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도들을 만나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우는 일도 매우 중요하고 보람이 있다. 아울러 나 자신만의 회막, 곧 만남을 위한 나만의 장막에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설수 있다면, 또한 성도들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다면 어떻겠는가? 이처럼 회막 목회는 목회자가 누릴 수 있는 값진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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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20. 6. 21.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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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한국의 교회는 얼마나 성도가 줄었으며, 헌금액은 어떻게 변했을까? 최근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통계자료가 나왔다.[각주:1] 그리고 그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배 출석과 헌금의 변화에 대한 교회의 통념을 검증할 수 있다. 


코로나 시대의 예배 출석 

코로나 바이러스로 예배의 출석 인원은 얼마나 줄었을까? 기존의 출석인원을 기준으로 코로나가 급증하던 시기(3-4월)에는 42.4%, 설문조사 직전 주일인 5월 24일에는 61.8%가 출석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회 규모에 따라 세분해보면, 성도 499명 이하 교회의 출석률이 69.8%인데 반하여 성도 500명 이상 교회는 56.3%에 머무른다. 중형교회가 대형교회보다 예배 출석률이 높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익명성이 높은 대형교회가 코로나의 위기에 더 취약하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예배 출석과 관련하여 한국교회에 퍼져있는 또 하나의 가설이 있다. 현장예배를 온라인예배로 전환하면, 이후 현장예배를 재개해도 성도들의 현장예배 참석률이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바이러스의 위협 속에서도 현장 예배를 강행하는 경우도 있다.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통계를 조금 더 살펴보자. 코로나가 급증하던 3-4월, 주일예배를 온라인으로 전환한 교회는 평균 참석률이 24.5%로 그렇지 않은 교회에 비해 확연히 낮다. 그러나 온라인 예배를 다시 오프라인 예배로 전환한 5월 24일 주일예배에는 그 차이가 사라졌다. 3-4월에 현장예배만 고수하거나 현장예배와 온라인 예배를 병행한 교회가 5월 24일 예배에서는 각각 60.9%와 61.5%의 참석률을 보인 반면, 3-4월에 현장예배를 포기하고 온라인 예배와 가정예배로 전환했던 교회는 5월 24일 예배에서 각각 62.4%와 63.1%로 참석률이 더 높았다. 그러므로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면 성도들이 장기적으로 현장예배 출석을 안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근거 없는 우려였으며, 현장예배를 고수한다고 예배 참석률을 더 높일 수도 없었다. 

코로나19의 종식 후 교회 출석인원은 얼마나 줄어들까? 이것은 교회 출석에 대한 핵심 질문이지만, 아직 누구도 정확히 답할 수 없다. "설문조사 보고서"에는 위의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다수의 예측이 개인의 예측보다 정확하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에 목회자들의 의견을 물어보는 설문조사로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어느 정도 답할 수 있는 설문은 있다. 지난 4월 교인 천명(유효표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12.5%의 응답자가 코로나 이후에도 '온라인 및 방송으로 예배를 드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응답했다. 성도들에게 직접 물어본 설문이니 이후 현실로 나타날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얼마나 정확한 예측인지는 지금으로서 알 수 없다는 것이 정직한 대답이다. 


코로나 시대의 헌금

출석인원이 줄어드니 헌금도 줄어든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68.8%의 교회가 헌금이 줄었으며, 30.1%의 교회만 변화가 없었다. 헌금이 줄었다고 대답한 교회 가운데 20~40% 줄었다고 응답한 교회가 53.0%로 가장 많았으며, 평균적으로는 28.7%의 헌금이 준 것으로 나타났다. 

헌금의 감소와 관련한 몇 가지 가설을 살펴보자. 현장 예배를 포기하고 온라인예배 및 가정예배로 전환하면 헌금이 더욱 감소할 것인가? 온라인 헌금을 유도하면 헌금의 감소를 줄일 수 있는가? 이번 통계를 면밀히 살펴보면 위의 두 가지 가설도 모두 거짓으로 드러난다. 3-4월 주일예배의 형태와 헌금의 증감, 그리고 온라인 헌금의 운영과 헌금의 증감 사이에는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코로나를 계기로 온라인 헌금을 운영한 교회에서 헌금이 줄어든 비율(75.0%)이 온라인 헌금을 운영하지 않은 교회에서 헌금이 줄어든 비율(65.%)보다 높았고, 온라인 헌금을 운영하지 않는 교회에서 헌금이 감소하지 않은 비율(33.7%)이 코로나를 계기로 온라인 헌금을 운영한 교회에서 헌금 감소가 일어나지 않은 비율(24.6%)보다 높았다. 결론적으로, 코로나의 시기를 보내며 현장 예배를 강행하는 것이나 온라인 헌금을 강조하는 것은 헌금의 감소를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예배 출석 및 헌금액은 다양한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한 두 가지 원인으로 출석인원과 헌금액의 변화 과정을 다 설명할 수도 없고, 한 두 가지 처방으로 출석 인원을 늘리거나 헌금액을 높일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면 현 상황을 다각도로 관찰하고 신중하게 대안을 내어놓기 어렵다.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 검증되지 않은 방법에 얽매이는 우를 범하기 쉽다. 출석인원의 감소가 두려워  바이러스의 위협 속에서도 현장예배를 강행하거나, 헌금의 감소가 두려워 온라인 헌금을 강조하는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통계 자료를 분석해보니 조급한 마음에 시도하는 이러한 노력은 열매가 없었다. 

