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1. 11. 28.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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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과 연시가 되면 우리 사회의 이른바 전문가들이 내일에 대한 예측을 내어 놓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시간이 흐른 뒤 전문가들의 예측이 얼마나 실현되었는지를 조사한 연구를 보면 과연 이것이 각 분야 전문가들의 예측이었나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전문가들의 예측과 그 이후에 일어난 현실 사이에 큰 괴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시대 전문가들의 예측이 가장 정확한 분야가 있다면 기상 예측입니다. 참 의외이지요.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기상청의 예보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데 기상예측이 가장 정확한 분야라고 하니 참 흥미롭습니다. 경제계의 예측 – 예를 들어 내년 경제성장률에 대한 전망 – 이나 정치계의 예측 – 이를 테면 내년 선거의 향방이 어떠하리라 – 는 것은 정확히 맞추는 경우보다 틀린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프로이센과 독일제국의 군인으로 근대적 참모 제도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헬무트 폰 몰트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그러나 전쟁만 불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는 불확실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예측 불가능성’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도 예측 불가능성에 대해 매우 강력한 어조로 말씀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도서의 말씀이지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때를 따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우리의 모든 삶이 좌우됩니다. 그런데 전도자의 중요한 관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처음과 끝을 사람은 측량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성경의 선언이지요. 여기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어떤 직감이나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기도를 많이 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중에는 그런 분이 한 분도 안 계시다고 생각하지만 내년의 운세를 알아보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새해를 맞이하며 축복의 말씀을 받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도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 일을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다 깨달을 수 없다고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므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한 해를 준비하는 연말과 연시, 우리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는 내일에 대한 예측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측이 아니라 바로 준비입니다. 


언제 VS 어떻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하신 내용의 일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세워진 멋진 성전을 자랑하듯 예수님께 소개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날이 이르면, 곧 때가 이르면 예루살렘 상전이 모두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그날은 언제 임하게 될까요? 과연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는 그 위기의 날, 대변동의 그날이 가까이 왔다는 징조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이러한 질문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언제’입니다. 언제, 나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그날이 찾아오겠습니까?라는 질문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의 이 질문은 내일에 대한 예측을 원하는 질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누가복음 21장의 대부분의 내용이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긴 대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천천히 읽어보면, 예수님은 언제라는 질문에는 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십니다. 사람들의 질문, 곧 그날이 언제 올 것인지 ‘예측’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으시고, 그날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를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에도 매우 중요한 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본문 35절입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5절) 

여기에 등장하는 ‘이 날’은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는 바로 그날입니다. 이 지점에서 먼저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넘어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단지 종교시설 하나가 파괴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바라보았던 성전은 예루살렘에 세 번째로 세워진 성전으로 헤롯 왕이 세웠다고 하여 ‘헤롯 성전’으로 불리는 성전입니다. 예루살렘에 역사상 처음으로 세워진 성전은 솔로몬이 건축했다고 하여 이른바 ‘솔로몬 성전’으로 부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러니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는 그날에도 단지 성전 하나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바벨론이라는 이민족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모든 토지가 황폐해지는 역사적 현장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바라보고 계시는 헤롯 성전도 AD 70년에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러니 그날의 참화는 단지 종교시설 하나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에게 민족적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35절에 등장하는 ‘그날’은 단지 종교시설 하나가 무너지는 날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위기의 날이요, 대변동의 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그 위기의 날, 그 대변동의 날이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건강했던 몸에 질병이 찾아오는 것이 그날의 시작이 될 수 있어요. 어떤 분들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실직이 그날의 시작이 될 수도 있지요. 어떤 분들에게는 큰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분들에게는 자녀에게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우리 중에는 그날이 이미 찾아온 분들도 계시지요? 그리고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날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는 아직 그날이 찾아오지 않은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그날이 나에게 찾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나에게 찾아오는 그날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을 띄고 있는지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큰 위기와 대변동의 날이 불현듯 찾아오겠지만,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나의 삶을 송두리째 뒤 흔드는 대변동의 날을 피해 갈 수 있을까요? 그 정도로 부족하다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께 늘 기도하며,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면 이 위기의 날을 피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모든 기대는 헛된 기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잖아요.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 임하리라”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리고 지금도 열심히 하나님을 예배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나의 삶에도 큰 위기의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 아니 나의 삶에도 대변동의 그날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날을 착실하게 준비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조심하라

자, 우리의 삶에도 위기의 그날이 찾아오고 나의 삶에도 대변동의 그 순간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그날을 준비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본문 34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계속해서 예수님은 스스로 조심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곧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3가지입니다. 첫째로, 방탕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술 취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먼저 방탕과 술 취함이 등장하지요. 주일예배에 참여하는 여러분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방탕함이나 술 취함에 깊이 빠져 계신 분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언급하신 것은 조금 다른 차원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쉽게 그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생활의 염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농부가 뿌린 씨앗은 길가에도 떨어지고, 돌밭에도 떨어지고, 가시떨기에도 떨어지죠.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떨어지자마자 새가 와서 먹어버렸으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묘사와는 조금 다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삶의 고통이 찾아왔을 때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해온 신앙인들은 어느 정도 이 단계를 넘어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 번째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그다음을 주목하세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이 단계만 넘어서면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는 분들, 그래서 믿음이 좋다고 하는 분들도 너무도 쉽게 넘어질 수 있는 영역이 있으니 그것은 생활의 염려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너무도 쉽게 자주 넘어지는 ‘생활의 염려’를 가만히 분석해보면 그 깊은 밑바닥에는 불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염려합니까? 우리가 왜 걱정합니까? 우리가 왜 근심합니까? 그 이유를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매우 단순합니다. 지금도 내 인생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어요. 바로 불신앙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으면 생활의 염려가 내 마음을 사로잡게 되는 것이요, 내 마음이 생활의 염려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나의 마음에 불신앙이 가득 일어났다는 증거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라”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집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결과가 본문 34절의 마지막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뜻밖에” 나에게 위기와 대변동의 순간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스스로 조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뜻밖에 그날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날이 찾아와서 우리 삶에 무서운 덫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의 마음이 굳건한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십시오. 염려와 걱정과 근심의 거리들이 많이 몰려올지라도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스스로 조심하여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날들이 하루하루 쌓일 때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위기의 그날, 대변동의 그날이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신앙의 중심을 잡고 그 모든 과정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34절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면서 스스로 조심하여 마음을 지키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36절에서는 스스로 조심하여 우리의 마음을 지킬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36절) 

우리가 스스로 조심하여 나의 마음을 지킬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이 구절은 나에게 그날이 찾아오지 않는다거나 나에게 위기의 때나 대변동의 시간이 찾아오는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 3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그리고 넉넉히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지요. 거기에 더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인자 앞에 서도록” 우리 성도들에게도 거대한 고통의 시기는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조심하여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지키는 성도들은 그 모든 일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 모든 일을 주님과 동행함으로 능히, 넉넉히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권면하십니다. 그 말씀은 무엇입니까?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깨어 있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수시로 점검하라는 말씀이지요. 본문이 시작하는 첫 구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방탕함이나 술 취함이나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날마다 영적인 민감성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이 시작하는 34절의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이나 본문이 마치는 36절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마지막 36절에는 깨어 있기 위한 하나의 구체적인 방법이 덧붙여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AD 3세기경,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도시를 떠나 사막에서 기도와 수도에 전념하던 분들이 계셨습니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가리켜 사막의 수도사들이라고 부릅니다. 사막의 수도사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하나의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이제 막 사막에 들어와 수도자의 길을 시작한 사람이 명망이 높은 스승님에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제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요?” 그러자 스승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도록 자네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도록 하기 위해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위해서도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네.” 이 대답에 만족할 수 없었던 이 수련생은 다시 한번 스승님께 질문하지요. “그러면 우리가 매일 기도하며 수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승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태양이 떠오를 때 우리가 잠들지 않고 깨어 있기 위함일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빛이 되시는 주님께서 매일 아침 여러분의 마음에 밝은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여 깨어 있으십시오. 그리하여 매일 아침 태양이 떠오르듯 매일 우리의 삶을 찾아오시는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십시오. 우리 모두에게 큰 위기의 날, 모든 것이 뿌리째 뒤흔들리는 대변동의 날은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기도함으로 깨어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여러분들은 그 모든 시련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깨어 있기만 한다면, 그 모든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의 인생을 여전히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든든한 손길을 우리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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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0. 6. 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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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건망증이 심한 40대 아주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아주머니께서 아파트 단지에서 쓰레기를 버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경비원이 이렇게 소리 지르는 겁니다. “동수 어머니, 지금 뭐하세요!!” 그때야 이 아주머니께서 깨달으셨습니다. 지금 자신이 의류를 버리는 곳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고 하던 참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의류를 버리는 곳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 했다는 자신의 행동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 마음에 불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은 집에서 나오면서 음식물 쓰레기만이 아니라, 못 입는 옷가지들도 한 봉지 가지고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손에는 못 입는 옷가지들은 안 보이고 음식물 쓰레기만 들려있는 거지요. 

아주머니는 황급한 마음에 음식물 쓰레기장으로 달려가 코를 부여잡고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어보았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네, 그 안에는 음식 쓰레기와 함께 뒤엉켜있는 옷가지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자신의 건망증을 한탄하고 또 한탄하면서 코를 부여잡고 옷가지들을 치웠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이제는 정신을 좀 차리자.” “이제는 정신을 좀 차리자.” “내가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된다.” 계속해서 결심하면서 집에 들어왔지요. 그리고 이제 건망증은 멀리하고 스마트한 삶을 살려는 마음으로 시원한 냉수 한잔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냉장고 문을 활짝 여는 순간. 

냉장고 안에는 버젓이 섬유유연제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고 하여 건망증이 사라지고 스마트한 생활이 시작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죄성 역시 우리의 결심과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간절한 바람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이제는 정신을 좀 차려야지.” “이제는 정신을 좀 차려야지.”라고 결심하였지만, 냉장고 안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는 섬유유연제를 바라보며 절망하듯,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고자 결심하였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여전히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마음을 바라볼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잠 16:2)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예수님께서 하나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사람 가운데 한 명은 바리새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세리였지요.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들려주신 율법의 말씀을 가장 열심히 실천하고 지켰던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과는 상관없이 살았던 사람들, 나아가 주변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당했던 사람이 세리입니다. 이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먼저 바리새인이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가만히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죄를 전혀 짓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자랑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자랑합니다. 자신에게 수입이 생기면 그 가운데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한마디로 ‘자랑’입니다. 