반면, 499명 이하의 중형 교회가 500명 이상의 대형 교회보다 코로나 시대의 예배 출석률이 더 높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형 교회일수록 온라인을 통한 다양한 프로그램 및 콘텐츠를 제공하며 보다 강력한 행정력을 발휘했으리라고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대형 교회의 목회적, 행정력 역량보다 중형교회이기에 가능한 보다 밀착된 목회적 돌봄이 출석 관리에 더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니 
위기일수록, 더욱 침착해야 하며 
불안할수록, 더욱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이와같은 삶의 자세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나온다고 가르친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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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교회적 변화와 준비

코로나 시대의 목회적 변화와 준비 포스트 코비드(Post-COVID). 코로나19 이후의 변화된 세상을 일컫는 말이다. 코로나 사태는 문화적 대변혁을 가져올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수많은 지식인이 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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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팬데믹>, 그리스도인의 시대적 사명 "탄식"

거대한 재앙을 맞이할 때 기독교인은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톰 라이트의 <하나님과 팬데믹>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하나의 신학적 응답이다. 쉽게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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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지앤컴리서치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소속 목회자 대상 포스트코로나19 설문조사 보고서"를 지난 6월 8일 발표하였다. 제목이 밝히는 것처럼 각 교회의 예배 출석 인원 및 헌금 액수에 대한 정확한 통계자료는 아니며, 예장(통합) 교단 내의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사 대상이 담임목사이기에, 1,135명을 대상(유효표본)으로 한 이 설문조사는 천 개가 넘는 교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응답자의 교회 위치 및 규모 등을 고려할 때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드러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보고서에서 교회의 현황을 묻는 질문에 집중하면, 한국 교회 전반에 대한 예배 출석 및 헌금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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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20. 6. 1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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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 교회 권사님 한 분이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제 동생이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어요. 저희 형제들은 어머니의 믿음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지금까지 잘하고 있는데, 유독 그 동생만이 신앙생활을 안 하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더니 간이 다 못쓰게 되었네요.” 권사님에게 그 남동생의 나이를 물어보았더니 이제 50대 후반이란다. 이미 병원에서는 임종을 준비하라며 진통제만을 처방해주는 형편이었다.

권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거니 더 이상은 미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 동생이 아직까지 예수님을 안 믿거든요. 언제 한번 제 동생을 만나 주실 수 있으실까요?” 진통제를 처방받기 위해 교회에서 멀지 않은 병원으로 이따금 오니, 그 시간에 잠시 만나줄 수 있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런데 그 동생이 입원한 것도 아니고, 잠시 병원에 오신 분을 스치듯 만나서는 대화를 이어가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생 집이 어디인지 물었다. “목사님, 제 동생 집이 멀어요. 의정부거든요.” “아니 권사님, 의정부가 뭐가 멉니까? 시간 정해서 저와 한 번 가시죠?” 

중간중간 권사님을 통해 소식을 들었다. 통증의 강도가 강해지고, 통증의 빈도도 높아졌다. 누나들이 예수님에 대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그렇게 아프다고 하면서 거절한단다. 처음 소식을 듣고 한 달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더 미루면 안 되겠다 싶어, 권사님과 날짜를 정했다. 그러면서 기도했다. 이번에 방문하면 딱 한번 그분을 만날 텐데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런데 방문 약속을 이틀 남겨둔 늦은 저녁 시간에 권사님에게 전화가 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을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연락이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의 게으름으로 그 한 번의 기회조차 놓치는 것은 아닐까? 바로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겠노라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하루만 더 살려주세요. 제가 내일 만나볼 수 있게 해 주세요." 

다음날 아침, 병상 세례를 대비해 이동식 세례반을 챙겨 의정부로 출발했다. 그런데 동부간선도로가 왜 이렇게 막히는 건가? 가는 길이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 병원에 도착해보니 통증의 강도는 너무도 컸고 크게 괴로워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저 침상 곁에 앉아 통증이 누그러지기를 기도하며 기다릴 뿐. 어느 정도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행히 통증이 잠시 누그러졌고 그분의 손을 잡은 채 간단한 인사를 시작으로 천국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복음을 전했다. 

임종이 가까우신 분들은 대부분 대화가 순조롭지 못하다. 복음을 제시하고 결신을 할 때면 그분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 별도의 방법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날 나는 손을 붙잡는 것으로 믿음을 표시하도록 유도했다. “선생님, 참으로 예수님을 선생님의 마음으로 믿기를 원하신다면, 예수님을 믿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신다면 통증으로 고통스러우시겠지만 제 손 위에 선생님의 손을 올려놓아 주세요.” 그의 손이 나의 손 위에 올라왔다. “선생님, 입술로 저의 기도를 따라하지 못하시더라도 마음으로부터 저의 기도를 따라 하시면 하나님께서 선생님의 기도를 다 들으십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저의 기도를 따라 하신다는 의미로 제 손 위에 선생님의 손을 계속 올려놓고 계세요. 그러면 선생님께서 저의 기도를 따라 마음으로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천천히 영접 기도를 시작했고 영접기도가 마칠 때까지 그분의 손은 내 손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칠 때 마지막 힘을 다해서 자신의 입술로 ‘아멘’하는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믿음을 표현하였고 그분은 믿음의 고백 위에 병상에서 세례를 받았다.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뒤 교회로 돌아오는 길은 차가 훨씬 더 많았다. 문제의 동부간선에서는 차가 꼼짝도 안 했다. 그런데 길이 막히고 차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이번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일이 지나지 않아 그분의 부고 소식이 날아왔다. 돌이켜보니 나는 고인을 평생에 딱 한번 만났고,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기회가 없다.

 

그 짧은 만남이 나에게 긴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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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20. 6. 17.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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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일교회 청년부의 2009년 여름수련회 특강 원고입니다. 