그런데 함께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던 세리는 감히 눈을 높이 들거나, 큰 소리로 기도하지 못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그에게는 자랑 거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가슴을 치며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상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의 기도는 짧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바리새인은 정말 많은 자랑 거리를 늘어놓았지만 세리는 내세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그저 하나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신 이후에 이렇게 결론 내리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 18:14) 

적지 않은 크리스천들이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자기 자신을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의 모습과 일치시키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주인공은 세리가 아니라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 분명한 증거가 누가복음 18장 9절입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신 이 비유의 말씀은 세리와 같은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 있었습니다. 그는 여려서부터 성경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율법의 말씀을 거의 다 외우고, 그 말씀대로 자신의 행동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 기도했습니다. 금식기도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그들은 매주 두 번씩 금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소득 가운데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의롭게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이 정도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앙생활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고, 잘못을 저지르면 회개 기도를 올리기도 하고, 말씀에 비추어 나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교정하려는 노력을 하기에, 그래도 나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평가는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한 관원 

누가복음 18장에는 또 하나의 사건이 나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죠. 어떤 관리가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그는 큰 부자였으며 율법에 있어서도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열심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계명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모두 지켰던 사람입니다. 이 관리에 대해 이렇게 소개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중 딸이 있으신 분들에게는 정말이지 사위 삼고 싶은 사람, 그가 바로 이 관원입니다. 부자입니다. 관원이니 사회적 지위도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킬 정도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영원한 생명’, 곧 영생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떠세요? 우리가 결론을 다 알고 있어서 그렇지, 오늘 본문의 스토리를 배제한 채, 이 관원의 조건만 놓고 본다면 어떻게 해서든 사위삼고 싶은 사람 아니에요?  바로 그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18절입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관원은 재물을 많이 모으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율법을 다 지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생명,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더 높은 차원의 신앙이 필요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가 지금까지 성실하게 지키고 있는 율법, 곧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의 핵심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던 그는, 그 모든 계명을 지켜왔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는 아직 율법을 지키는 이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관원은 열 개의 계명을 잘 지켰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의 핵심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십계명이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는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명령이 십계명 1 계명부터 4 계명까지의 내용입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명령이 십계명 5 계명부터 10 계명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관리에게 십계명을 지키라고 다시 한번 명령하신 것은 그 관리가 십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십계명의 정신,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 관리는 아직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관리는 자신을 위해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지켰던 것도, 관리로서 열심히 일했던 것도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진정 영원한 생명, 영생을 얻기 원한다면 십계명과 율법이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인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과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는 재물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과 이웃을 ‘너를 위한 도구’가 아닌 ‘진실한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는 명령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찾아온 관원은 고민하며 머뭇거리기 시작합니다. 누가복음은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살아왔던 그에게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대나 보상도 없이 나누어주라는 말씀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어려서부터 열심히 율법을 배웠던 바리새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 대해 많은 비판의 말씀을 하셔서 우리는 바리새인 하면 대단히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묵상하고 공부하는 열심을 결코 따라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그 열심을 조금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관원은 어떻습니까? 그 역시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웠고, 열심히 실천했습니다. 예수님께 자신 있게 모든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마 성실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율법의 말씀을 지키는데 성실했고, 국가 공무원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할 때도 그는 성실했던 것 같습니다. 누가 보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딸 가진 부모가 사위 삼고 싶은 사람이었죠.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도, 그리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관원도 모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율법을 모르는 죄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바라보시고 너는 참 의롭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만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죄인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물론 노력합니다.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죄인 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능력 

기독교 복음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인정받을 수 없는 철저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19-21) 

같은 본문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롬 7:19-21) 

악이 붙어 있어요. 마치 건망증을 내보내고 싶지만 냉장고 안에 자리 잡은 섬유유연제를 보며 절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은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려 노력했던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 역시 고백하기를 자신은 선을 행하고 싶지만, 그 안에 죄가 있어서, 악이 있어서 죄를 짓도록 한다고 합니다. 하물며 우리야 어떻겠습니까? 우리도 작은 노력을 기울여 보지만 여지없이 죄의 유혹에 빠져드는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옛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1-22) 

이 본문 역시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롬 3:21-22)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행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다 살아가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살아가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 사실이 복음이요, 이 사실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은혜를 믿으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크리스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관원이 실망한 표정으로 되돌아가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눅 18:26)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 18:27) 

만일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삶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여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죄 많은 우리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았던 바리새인도 결국에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우리에 비해서 의로울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결국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었던 세리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을 때,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고 되돌아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세리가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전혀 없지만, 그러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 곧 죄인을 위한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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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0. 6. 4.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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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여기에는 두 사람의 공통점이 등장합니다. 곧 두 사람 모두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두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간 때는 공적인 기도의 시간이 아닙니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새벽기도 시간 외에 개인적으로 기도하기 위해 성전을 찾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한결같이 기도를 자신의 하루 일과 중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 곧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론을 잘 알고 있지요. 두 사람 모두 성전에서 기도하였지만, 두 사람의 기도가 모두 하나님께 열랍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동일한 성전에서 기도하였던 두 사람의 기도가 전혀 다른 결과에 다다르게 한 것입니까? 



바리새인의 기도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9절) 

바리새인의 기도, 그 첫번째 특징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만하면 됐지 !”라는 생각입니다. 신앙생활을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마음이 일어나기 어렵겠지요. 그러나 신앙생활의 경륜이 늘어나고,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유혹이 찾아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자신의 완벽하다고, 자신은 의롭다고, 자신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고, 주변 사람들이 계속해서 칭찬하면 그의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교만한 마음이 찾아옵니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도 계속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참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참 아릅답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옆에서 칭찬을 합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우쭐해지는 마음이 들면서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됩니다. 

“이만하면 됐지!” 

바리새인의 기도, 그 첫번째 특징은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입니다. 곧, “이만하면 됐지”라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은 다음 단계로 그의 시선을 다른 사람에게 돌립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9b절) 나는 이정도로 신앙생활을 하고, 나는 이 정도로 예배생활, 기도생활, 말씀생활, 헌금생활을 하는데 저 사람은 왜 그렇게 못하는가? 주변을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비판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기도할 때 계속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토색, 불의, 간음을 행하는 사람들이 잘못을 행하지 않았다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오류는 자신이 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며 자신을 가꾸려는 노력보다 다른 사람을 향해 비판하고 비난하려는 마음이 더욱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눈에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면이, 다른 사람의 잘못하는 모습만이 여러분의 눈에 들어온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이미 나는 이제 됐다’, ‘이만하면 됐다’는 교만의 마음이 들어와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그 첫번째 특징은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나아가 두번째 특징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공격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기도의 특징, 그 마지막 세번째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보다는 자신이 행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만 하면 됐지”라는 생각이 가득했어요. 그러니 더 이상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실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미 나는 의롭고, 이미 나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잖아요. 그래서 바리새인의 기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보이지 않고 자기 자신의 행동만 등장합니다. 11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나는” 토색하지 않았고, “나는” 불의하지 않았고, “나는”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12절도 보십시오. “내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가”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모두가 “내가”한 일이지 도무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등장하지 않아요. 


세리의 기도 

자, 바리새인 기도의 세 가지 특징을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자신을 의롭게 여깁니다. 그러자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지 못한 채 상대방의 행동을 비판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일하심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행한 것만을 이야기합니다. 
이제 세리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세리의 기도를 바리새인의 기도와 비교해보니 바리새인 기도의 세 가지 특징에 있어서 전혀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더라”

바리새인은 자신을 의롭다고 여겼지요. 그러나 세리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잘 압니다. 자신은 죄인입니다. 바리새인은 “이만하면 됐다”고 말하지만, 세리는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13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래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신은 의인이 아니라 자신은 죄인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그 두번째 특징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바라보며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의 기도를 보십시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누구의 가슴을 칠까요? ‘자기 자신의’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그 다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다른 사람이 잘못한것, 다른 사람의 죄를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어요. 나의 가슴을 치며 내가 죄인이라고 나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바리새인은 자신이 의롭다고 여겼기에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행하는 일만 이야기해도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행동에 내세울 것,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기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만을 기대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무엇이라고 기도합니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행한 것 없고, 내가 자랑할 것 없고,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으니,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행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입니까? 세리의 기도입니까? 

물론 처음부터 바리새인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세리와 같이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을 간구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신앙생활이 익숙해지다보면, 어느세 조금씩 조금씩 바리새인의 자리로 이동하는 우리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때마다 다시금 우리의 마음을 쳐서 내가 여전히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을 간구하며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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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0. 6. 4.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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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실천이 중요하다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의 어떤 본문은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성경 본문을 난해 구절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예를 들면,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일반적으로 난해 구절이라고 –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라고 –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반면, 성경의 어떤 본문들은 읽기만 해도 이해가 되고, 그 뜻이 어떠한 의미인지 누구나 알 수 있는 본문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본문이 바로 오늘의 성경 본문입니다. 누구든지 읽기만 하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소개하기에 앞서 그 비유의 교훈이 무엇인지 너무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어요. 

오늘 본문의 주제는 본문이 시작하는 바로 1절에 명확하게 이미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는 어떠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어요. 비유가 무엇인지 소개하기도 전에 1절 말씀에서 그 교훈을 명확하게 요약해 주고 있지요. 그리고 이 비유를 한번 읽기만 하면, 혹은 한번 듣기만 해도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왜 말씀하셨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의 놀라운 비밀 가운데 하나는 성경의 어느 구절을 우리가 다 안다고 다 이해한다고 해서 그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이라는 분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때문에 괴로워 하지만, “성경말씀 중에 내게 이해되는 내용이 나를 더 괴롭힌다.” 성경의 말씀을 잘 모르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그 말씀을 더 알고 싶고 잘 이해하면 좋겠다는 아쉬운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성경의 말씀을 참으로 알게 된다면 성경의 한 구절 혹은 한 단락의 의미를 참으로 알게 된다면 우리는 더욱더 괴로움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내가 그 말씀을 바르게 실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어요. 예수님의 말씀이 옳아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부가 매일같이 찾아가 재판장에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이야기했을 때, 그 재판장이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지만 이 과부가 자신을 매일같이 찾아오는 것이 번거러워서 귀찮아서 그의 송사를 처리해 주었지요. 불의한 재판장도 과부의 계속되는 청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께서 간절히 요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속히 이루어 주시겠지요. 머리로는 알아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는 “실천력”이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루는 어느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질문하지요.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게 될까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율법 교사에게 반문하십니다. “너가 율법의 교사인데 네가 가르치는 율법에는 어떻게 하라고 쓰여있느냐?” 그러자 그 율법 교사가 정답을 말합니다. 율법을 보니까요, 성경을 보니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되어 있고요, 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되어 있었던 데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죠. “그래, 너 말이 맞아. 그대로 실천해, 그러면 살게 될 거야.” 

여러분, 예수님을 참아온 율법 교사에게 무엇이 부족했습니까? 그에게 지식이 부족했나요?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해가 필요했나요?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 말씀, 이미 자신의 머리 속에 잘 정리되어 있는 바로 그 말씀을 실천하는 실천력이 부족했습니까? 네, 그 율법 교사에게는 지식이 풍부했지만, 그 지식을 실천할 수 있는 실천력이 부족했어요.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듣고 있는지 모릅니다. 매주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해서 말씀을 듣지요. 우리 가운데는 매일 열심히 큐티를 하는 분들도 있고, 여러 가지 양육 과정에 참여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말씀 가운데 단 한 구절이라도 나의 마음에 담고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한해를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결심을 하셨을 줄로 압니다. 특별히 우리 신앙인들은 신앙생활에 대해 몇 가지 결심을 하지요. 올해는 매일 큐티로 하루를 시작하겠다. 올해는 성경을 한번 이상 읽어야 하겠다. 올해는 열심히 기도해야 되겠다. 올해는 전도를 해야 하겠다. 올해는 교회에서 어느 어느 부서를 열심히 섬기겠다. 뭐 이런 결단을 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혹시 연초에 세웠던 계획이나 목표를 이미 오래전에 포기하신 분 계신가요? 오늘 본문 1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그다음이 무엇입니까? ‘낙심하지 말아라’ 

 

기도의 실천을 방해하는 요소 - 더딤 

오늘 본문의 주제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비유 – 곧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 – 를 가만히 묵상해보면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 낙심하고, 신앙 생활에 계속해서 넘어지는 중요한 이유를 한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게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오늘 본문 4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과부는 억울한 일을 당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재판장을 찾아가서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풀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장은 처음에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었나요?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여러분, 이 짧은 한 마디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이 짧은 한 구절이 때로는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잘 아시잖아요.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기시는데, 결혼한지 3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7년이 지나도 자녀가 안 생기는 거예요. 물론 목사님과 사모님도 열심히 기도하셨지요. 그리고 목사님께서 사역하시던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밤낮 목사님 가정을 위해 기도할 때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을까요? 목사님에게 자녀를 주시라고 기도했어요. 그 목사님께서 그 교회에서 사역하신 지 7년, 결혼한 지 9년 만에 하나님께서 예쁜 딸을 주신 거예요. 지금도 그 딸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에 미소가 넘쳐요. 그 목사님에게는 4절에 등장하는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는 몇 년의 시간을 의미할까요? 그 목사님에게는 9년을 의미하는 거예요. 