 

2009년을 살고 있는 신일교회의 청년들이 교회의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우리가 소속되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교회’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함이다. 역사야 말로 오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이다. Karl Heyssi는 「세계 교회사」 서문에서 자신이 서술하려는 교회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교회사에서 문제 삼고 있는 교회란 교의학적(종교적) 의미에서 표현된 교회나 교의학적 의미에서의 교회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도 일치하지 않는다.”[각주:1] 우리가 이해하려는 신일교회와 한국 교회의 역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성경이 가르치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 교회의 모습이 궁금하고 역사를 통하여 신일교회의 오늘을 정확히 바라보고 싶은 것이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이 기독교로 회심하기까지, 교회는 당시 세계를 다스리던 로마의 박해를 받았다. 당시 교회의 신앙생활은 지하 카타콤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지하로 끌어내리는 일이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던 크리스천들의 모임, 곧 교회는 부족하지만 성경이 추구하는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313년 콘스탄틴이 밀라노 칙령을 공포함으로써 기독교는 지하의 종교에서 벗어난다. 이때부터 기독교 예배는 궁정 의전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황제에 대한 존경의 표시인 향불이 교회 예배에도 사용되었고, 교역자들이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했으며 성가대가 발전하였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순수한 믿음과 신앙만을 추구하는 사람들보다는 기독교 제국인 로마에서 출세하기 원하는 이들로 북적되기 시작하였다. 

4세기 후반, 5세기 초에 활동했던 어거스틴은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하기에 이른다. 현재 ‘보이는 교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 중에도 가라지와 같은 이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보이는 교회’에는 속해있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에는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로서 후일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모두 포함한 ‘보이는 교회’와 의로운 사람이 그 핵심이 되는 ‘보이지 않는 교회’ 사이를 구별함으로써 “제도적 교회 개념이 더 이상 타당성이 없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각주:2]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천상의 교회가 아니라 눈에 분명히 보이는 지상의 교회가 아닌가? 이 시간만큼은 기독교의 교리가 읊어대는 교회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 교회와 신일교회만을 이야기하자. 


청년의 눈으로 읽는 신일교회의 역사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내한으로 공식적으로 출발한다. 그로부터 2009년까지, 120여 년의 한국 교회 역사를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하라면 1945년이 그 분기점이다. 한국 교회의 역사는 1945년을 기점으로 큰 단절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1885년 선교사들의 내한으로 시작된 한국 개신교는 1910년대까지 크게 성장하였다. 사회의 지도층 가운데 조선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지켜보면서 기독교 정신 속에서 구국의 희망을 보았던 이들이 많았다.[각주:3] 한편, 병원과 학교를 설립했던 선교사들의 노력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의료 및 교육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던 이들이 기독교에서 안식처를 찾는 계기가 되었다.[각주:4] 그리고 그 위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나타나 기독교는 한국 땅에 전파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부흥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부흥은 교회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선봉에 설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그 하나의 열매가 1919년에 일어났던 3․1 독립운동이다. 

그러나 1920년대 조선인들의 눈으로 볼 때,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평화적 반폭력의 방법을 채택하였던 3․1 독립운동은 실패였다. 민족은 여전히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 아래에 있었고 일본 제국주의는 문화 정치라는 이름으로 더욱 철저한 통제와 감시를 실시하였다. 3․1 독립운동의 실패 원인이 기독교의 반폭력적 방법에 있다고 평가한 당시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반기독교세력이 되어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폭력을 통한 혁명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의 공격,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기독교 분열 정책이 어우러져 기독교는 1920년대부터 크게 쇠퇴한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점한 이후 줄곧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 제국주의는 신사 참배를 더욱 강하게 요구하였고, 이에 불응하였던 기독교 학교들이 문을 닫아야 했다. 더 이상 신사 참배를 거부할 경우 교단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조선의 거의 모든 교단이 신사 참배를 공식적으로 가결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기독교는 완전히 붕괴하는데, 이것이 일제 시대 말기 한국 교회의 모습이었다. 

1945년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였고, 기독교는 이때 문자 그대로 ‘재건’(reconstruction)된다. 일제시대 본국으로 돌아갔던 선교사들이 재입국하여 설교 활동을 시작하였고, 일제 말기 신사 참배를 가결했던 교회의 지도자들도 이제는 한국의 교회가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교회 재건의 강력한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 교회 역사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009년 지금까지 한국 교회 역사에 있어서 1945년과 같은 역사의 단절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한국 교회와 오늘의 신일교회를 알고자 한다면, 1945년 이후의 역사 흐름을 탐구해야 한다.[각주:5]

그런데 문제는 1960년 이후, 한국 교회는 진보와 보수의 양 극단으로 나뉘었다는 점이다. 1950년대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일치된 목소리를 내었다. 곧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이다. 그런데 1960년 4․19 혁명을 계기로 일부 크리스천들이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주장하며 사회구조의 개혁 및 변혁을 앞세우는 기독교의 진보진영을 형성하였다.[각주:6] 이후 군사정권의 등장과 남북 분단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진보와 보수의 양 극단으로 나뉘어 서로에 대한 편협된 생각으로 한국 교회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하였다. 

진보와 보수의 극단적인 대립의 양상은 1980년대에 이르러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있던 기독교에 심각한 자기반성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먼저 진보진영의 기독교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한국의 민주화 운동 진영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여 강경한 투쟁노선을 견지하기 시작하자, ‘과연 기독교적 운동’이란 무엇인가라는 소위 ‘정체성 논쟁’에 빠져들고 만다. 아울러 보수진영의 기독교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며 기독교인으로서 정교분리 원칙만을 내세운 채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이 과연 기독교적 책임인가라는 소위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 문제’로 고민한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약 30년이 지난 2009년 오늘, 한국 사회 속에서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적 구분으로는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뚫어보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1945년 이후의 교회 역사에 대해서도 진보와 보수의 어느 한 가지 관점에 묶여 있다면 바른 역사관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진보와 보수의 구분을 뛰어넘는 새롭고 창조적인 관점으로 교회의 역사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1980년대 이후에 출생하여서 과거의 진보와 보수라는 관점에서 자유로운 청년들이다.[각주:7] 곧 2009년 현재 신일교회의 청년들이 신일교회의 역사를 바르게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신일교회의 창립과 한국 전쟁 

상술한 바와 같이 한국 교회의 역사는 1945년을 기점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해방 이후 한국 교회의 재건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재건을 위해 노력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한국 교회는 물론이요, 한국 사회 전체의 큰 비극이 일어난다. 곧 1950년 시작되었던 한국 전쟁이다. 한국 전쟁을 계기로 한국의 교회는 크게 두 가지의 특징을 띄게 되었다. 그 첫째는 철저한 반공주의요, 둘째는 사회봉사이다. 