이와 비슷한 예를 성경에서 찾아볼까요? 여러분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을 기억하시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그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아직 아들 하나 없잖아요. 10년을 기다렸어요. 아브라함의 나이 85세에 하갈이 잉태하여 아브라함의 나이 86세에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어요. 11년을 기다렸거든요. 오래 기다렸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니래요. 조금 더 기다리래요. 그래서 또 얼마를 기다렸습니까?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에 사라가 잉태를 했고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어요. 아브라함에게는 오늘 본문 4절에 등장하는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의 ‘얼마 동안’이 아브라함에게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었어요? 모두 25년의 시간이었어요. 

아브라함의 증손자 가운데 한 명인 요셉은 어때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형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어요. 그리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었어요. 아마 요셉은 이때부터 열심히 기도했을 거에요. 하나님께서 꿈으로 보여주셨으니,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현실이 되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까? 

요셉이 꿈을 꾸었을 때의 나이는 17세였습니다. 그로부터 13년의 시간이 흘러 요셉의 나이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러면 요셉에게는 꿈을 이루는데 13년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이후, 7년의 풍년이 있었어요 그리고 연이어 2년의 흉년이 있었어요. 바로 그때 요셉의 앞에 형들과 요셉의 동생 베냐민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게 돼요. 그리고 그 장면을 통해서 그 옛날 하나님께서 요셉 자신에게 주셨던 꿈이 자신을 통해 온 이집트와 자신의 가족을 포함하여 오리엔트 전역의 모든 사람들을 7년의 거대한 가뭄으로부터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비전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요셉이 꿈을 꾼 후 총리가 될 때까지 13년 형들을 다시 만날 때까지 9년, 총 22년의 세월이 필요했어요. 그러므로 요셉에게는 오늘 본문 4절에 등장하는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의 ‘얼마 동안’은 총 몇 년의 시간을 의미해요? 22년 동안 재판장이 들어주지 않은 거예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오늘 본문 4절에 등장하는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의 ‘얼마 동안’이 참 길고 힘겹게만 느껴지거든요. 그 유명한 사영리의 제1원리인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는 말은 수 없이 들어보았지만. 과연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향한 그 놀라운 계획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도대체 언제까지 내가 기다리고 인내해야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알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농부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시편 126편 5절과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우리는 시편 126편을 묵상할 때 주로 그 결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요. 씨를 뿌리를 때는 눈물을 흘리지만 기쁨으로 거두게 된다고, 울면서 씨를 뿌리지만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오게 된다고. 그렇지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알게 되는 한 가지 사실, 씨를 뿌리기 위해 눈물을 흘리는 과정이 너무나도 고단하고 힘이 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편 126편을 읽으면 여러분은 그 내용이 쉽게 이해가 되시나요? 저는 시편 126편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한 대목이 있어요. 시편 126편 5절을 다시 보세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씨를 뿌리는 농부의 눈에 지금 무엇이 있어요? 씨를 뿌리는 농부는 지금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어요. 
시편 126편 6절도 보십시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씨를 뿌리러 나가는 농부의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씨를 뿌리러 나가는 농부의 마음이 지금 매우 슬퍼요. 그래서 눈에는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이 쉽게 이해가 되세요? 여러분은 농부들이 논이나 밭에 씨를 뿌리러 나갈 때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으세요? 대부분의 농부들은 씨를 뿌릴 때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봄에 씨앗을 뿌리면 가을이면 추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논이나 밭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씨를 뿌리는 과정이 고단하기는 하지만 눈물을 흘리거나 울음이 가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시편 126편에 등장하는 농부는 눈물을 흘리며 씨앗을 뿌리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시편 126편 5절과 6절 안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농부는 씨앗을 뿌리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거에요. 여러분, 이해하세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까요? 시편 126편에 등장하는 농부는 씨앗을 심는 것이 아니라 뿌리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고요. 
만일 여러분이 농부라면 씨앗을 그저 논이나 밭에 뿌리겠어요? 아니면 흙을 조금이라고 헤치고 땅 속에 씨앗을 심어놓겠어요? 당연히 씨앗을 심지요. 바람이 불면 날아가고 비가 내리면 씻겨나가도록 씨앗을 왜 뿌리겠어요. 그런데 시편 126편에 등장하는 농부는 그 땅이 얼마나 척박했는지, 그 땅이 얼마나 건조했는지 씨앗을 심지 못하고 그저 뿌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 ‘씨를 뿌리는 비유’가 있지요. 이 비유에서도 농부는 씨앗을 심지 못하고 씨를 뿌립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씨를 심지 못하고 씨를 뿌리기 때문에 그 씨앗의 4분의 1은 길 가에 떨어져요. 씨앗을 심지 못하고 그져 뿌리기 때문에 4분의 1은 돌짝밭에 떨어지죠. 씨앗을 심을 수 있는 땅이 없어요. 그래서 그저 씨앗을 뿌려요. 그러니 농부가 뿌리는 씨앗의 4분의 1은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거예요. 오직 농부가 뿌린 씨앗의 4분의 1만이 좋은 밭에 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그 농부의 눈에 눈물이 주르룩 주르륵 흐르죠. 나의 손에서 씨앗이 떠남과 동시에 바람이 부는 대로 씨앗이 길가,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그 장면을 바라보는 농부 가운데 그 누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어요. 

여러분, 이것이 시편 126편이 묘사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열심히 기도해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항상 기도하려고 노력하지요. 그런데 그러면 뭐해요. 내가 뿌린 씨앗이 지금 나의 손에서 떠나는 그 순간 그 씨앗의 4분의 1이 길가에 떨어지는데요, 그 씨앗의 4분의 1이 돌짝밭에 떨어지고, 또 4분의 1이 가시덤불에 떨어지잖아요. 그러니 아침과 저녁으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 눈물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시편 126편을 따라 이렇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여러분이 지금 흘리는 그 눈물을 통해 하나님은 나머지 4분의 1의 씨앗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인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통해 항상 기도하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낙심하지 말라고 교훈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오늘 본문 4절에 등장하는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의 그 ‘얼마 동안’의 시간이 참으로 고난의 시간이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시간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7절과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요. 낙심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 그러니까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 언젠가는 응답을 해 주시겠지요. 그런데 그 뒤의 말씀은 참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네, 하나님. 어떤 목사님에게는 9년을 기다리게 하셨고, 아브라함에게는 25년을 기다리게 하셨고, 요셉에게는 22년을 기다리게 하셨잖아요. 우리에게는 씨앗을 심지 못하고 뿌려야 하기에 오랜 시간 눈물을 흘리게 하셨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다음에 어떠한 단어가 등장합니까? “속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아니 예수님, 해도 너무하시지. 온 성도들이 기도하였더니 9년 만에 자녀 주신 것도 ‘속히’ 주신건가요? 아브라함에게는 25년 만에 아들을 주신 것도 ‘속히’ 이루어 주신 건가요? 요셉에게 22년 만에 꿈을 이루어주신 것도 ‘속히’ 이루어 주신 건가요? 그토록 오랜 세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게 하신 것도 ‘속히’ 이루신 건가요? 우리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요. 속히 이루어 주신 것이 아니라, 오래 기다리도록 하셨다가 이루어주신 것처럼 보이거든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제가 가만히 묵상해보니, 이 본문을 해석할 수 있는 별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저 하나님께는 9년 도 속히고, 25년도 속히고, 22년도 속히 이루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하기에 하루도 너무나 길게 느껴지지만 그것도 속히 이루어 주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길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가장 적절한 시간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교훈이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할 때, 때로는 우리의 관점에서 인간적인 우리의 시각에서 볼때 기도의 응답이 굉장히 늦어진다고 생각될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이 조금 늦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지 아세요? 하루를 기도하고, 이틀을 기도하고, 일주일을 기도하고 한 달을 기도했어요. 그것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농부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어요. 그런데도 하나님의 응답이 보이지 않잖아요. 바로 그때 우리의 마음에는 의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나봐?’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 것을 보면, 이제 이 기도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 그러면서 기도를 쉬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입장에서는 오랜 시간을 기도하고 기다렸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 얼마 안 지난 거에요. 아직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가장 좋은 시간이 오지 않은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여전히 기도의 응답이 보이지 않아서 낙심하고 계세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물리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다시금 기도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구약성경 하박국서에 있는 구절을 소개하면서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하박국 2장 3절의 말씀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 민족의 참상을 보면서, 하나님께 따지듯이 기도했어요. ‘하나님, 도대체 언제예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구원의 날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예요?’ 바로 그때 하박국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이 2장 3절의 말씀이지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번째,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반드시 있어요. 두 번째,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속히 임한데요.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데요. 그런데 세 번째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시죠. “비록 더딜지라도” 어떻게 하라고요?  “기다리라” 하박국 네가 보기에,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에 조금 더딘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에 비록 더딜 지라도 기다리라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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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0. 6. 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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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단지 책의 제목이 흥미로워서 잠시 훓어보게 된 책이 한 권 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고수의 생각법>입니다. 바둑에 큰 관심이 없는 분들도 한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보셨을 만한 바둑의 전설적인 고수 조훈현 9단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기록한 책입니다. 그 책에 이른 내용이 있습니다. 바둑을 두다보면 이른바 ‘수읽기’를 하쟎아요. 내가 여기에 돌을 놓았을 때, 상대방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그것들을 머리속으로 그려보는 것이 수읽기인데, 바둑의 전설적인 고수인 조훈현 9단은 바둑에서 수읽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 ‘욕심’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 부분을 잠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수읽기를 방해하는 건 욕심이다. … 꼭 이겨야 한다는 욕심이 꿈틀거리면 수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면 서너 수 앞이 안 보인다. 그래서 수읽기를 제대로 한다는 건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수읽기를 제대로 한다는 것은 어떠한 뜻이랍니까? 마음 속에서 솟아오르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둑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에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한 사람의 청원 

오늘 본문에서도 마음에 가득한 욕심 때문에 주변 환경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3절의 말씀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한 사람이”라고 시작하나요? 아닙니다. 성경을 다시 자세히 보시면 “무리 중에 한 사람이”라고 시작합니다. 성경은 이 사람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직접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알려주지 않아요. 이사람이 몇세였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아요. 그런데 성경이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은 무리 가운데 섰여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무리들 가운데 섞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행위를 보았던 사람들 가운데 한명이었어요. 