일제시대부터 기독교는 공산주의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해방 정국에서 교회와 공산주의의 갈등은 더욱 노골화되었고, 한국 전쟁을 계기로 교회와 공산주의 사이의 적대의식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전 세계가 양분되었던 냉전 체제 속에서 한반도가 무력 충돌의 장이 되면서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였던 한국 교회는 공산주의를 악마화하는 반공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1953년 휴전에 대한 협상이 시작되자 한국 기독교가 휴전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던 것은 당시 한국 교회의 반공정서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각주:8] 
 
한국전쟁은 한반도 전역을 폐허로 만들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조차 어려웠던 것이 대다수 국민의 생활이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전쟁 피난민을 위한 구제 사업과 전쟁으로 인한 고아와 미망인들을 지원하는 사업이 모두 교회의 역할이었다.[각주:9] 당시 교회가 사회 구제의 제 일선에 나설 수 있었던 배경은 외국(특별히 미국) 교회의 원조에 있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한 한국 국민들의 참상이 외국 크리스천들에게 알려지면서 많은 구호물자들이 한국에 들어왔고, 그것을 분배하는 일이 한국 교회에 맡겨졌기 때문이다. 

신일교회는 공교롭게도 한국 교회 역사를 크게 구분하는 분기점인 1945년에 창립되었다. 그리고 신일교회의 출발 역시 해방 이후 한국 교회의 재건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각주:10] 미군부는 일제시대의 천리교당이었던 자리를 교회의 재건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신당동 분소이고 그 자리에서 1945년 11월 신일교회가 시작된다. 한국 교회의 재건 과정에서 시작된 신일교회 역시 한국 전쟁이라는 소용돌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신일교회 역시 이 과정에서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것과 동시에 사회적 봉사에 힘을 썼는가? 

이일선 목사가 신일교회를 개척한 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신일교회는 약 30여 명의 장년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북한 지역에서 월남하신 분들이 계셨다. 해방정국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월남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북한에서 내려온 분들이 신일교회의 교인이 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교회 안에 반공의 감정이 있었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반공의 감정은 한국 전쟁 동안 더욱 증폭되었을 것이다. 신일교회를 개척하였던 이일선 목사가 전쟁 중에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끌려가고,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했던 성도들이 인민군으로부터 강제동원을 당했으며, 교회 건물은 노동당이 강제로 수용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이다.[각주:11] 
 
한국 전쟁 속에서 나병환자 역시 큰 아픔을 겪어야 했다. 당시 전국에 약 10만 명의 나병환자가 있었는데 나환자수용소의 규모는 총 2만 여 명이었다고 한다. 전쟁 속에서 건강한 사람조차 살아가기 힘든 시절, 나병환자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런데 신일교회를 개척했던 이일선 목사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으로, 한국 전쟁의 와중에서도 학업을 마치고 의사가 된다. 이일선 목사는 ‘나병 이동 진료반’을 조직하여 공동묘지나 다리 밑에 우거하는 나병환자를 찾아다니며 1천 여 명을 진료하여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 이후 신일교회가 예배당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10여 명의 나병환자들이 교회에서 숙식하며 예배실 장의자를 만들었다고 하니,[각주:12] 당시 이일선 목사와 신일교회가 어떻게 나병환자들을 돌보았는지 짐작케 한다.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과 신일교회의 내부 갈등 

한국의 장로교회는 일제 통치 기간 하나의 교단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1950년대에 이르러 3차례에 걸친 한국 장로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난다. 첫 번째 분열의 씨앗은 신사 참배 문제였다. 일제통치 기간 중에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신사 참배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크리스천들은 마지막까지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고, 그 결과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들을 가리켜 이른바 ‘출옥 성도’라고 부르는데, 신사를 참배했던 성도들과 출옥 성도들 사이의 갈등이 불거져 1952년 예수교장로회(고신) 교단이 시작되었다. 

해방 직후 장로교 신학교는 조선신학교가 유일하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신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치던 김재준 교수에 대하여 고등비평에 근거한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진정서를 학생들이 조선신학교 총장에게 제출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재준 교수의 신학 사상에 대한 다양한 논쟁들이 있었고, 이 논쟁이 불거져 조선신학교의 신학을 지지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장로회 교단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1954년에 있었던 한국 장로교회의 두 번째 분열이다. 

195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세 번째 분열은 예수교장로회(통합)과 예수교장로회(합동)의 분열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WCC 창립대회에 참여하였던 김관식이 한국 장로교회의 WCC 가입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당시 보수적인 교회 인사들은 WCC가 공산주의를 용납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고, 보다 진보적인 교회 인사들은 WCC에 대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오해라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좁히지 못한 채, 예수교장로회는 1959년 통합 교단과 합동 교단으로 분열하고 만다. 

한국 장로교회가 이와 같이 분열을 거듭하고 있을 때 신일교회는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려고 노력했다. 예수교장로교회와 기독교장로회가 분열하였던 1954년, 예장과 기장이 재통합될 때까지 그 어느 편에도 가입하지 않겠다고 중립을 선언했던 교회들이 있었다. 신일교회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가운데 또 다시 예수교장로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신일교회는 더 이상 무소속으로 교회를 유지할 수는 없으니 어느 교단이든 가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합동보다는 통합에 가입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당회원 중에는 많았다고 한다.[각주:13] 
 
계속되는 장로교회의 분열 속에서도 중립적인 위치를 유지하려 노력하던 신일교회였지만, 교회 내부로부터 시작된 갈등은 피해 갈 수 없었다. 1963년 신일교회의 3대 담임 목사로 취임한 송치헌 목사의 열정적인 설교와 목회로 신일교회는 큰 성장을 이룩하였다.[각주:14] 그 결과 1965년에는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성인 성도가 약 700여 명에 이르는 중형교회가 되었다. 이때 송치헌 목사는 급격히 증가하는 교인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젊은 여전도사인 김은신 전도사를 영입하였다. 그런데 이 것이 내적 갈등의 도화선이 된다. 

신일교회가 창립되면서부터 초대 담임 목사였던 이신일 목사를 도와 성도들을 돌보던 유숙렬 전도사가 있었다. 교회의 창립, 한국 전쟁, 그리고 교회의 재건축이라는 모든 과정을 함께 겪으며 신앙생활을 하였던 유숙렬 전도사와 그의 돌봄을 받았던 교회 여집사들 사이의 관계는 매우 돈독한 것이었다. 그런데 송치헌 목사의 부임 이후 새로운 신자들이 늘어나고, 당시 60세가 넘은 유숙렬 전도사를 대신할 젊은 여전도사가 부임하니 교회 초창기의 교인과 새로운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게다가 신일교회가 아직 어느 교단에 소속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송치헌 목사가 합동 측 목사들과 교류하고 있다는 소식이 교회에 퍼지자 교회 안의 갈등은 걷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각주:15] 
 
1965년 약 700여 명의 성인 성도가 출석하던 신일교회는 교회 안의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1년 만에 주일 예배 출석인원이 약 300명인 교회가 되었다. 1년 만에 약 60%의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상황 속에서 신일교회가 겪었을 고민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당회가 나섰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그 모든 책임을 지고 1966년 송치헌 목사가 신일교회를 떠난다.[각주:16] 
 

부흥의 시대 

1965년은 한국 교회가 개신교 선교 8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한국 교회는 대대적인 민족 복음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4년 10월 김활란 박사가 교계 지도자 75명을 이화여자대학교에 초청하여 ‘전국복음화운동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그해 12월 서울 YMCA회관 강당에서 신․구교 17개 교파의 대표들이 ‘전국복음화운동위원회’를 조직하여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 아래 1965년을 ‘복음화운동의 해’로 정하였던 것이다. 이후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교회는 큰 부흥을 경험하는데, 그 중심에는 부흥회와 전도 훈련이 있었다.[각주:17] 
 
첫째로, 부흥집회이다. 한국 CCC 대표였던 김준곤 목사는 1971년 1월 1일 기독교방송에서 공식적으로 민족복음화운동을 선언하였다.[각주:18] 그리고 1974년 한국 CCC는 여의도에서 대규모 전도집회인 엑스플로 ‘74를 개최하였다. 당시 대회본부가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마지막 날 밤에만 1백58만 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엑스플로 ’ 74 대회를 전후로 한국 CCC는 1천여 개 교회의 주보를 무작위로 수집하여 교회의 출석 교인 숫자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조사하였는데 엑스플로 ‘74를 전후로 한국 교회는 33%의 성장을 이룩하였다는 것이다.[각주:19] 엑스플로 ’74 외에도 1973년과 1980년에 있었던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도 한국 교회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교회의 부흥에는 부흥집회와 더불어 전도훈련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위에서 서술한 엑스플러 ‘74 대회도 1971년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1명의 성도들을 민족복음화운동을 위한 요원으로 훈련시키는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각주:20] 그리고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교회에는 한국기독학생회(IVF)에서 펴낸 「원투원」(one to one), 「행복에로의 초대」, 「새로운 삶의 길」 등 다양한 성경공부 교재가 등장한다. 이러한 성경공부 교재는 귀납법적 성경연구 방식을 기초한 것인데, 이 방법을 개인의 경건훈련으로 적용한 것이 QT이며, 그룹으로 활용한 것이 제자훈련이다. 이러한 성도의 양육과 전도 훈련이 한국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 교회가 개신교 선교 8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복음화운동’의 기치를 내걸었던 1965년 신일교회는 제4대 담임 목사로 현성초 목사를 모신다. 그리고 현성초 목사가 사임했던 1977년까지 신일교회는 주일예배 출석인원이 약 750여 명으로 부흥한다.[각주:21] 그리고 제5대 담임 목사로 이광선 목사를 모셨다. 이광선 목사의 사역이 시작된 후 약 10년 뒤인 1987년 12월 새성전을 봉헌하였는데, 이때 주일 예배 출석인원이 약 2,8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각주:22] 이것은 1970년대와 1980년대 크게 부흥하였던 한국 교회의 성장과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일교회의 부흥에도 각종 부흥회와 전도 훈련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첫째로 각종 부흥집회이다. 현성초 목사는 부흥사 출신답게 신일교회에 부임하면서 매월 다섯째 주일에 하룻밤 부흥회를 열었다.[각주:23] 이후 이광선 목사의 부임과 더불어 신일교회의 부흥회는 더욱 다양해졌다. 이광선 목사는 1978년 3월 인천 숭의교회 이호문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여 부흥회를 개최한데 이어, 1979년 3월과 1980년 4월에도 각각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이 외에도 이광선 목사는 학생 부흥회, 장년부 수련회, 여전도회 부흥회 등 다양한 형태의 부흥회를 실시하였고[각주:24] 이것은 신일교회의 부흥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65년부터 1980년대까지 신일교회의 부흥은 다양한 부흥회만의 결과는 아니었다. 현성초 목사는 제직과 구역장을 중심으로 3대 전도 운동을 실시하는 한편, 제직 세미나와 구역 교육 그리고 전도요원 훈련을 지속하였다.[각주:25] 이광선 목사는 신일교회에 부임하여 평신도 교육을 위한 두 개의 기구를 신설한다. 곧 평신도들이 교회의 성장과 선교의 사명을 실행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연경원과 교회 조직의 기초가 되는 구역을 강화하기 위한 제직 양성반이다.[각주:26] 이와 같은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 양육과 전도 훈련이 각종 부흥회와 연결되어 신일교회의 급격한 성장으로 이어졌다. 