그런데 여러분, 참으로 놀랍지요. 이 사람은 자신의 눈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도 바라보고, 자신의 귀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고, 자신의 손으로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신 떡과 물고기를 직접 만져보았어요. 그러면 예수님께 손을 들어 질문을 할 때 어떤 질문을 던져야 되겠어요? 영생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질문해보아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행동을 보아도 그의 마음에 있는 관심사가 변하지를 않는 거에요. 그의 관심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어디에 있었습니까? 돈에 있었죠. 재물에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요청하는 거죠.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우리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귓가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지금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역사가 멈춰버렸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 교회를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나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욕심, 물질에 대한 탐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나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4절과 15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이 사람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14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라고 말씀하셨어요. 단호한 거절이죠. 예수님은 재산 나누는 일을 거절하셨어요. 그러면 예수님은 재물에 대해서, 돈에 대해서 아무런 말씀도 안하시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14절에서 한 사람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셨지만, 15절에서는 재물과 물질에 대해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15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예수님은 물질을 나누는 일은 거절하셨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정말하고 싶으셨던 일, 꼭 하셔야만 하는 일을 지금 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탐심의 문제’를 해결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기도하면 로또에 당첨이 되고, 교회에 헌금하면 이 땅에 살면서 더 크고 좋은 집으로 이사하게 되고, 주님을 위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면 자자손손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계세요? 여러분, 잘못 오셨어요. 그런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계신 분이 계시다면, 여러분의 로또는 꽝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잖아요. ‘나는 물질을 나누러 온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에게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계신 것이 놀라운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로또에 당첨되는 것보다 더 큰 복을 여러분에게 주시거든요. 그 복이 무엇입니까? ‘탐심을 물리치는 복’입니다. 

“아니, 목사님! 해도 너무 하십니다. 탐심을 무리치는 것이 무슨 복이에요, 내 손에 재물이 들어오는 게 복이지요.” 이런 생각이 사실 마음에서 일어나시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이 마음에 일어나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왜 탐심을 물리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인지 곧 이어 설명하시잖아요. 오늘 본문 15절을 다시 보세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왜 탐심을 물리치는 것이 놀라운 축복인지 설명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세요. 물질도 있고, 재물도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데 조그마한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 정도면 충분히 행복할 것같은데, 아니 저 사람이 가진 재산의 절반만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춤을 출 것 같은데 그 사람의 마음에는 조금도 기쁨이 없고 오히려 슬픔과 걱정과 탄식의 소리가 가득한 모습을 우리가 많이 보잖아요. 여러분, 물질이나 재물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하박국의 고백도 기억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아요. 그리고 무엇이라고 기도합니까?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가득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나요? 아니잖아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예수님은 우리에게 남부러울만한 물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으셨어요.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시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의 감격으로 말미암아 나의 마음이 모든 탐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오직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감격하며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축복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예수님께서 이 정도 말씀하시면 좀 알아들어야 하는데, 우리 인간들이 참 어리석어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주 쉬운 비유를 통해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지요. 이 비유는 한 부자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16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부자가” 여러분, 부자는 이미 재산이 그득한 사람입니다. 이미 그에게는 풍성한 재물이 있어요. 쓰기에 부족하지 않은 재물이 그에게 있어요. 그래서 그는 부자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에게 더 많은 재물이 찾아옵니다. 16절을 다시 보세요.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그러니 물질의 축복을 얼마나 많이 받은거에요. 하나님께서 이 부자에게 물질을 마구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부자에게는 무엇이 문제입니까? 물질이 부족해서 문제도 아니고, 지금 먹고 입을 것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물질도 있고 재물도 있지만 그의 마음에는 그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탐심과 욕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문제지요.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복, 곧 예수님을 만나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우리 마음에 도사리는 탐심을 물리치는 참된 축복을 받지 못한 이 부자는 물질이 채워지면 채워질 수록, 물질을 더욱 많이 소유하면 소유할 수록 더큰 걱정과 근심에 사로집히게 됩니다. 오늘 본문 17절의 말씀입니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하고” 

부자가 말합니다. ‘내가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구나, 어떻게 할까?’ 곡식이 많아지니 오히려 큰 걱정과 근심에 싸여요. 이 말씀에서 ‘어찌할까’라는 말은 단지 ‘어떤 좋은 방법이 있을까’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어느 성서 주석가는 오늘 본문을 해설하면서 ‘어찌할까’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한끼의 식사를 어디에서 해결해야 할지 몰랐던 그 지방에서 가장 가난한 거지라도 이것보다 더 걱정스러운 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지 못해서 어떻하지, 우리 가족들 식사를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하는 그 지방의 거지보다 이 부자의 걱정과 근심이 더 깊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진리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급기야 그는 아주 어리석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 18절과 19절입니다.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이 부자는 자신의 재산이 들어날수록 더욱 고민이 깊었졌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아주 어리석은 결정을 내립니다. 18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습니까?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여러분, 지금 당장 소출이 많아서 곳간의 공간이 부족해요.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부자는 제일 먼저 곳간을 헐겠데요. 여러분, 지금 있는 곳간을 헐면, 지금 당장 곳간을 허는 동안에는 곡식을 어디에 저장할 건데요? 곳간을 헐고 다시 짓겠다는데 그 과정에서 필요한 인력이나 자제 등은 어떻게 조달할 건가요? 더 크게 곳간을 만들었다면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과 정성이 필요할텐데 그건 어떻게 하죠? 이 부자는 풍성한 소출을 저장할 곳이 없다는 고만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서 곳간을 아예 부서버리고 다시 더 크게 짓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재물을 더많이 모아두려고 곳간을 더 크게 지으면 고민거리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고민 거리가 생겨나고 더 많은 걱정 거리가 생기는 거에요. 

19절도 보십시오. 부자가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여러분, 지금 부자가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새로 지었나요? 더큰 곳간을 만들고 매년 그 곳간을 채월만큼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있나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저 자신의 마음에서만 더 큰 곳간을 만들었고, 그의 마음 속에서만 곡식과 재산이 풍성해요. 혼자 생각에, 그의 마음에서만 곳간을 더 크게 지어놓으면 만사가 형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과정과 결과가 자신의 생각되로 될지 안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자신의 계획대로 더 많은 재산을 모아놓기만 하면 나의 인생에 평안이 찾아오리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어리석은 생각이죠. 

이 부자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전도서 5장 11절과 12절 말씀입니다. 전도서 5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재산이 많아지면, 그래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생각처럼 곳간을 더 크게 짓게 되면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요. 그러면 어리석은 부자의 곡식은 누가 먹게 될까요? 부자가 아무리 많이 먹어도 하루에 밥은 세끼밖에는 못먹어요. 그 많은 곡식은 그 집에 일하는 사람들이 먹는 거에요. 그러니 전도서의 말씀처럼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냐”고요. 저 사람들이 먹는 곡식 저거 내거야라고 생각하는 유익밖에는 없어요. 전도서 5장 12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지금 있는 곳간을 부수고 새로 큰 곳간을 지으면 평안히 쉬고 즐거워할 수 있을 것 같지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가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 집에 일하는 노동자들은 만든지 적든지 주는 만큼 먹고 마음 편하게 잠들 수 있어요. 그러나 부자는 그렇지 못해요. 누군가 나의 재산을 노리고 있지는 않을까? 이 큰 재산을 어떻게 관리할까? 계속해서 걱정이고, 계속해서 스트레스예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는 바로 이 사실을 몰랐어요. 그래서 그의 이름은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자, 드디어 하나님께서 이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20절과 2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나님은 이 땅에 자신의 재물을 가득가득 쌓아놓으려고 아둥바둥하는 이 부자를 향해 어떻게 부르십니까? “어리석은 자여” 이 부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 부자가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그래서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 부자는 이 세상의 재물만을 모으려고 노력했지 죽음 이후의 문제를 조금도 준비하지 않았다기에 그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물론이요, 죽음 이후의 삶에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돈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재물이 많다고 천국에서 풍족하게 생활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어나, 저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을 받아누리는 일이나 그 어디에도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았느냐는 결코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죽음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았느냐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했느냐에 달려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분의 재물을 사용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이 땅의 재물이 많고 적음을 떠나 저 영원한 천국을 위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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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0. 6. 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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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헤론(John W. Heron)과 양화진 

양화진 외국인 묘에 최초로 묻히신 분은 미국인 선교사 존 헤론(John W. Heron)이라고 하는 의사였습니다. 존 헤론은 미국의 테네시(Tennessee)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테네시 대학이 설립된 이래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학교를 졸업할 때, 테네시 대학은 교수회의를 열어 이번에 졸업하는 헤론을 그 학교의 교수로 초빙할 것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실력이 좋으면, 졸업생을 바로 교수로 채용하려고 학교에서 먼저 제안을 했을까요? 그러나 학교의 교수 청탁 제의를 받았던 헤론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저 미지의 땅 조선에 선교사로 떠날 결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존 헤론은 이제 막 결혼한 그의 아내와 함께 한국 땅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때는 1885년 6월이었는데, 그의 나이 스물아홉(29)이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근대적 시설을 갖춘 병원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국가의 운명이 다해가고 있는 조선의 많은 백성들은 마땅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여름이 되면 한반도 전역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헤론 선교사님은 그보다 1년 앞서 조선에 들어왔던 알렌(Allen) 선교사님이 세운 제중원이라는 병원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일했던 이 병원은 의료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던 당시 조선의 많은 백성들을 치료해주었던 것입니다.  

헤론 선교사님이 1885년 한국에 입국하여 의료선교사로서 일한지 5년 되던 해, 곧 1890년 여름 특별히 전염병들이 창궐하였고, 그 결과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약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전염병은 당시 한국에 들어와 있었던 선교사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서양 사람이었던 선교사들은 한국의 전염병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여름 한철 동안 남한산성에 올라가 피하였다가 여름이 지나면 다시 서울로 내려와서 선교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헤론이라는 의료선교사는 극심한 전염병이 온 한반도를 뒤덮었던 1890년 여름 남한산성에 올라가지 않고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던 한국인들을 찾아 사방으로 뛰어 다녔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역시 전염병에 걸리고 맙니다. 한국인 환자들을 뛰어다니던 그의 몸은 과로와 피로로 이미 약해있었고 전염병에 걸려 3주 동안 앓다가 그해 7월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의 나이 34세의 일이었습니다. 

미국에서 교수 자리를 버리고, 잘나가는 의사 자리를 버리고, 한국에 들어와 5년 동안 질병으로 고생하는 한국인들을 열심히 돌보는 가운데 그 자신이 결국 전염병에 감염되어 죽음을 자초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순교의 길을 걸었던 헤론에게 한국에서 땅 한 평 있었을 리 없습니다. 그가 죽자 동료 선교사들은 한국 땅에 장사 지내 주려했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는 서양의 선교사들과 조선의 관료들 사이에 적지 않은 소동을 일으켰고 결국 조선의 마지막 황제이셨던 고종께서 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헤론의 헌신과 노력을 높이 평가하신 고종 황제께서 한강의 양지바른 곳을 선택하여 헤론을 장사할 수 있도록 하사하셨는데, 그곳이 바로 양화진입니다. 