신일교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신일교회가 창립되던 1945년부터 부흥의 시대를 겪었던 1980년대까지 신일교회는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특징을 그대로 견지해 왔다. 부분적인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해방 이후 한국 교회가 재건되는 과정, 한국 전쟁을 지나며 교회 안에 반공주의 정서가 확대되는 모습, 전쟁의 폐허 속에서 적극성을 띄었던 교회의 사회봉사, 한국 장로교회의 잇따른 분열 양상, 그리고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폭발적인 성장까지 신일교회의 역사는 한국 교회의 역사 흐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심지어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교회의 성장이 교회의 예배당 건축으로 상징되었고, 보수적 교회의 복음화 운동과 진보적 교회의 민주화 운동이 1987년 6·10 항쟁을 기점으로 크게 변화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신일교회가 1987년 새로운 성전 건축을 완공하였다는 점도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만일 신일교회가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역사의 흐름을 따라간다면, 오늘의 신일교회도 오늘의 한국 교회가 걸어가는 발걸음의 그 보폭과 방향에 있어서 비슷하지 않을까? 오늘의 신일교회 모습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필자는 1990년대 이후 한국 교회의 모습과 2000년대 한국 교회에 주어진 과제를 소개하면서 그러한 특징들이 오늘의 신일교회에도 동일한지 여부를 신일교회 청년부가 판단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 교회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것이 ‘해외 선교’이다.[각주:27] 1965년 ‘민족복음화’를 선언하였던 한국 교회는 1970년대와 1980년대 큰 부흥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 축적된 교회의 역량이 해외 선교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1988년 해외여행자율화 조치가 취해지면서 한국 교회는 앞 다투어 단기선교에 열을 올렸다. 1990년대 한국 교회를 표현하는 단어는 단연 ‘해외 선교’였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해외 선교에 집중하였던 1990년대가 지나고 2000년대로 접어들자 교회는 지금까지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환경을 접하게 되었다. 새로운 환경이란 더 이상 한국 사회가 한국 교회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는 눈에 보이는 통계로 확인할 수 있는데, 2009년 3월 한국 교회는 해외 선교사 2만 명 시대를 맞이하였지만[각주:28] 한국 교회는 성도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각주:29] 이에 대한 정확한 원인 분석과 대안이 2009년을 살고 있는 한국 교회의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한국 교회의 구체적인 과제로 ‘신앙의 계승 문제’와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신앙의 계승 문제이다. 과거 한국 교회의 조직은 전통적인 가정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구역 조직이 그 대표적인 예로, 지역을 기준으로 가족단위 소그룹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구역 조직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세대 간 특성이 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한국 사회는 가족단위로 움직일 때 강력한 결속력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세대간 문화적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으며, 전통적 구역조직은 그 한계를 드러내었다.[각주:30]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세대와 세대를 이어 신앙을 계승해야 할 청년 및 젊은 부부들이 교회에서 이른바 ‘낀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둘째로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이다. 1980년대까지 한국 사회는 민주화와 경제 성장이라는 두 가지 거대 담론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이러한 거대담론을 이끌어가는 주체세력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를 접어들면서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다양한 미시 담론이 우리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한국 교회는 다양한 미시 담론을 기독교적 정신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이 부재하다. 교회 지도자들은 다양한 미시 담론을 성경적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으며, 각 분야의 평신도 전문가들은 자신의 전문성과 신앙을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 그 접촉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신앙 계승의 문제’와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의 열쇠는 2009년 을 살아가는 한국 교회 청년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점이다. 민주화와 복음화라는 거대 담론에 익숙한 기존 세대가 아닌 198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들, 그리하여 진보와 보수라는 과거의 개념이 전혀 없는 세대들, 한국 사회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몸으로 익힌 세대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찾아 나설 때 한국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이 살아날 수 있다. 그리고 각자에게 주신 다양한 사명을 중심으로 동질적 집단이 형성되어야 그 공동체 안에서 신앙의 계승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 Karl Heyssi, Konpendium der Kirchengeschichte, 손규태 역, 「세계 교회사」, 한국신학연구소, 2004, p. 22. [본문으로]
  2. 어거스틴의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분은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에 기원을 둔 것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개념으로부터는 유추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본문으로]
  3. 그 대표적인 인물로 이상재를 꼽을 수 있다. 이상재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계기로 일본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자 YMCA 종교부 총무로 활동하면서 기독교 청년 운동에 투신한다. 그때 이상재의 나이는 59세였다. 전택부, 「이상재 평전」, 범우사, 1985, 120-126. [본문으로]
  4. 1885년 내한하였던 언더우드는 그 다음 해인 1886년에 고아원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1905년 경신학당으로 정착되어 오늘의 경신중고등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아펜젤러 역시 1886년 영어학교를 개설하였는데 1887년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학교의 이름을 하사하여 오늘의 배재중고등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본문으로]
  5. 그 하나의 예로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을 들 수 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위대한 성령의 역사였지만 2009년 현재의 한국 교회 부흥과는 역사적 연결점이 약하다. 현재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의 모습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부흥의 결과이다. [본문으로]
  6. 강원용 목사는 4·19 혁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 나와서 데모를 하도록 고려대 학생들을 주동한 학생이 경동교회 박상원입니다. 그리고 4월 19일 국회의사당 앞 데모를 주동한 서울대학의 학생회 위원장 윤식과 간사장인 윤영일, 둘 다 경동교회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외에도 4·19의 주동학생들 가운데 다는 아니지만 기독학생들의 영향력이 제일 컸습니다.” 조병호, 「한국기독청년학생운동 100년사 산책」, 땅에쓰신글씨, 2005, p. 77. [본문으로]
  7. 이와 관련하여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의 주장은 참고할 만하다. “저는 신세대를 향해서 보수냐 진보냐를 묻는다면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과거의 냉전적 보수, 냉전적 진보의 개념으로 질문한 겁니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그런 상황이 없었지요. 그들에게는 미래만 있습니다.” 김병혁, 박종화, “허구와 수구를 넘어 함께하는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목회와신학」, 2009년 7월호 시국대담. [본문으로]
  8. 한국 교회는 휴전을 반대한다는 분명한 입장을 표출하였는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휴전이 된다면 아시아와 전 세계의 공산화를 방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휴전재론과 우리의 태도”, 「기독공보」, 1953년 4월 20일자; “38선 정전 반대”, 「기독공보」, 1952년 1월 21일자. 또한 1953년 6월 탑골공원에는 약 7,000여 명의 크리스천이 참석한 가운데 북진통일 기원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9. 전쟁고아를 위한 기구로 기독교아동복지회(Christian Children's Fund), 스와슨복음전도회(Everett Swanson Evangelistic Association), 기독교선명회(World Vision), 그리고 홀트아동복지회 등이 이때 설립되었다. 그리고 국제연합한국재건단, 기독교세계봉사회, 감리교, 동양선교회, 메노나이트, 월드비전, 캐나다연합교회, YWCA, 메리놀수녀회 등의 지원으로 미망인을 위한 시설이 설립되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기독교의역사」(3),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pp. 66-67 [본문으로]
  10. 신일교회를 개척했던 이일선 목사는 일제에 의해 폐쇄된 교회 문 앞에서 기도하던 중 “너는 교회의 종을 다시 울리게 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신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지광원 편, 「신일교회 50년의 발자취」, 신일교회 홍부출판부, 1995, p. 37. 이처럼 신일교회의 시작은 한국 교회의 재건이라는 비전과 일치하였다. [본문으로]
  11. 신일교회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신일교회 60년사」, 신일교회, 2007, p. 20-26. [본문으로]
  12. 지광원 편, 「신일교회 50년의 발자취」, pp. 52-53. [본문으로]
  13. 신일교회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신일교회 60년사」, pp. 34-39. [본문으로]
  14. 송치헌 목사의 열정적인 목회 외에도, 교회당의 완공 및 신당중앙교회의 내적 분규로 말미암아 제직들과 교인들이 신일교회로 전입해왔던 것 등도 신일교회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Ibid., 43. [본문으로]
  15. 지광원 편, 「신일교회 50년의 발자취」, pp. 61-62. [본문으로]
  16. 신일교회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신일교회 60년사」, pp. 44-45. [본문으로]
  17.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교회가 큰 부흥을 이룰 수 있었던 원인으로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 미국으로부터 소개된 교회 성장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그리고 부흥회 및 전도 훈련을 비롯한 교회 내부의 노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 역사의 흐름을 따라 신일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이 글에서는 교회의 내적 노력에 초점을 맞추었다. [본문으로]
  18. “방금 울린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60년대가 70년대로 넘어오는 이 엄숙한 순간에, 나는 나의 사랑하는 한국 교회와 함께 우리들의 지상 과제인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비상한 헌신과 결심을 하고 싶습니다.” 김준곤, 「김준곤 문설집」(1), 순출판사, 1984. p. 61. [본문으로]
  19. 김준곤, “제3의 성령폭발 엑스플로 ’74를 조명한다”, 「CCC편지」, 1997년 11월. [본문으로]
  20. 엑스플로 ‘74 팸플릿에 나타난 대회 7대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의 지상명령인 전도의 폭발점을 만든다. 둘째, 전민족 복음화를 위한 전신자정예화훈련을 한다. 셋째, 사도행전적 교회부흥의 폭발점을 만든다. 넷째, 예수혁명운동을 세계적 차원으로 폭발시킨다. 다섯째, 학생, 청소년층에 신앙운동의 폭발점을 만든다. 여섯째, 사랑의 새 물결을 일으킨다. 일곱째, 전도를 위한 크리스천의 힘의 총화로 집약된다. 한국준비위원회, 「EXPLO 74 세계기독교대회 안내」, 1974, p. 8. [본문으로]
  21. 지광원 편, 「신일교회 50년의 발자취」, p. 72. [본문으로]
  22. 신일교회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신일교회 60년사」, p. 66. [본문으로]
  23. 현성초 목사가 신일교회에 부임하여 온 과정에도 부흥회가 있었다. 1966년 여름, 신일교회에서 기독교선교회 성동구연합부흥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부흥회의 강사가 현성초 목사였다. 이 부흥회에서 큰 은혜를 받은 신일교회가 현성초 목사를 담임 목사로 청빙한 것이다. 지광원 편, 「신일교회 50년의 발자취」, p. 63. [본문으로]
  24. 신일교회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신일교회 60년사」, pp. 54-55. [본문으로]
  25. 현 목사가 주장했던 전도 운동이란 첫째로, 전도지 나누어주기(심기 운동) 둘째로, 데려오기(자라기 운동) 셋째로, 결신자 찾아보기(김매기 운동)이었다. 지광원 편, 「신일교회 50년의 발자취」, pp. 63-64. [본문으로]
  26. 신일교회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신일교회 60년사」, p. 55. [본문으로]
  27. 2009년 현재 한국 교회에서 ‘선교’란 곧 해외 선교를 내포하고 있지만, 한국 교회 역사에서 해외 선교가 일상화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본문으로]
  28.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2009년 1월 발표한 통계이다. 2009년 1월 한국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는 총 1만 9,413명으로 2009년 3월이면 2만 명이 넘을 것으로 계산하였다. [본문으로]
  29. 2006년 6월 발표된 인구조사통계자료에 의하면 1996년부터 2006년까지 천주교가 78%, 불교가 3.9% 성장한데 반하여 한국 기독교는 1.6% 감소하였다. [본문으로]
  30. 이에 대한 대안으로 셀그룹 운동, 가정교회 운동 등이 한국 교회에 등장하고 있지만, 젊은 부부와 청년들 그리고 그 이후의 세대를 품을 수 있는 교회의 조직 구성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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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20. 5. 2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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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문맥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한다. 