헤론을 비롯하여 이 땅 한반도를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쳐 헌신했던 여러 선교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분들의 사랑과 헌신에 고개가 절로 숙여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 깊이 깨닫게 됩니다. 


지식과 사랑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이 짧은 구절은 참으로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진리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기록합니까?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사람의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우리의 주변 사람들에게 봉사하게 만들고 사랑으로 섬기게 합니다. 그래서 나의 행동으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되지요. 

존 헤론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마음에 숙연한 마음과 그분을 본받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분이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기 때문이 아니지요. 그분에게 지식이 풍성했기 때문에 아니라, 그분의 마음에 거대한 사랑이 넘쳐흐르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그와는 반대로 지식으로 인해 교만해진 한 율법 교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 교만하여져서 스스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자리에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시험할 자격이 있다고 느꼈던 그는 예수님께 시험 문제를 제출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 것인가? 의 문제였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렇게 질문하고는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대답을 하든 그는 자신의 해박한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 예수님의 대답을 판단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외로 상대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전공과목으로 대답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에 율법 교사는 율법의 두 가지 핵심,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정확히 대답합니다.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 대답은 매우 정확한 정답이었습니다. 율법 교사는 정확한 정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되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율법 교사는 율법의 핵심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꿰뚫고 계십니다. 그에게는 지식이 부족하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그에게는 지나치게 교만해질 정도로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니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28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기준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율법교사의 대화는 지금까지 살펴본 28절까지로 끝나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다 하셨거든요. 그러나 율법 교사의 질문은 끊이지 않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여전히 율법 교사는 예수님과의 ‘논쟁’을 의도합니다. 그 논쟁 속에서 자신의 해박한 율법 지식을 드러내고, 나아가 자신이 의롭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율법에 순종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는 또 다른 논쟁을 일으켜 자신은 그 안에 숨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이웃사랑 실천의 행동을 요구하셨는데, 그는 이웃의 한계를 질문함으로써 율법과 성전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또다시 숨어버립니다. 이때 그의 도피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죽어가고 있는 이 사람의 곁을 제사장이 지나갔고 레위인이 지나갔지만 그들은 이 사람을 피하여 지나갔을 뿐입니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오늘 본문 36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너무나도 쉬운 질문이고, 누구라도 그 정답을 알 수 있는 질문입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요리조리 피하려는 율법 교사의 퇴로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여러분, 중요한 것은 우리의 머리에 얼마나 많은 지식이 있느냐가 아닙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있는가입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우리의 머리에 얼마나 많은 지식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있는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강도만난 사람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었던 사람이 사마리아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에게 지독한 선입관이 있었어요.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여러분, 그가 비록 사마리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없을지라도 그에게 진정한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그는 율법 교사에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는 진정한 의미의 ‘교사’였던 것입니다. 반대로, 율법 교사는 그 누구보다 율법에 대한 지식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여 사랑의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면 그는 율법의 교사이기는커녕 진정한 신앙인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은 지식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시작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신앙의 목적지는 강도만난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그를 극진하게 보살펴주는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회피하고 싶은 말씀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주제가 명확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내 주변에 있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성경에 대해 알아가는 지식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완성된다는 말씀이지요. 오늘 본문의 주제는 너무도 분명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계속해서 묵상하고 묵상할 수록 저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어요? 성경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지시하시거든요. 그것은 머리로 충분히 이해가 돼요. 그런데 문제는 저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여러분, 한번 진지하게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보세요. 만일 우리가 영생을 얻는 길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면 –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적극적으로 나의 모든 시간과 정성과 재물을 쏟아부어주는 것이 영생의 길이라면 – 여러분은 그 영생의 길에 들어갈 자신이 있으세요? 설교를 시작하며 존 헤론 선교사님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만일 그와 같이 이웃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자신이 있으세요?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본받고는 싶어요, 그러나 그렇게 살아갈 자신은 없어요. 존 헤론 선교사님과 같이 열방을 품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요. 그러나 그렇게 살아갈 자신이 있느냐 누군가 물으신다면, 저는 자신이 없어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때문에 괴로워하쟎아요. 그러나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라는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말씀 중에 내게 이해되는 내용이 나를 더 괴롭힌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마크 트웨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점점 더 알 것 같아요. 오늘 본문의 주제는 명확해요. 오늘 본문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머리로는 분명히 알겠어요. 이해가 돼요. 그래서 더욱 피하고 싶은 본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교사와 같이 정답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분명히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계속해서 예수님의 교훈을 논쟁으로 말싸움으로 회피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교사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은 던졌지만, 정작 예수님의 대답 앞에 우리의 부끄러운 본성이 드러나서 더 이상 어디로도 피하거나 숨을 수 없는 벌거벗겨진 우리의 자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상관없었어요. 성경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아요.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성경의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깨달아가면서 우리의 마음에 갈등이 찾아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과 너무나도 멀리 괴리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자리 

이러한 갈등과 고민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비유에는 몇몇 등장인물이 있어요. 먼저 강도만난 사람이 등장하죠. 둘째로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지식은 있었지만 사랑의 마음은 없었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셋째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율법에 대한 탁월한 지식이 있었는지를 모르겠어요.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너무도 분명해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이 되라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질문해봤어요. ‘네, 그래요. 하나님의 자녀답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고 싶어요. 그러나 나의 본성을 주님께서 아시잖아요. 저의 본성은 제사장과 레위인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때 제 마음에 들어왔던 또 한명의 등장인물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바로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지금 당장 강도를 만나서 모든 재물을 다 빼앗겼고, 지금 당장 강도를 만나 그의 몸은 상할 대로 상했고, 지금 당장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어요. 제사장이  자신을 보았지만 그저 지나갑니다. 레위인이 자신을 살펴보았지만 그 역시 피하여 갑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아무런 소망도 아무런 기대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한 사마리아 사람이 걸어오는 거예요. 그리고는 자신의 상처를 씻어주기 시작해요. 자신을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옮겨줘요. 그리고 치료를 받는데 필요한 모든 비용을 그분이 대신 치러줍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구원의 은혜를 받았어요. 

여러분, 이 강도 만난 사람이 이제 완전히 치유되어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강도만난 사람, 곧 선한 사마리아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난 그가 이후 누군가 큰 곤경에 빠진 사람을 만났다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그 자리를 그저 피해버릴까요? 그럴 수는 없는 거죠.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그 사람에게 달려가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그를 돌봐주지 않겠어요? 오늘 본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그러나 한 사마리아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던 사람이 이후 큰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는 분명히 자신의 온 힘을 다하여 그를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돌보아 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마음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아직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은 부족하기 짝이 없을 수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적어도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자리에는 있지마십시오. 차라리 강도 만난 사람이 되십시오. 강도 만난 사람의 자리에서 우리의 깨어져버린 마음, 상한 마음, 병든 마음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치유를 경험하십시오.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의 온 마음과 온 생명과 온 뜻과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으며, 이웃을 사랑하되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존 헤론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잠시 말씀드렸지요. 그토록 조선 사람들을 위해 한 없는 사랑과 헌신을 드렸던 존 헤론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지금도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자신을 주셨다.” 

존 헤론 선교사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리에 있기에 앞서, 강도만난 사람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자리에서 자신을 찾아와 상처를 싸매시며 돌보아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의 인생이 바뀌어서 미국 의과대학에서의 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와 미지의 땅 조선에 그의 젊음을 불태우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단에 자신을 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당장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리에 있지 못하다면, 우리의 사랑없는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곳에서 우리의 상처 난 마음, 고장 난 마음, 깨어진 마음을 선한 사마리아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십시오.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깨어지고 상한 마음이 치유를 받을 그때, 우리는 역시 하나님을 사랑을 들고 내 곁에 있는 이웃 한 사람을 사랑하되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또 한 사람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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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0. 6. 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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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길에 좋은 선물을 가득 쌓아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좋은 길로 나아오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쌓아놓으신 선물까지 가는 길이 어둡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주는 땅으로 가라” 지금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입니다. 75세 된 할아버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 자신의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용기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사람,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집트의 황제 파라오에게 가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모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파라오는 온 세계를 굴복시킬 수 있는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파라오에게 나아간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사람은 여호수아였습니다. 그의 사명은 조금 특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호수아 시대 가나안 땅에는 이미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들어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전쟁을 치러서 승리해야 합니다. 가나안에 살고 있는 민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삶의 터전을 다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달려들지요.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용기를 내어 가나안의 민족과 전쟁을 수행하는 일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한 분만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고 있는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다윗의 믿음,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다윗의 용기가 함께 만나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다윗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놀라운 은혜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크고 놀라운 선물을 우리 인생길 곳곳에 가득 쌓아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다만 그 길이 어둡고 캄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란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에 용기를 내어 그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여인 

누가복음 8장에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그 여인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용기를 주시는지가 오늘 성경 본문입니다. 누가복음 8장 40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라” 

큰 무리가 예수님을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나자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지금 예수님 주변에 예수님의 제자들만 있습니까? 아니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까?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바로 그때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와 한 가지 중요한 부탁을 합니다. 41절과 42절입니다.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자, 이제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부탁을 받으시고 그의 딸을 고쳐주기 위해 야이로의 집으로 걸어가고 계십니다. 성경은 그의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가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막 죽어가고 있는 딸을 놓고 예수님께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고 있는 야이로는 마음이 다급합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발걸음을 재촉하여 한시라도 빨리 딸에게로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다급한 발걸음을 멈춰 세운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8장 43절과 44절입니다.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우리는 그의 이름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 짐작하건데,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가운데서도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 여인의 특징은 혈루병이 아주 심하게 들었습니다. 혈루병이란 여자의 하혈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피를 흘리는 병이지요. 그런데 그 병을 12년 동안이나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먼저 혈루증이라는 병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12년 동안 계속해서 피가 흐르니 생활 자체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 병을 고치기 위해 사방으로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치료받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생활을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아무리 노력을 해도 고칠 수 없는 이 혈루증이라는 질병이 그 여인에게 큰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여자가 하혈하는 기간 동안 그 여자가 부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경우 12년 동안 하혈이 계속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12년 동안 부정한 겁니다. 사람들은 12년 동안 이 여인이 부정한 여자라고 여기며 그를 멀리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자신을 부정하다고 피하는 사람들이 또 두려운 겁니다. 
그리고 나아가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신 하나님까지도 두려웠습니다. 12년 동안 그 여인의 마음에 쌓인 두려움으로 그 여인은 누구에게도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 여인의 마음에 이처럼 무서운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에게 믿음이 조금씩 생기고 있었습니다. 누구에 대한 믿음이죠?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마음속에 가득한 두려움이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가급적이면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목소리를 크게 높이지 못하고 언제나 두려움에 갇혀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 안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겁니다. 누군가 그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환자들을 고쳐주시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까지도 살려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생긴 겁니다. 자신의 병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실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고칠 수가 없었지만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그 여인의 마음속에 싹트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그 여인은 두려움이 갇혀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 깊은 곳에서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의 12년 묵은 병을 고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많은 무리들 한가운데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이 여인이 용기를 냅니다. 그리고 아무도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고 돌아오기로 계획을 세웁니다. 