위의 주장을 반대하는 현대 성서학자나 설교자는 내가 알기로 아무도 없다. 그런데 성경에는 문맥을 찾기가 쉽지 않은 본문이 있다. 이야기체의 본문이라면 내러티브의 흐름을 문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구약의 예언서나 신약의 서신서는 중심 주제가 있고, 그 주제를 전개하는 나름의 논리가 있다. 이것이 문맥을 형성한다. 그러나 구약의 성문서 중에는 특정 문맥을 찾아 그것을 해석의 배경으로 삼기 어려울 때가 많다. 

시편은 150개의 독립된 시가 하나로 엮여 있다보니, 적지 않은 설교자들이 시편의 문맥을 찾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등장하는 방법이 표제어를 문맥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시편에는 '다윗'이라는 이름이 포함된 표제어가 73개나 등장한다. 이러한 시를 읽고 해석할 때 다윗의 삶을 그 문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혹은 시편이 암시하는 역사적 사건을 그 시편의 문맥으로 여기는 방법도 있다. 

다윗의 삶을 시편의 문맥으로 받아들인 설교의 예는 아래와 같다. 

 

 

시편 8편 1-9절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봅니다”

오래전 어느 부유한 남성이 마차를 타고 어두운 밤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부유한 남성은 밤의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마차 안에 있었고 그 안에 환하게 등불을 켜 놓고 있었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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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건을 시편의 문맥으로 받아들인 설교의 예는 아래와 같다. 

 

 

시편 46편 1-11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히스기야 왕이 남 유다를 다스리던 때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북쪽에서 내려온 앗수르 제국의 군대는 이미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더 남쪽으로 내려와 남유다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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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개인의 삶이든,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이든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시편의 문맥으로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150편으로 묶여 있는 시편 안에서 문맥을 찾을 수는 없을까? 모세 오경, 역사서, 예언서는 모두 각 권 안에서 문맥을 발견할 수 있는데 시편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국내 학자의 연구 도서를 두권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김창대. <한 권으로 꿰뚫는 시편>. 서울: IVP, 2015. 
  • 방정열. <새로운 시편 연구>.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8. 

<새로운 시편 연구> & <한 권으로 꿰뚫는 시편>


1985년 윌슨(Gerald H. Wilson)이라는 학자가 Editing of the Hebrew Pslter라는 책을 펴내며 시편은 1편부터 150편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김창대와 방정열은 그러한 전제 위에 시편 전체의 주제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정경 비평 혹은 구성적 방법이라 부른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시편 1-2편은 시편의 서론이며, 시편 146-150편(할렐루야 시편 모음집)은 시편의 결론이다. 서론(1-2편)과 결론(146-150편)을 제외하면 제1권부터 제5권까지 각각의 잘 짜인 구성이 있고 이러한 배치는 나름의 신학적 주제를 담고 있다. 

김창대와 방정열의 연구 결과는 매우 흡사하여 설교자로서 시편의 문맥을 찾는데 신뢰할만한 가이드를 제공한다. 그러나 시편의 구조 분석에 상당히 유사한 관점을 소유한 두 학자가 시편 150편의 핵심 주제로 내어놓은 결론은 사뭇 다르다. 김창대는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이라는 고난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며 낙심하지 말고 율법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그래서 그의 책은 "성도의 탄식과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반면, 방정열은 바벨론에서의 귀환한 신앙 공동체에게 '다윗 왕조로 대표되는 실패한 인간-왕을 그리워하지 말고 영원토록 신실하신 하나님-왕을 의지하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래서 그의 책은 "실패한 인간-왕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왕을 향하여"라는 부제가 달렸다. 김창대가 시편 2편(제왕시)보다 시편 1편(토라시)에 더 비중을 두며 국가보다는 개인적 측면에 관심을 두었다면, 방정열은 시편 1편(토라시)보다는 시편2편(제왕시)에 더 비중을 두고 개인보다는 국가적 측면에 관심을 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아무튼, 두 학자가 동일한 비평 방법으로 다른 교훈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흥미롭다. 

시편을 본문으로 설교하는 목회자에게 김창대와 방정열의 연구는 본문의 문맥을 찾는데 도움을 준다. 물론 동일한 방법론과 동일한 연구 자료를 참고할 지라도 해석의 결론은 설교자마다 다양할 것이 명백하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150편으로 구성된 시편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이미 그 안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권으로 꿰뚫는 시편
국내도서
저자 : 김창대
출판 : IVP 201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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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편 연구
국내도서
저자 : 방정열
출판 : 새물결플러스 2018.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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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