이 여인은 언제 예수님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좋을 것인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이로가 예수님을 급히 모셔가고 있습니다. 그 발걸음이 급한 것으로 보아 자신이 조심스럽게 예수님 곁으로 다가가 옷자락을 잠시 만지고 돌아가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자신의 계획을 수행합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여인의 믿음대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순간 혈루증이 깨끗해졌습니다. 

누가복음 44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여인은 차마 예수님의 앞으로 가지 못하고 예수님의 뒤로 갑니다.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혈루증은 계속해서 피가 나는 병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로 다가가는 지금까지도 혈루증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니 즉시 그쳤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계획이 완전히 성공했다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이제 이 여인은 조용히 그 무리들 속에서 빠져나오면 됩니다. 야이로의 집으로 급하게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무리들이 빨리 움직일 때, 아무도 모르게 그 무리에서 뒤처지면 계획 성공입니다. 



두려움을 물리치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멈추십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누가복음 8장 4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그러자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한 사람씩 대답을 했겠죠. ‘예수님 저는 아닙니다.’ ‘예수님 저도 아닙니다.’ 이제 그 여인의 순서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여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그 순간 너무도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답합니다. ‘저도 아니에요’ 

45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예수님의 질문에 모두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 속에는 아마 이 여인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저도 아니에요”라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당당하게 이야기했을까요? 아닙니다. 개미 목소리로,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저도 아니에요”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옷자락에 누군가 손을 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주변 사람들이 다 아니라고 말하면, 이쯤해서 예수님께서 지금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고 있으니 급한 발걸음을 다시 옮길 만도 하지 않습니까? 정말 이 여인의 마음, 이미 한 번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저도 아니에요’라고 거짓말을 한 이 여인은 정말이지 예수님께서 자신의 급한 발걸음을 다시 옮기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다행히 예수님 옆에 서 있던 베드로가 그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는 발언을 합니다. 

45절 뒷부분입니다.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그저 사람들이 많아서 조금 밀린 것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라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할 때 이 여인은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이제 예수님이 그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시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 여인에게 예수님의 두 번째 말씀이 들려옵니다. 46절입니다. 우리 46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십니다. 47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너무도 두렵습니다. 결국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린 이 여인은 지금 온 몸이 떨립니다. 그러면서 떠듬거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는지 그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48절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 여인의 계획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무리들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께도 알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옷자락만 살며시 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많은 무리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집중시키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이 여인은 자신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이유를 말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12년 동안 그녀를 괴롭혔던 혈루증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모든 사람이 듣고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도록 요구하신 겁니다. 이 여인에게 자신은 12년 동안 부정한 사람이었다고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고백하라고 요구하신 겁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듣고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혈루증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써 깨끗해졌다고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듣는 가운데서 이 여자가 병이 나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여인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병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그 병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도록 하신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싫어하는 이 여인을 골탕 먹이시기 위함이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께 이야기도 하지 않고 옷자락을 살며시 만진 이 여인이 얄미워서 그렇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 여인에게 많은 무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도록 강요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 여인의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을 몰아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음속에 품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자기만의 믿음으로 가두어 놓지 말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드러내어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모르게 자신의 병을 고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를 한 무리 중앙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믿음으로 혈루병을 치유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확신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치료받았으니 더 이상 두려움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쉬쉬하면서 살아가지 말고, 자신의 믿음을 당당하게 선언하면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믿음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믿음이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용기를 내어 그 어두운 길 한 가운데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놀라운 은혜의 자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알아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일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서에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일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칠흑 같은 어두움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젊은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오랜 세월 사신 분들은 야고보서의 말씀이 참된 진리임을 알고 계십니다. “너희 인생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런데 그 짧은 인생도 바로 다음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내일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믿고 용기를 내어 그 어두운 길의 한 가운데를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음성이 우리의 귓가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내 딸아, 내 아들아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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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0. 6. 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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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클레어몬트대학교의 신학부 학장을 맡고 있는 필립 클레이톤 교수는 자신의 저서『신학이 변해야 교회가 산다』(Transforming Christian Theology)에서 미국의 주류 교단이 쇠퇴하는 원인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미국 개신교의 주류 교단이 쇠퇴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교만’입니다. 클레이톤 교수는 한 가지 재미있는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그 유명한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를 부르면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은 자신과 다른 모습의 사람들 - 예를 들어 유색인종, 혹은 빈곤층이나 노숙자들 – 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Amazing Grace)가 전혀 임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비판입니다. [각주:1] 비록 자기 자신은 잘못을 범하고, 실수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기도 하였지만 나는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로 깨끗하게 되었고 의롭게 되었다는 확신이 가득합니다. 나는 이미 의인입니다. 그런데 나와 다른 사람들, 백인이 바라보는 유색인종들, 경제적인 중산층이 바라보는 빈곤층이나 노숙인들에게는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가 무효한 듯 여기는 경향이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는 지적입니다.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몬이라는 이름의 바리새인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한 사람은 시몬이라는 이름의 바리새인이요, 또 다른 사람은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여인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녀의 이름 대신 하나의 수식어를 붙여주었는데, 그것은 ‘죄를 지은 한 여자’입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7장 36절부터 39절까지를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찬찬히 묵상하다보면, 시몬이라는 이름의 바리새인과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서로 비교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 시몬이 사람을 비교하는 기준과 예수님이 사람을 비교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바리새인 시몬이 사람을 비교하는 기준입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의 바리새인은 사람들을 비교함에 있어서 ‘그가 얼마나 의로운 삶을 살고 있느냐’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36절을 보면 시몬에 대한 두 가지 설명이 등장합니다. 36절을 다시 보십시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무엇보다 시몬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단어의 뜻은 ‘분리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삶을 산다는 의미로 바리새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시몬은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하여 구별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뿐 아니라, 36절을 보면 시몬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지요. 구약 성경의 전통을 따라 하나님을 철저히 섬겼던 시몬은 예수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그분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는 성의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정도면 나무랄 데 없는 경건한 삶을 사는 듯하지요. 

반면에,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온 한 여인에 대한 수식어는 ‘죄’입니다. 37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죄를 지은 한 여자”입니다. 시몬의 이름 앞에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의미인 ‘바리새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면, 이 여자의 이름 앞에는 ‘죄를 지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 시몬의 눈에는 물론이고, 그 동네 모든 사람들의 눈에 바리새인 시몬과 이 한 여자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어떤 차이입니까? 한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죄인이라는 차이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 시몬은 사람들을 평가하고, 사람들을 서로 비교함에 있어서 ‘누가 의로운 삶을 살고 있는가,’ ‘그의 삶이나 행동이 의로운가 아니면 죄로 가득한가’를 기준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고 오늘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는 사람을 비교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누가 의로운 행동을 많이 했고, 누가 죄를 더 많이 범했는가로 사람을 평가하고 비교하기보다는, 누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가로 사람을 비교합니다. 자, 36절을 다시 보십시오. 36절에서 누가는 시몬이라는 이름의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위해 행했던 사랑의 표현이 무엇인지 기록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식사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누군가에게 식사를 대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지요.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은 예수님께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36절에 바로 이어서 37절부터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오지요, 그리고 38절입니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십니다.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마추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향한 그 여인의 마음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한 끼의 식사를 대접하는 정도의 적당한 사랑을 표현했다면, 이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뜨거운 사랑을 예수님께 드렸던 것이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이 여자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자신의 눈물로,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자신이 가져온 귀한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그 장면을 클로즈업(close-up)합니다. 예수님 역시 그녀의 행동,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에 집중하시죠. 

필립 클레이톤 교수는 미국의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자신에게만 임하였을 뿐,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의 많은 개신교인들 역시 나만이, 우리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인 것처럼 교만한 마음과 행동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 안에 교만한 마음이 들어오는 것은 우리의 관점이 예수님의 관점이 아니라, 바리새인 시몬의 관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나는 그래도 예수님을 믿고, 나는 그래도 교회를 출석하고, 그래도 나는 상식적인 선에서 큰 잘못 저지르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우리 그리스도인이 보기에 죄악 된 행동을 한두 가지 저지른다고 하여 우리가 그들보다 거룩하다는 마음이 우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관점은 누가 외관상으로,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에 더 거룩한 삶을 사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누가 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가입니다. 


사랑의 깊이가 곧 은혜의 깊이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외관상으로,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에 누가 더 거룩한가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가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사람들을 비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가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은 것입니까? 그 대답이 오늘 본문 41절부터 43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등장합니다. 41절부터 43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비유입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한 사람에게는 약 5000만원 정도를 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약 500만 원 정도를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500만 원을 빌려 쓴 사람이든, 5000만 원을 빌려 쓴 사람이든 도저히 돈을 갚을 수가 없어요. 아무리 봐도, 아무리 애를 써봐도 이자도 못 냅니다. 그래서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한 사람에게는 5000만 원 빌린 것을 다 탕감해주고, 500만 원을 빌린 사람에게도 다 탕감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이야기를 말씀하신 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42절입니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예수님의 질문은 누가 더 고마워하겠느냐는 질문이 아닙니다. 누가더 시름을 덜겠느냐고 질문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누가 더 빚을 탕감하여준 사람을 무엇이요? 사랑하겠느냐? 질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핵심은 주님을 향한 사람의 마음과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누리는 깊이가 서로 비례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47절입니다. 47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7절 마지막을 보십시오. 사함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죄의 용서를 적게 받은 사람은, 죄 용서의 은혜를 적게 누리는 사람은 그 결과로 우리 주님을 적게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뒤집으면 누군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적게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뜨겁게 사랑하지는 않는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풀어주신 죄 용서의 은혜를 적게 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그토록 뜨겁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죄 용서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제 질문에 답을 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시몬은 왜 왜 예수님을 적당히 – 그저 식사 한끼 대접하는 정도로 – 적당히 사랑했을까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반대하고 미워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왜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적당히 사랑했을까요? 왜 바리새인 시몬은 자신의 집에 들어온 그 여인과 같이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죄 용서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고, 외관상으로는 바리새인 – 곧 거룩히 구별된 사람 – 처럼 보이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죄 용서의 풍성함이 없어요. 외면적인 경건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반면에, 죄를 지은 한 여자는 누가 보아도 죄인입니다. 실제로 동네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죄를 지었습니다. 명백하게 죄인이고, 자신도 자신의 죄를 압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여인의 마음에는 자신의 그 큰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지 못할까요? 우리는 왜 주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지 못할까요? 우리는 주님을 믿고 그분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 적당한 사랑일까요? 우리는 왜 바리새인 시몬과 같이 예수님을 우리의 집에 초대하여 식사 한끼 대접하는 정도의 적당한 사랑만을 베풀고 있을까요? 우리는 왜 이 여인과 같이 나의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기는 뜨거운 사랑이 없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교회를 출석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식사 한 끼 대접하는 정도의 적당한 사랑만을 드릴뿐, 우리의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기고 우리의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으며 울의 가장 귀한 보물을 그분의 발에 부어드리는 뜨거운 사랑을 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에 나의 큰 죄를 용서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의 은혜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대역전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듯 하였지만, 예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식사 한 끼 대접하는 적당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한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하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뜨거운 사랑을 드렸지요. 그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선언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누가복음 7장 48절부터 50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무엇이라고 선언하십니까? 48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에 여자에게 이르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여자는 무엇인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이 모두가 인정하는 큰 죄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신이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간절히 찾았고, 자신의 그 큰 죄를 용서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뜨겁게 살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50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죠.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그 여인의 믿음, 자신의 죄악이 크지만 그 죄악을 예수님께서 용납하시고 받아주셨다는 그 믿음, 그리고 그 믿음으로부터 비롯된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그 여인을 구원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그 여인은 자신의 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예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을 비롯하여 그날 시몬의 집에 초대받았던 시몬의 친구들 – 그 친구들 가운데 대부분은 시몬과 같은 바리새인이었을 것입니다 – 은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했지만 적당히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죄 용서의 깊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장면이 49절에 등장하죠. 49절을 다시 보십시오.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죄 용서의 은혜를 누리며 기쁨과 감격에 젖는 것은 고사하고,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듯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죄악의 뿌리를 예수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두 제거할 수 있다는 그 놀라운 복음의 신비를 알지도 못하고 있는 거지요.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눈 앞에 분명히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구원의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구원의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 시몬을 비롯하여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죄악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계십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실하게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하실 것입니다. 매주 주일이면 어김 없이 예배에 참석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술이나 담배도 멀리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당할 죄악을 다 피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계시죠. 그러나 만일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죄 용서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세는 죄 용서의 풍성한 은혜가 넘쳐흐르지 않는다면 – 여러분이 비록 교회를 출석하고 외관상 거룩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죄의 속성, 죄의 본성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 존 칼뱅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위선자들은 자신의 죄를” 어떻게 고백할까요? “형식적이고 일반적으로 고백함으로써, 숨겨진 자신의 엄청난 죄악을 감추려는 속임수를 쓰고 있다.” 그 옛날 바리새인 시몬이 그러했지요. 그는 자신 안에 감추어진 엄청난 죄악을 숨기려고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였지만 그저 일반적으로 그저 형식적으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필립 클레이톤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미국의 보수적인 개신교인들 중에는 자신의 죄를 그저 일반적으로 그저 형식적으로 고백하면서 너무도 빨리 하나님의 놀라우 은혜 (Amazing Grace)를 찬양하였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에는 자신의 그 엄청난 죄악을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힘 있게 역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도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웁니다. 우리는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술과 담배를 멀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와 형식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의 잘못과 죄악을 고백하면서 우리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다면 – 그저 식사 한 끼 대접하는 정도의 그럭저럭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 우리의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기고 우리의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으며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그분의 발에 부어드릴 수 있는 뜨거운 사랑이 없다면 우리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의 은혜가 풍성하지 못한 것이요, 곧 우리 마음의 큰 죄악은 여전히 우리 안에 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시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 시몬과 대비되는 또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간 한 여인입니다. 그의 수식어는 ‘죄를 지은 한 여인’이었지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람들 앞에는 물론이요, 하나님 앞에도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간절히 붙들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 여인은 마침내 자신의 그 큰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계십니까? 

예수님을 그저 우리 교회에, 우리 가정에 한번 모시고 식사 한끼 대접하면서 내 안에 있는 깊은 죄의 본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우리의 알량한 외형적인 거룩만을 내어 놓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모습 속에서는 복음의 능력도,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일 바리새인 시몬의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찾아와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으며, 자신의 가장 귀한 보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던 그 여인의 자리로 옮긴다면, 내 안에 있는 모든 죄악을 우리 주님 앞에 내어 놓고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십지기의 능력을 구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교회 안에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우리 안에 넘쳐 흐르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비로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1. Philip Clayton, Transforming Christian Theology: for church and societ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10), 10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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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0. 6. 3.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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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서신을 보면, 사도 바울이 신앙을 세 가지 요소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세 가지 요소란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전서를 보면 사도 바울은 신앙생활의 요소 가운데, 그 첫 번째인 믿음 뒤에 ‘역사’라는 표현을 넣어서 ‘믿음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곧, 우리의 믿음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믿음은 우리의 마음에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인생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참으로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신 줄 확실히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 믿음 위에 성령의 기름을 부으셔서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가정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미 시작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믿음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본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오늘의 본문을 함께 묵상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믿음의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나는 은혜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역사는 듣는 귀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자신의 사랑하는 종이 큰 병에 들자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하지요. 오늘 본문 2절과 3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어느 백부장에게 충성스럽고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신실한 종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그 종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종에게 큰 병이 찾아왔고 죽음의 그림자가 그 종에게 드리워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시점에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종이 큰 병이 들어 죽음의 위기를 겪고 있는 이 백부장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들리게 되는 것이죠. 
3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 백부장은 자신이 잘 아는 유대인의 장로들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언듯 생각하면, 자신의 사랑하는 종이 병이 들었는데, 때마침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러 사람을 보낸 것은 별로 대단하거나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음의 역사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귀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과 매우 유사한 사건이 구약성경 열왕기하에 등장합니다. 바로 나아만 장군의 사건이지요. 나아만 장군의 사건과 백부장의 믿음을 소개하는 오늘의 본문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묵상할 때, 나아만 장군의 사건을 염두에 두는 것도 유익하지요.  우리는 흔히 나아만 장군이 좋은 부하를 두어서, 콧대 높은 나아만 장군이 고향 땅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부하 장수가 여기까지 왔으니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어 보시라고 간청하여 그의 몸에서 나병이 치유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열왕기하 5장을 유심히 읽어보면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나아만 장군에게 이스라엘의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면 나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어린 소녀가 전해준 소식입니다. 그것도 포로로 잡혀온 어린 소녀는 그의 여주인에게 그 소식을 전했어요. 그러니 나아만이 그 이야기를 직접 들은 것이 아니고 아내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 장군의 위대함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는 자신의 집에 종으로 잡혀온 어린 소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그 소녀의 말 한마디만 믿고 엘리사 선지자의 도움을 받기 위해 왕에게 자신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여, 큰 재물을 들고 이스라엘 땅에 갔다는 점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신의 집에 종으로 붙잡혀온 어린 소녀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듣는 귀가 열려 있었던 사람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자신의 마음에 분노가 차오르는 순간에도 부하 장수의 목소리를 듣고 요단강에 자신의 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나아만 장군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백부장에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그 시작점은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듣고 무시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들려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을 했던 거지요.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분명히 선언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믿음의 시작점이 어디라고요?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듣는다는 것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귀를 기울여서 듣는 것이고, 마음으로 듣는 것이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면 이제 그 예수님께 나아가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여러분의 삶에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시기를 바라세요?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활짝 열리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믿음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점에서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부터 설교 말씀이 나의 마음을 울리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신호가 켜졌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성실히 하고, 오랫동안 해오셨더라도 어느 순간 신앙의 침체기가 찾아오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신앙생활의 침체기가 찾아오는 그 첫 번째 신호가 무엇인지 아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매주 예배에 참석하지요. 시간마다 설교 말씀을 듣지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분량의 성경을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을 울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아요. 바로 그때부터 우리의 신앙생활은 침체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기에서 빠져나오는 첫 번째 단계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의 침체기는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렇게 시작된 영적인 침체기가 극복되기 위해서는 그 첫 번째 단계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들려와야 합니다. 아무리 길고 어두운 영적인 침체기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기 시작하면 비로소 ‘믿음의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온 힘과 온 마음을 다하여 귀를 기울이십시오. 바로 그때 믿음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믿음은 겸손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습니다. 백부장의 부탁을 받은 유대인의 장로들은 예수님을 찾아가 백부장을 대신하여 간청합니다. 아마도, 유대인의 장로들은 로마 제국의 위세를 등에 업고 식민지를 통치하러 온 백부장이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보이고, 유대인의 신앙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성전을 건축해주기도 했던 것에 대해 대단히 고마워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 그 백부장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지요. 오늘 본문 4절과 5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특별히 4절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어떻습니까? “합당하니이다” 유대인들이 볼 때 이 백부장은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있는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실 만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이 백부장을 그 정도의 대가를 받을 가치가 있다는 의미죠. 

그런데 바로 그 다음절에 등장하는 백부장의 이야기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백부장이 말합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그다음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유대인의 장로들은 백부장에 대해서 그가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한 사람인 예수님이 그를 찾아가서 종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이야기했어요. 백부장에게는 그만한 자격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백부장 자신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저는 자격이 없어요. 저는 예수님을 저희 집으로 모실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의 장로들은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들의 눈에는 로마 군대의 백인대를 이끄는 백부장이 위대해 보였고, 그러한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사실이 대단해 보였어요.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그저 병을 고치는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사람 정도로만 보였던 거죠. 그래서 마치 빚을 갚듯이 예수님이 그 백부장의 청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긴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로마의 백부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한 사람의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감히 자신의 집으로 영접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된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메튜 헨리라는 분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백부장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백부장은] 군대의 장교로서 마을을 통치하는 자이므로 스스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높은 지위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서 그리스도께 나아가 간구하였던 것이다. 주목하라,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그리스도 앞에서는 구걸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 다시 한번 들으십시오.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그리스도 앞에서는 구걸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 나아갈 때, 얼마나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왔는지 내세울 수 없어요. 예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교회에서 받은 직분이 무엇인지를 자랑할 수 없어요. 예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에 얼마나 많은 헌금을 냈는지 자랑할 수 없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예수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우리가 지금 사회적인 지위가 어떠한지, 우리 집이 얼마나 위대한 가문인지를 내세울 수 없어요.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갈 때 다만 ‘구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고, 주님 앞에 내어 놓을 것이라고는 죄악 된 나의 심령과 죄악 된 나의 언어와 죄악 된 나의 행위밖에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할 때 비로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 앞에 나아가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어 놓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믿음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신뢰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자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대신 인류의 주권자이신 예수님께 구걸하듯 겸손한 자세로 간구하지요. 오늘 본문 7절과 8절에 백부장이 예수님께 간구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을 직접 방문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아울러 이방인에 불과한 자신이 예수님을 찾아뵙는 것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이렇게 간구합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말씀으로만 하십시오. 그러면 하인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믿음을 하나의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네, 그에게는 자신을 다스리고 있는 상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통솔하는 부하 군사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말합니다. 상관이 명령 한 마디로 부하 군사를 움직이고 통솔한다는 거예요. 8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그 뒤에 어떠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모든 질병이 떠나갈 것을 제가 믿습니다. 

백부장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 이와 같은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백부장이 배웠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아직까지도 많은 성서학자들이 대도체 이 백부장은 어떻게 이런 위대한 믿음을 마음에 갖게 되었는지 명확한 답을 내어 놓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백부장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체계적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체계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대해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그의 마음속에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믿음은 믿음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과연, 많은 성경공부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일까요? 과연, 성경 지식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까요?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상관없어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분명한 믿음만 있다면 오늘 우리의 삶 속에도 믿음의 역사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두 가지 기적 

백부장은 자신의 귀에 들리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단지 귀로 들은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 앞에 자신의 모든 사회적인 지위와 조건들은 한낱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구걸하는 듯한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은혜만을 간구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의 믿음에 역사가 따릅니다. 
오늘 본문 9절과 10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우리가 함께 읽은 9절과 10절을 찬찬히 관찰해보면 이 짧은 두 구절에는 두 가지 기적이 등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두 가지 기적 가운데 한 가지 기적은 쉽게 찾아보실 수 있으시지요. 바로 10절에 등장합니다.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 그대로 예수님의 능력에는 시간이나 공간의 한계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놀라운 기적을 분명하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9절과 10절을 보다 자세히 보시면 또 하나의 놀라운 기적이 등장합니다. 바로 9절에 등장하지요.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를 놀랍게 여겨” 예수님께서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다.’ 
여러분, 백부장은 유대인이 아니에요.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율법을 배우며 자란 것도 아니에요. 그는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어요. 
그런데 그의 마음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거예요. 그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었으면 예수님조차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이었던 거죠.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자 존 칼뱅은 오늘 본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종을 고치기 이전에 그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치료를 받은 사람이다. 여기서 기적이 있다면 유대인들로 하여금 로마 독재의 멍에를 받아들이게끔 하려고 무력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온 이 군인이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자기 자신을 굴종하고 그분의 순종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긴다는 바로 여기에 있다.”   
백부장은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도 당연히 몰랐던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의 귓가에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자 그의 마음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생겼어요. 그리고 그의 마음에 기적이 일어나자 그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서 병든 자가 치유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죠. 

여러분,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 믿음의 역사가 풍성하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과거에 비해, 교회가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성경과 신학에 대한 자료도 풍성하며 수준 높은 성경공부와 양육 프로그램이 무수히 많은 우리 시대에 과연 무엇이 부족하여 이 시대에 믿음의 역사가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정답은 아무 단순한 곳에 있어요. 우리의 마음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기에 우리가 출입하는 삶의 현장에도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에 믿음의 역사가 풍성하게 일어나기를 원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에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는 믿음의 귀가 열리기를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에 참으로 나의 사회적인 지위나 공로나 자격을 다 내려놓고 그저 구걸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겸손한 심령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에 오직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마음의 기적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의 기적을 허락하실 때, 여러분의 삶 속에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 가운데 참된 믿음의 역사 풍성하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마음에 기적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이 모두 사라지게 하시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구걸하듯 하나님의 은총만을 간구하는 겸손한 심령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구원자되심을 분명히 믿고 그 주님만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곳에 머리 숙인 주님의 모든 자녀들 가운데 믿음의 놀라운 역사가 가득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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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0. 6. 3.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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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음의 표준으로 삼는 성경은 다른 책과 비교해 볼 때 여러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성경이 갖는 독특한 특징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예언과 성취의 책”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예언이 기록되어 있고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도 보여줍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하나만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 12:2)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처음 말씀하실 때부터 예언의 말씀을 주셨던 겁니다. ‘내가 너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만들 거야’ 그러자 아브라함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이르렀더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지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을 때, 이미 75세 되었던 아브라함에게는 자녀들도 많고 그들이 낳은 자손들도 많이 있었나요?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나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단 한 사람의 아들도 없었고, 단 한 평의 땅도 자신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들었고, 그 예언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어떤 분은 젊은 시절 최선을 다해 살아왔어요. 그래서 이제는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가정적으로도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그만 그 자신의 몸에 못쓸 병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절망하죠. 바로 그때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50:15) 

또 어떤 분은 모든 것이 평안하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데, 사랑하는 자녀가 방황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꾸 그릇된 길로 가요. 바로 그때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듣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 22:6) 

또 어떤 분은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마음에는 큰 근심과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바로 가족의 구원을 위한 기도이지요. 자기 자신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지만 남편과 자녀들에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그 마음을 닫아버려요. 바로 그때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처럼 성경은 예언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위대한 점은 성경이 하나님의 놀라운 예언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예언을 기록하고 있지만, 더불어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장면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참으로 위대한 책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놀라운 예언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놀라운 예언이 이루어지는 위대한 성취의 사건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의 자손을 통해 큰 민족을 만드시겠다는 예언이요,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굳게 믿었어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의 기록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자신의 예언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여금 큰 민족 이스라엘을 만들었고, 그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내용이 구약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예언과 성취의 책’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귓가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들려주신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위대하게 성취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민수기의 말씀은 이렇게 선언하시죠.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민 23:19) 


놀라운 예언: 주의 은혜의 해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바로 “예언과 성취”의 관점으로 묘사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의 사역을 ‘예언과 성취’로 설명하시는 장면이지요. 자, 이 이야기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시면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16절과 17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나셨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는 사람이 성경을 드리는데 이사야서의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우연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7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그다음을 주목하세요.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예수님께서 의도를 갖고 찾아서 읽으셨어요. 예수님께서 찾아서 읽은 구절은 구약성경에서 참으로 손에 꼽을 만큼 놀라운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서 읽으신 놀라운 예언의 말씀이 오늘 본문 18절과 19절에 등장합니다. 우리 먼저 18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18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사역의 목적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서 가난한 자는 상대적인 빈곤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가난한 자’는 오늘 하루의 식사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굶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곧 절대적인 빈곤자를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가난한 자’는 ‘거지’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은 계속해서 가난한 자, 곧 거지들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3가지 모습으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그 다음에 가난한 자의 구체적인 모습, 그 첫 번째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그 어떤 것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육신에 질병이 찾아와요. 그러면 우리의 몸은 질병의 포로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에 탐심과 시기심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탐심과 시기심의 포로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우리의 영혼 역시 어둠과 죄의 세력이 점령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어둠의 세력, 죄의 세력의 포로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가난한 자의 구체적인 모습, 그 두 번째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육신의 눈이 어두워지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고단해집니다. 그런데 말씀드렸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가난한 자는 상대적인 빈곤자가 아니라 절대적인 빈곤자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눈이 어두워진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눈먼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의 눈에 빛이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고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는 비참한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가난한 자의 구체적인 모습, 그 마지막 세 번째를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여기서 ‘눌렸다’는 것은 ‘상하고 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느 CEO가 인생을 다섯개의 공을 동시에 돌리는 저글링으로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개의 공을 계속해서 공중에 던져서 그 하나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저글링이잖아요. 그런데 인생이란 다섯 개의 공을 계속해서 돌리는 저글링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섯 개의 공이란 직장, 가족, 건강, 친구, 그리고 영혼입니다. 인생을 저글링으로 비유하면서 그는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다섯 개의 공 가운데 직장이라는 단 하나의 공은 고무공이어서 바닥에 떨어지더라도 다시 튀어 오를 수 있지만, 나머지 4개의 공은 모두 유리로 만들어져서 바닥에 떨어트리는 순간 깨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 속에 가정이라는 공이 떨어져서 깨어지고 말아요. 때로는 건강이라는 공이 떨여져 깨어질 때도 있고요, 때로는 친구 관계가 그리고 어느 때는 나의 영혼이 상하고 깨어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들으셔야 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의 놀라운 예언의 말씀이 간절히 필요하신 분들은 안 계십니까? 매주 예배는 드리고 있지만 참된 예배의 감격을 잃어버린 분이 우리 가운데는 안 계십니까? 여러 가지 교회의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고 있지만 나의 마음속에 참된 성령의 능력은 상실해버린 분은 이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한 지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몸과 마음이 새롭게 되는 참된 회복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신 분들은 안 계시나요? 
아니, 오히려 포로된 자가 되어서 우리의 육신은 온갖 질병에 붙잡혀 있고, 우리의 마음은 온갖 탐심과 시기심에 붙잡혀 있으며, 우리의 영혼은 여전히 어두움의 세력에 붙잡혀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내가 육신의 눈을 열려 있어서 세상을 살아가는 세상의 지혜는 잘 알고 있지만, 영적이고 신령한 일에는 나의 눈이 완전히 막혀 그 무엇도 바라보지 못하는 분들은 안 계시나요? 눌린 자, 곧 깨어진 자의 모습 - 가정이 깨어지고, 건강이 깨어지고, 친구 관계가 깨어지고, 나아가 나의 영혼도 깨어진 바로 그 모습 – 에 여러분 자신이 놓여 있지는 않으십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는 놀라운 예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은 가난한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 하나님은 포로 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눈이 멀어버린 우리를 다시 보게 하시고, 상하고 깨어져버린 우리의 가정과 건강과 영혼을 새롭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위대한 성취 :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입니다. 19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여기 나오는 주의 은혜의 해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희년을 이야기합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안식일을 맞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모든 노동을 쉬도록 되어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7년에 한 번씩 안식년을 정하여 농사일을 쉬어야 합니다. 지나온 6년을 돌이켜보며 다시금 모든 것을 회복하는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7년이 7번 지난 후에는 50년에 한 번씩 희년을 맞이하는데, 이 때는 모든 것을 처음 상태로 되돌려 놓습니다. 만약 누군가 다른 사람의 종이 되었다면 희년을 맞이하여 다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어쩔 수 없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면 그는 희년이 되었을 때 그 땅을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 안식년, 그리고 희년을 제정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주기적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쉼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던 때에 아무리 매주 안식일을 맞이하더라도 참된 쉼과 회복을 경험할 수가 없었습니다. 7년에 한번씩 안식년은 주기적으로 돌아오지만 지나온 6년을 돌아보며 회복하는 역사가 일어나지를 않았어요. 시간이 흐르다 보면 50년에 한 번씩 희년이 돌아오기는 하지만 참으로 노예들을 해방하고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참된 회복의 과정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성령에 붙들린 한 사람을 세상에 보내주실 것인데, 그를 통해 다시금 회복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이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다시금 선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신 후, 회당에 모여 있던 모든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어떠한 말씀을 하시는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자신이 읽으셨던 이사야서의 예언보다 훨씬 더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21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사야의 말씀이 예언된 지 약 50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기까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읽으신 이 말씀은 예언이었습니다.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읽으시고는 이제부터는 이 말씀이 더 이상 예언이나, 약속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사야가 전했던 놀라운 예언의 말씀은 위대한 성취의 말씀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우리가 함께 묵상하는 이 말씀은 단지 놀라운 예언의 말씀만이 아닙니다. 장래의 어느 순간 이루어질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여러분에게 이미 이르렀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죄하는 모든 죄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영적으로 앞을 못 보는 소경이 아니라 영적인 일과 신령한 일에 대해 밝히 아는 지혜가 생겼어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깨어진 관계들은 치유되고 회복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소리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라” 

여러분, 설교의 초입에 말씀드렸던 아브라함의 예를 다시 한번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자녀로 말미암아 큰 민족이 되리라는 예언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그의 자손들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의 생을 마감할 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자녀는 10명도 아니고, 5명도 아니고 ‘이삭’이라는 이름의 아들 단 한 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생을 마감할 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가나안 땅이라고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매장했던 막벨라 동굴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이삭이라는 아들 한 명은 큰 민족이라는 예언의 성취로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매장되어 있는 한두 평 남직의 막벨라 굴은 가나안 땅 전체를 주시겠다는 예언의 성취로 보기 어려워요.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삭 한 사람이 남겨진 것은 예언이 성취되는 첫걸음입니다. 한 두 평 남직한 막벨라 굴은 가나안 땅 전체를 주시겠다는 예언이 성취되는 첫 단추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하게 자신의 예언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전히 포로된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눈 먼자를 보게 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보이지 않으시나요? 산산이 깨어진 나의 건강과, 나의 가정과, 나의 친구 관계와 나아가 나의 영혼이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 도저히 보이지 않으시나요?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남겨놓으신 이삭 한 사람을 바라보시고, 한 두 평 남직한 막벨라 굴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십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 속에, 놀라운 예언의 말씀에 대한 위대한 성취를 이미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시마다 때마다 꼭 필요한 예언의 말씀을 들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부족하고 의심이 많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는 예수님의 분명한 말씀을 확신하게 하시고, 이미 우리의 삶 속에서 시작하신 위대한 성취의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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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